옥·덕·후 (옥: 옥천 덕: 덕후는 후 :who(누구)?)친구와 함께 좋아하는 만화책 '하이큐'를 들고 사진 찍은 박지우씨.(오른쪽)과거에는 애니메이션 보는 사람을 다른 취미를 가진 사람과 다르게 어두운 방 안에서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는 사회 부적응자로 묘사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들이 자신의 취미를 더는 숨기지 않게 됨으로써 애니메이션은 부정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여느 때처럼 평범한 오후, 옥천여중 3학년 박지우(16, 읍 삼청리)씨는 청소년기자 김가람(16, 읍 죽향리)씨를 따라 옥천신문 사무실 '오카이브'에 놀러 왔다. 인턴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던 그는 일본 애니메이션 하이큐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했다. 원래 그는 애니메이션에 관심 없었지만 15살 때 주변 친구들이 하이큐가 재밌다고 말해서 하이큐를 보게 됐다. 그렇게 하이큐를 통해 그의 일본 애니메이션 ‘덕질’이 시작했다.그는 애니메이션에 재밌고 슬프고 감동적인 감정이 다 담겨있어 좋다고 말했다. 하이큐, 주술회전, 암살 교실, 부호 형사 등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보며 생긴 자신만의 기준도 있다.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캐릭터이며, 캐릭터가 잘생겨야 애니메이션을 시작할 수 있다. 그는 주술회전의 고죠 사토루, 암살 교실의 카르마가 잘생겼다고 답했다. 그래서 그가 애니메이션을 볼 때 가장 주의하는 점이 그림이다. 애니메이션 중간에 그림이 예전 퀄리티와 달리 무너지는 '작화붕괴'가 일어나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애니메이션이 잔인하거나 무서우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가 본 주술회전이나 암살 교실은 제목이 무섭긴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내용이 아니어서 재밌게 봤다고 덧붙였다.지우씨는 자신의 인생 중 30%가 애니메이션이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 현실에서 꿈꾸는 로망이 있잖아요. 저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로망을 대신 이루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변하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고, 어떤 사람은 배구를 잘하고 싶고, 어떤 사람은 우주에 나가고 싶은 로망들이 있다. 애니메이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보여주는 매력이 있다. 그는 체육 시간에 배구를 배운 적이 있었는데 생각처럼 잘 안 됐던 적이 있다. 그럴 때 하이큐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꼈다고 답했다.그 밖에도 애니메이션은 그에게 동기부여가 되는 존재이다. 지우씨는 명언처럼 되새기고 있는 문장이 있다. “센스는 갈고 닦는 것, 재능은 꽃피우는 것” 애니메이션 하이큐에 나오는 문장이다. 그는 힘들거나 포기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이 문장을 생각하며 다시 도전하는 경우가 많다고 답했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그는 일본에 대한 관심도 생겼다. 애니메이션 자막을 보며 일본어 단어를 외우기도 하고 대사를 외운다고도 말했다. 틱톡에서 나오는 애니메이션 대사를 안 보고도 할 수 있고 엄청 신이 날 때 자연스럽게 일본어가 나온다. 그는 일본에 유학 가고 싶다며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됐던 마을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모습도 보였다. “뭔가 일본에 가면 하이큐 멤버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반짝이며 말을 덧붙였다.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지우씨는 누군가가 오타쿠라고 말하는 것도 들어봤다. 그런 말에 그는 “맞아 나 오타쿠야”라며 쿨하게 인정한 일화를 들려줬다. “저 오타쿠 맞아요. 근데 그게 뭐 어때서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보겠다는데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마음이었다. 그는 이제는 애니메이션 보는 사람도 많아서 전혀 욕처럼 들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너는 왜 이 재밌는 걸 안 봐?”라며 말을 덧붙였다. 그는 애니메이션 보는 것을 친구들에게 말하고 다닌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같은 주제로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도 크고 애니메이션을 보며 자신이 받았던 감동을 친구들도 받았으면 좋겠기에 이야기한다고 말했다.지우씨는 웃으면서 “사실 아빠가 일본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으면 왜 왜놈 걸 보고 있냐고 말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 기회로 아버지께 해명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빠 일본이 우리나라에 나쁜 짓을 한 건 아는데 나는 그런 걸 옹호하면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지 않아” 그는 신념을 확고하게 보여주면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도 표현했다. 그의 아버지는 매주 금요일에 옥천신문이 오면 옥수수를 가장 먼저 펼쳐본다.자신의 딸이 신문에 나왔나 안 나왔나 확인을 하는 것이다. “저번에 옥수수 기사사진에 제가 나왔는데 그거 보고 저 나왔다고 놀리더라고요.” 이번 신문에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걸 보고 놀랄 아버지의 반응이 궁금하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처음에 기자 언니가 하이큐를 좋아하냐고 물어봤을 때 어떻게 알았지? 하며 놀랐다”며 “하이큐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기뻤고 이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 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리고 그는 친구들에게 “애들아 나도 처음에는 할 말이 없을 줄 알았는데 재밌어서 술술 말하게 돼. 그니까 걱정하지 말고 모두 인터뷰해”라고 덧붙였다.
인물일반 | 박진희 인턴기자 | 2021-11-18 20:45
노인장애인복지관에서 장애인 연극 교육을 받는 유은종(51)씨.“우리 같은 환자, 등신이니 병신이니 그렇게 부르는데요. 물론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많이 못 하겠지요. 그래도 버러지 보듯 그렇게 손가락질하지는 마세요. 우리도 사람입니다.”■ 적응하기 어려웠던 학창 시절부터 조현병 진단을 받기까지유은종(51, 옥천읍 양수리) 씨는 옥천에서 태어나 삼양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학창 시절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했다. 어릴 적 머리에 부스럼이 나서 머리를 밀고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당시 계절용 모자가 따로 없어 사계절 내내 겨울 모자를 썼다. 통풍이 제대로 안 되니 머리에 난 부스럼은 어느새 종기가 됐고 상처는 더 심해졌다. 친구들은 그런 은종 씨를 보듬어주기보단 놀림의 대상으로 삼았다. 설상가상으로 출생신고를 잘못해 학교에 다니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은종 씨는 초등학교 1학년생으로만 삼 년을 다녔다. 학교에 제대로 적응할 수가 없었고, 학창 시절 내내 친구들 사이를 겉돌았다.이후 중·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서울로 올라가 15년을 살았다. 옷 공장을 하는 작은 아버지 집에 얹혀살며 밥하고, 일하고, 세 살배기 사촌 동생을 돌봤다. 그 무렵 은종 씨는 ‘내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어쩌면 정신 질환일지도 모르겠다고 여겨 다른 사람들에게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작은 아버지가 은종 씨를 불러내 손찌검을 했다. “왜 남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느냐.” 은종 씨가 집안의 체면을 깎아 먹는다는 것이다. “그때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하면 병동에 가둬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어요. 아파도 무조건 숨겼어요. 그러니 그게 병인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가 버렸죠.”이후 옥천으로 돌아와 중장비 운전기사로 일하는 열 살 연상의 남편과 결혼했다. 예쁜 딸도 둘 낳으며 평범한 가정을 꾸렸다. 그런데 큰 아이를 출산한 후부터 알 수 없는 압박감이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남들 하는 대로 아이 젖을 물리고 기저귀를 갈긴 했지만, 앞으로 이유식은 어떻게 해야 할지 육아와 병행하며 식구들 밥은 또 어떻게 차려야 할지 앞이 깜깜했다. 남편은 새벽에 나가서 밤에 돌아왔기에 아이를 같이 돌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럴수록 은종 씨의 증상은 점점 심각해졌다.처음에는 자궁 쪽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고 해서 옥천성모병원으로 향했다. 산부인과에서 입원하라고 해서 병실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이것도 궁금하고, 저것도 궁금하고, 세상 모든 일이 다 궁금했다. 눈을 감으면 알고 싶은 것들이 끝도 없이 부풀어 올랐다. 참지 못하고 병실을 빠져나와 목욕실을 들여다보고 다시 병실에 돌아와 화장실을 들여다봤다. 밤새 호기심을 달래느라 잠도 자지 못했다. 은종 씨는 더 이상 아이에게 젖도 물리지 못했다. 복용하는 약 때문에 아이가 잘못될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쫄쫄 굶는 아기를 두고 어쩔 줄 몰랐다. 그래서 젖 대신 어른들 먹는 두유를 먹였다.그때 가장 먼저 은종 씨의 증상을 알아챈 사람은 산부인과 간호사였다. 그는 은종 씨에게 당시 대전 선화동에 있던 정신과를 소개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제대로 된 검사도 하지 않고 상담만 본 후 우울증 진단을 내렸다. 남편이 병원에서 꼬박꼬박 약을 타 왔는데, 그 약을 먹으면 그대로 기절해 온종일 잠만 잤다. 아무리 오랜 시간 잠을 자도 전혀 개운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잠기운 때문에 화장실까지 걸어가지도 못했다. 다른 병원으로 옮기고 나서야 병명이 ‘조현병’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 “장애인도 사람입니다”은종 씨는 5년 전쯤부터 옥천군노인장애인복지관에서 교육을 듣기 시작했다. 노래 교실을 다녔고, 꽃꽂이 수업도 수강했다. 요즘은 장애인 연극 수업을 듣고 있다. 발달 장애, 정신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 수업을 들으며 다른 수강생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었는데, 나이가 많은 편이라 먼저 다가가지 못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말도 트고 얼굴도 익혔다. “이젠 수업 나가면 다들 어우러지는 게 보여요. 호흡도 잘 맞고요.”연극의 좋은 점은 자기 세상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제 생활에서 벗어나는 느낌이에요. 백 퍼센트 즐겁다곤 못하지만 어쨌든 삶의 다른 패턴을 경험하잖아요.”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사람들은 제 발음이 뭉그러진다고, 그래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그래요. 아무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요. 그래서 그나마 여기 오는 게 좋아요.”“차라리 결혼 안 하고 일찌감치 죽었으면 어떨까 싶어요.” 은종 씨는 이런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꼼꼼하지도 않고, 예쁘게 꾸미는 것도 못 하고, 맛있는 음식도 못 만든다고. “꿈은 사라졌어요. 이것저것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손 떨림이 생긴 후론 다 포기했어요. 흥분상태가 심했다 팍 가라앉았다 이러니까 뭘 배운다고 해도 몸이 따라가질 못해요.”잘하는 건 도저히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좋아하는 일을 묻자 은종 씨의 눈이 반짝였다. 그의 평소 취미는 노래 부르기다. 18번은 김용임의 ‘부초같은 인생’이다.“가사가 꼭 제가 살아온 인생 같아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그게 안 되네요.” 노래 한 소절만 들려달라는 요청에 은종 씨는 금세 절절한 곡조를 뽑아냈다. “내 인생 고달프다 물어본다고~ 누가 내 맘 알리오~ 어차피 내가 택한 길이 아니냐~ 웃으면서 살아가 보자~”은종 씨의 바람은 그저 코로나가 빨리 지나가고 가족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지내는 것이라고 했다. 또, 사람들이 장애인을 너무 괄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람들이 정신 질환자들이 다니는 센터 팸플릿을 보고 손가락질하는 걸 봤어요.” 그는 “우리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노력하고 활동하고 있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다.“…장애인도 사람입니다.”은종 씨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었다. 누군가는 이 당연한 명제를 말하기 위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세월의 아픔을 삼켜내야 했다. 은종 씨는 진짜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덧붙였다.“우리가 보통은 못 되어도요, 아주 포기하고 사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 너무 아랫사람으로 보지는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인물일반 | 윤수진 인턴기자 | 2021-11-18 20:12
'꽃보다 Bic밴드 멤버' 아래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전혜숙(베이스 기타), 정찬분(일렉 기타), 신옥숙(보컬), 권선자(드럼), 정옥영(섹소폰)씨. ■ ‘돌핀스 밴드’에서 ‘꽃보다 Bic밴드’로“새야 날마저 기우는데 / 새야 아픈 맘 어이 하나” 힘찬 노랫소리가 음악학원 연습실 밖으로 새어나왔다. 비좁은 연습실에는 7명이 저마다의 악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막내 45세, 연장자 75세, 평균 60대 멤버들로 구성된 시니어 밴드 ‘꽃보다 Bic 밴드’다. 지금까지 합을 맞춘 곡만 해도 30~40곡. 곡 장르는 7080부터 트로트, 폴카, 디스코 등 다양하다.“학원에 갔더니 사람들이 다 착하더라고요. 이 사람들과 같이 밴드 하면 재밌겠다 싶어서 시작했어요. 옥천에서 사귄 첫 친구들인 셈이죠.”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귀향한 지 2년, 전혜숙(75, 이원면 장찬리) 회장은 멤버들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억했다. 한얼재즈음악학원 전 원장이자 밴드 단장이기도 한 김욱성(54, 읍 가화리)씨가 학원 수강생들을 모아 밴드를 만들었다. 2019년 10월, 그렇게 ‘돌핀스 밴드’가 탄생했다.처음에는 멤버들 가운데 이원면 장찬리 고래마을에 사는 주민들이 많아 이같이 불렀다가, 1년 뒤 지금의 이름을 찾았다. “김욱성 원장님이 지어줬어요. <꽃보다 할배>라는 방송 있었잖아요. 거기는 나이가 있어도 해외여행을 다녔지만 우리는 밴드를 한다는 의미로요.” ‘Bic 밴드’는 밴드가 확장되길 바라는 김욱성 원장의 바람을 담았다. 빅 밴드란 피아노, 드럼, 베이스, 색소폰, 트럼펫 등으로 구성된 10인조 이상의 악단을 의미한다. 이름 따라 간다고 5명으로 시작했던 밴드가 지금은 13명으로 늘었다. 보컬, 드럼, 일렉 기타, 베이스 기타, 키보드, 색소폰 등 악기도 다양해졌다. 겹치는 포지션이 있지만 곡과 스케줄에 따라 모이는 멤버는 유동적으로 바뀐다. 올해는 군 평생학습원의 동아리 지원 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기타리스트 정찬분 씨■ 나이 일흔셋에 첫 악기 경험악기를 다루는 실력은 인내심과 애정에 비례한다. 처음부터 프로가 될 수는 없다. 특히 나이를 먹고 무언가를 새로 배우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처음에는 그만두고 싶을 때가 많았어요. 생각보다 어렵고 손에는 굳은살이 박여 아프고. 틀리면 원장님한테 한소리 듣지. 내가 이 나이 먹고 뭐 하나 그랬다니까요.” 일렉 기타를 맡고 있는 정찬분(65, 읍 금구리)씨는 피아노를 배운 경험은 있었지만 기타는 처음인지라 애를 먹었다. 2년만 채우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다 보니 어느덧 2년이 됐고, 이제는 욕심이 생겨 계속 이어가고 있다.드러머 권선자(63, 읍 죽향리) 부회장은 멤버 가운데 유일하게 밴드 결성 이전부터 드럼을 쳤다. “남편이 색소폰을 시작하면서 같이 연주하려고 드럼을 배웠어요. 저도 색소폰을 다룰 줄 알고요.”베이시스트 전혜숙 씨반면, 음악이라곤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는 게 전부였던 전혜숙 회장은 나이 일흔셋에 처음으로 악기를 배우게 됐다. “베이스 기타가 뭔지도 모르고 아는 사람의 권유로 그냥 시작하게 됐어요.” 그럼에도 베이스 기타의 매력에 금세 빠져들었다. 응원하는 베이시스트도 생겼다. “JTBC에서 하는 <슈퍼밴드> 봤어요?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어요. 문자 투표도 하고. ‘시네마’의 변정호가 베이스 기타를 하는데, 너무 멋있더라고요. 나도 일찍 했더라면 저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었어요.”밴드가 결성된 지 6개월이 되던 때, 이들은 공연장에 내던져졌다. 김욱성 단장의 이유 있는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았어도 공연을 해봐야 동기 부여가 된다는 이유였다. 나이가 많을수록 공연 경험으로 활력이 생긴다며 김욱성 단장이 밀어붙였다. “첫 공연이요? 하긴 했지만 엉망이었죠, 뭐.” 멤버들은 첫 공연이 엉망이었다면서도 주눅은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들은 무대에 섰다. 최근에는 지난달 있었던 ‘금강휴게소 이웃돕기 주말공연’에도 참가해 5곡 넘게 연주했다. 노래 '자갈치 아지매'를 연주하고 있다.■ 매니저는 가족이, 멤버들은 가족 같은 친구로김욱성 단장의 역할은 지대하다. “연습실 밖에 있다가도 틀린 건 귀신 같이 듣고 혼낸다니까요.” 단장으로서 밴드를 지도하고, 결석한 멤버의 자리를 메우는가 하면 악기 세팅부터 편곡도 한다. 문화적 봉사를 한다는 차원으로 연습 공간을 무료로 제공하기도 한다. 인재를 찾아내는 것도 김욱성 단장 몫이다. 5개월 전에는 신옥숙(45, 읍 가화리)씨를 보컬로 영입했다. “원장님과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데 제가 매년 마을 축제에 나가 노래를 하고 1등을 했었거든요. 그걸 원장님이 알고 계시다가 기존 보컬 자리가 비자 함께 하자고 연락을 하셨어요.”매주 금요일마다 만나다 보니 이제는 연말연초도 같이 보내는 가족 같은 사이가 됐다. 자기자랑보다는 멤버들 자랑을 늘어놓는다. “우리 드러머 부회장님이 색소폰도 잘 하거든요. 저번에 버스킹을 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또 해달라고 섭외 들어왔대요. 영상 좀 보여드려봐.”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근무하고 있는 신옥숙씨는 밴드 모임으로 숨이 트인다. “병원 일이 스트레스가 많아요. 또 제가 부산에서 왔는데 친구들도 다 고향에 있어 여기서는 얘기할 사람이 없었거든요. 밴드 하면서는 외롭지 않죠. 다 엄마 같고 편해요. 마음 같아서는 일주일에 두세 번은 만나고 싶어요.” 화합의 비결은 ‘무작정 보듬기’다. “연주하면서 누가 실수해도 그냥 웃으면서 넘어가요. 어차피 피드백은 원장님이 해주시니까요.”봉사라는 공통점으로 통하기도 한다. “저희가 다 자원봉사센터 회원이에요. 단장님도 음악 봉사를 오래 했어요. 지적장애가 있는 분을 제자로 가르치기도 하고요. 그 제자들 중 두 명이 지금 우리 밴드에도 있어요.”보컬 신옥숙씨가족들은 팬이자 매니저가 돼준다. 신옥숙씨의 중학생 딸은 엄마 공연을 따라다니며 매니저 역할을 한다. “땀 닦아주고 메이크업 수정해주고 그래요.” 정찬분씨는 캐나다에 있는 딸과 사위가 열렬한 팬이다. “딸 부부가 코로나19 때문에 한국에 못 오니까 엄마 공연 좀 보여달라고, 멋지다고 응원해줘요. 공연 영상을 유튜브로도 챙겨보고.” 전혜숙 회장은 남편이 매니저다. 매니저 일이 여간 쉽지 않다고 멤버들이 증언을 한다. “언제는 회장님이 기타를 집에 놓고 온 적이 있는데 매니저가 안 챙겼다고 혼을 내더라고요. 기타는 회장님이 챙겨야지(웃음).”이들은 다음달 18일 첫 정기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간 실력이 어느 정도 쌓인 만큼 정기공연을 할 때가 왔다. 앞으로는 1년에 한 번씩 정기공연으로 관객을 만날 계획이다. 멤버들의 목표는 무엇일까. 큰 무대보다는 봉사로써 무대에 서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코로나19 때문에 무대 봉사를 못 했어요. 특별히 어느 무대에 서고 싶다는 건 없고 봉사를 하고 싶어요.” 김욱성 단장의 목표는 분명하다. “아마추어에서 프로가 되는 거죠. 군 대표 시니어 밴드가 되면 좋겠어요.”
인물일반 | 박지원 인턴기자 | 2021-11-18 20:05
김원희(46)씨“지나갈 때마다 5만원을 줘요. 저희가 불쌍해 보였나 봐요. 제가 보기에는 저 사람들이 더 불쌍해 보이는데.”김원희(46,읍 금구리)씨는 어느 순간 차별을 받는 당사자가 되었다. 옥천에 와서 식당에 가니 밥 먹으라고 5만원을 주고, 대전에 가니까 아이가 이쁘다고 5만원을 주었다. 이주여성 구릉소니(31,읍 금구리)씨의 배우자가 되자 처음 겪었던 일들이다. “제가 또 생긴 게 네팔 사람처럼 생겼나 봐요. 사람들이 저희 앞에서 ‘한국 사람이 아니라서 말귀를 못 알아듣나?’ 이런 식으로 말하더라고요.”네팔에서 온 이주여성 구릉소니씨와 인터뷰(옥수수 2021년11월5일자 13호 참고)를 하면서 건네 들었던 남편 김원희 씨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옥천군결혼이주여성협의회의 유일한 자문위원이자 남성이고, 부부의 집은 네팔 이주여성과 노동자의 만남의 장소였다. 이주여성 부인에게 가정 폭력을 저지르고, 사생활을 억압하는 보통의 ‘한국 남편’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이 존재했다. 이주여성 배우자로서 살아가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자 2일 저녁, ‘오카이브’에서 그를 만났다.대안학교 선생님 시절, 네팔로 가정방문을 떠났다.(사진제공 : 김원희) ■ 네팔로 가정방문을 떠난 대안학교 선생님대안학교인 지리산고등학교(경남 산청)에 교사로 재직할 시기, 학교에는 3명의 네팔 학생들이 있었다. 타국의 아이들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봉사하면서 살아가게 하기 위한 취지였다. 학비, 기숙사비 모두 무료였다. 공부하러 온 네팔 학생들은 2년이 지나도록 고향에 가지 못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지 않은 시절이라 국제전화비 부담으로 연락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김원희씨는 가정방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네팔에서도 제일 멀리 살고 있는 학생과 함께였다. 본인과 학생의 항공비를 전액 사비로 부담했다. 가지 못하는 네팔 학생은 영상으로 담아 가족들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2012년, 그렇게 처음 네팔에 가게 되었다. “버스 타고, 걷기도 하면서 산길을 넘어갔어요. 그렇게 한 마을에 도착했어요.”제자는 마을에서 머무르고 있으면 혼자 집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험해서 선생님은 가다가 죽을 수도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기간을 정해놓고 이때까지 꼭 돌아오라고 했죠.” 그렇게 제자의 친척 집에서 머물렀다. 마을 아이들과 놀고 어르신들의 일을 도왔다. “자기 친척 집이라고 했어요. 그놈이 나쁜 놈(?)이에요(웃음). 자기 사촌이랑 저를 연결해 주려고 거기에 있으라고 한 것 같아요.” 그때 머물렀던 집은 현재 장인, 장모의 집이 되었다. 배우자 구릉소니씨와의 인연은 거기서 시작됐다.네팔을 방문해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사진제공 : 김원희) ■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 도전네팔까지 가정방문을 떠날 정도로 그는 열정적인 교육자였다. 청주에 있는 대학에서 지리교육을 전공하고, 쭉 ‘대안’ 교육에 대해 고민했다. 그가 생각하는 대안교육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단지 교육의 기본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대안이라는 건 사실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사람이 되고 남을 헤아릴 수 있는 교육을 하자는 거죠. 지금은 많이 배우고 똑똑할수록 나쁜 짓을 더 많이 해요. 교육의 목표가 자기 잘 먹고 잘 살자고 다른 사람 짓밟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대안학교에 있을 때 ‘공부 못해도 되니까 예의 없는 행동만 하지 말자’ 그런 말을 많이 했어요.”대안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칠정교회(경남 산청)에서는 갈 곳 없는 농촌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때 조한우 목사를 만났다. 그는 사회복지사 자격을 가지고 사람들을 도왔다. 그걸 보면서 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사회복지에 관심이 생기고 고민을 했어요. 다시 대학에 가기는 힘들 것 같으니까 어디 가면 사회복지를 공부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회복지 정책을 내는 공무원이 되고 싶어졌어요. 2018년 5월에 사회복지 자격증을 따고, 8월에 지방직 공무원 시험을 봐서 어렸을 때 살았던 태백시에서 사회복지 공무원이 되었어요.”그러나 생각만큼 행복하지는 않았다. 배우자인 구릉소니씨도 연고도 없는 태백에 머무는 것을 힘들어했다. 그래서 일을 그만두었다. 구릉소니씨의 사촌오빠이자 김원희씨의 제자가 있던 옥천으로 왔다. 네팔 전통복식을 입고있는 김원희씨(사진제공 : 김원희) ■ 연고도 없던 옥천에 왔다그렇게 옥천에 모였다. 원래 옥천에 거주하던 네팔 출신 이주여성 2명과 남성 노동자들과도 금세 친해졌다. 구릉소니씨와 김원희씨의 집에 네팔 사람들이 모였다. “거의 네팔 문화원이 된 거죠. 주말이면 모여서 음식 만들어 먹고, 명절이라고 또 모이고, 계속 모여요. 저도 좋죠. 부인이 행복해야 저도 행복한 거니까요. 제 부인의 친구면 저한테도 친구니까요. 남편들이 이주여성 배우자가 친구들이랑 놀지 못하게 막는 게 말도 안 되는 거죠. 만약에 이주여성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다문화센터와 이주여성 모임에 나가는 구릉소니씨 덕분에 부티탄화(39)씨도 만나게 되었다. 결혼이주여성협의회 모임이 결성될 즈음이었다. “아내가 리더십도 있고, 다른 사람도 잘 도와주던 사람이었거든요. 이주여성 모임이 있다고 해서 저도 아이를 업고 나갔어요.”처음엔 행정 업무를 조금씩 도와주었다. 그러다가 결혼이주여성협의회 정관을 만드는 일에도 참여했다. 아예 자문위원까지 맡아 협의회 활동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이제는 나의 일, 나의 가족의 일이 된 이주여성 인권에 대해 고민했다. 그가 보여준 파일에는 스스로 고민한 흔적이 가득했다. 다문화 가정의 아동과 이주여성의 교육 문제, 여성의 인권, 일자리, 지역사회 내 이주여성 역할에 대한 고민을 협의회와 함께 이어갔다.“여성 인권이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이주여성은 그중에서도 최하층에 있어요. 물론 복지제도나 다문화센터 같은 도움이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나 가정에서의 차별은 여전히 심각하죠.”김원희 씨는 부티탄화 회장과 함께 협의회 정관을 만들면서 더 이상 이주여성은 사회에 ‘이방인’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시혜적으로 도움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에 이바지하는 당당한 일원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부티탄화 회장님이 처음 정관을 만들면서 했던 말은 ‘우리는 지원 받으려고 온 사람이 아니고 도우려는 사람들이다’, 그런 말을 했어요. 그렇게 해서 지역사회 내에서 시민성을 가지게 되는거죠.” “각 읍면동에는 지역사회보장협의체가 있어요. 거기에 이주여성들이 참여했으면 좋겠어요. 당연한 거 아닐까요? 지역의 주체잖아요. 지금도 충분히 지역사회를 먹여살리고, 활력을 불어넣고 있고, 평생을 사는 분들이잖아요. 10년 뒤 그분들이 이장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지역에 이런 문제들이 있으니 같이 해결하자고 말했으면 좋겠어요.”구릉소니·김원희 부부의 집은 주말마다 '네팔문화원'이 된다.(사진제공 : 김원희) ■ 이주여성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이주여성협의회 자문위원으로서 김원희씨가 꿈꾸는 일은 이주여성들과 자녀들의 교육공동체 결성이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이주여성들도 언제든지 언어와 컴퓨터 활용능력 등을 교육 받을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한국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한자와 영어, 그리고 검색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컴퓨터 활용능력까지 다 같이 배웠으면 좋겠어요. 아이와 엄마. 그렇게 같이 앉아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면 좋지 않을까요? 이주여성이 현재 대부분 하는 일은 육체노동이거든요. 젊고 생산성 있는 이주여성들도 언어적 장벽을 넘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죠.”또한 그가 바라는 지점은 이주여성들이 자신의 고향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는 종종 만나는 베트남 이주여성의 자녀에게 베트남 역사에 대해 알려준다. 관련 다큐멘터리도 보여주고, 역사를 가르쳐주니 자녀들 또한 엄마의 나라에 관심을 가지고 좋아한다.“나라들마다 특성이 있고 장점이 있잖아요. 지금은 이주여성들이 고향을 싹 지우고 한국인으로서만 살아가도록 하잖아요. 그게 될 리가 없잖아요. 그러면 자기 나라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만들어야죠. 내 나라, 내 엄마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 수 있도록 해줬으면 좋겠어요.” 충북도립대에 입학한 네팔인 제자와 김원희씨(사진제공 : 김원희) ■ 지금은 옥천 공부 중..“사회복지 공무원으로 정책을 시행하고 싶다”결혼 이후 김원희 씨는 본인을 한국 사람이자 네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이 작고하시고 아이가 다 크면 네팔로 가서 학교를 짓고 아이들을 교육하고 싶다. 그전까지는 옥천에서 계속 살아가고 싶다. “손자 보고 싶다고 아버지도 옥천으로 이사 오셨어요. 결국 가족이 옥천에 다 모여있으니까 이제 떠날 수가 없어요. 여기서 계속 살아가야죠.”그는 현재 옥천지역아동센터에서 생활복지사로 일한다. 결혼이주여성협의회, 지역아동센터에서 활동하면서 지역을 ‘공부’하고 내년에는 옥천군 사회복지 공무원에 도전할 예정이다. “옥천에 와서 지금까지는 공부를 하고 있었던 거죠. 공무원 ‘시험’ 준비가 아니라 사회복지 정책을 시행하기 위한 공부였죠. 남들은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 사회복지를 공부하는데 저는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정책을 시행하고 싶어서 공무원이 되는 거죠.”교육, 아동, 이주여성, 인권에 이어 요즘은 농업과 적정기술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그는 기본이 지켜지고,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물론 “혼자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지역 가장 깊숙한 곳에서 지역을 경험하고 공부하며 살아간다. “저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어르신 짐 들어드리고, 이주여성들과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다운 관계를 맺을 때 행복함을 느껴요. 사람이 어떤 목적에 의해 관계를 맺게 되면 불행해진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사람이 살아야 하는데 돈이 사는 사회가 된 것 같아요. 그니까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인물일반 | 이상현 인턴기자 | 2021-11-12 11:16
급속도로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매체의 흐름도 폭넓고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다. 특히나 급격하게 발달하고 있는 ‘영상매체’와 그것을 손쉽게 볼 수 있는 ‘스마트폰’의 발전은 지난 10여 년, 다양한 정보를 손쉽게 접합 수 있는 수단이 되어 현재는 없으면 안 되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정치가 어떻고', ‘새롭게 가볼 만한 곳이 어디인가’라는 고민 등 내가 원하는 정보는 언제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뉴스’도 그렇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뉴스를 보려면 텔레비전 혹은 컴퓨터 앞에 앉아 시청을 해야 했고. 그것이 아니라면 종이 지면의 ‘신문’을 읽어야 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적 흐름에 따라 "종이 지면의 신문도 이제는 도태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들이 최근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흐름의 변화에도 곳곳의 '지역'에는 지면 신문이 가지는 '저력'이있다. ‘2030’의 젊은 세대들이 다양한 미디어의 영향을 발을 맞추고 있다면 ‘5060’혹은 ‘7080’의 고령세대는 여전히 지면 신문이 가지고 있는 힘을 믿는다. 그리고 매일 혹은 매주를 넘겨온 지면 신문이 당연히 그들에게는 익숙할지도 모른다.신문은 다양한 내용들의 모이는 집합공간이다. ‘오늘의 이슈’가 있고, ‘다양한 정치적 견해’와 더불어 ‘사회 곳곳의 이야기’가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눈을 사로잡는 형형 색색의 ‘광고’들 역시 즐비하고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안에 과연 ‘지역의 소식’이 있었는가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신문을 비롯한 여러 언론매체는 ‘수도권 중심’의 시각으로 구성되고 있다. ‘서울’의 소식이 곧 뉴스이고 중심이 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들의 중심이라고 일컬어지는 수도권의 소식들 이외에도 지역의 다양한 소식과 더불어 지역에서만의 고유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전하는 다양한 ‘지역 매체’가 존재한다. 옥천신문이 창간한 날부터 신문 구독을 해온 정수웅(오른쪽)·성일화 부부■ 지역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할 수 있는 매체가 생겼다는 것이 좋았다영동이 고향인 정수웅(79,옥천읍 금구리)씨는 1970년부터 옥천에 터를 잡았다. 근 50년을 옥천에 살았으니 옥천이 고향과 다름이 없다. 이미 옥천에 대한 애정은 그 누구보다 깊다. 어릴 적부터 읽는 것을 좋아한 정수웅씨. 젊은 시절부터 오랫동안 신문을 읽어왔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1989년 옥천신문이 창간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신문의 지면을 차례차례 넘겨왔다고.“옥천신문이 창간 32주년 이지요? 제가 지금까지 옥천신문을 30년 가까이 구독을 하고 있어요. 1989년에 창간을 했을 때부터 봤죠. 중간에 사정이 있어서 잠시 신문을 보지 못했던 시기도 있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을 읽어왔습니다”오랜 시간 옥천에 살아온 정수웅씨에게 1989년 옥천신문의 창간은 실로 놀라운 소식이었다. 오랜 시간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의 ‘중앙언론’이 안방을 꾀 차던 시기 우리 지역의 소식을 전하는 '지역신문'이 생겨난다는 것이 당시 정수웅씨의 가슴을 뛰게 했다. 신문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거대 언론사의 ‘전국지'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때만 해도 지면의 부수도 적고 기사의 내용 등, 모든 것이 처음이다 보니 서툴러 보이던 것이 사실이에요. 그리고 과연 지역에서 될 수 있을까라는 의아심을 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독자들도 늘고 기자들도 늘다 보니 지면의 부수도, 내용도 알차지는 것을 보니, 지금은 전국에 어디를 내놔도 손색이 없을 만큼 잘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지역의 소식을 전하는 신문이 생긴다는 것이 그때는 참 좋았죠” 정수웅씨는 옥천 군민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읽어볼 수 있다는 것이 지역 언론의 큰 장점이라 말한다. 지역에서 펼치고 있는 정책, 군민들의 이야기들이 1주일이라는 시간에 정리가 되어 읽어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세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중앙지와는 다른 차별점이라고.아내 성일화(77,옥천읍 금구리)씨 역시 신문이 2천원 일때부터 읽기 시작했다며 적십자봉사회에서 10여 년 봉사활동을 할 때에도, 스포츠댄스 교실에 참여했을 때, 등 인터뷰도 여러번 하고 성모병원에서 근무하는 딸도 신문에 나오는 등 오랜 시간 이어져온 옥천신문과의 인연에 이야기했다.인터뷰를 위해 대본을 준비해 며칠 전부터 외우기도 했다는 성일화씨■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아무래도 신문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눈이 가는 건 당연히 1면 일 겁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읽어보지는 않아요. 가장 먼저 읽어보는 면은 ‘사회’면에 나오는 이웃들의 소식을 가장 먼저 읽어봅니다. 그리고 가장 나중에야 1면을 읽어보죠. 요즘에는 ‘오크지’, ‘옥수수’등 읽을거리가 더 많아져서 참 좋습니다”정수웅씨는 최근 읽을거리가 많아진 것과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를 읽어볼 수 있다는 것이 만족스러운 부분이라 얘기했다. 비교적 최근 생겨난 옥수수에 대해서는 지역 청소년들의 이야기와 청소년 기자들의 다양한 활동을 담아낸 부분이 인상적이라 설명했다. 오크지는 지역의 소상공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우리 지역 이웃들의 다양한 소식들이 세세하게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이 상당히 만족스러운 부분이라고 정수웅씨는 말한다.“사실 청소년들이 신문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른들도 신문을 많이 읽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아는 친구의 이야기가 나오면 많이 읽어볼 것이라 생각됩니다. 때문에 청소년들의 다양한 활동만큼이나 다양한 ‘선행’, ‘효행’, 등 귀감이 될 수 있는 이야기도 지면에 실리면 좋을 것 같네요. 오크지 같은 경우에는 지역의 더 많은 소상공인들과 중소기업의 이야기가 전해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정수웅씨는 지인들을 만나면 신문을 읽어보길 권유한다. 지역에 사는 사람이 지역의 소식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이발소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지인에게 즉석에서 신문을 읽게 했다고. 또 현재 몸담고 있는 아동지킴이 활동에 함께 참여 하고 있는 동료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신문을 읽기를 권장하고 있다고 정수웅씨는 얘기했다. 몇 번을 다시 읽어본 신문, 가능하다면 스크랩을 통한 보관까지■ 여전히 지면 신문이 가지는 힘이 있다고 본다다양한 매체의 발달로 지면 신문이 가지는 영향력이 이제는 작아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 섞인 이야기들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간편한 영상매체의 등장과 더불어 스마트폰의 등장을 기점으로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뉴스를 접하고 신문을 읽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수웅씨는 여전히 지면 신문이 가지는 힘이 있다고 얘기한다. 지면 신문이 가지는 힘은 바로 ‘보관’과 ‘기록’의 의미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지면 신문은 우리들 세대 혹은 윗 세대들에게는 정말 중요합니다. 7080세대들에게 디지털 매체의 발전은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거니와 이미 몸에 익은 지면 신문을 통해 여전히 다양한 소식을 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잘만 챙겨두면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하죠. 디지털 맹인들에게 지면 신문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고령화 인구가 높아지는 추세에 지면 신문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지역의 다양한 소식을 만나볼 수 있었으면정수웅씨는 그동안 열심히 신문을 구독해왔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만큼 오랫동안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옥천에 애정이 있고 옥천의 많은 이야기들이 여전히 궁금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정수웅씨는 1주일마다 오는 신문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말 조그맣게 실린 글도 꼼꼼히 읽어본다고. 가능하다면 읽었던 내용들도 다시 읽어볼 만큼 신문에 대한 애정이 깊다. 스포츠댄스 교실에 참여한 성일화씨두 부부의 딸 정현숙 간호부장의 인터뷰 기사■ 한 번 찾을 옥천, 한 번 더 방문할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길정수웅씨는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 역시 독자로서의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조금 더 서민적인 부분도 신경 써주었으면 한다는 바람 역시 잊지 않은 것. 혼자 사는 인구가 많아진 요즘. 집에서 간단히 해먹을 수 있는 간편한 요리를 소개하는 코너와 청소년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기사들과 더불어 옥천을 떠나있는 이들이 옥천의 소식을 접하고 향수심을 고취시킬 수 있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신문을 읽으며 한 번 찾을 옥천을 한 번 더 찾을 수 있게 하는 그런 신문이 되었으면 한다고. 그것이 바로 '지역 언론’이 가지는 힘이라고 말이다.
인물일반 | 김기연 기자 | 2021-11-05 15:19
동년배 상담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종임(65) 씨지치고 힘든 순간 누군가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준다면, 때로는 그것만으로도 위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노인들은 특히 그렇다. 나이가 들면서 누구에게 속 이야기를 꺼내기 쉽지 않다. 자식들한테 누가 될까봐 속으로 전전긍긍하면서 우울증이 생기는 경우도 다반사다. 괜히 병원 가기도 꺼려지는데 동병상련하는 동년배가 상담을 해준다면 이야말로 큰 힘이 된다.노인장애인복지관(이하 복지관)에서는 어르신들이 어르신들의 고민을 상담해 주는 ‘동년배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동년배 상담사를 희망하는 어르신들은 약 두 달간의 교육을 거친 후 상담 대상자와 연결된다. 1인당 약 14~15명 정도를 맡고, 코로나로 인해 전화 상담만 진행 중이다. 현재는 총 12명의 동년배 상담사가 활동 중이며, 조를 나눠서 일주일에 두 명씩 복지관에 방문한다. 12명의 동년배 상담사 중 남편과 함께 활동하는 김종임(65)씨를 만났다. 그는 영동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을 모두 영동에서 보냈지만, 옥천에서 산 지 어언 42년이 된 어엿한 ‘옥천 사람’이다. “결혼하면서 이쪽으로 왔어요. 지금은 읍내 금구리에서 살아요. 거기서 40년 넘게 쭉 산 거죠.” 젊은 시절에는 20년 넘는 세월 동안 노래방을 운영했다. 그러다 9년 전 손주를 봐주면서 일을 그만뒀다. 딸이 손주를 다시 데려가고, 나이가 들며 할 일이 줄어드니 삶이 처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성심의원 3층에 위치한 아모레 화장품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주중 틈날 때를 이용해서는 보이지 않는 봉사활동도 한다. 그게 바로 동년배 상담사다.김 씨는 옥천신문을 통해 ‘동년배 상담사’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 “옥천신문에서 동년배 상담사 40명을 모집한다는 걸 읽고, 남편과 함께 신청해 수업을 받았어요. 그리고 후속 수업인 ‘나를 향한 미소’도 지금 듣고 있죠.” 김 씨는 수업 듣는 게 정말 즐거웠다. 삶에 대한 지식, 궁지에 몰렸을 때 극복하는 법, 노년은 처음이라 잘 알지 못했던 세세한 부분들까지. 그래서 그는 주변 지인에게 추천해 교육생을 7명이나 데리고 왔다. “영동에서도 네 분이 오고, 보은에서도 와요. 이왕 교수님 초빙해서 하는 건데 많이 들으면 좋잖아요. 그래서 제가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어요.”열정적으로 수업을 수강한 김 씨는 교육 수료 후 동년배 상담사로서 열심히 활동 중이다. 그는 ‘동년배 상담사’를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말동무”라고 소개했다. 남들에게 말 못 할 고민을 앓고 있는 동년배들을 위해 상담을 한다. 가정에서 어려운 일을 겪은 사람을 위해 전화는 물론, 직접 찾아가 문제를 해결해 준 적도 있다. “법적 문제로 분쟁이 있었던 적이 있어요. 직접 가서 그분들이 합의할 수 있도록 도왔죠. ‘서로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자’고 했어요. 각자 서로의 입장이 되어보면 이해할 수 있잖아요. 문제가 해결됐을 때 너무 좋았어요. 그전까지 그분이 엄청 고통스러워했거든요.” 실제로 동년배 상담으로 위안을 얻은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가 걸려오기도 한다. 그들은 문제가 해결됐다는 것뿐만 아니라 공감해 주고 들어준 것에 대해서도 고마움을 표시한다. 특별한 해결책이 없어도 그저 ‘우리 좋게 생각해 봐요’, ‘잘 될 수 있게 기도합시다’라는 말뿐이라도,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위로가 된다. 김 씨는 “공동체 정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인구가 줄어들고, 핵가족 시대가 도래하며 이기주의가 만연한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솔직히 지금 당장 누가 옆에서 넘어진다 해도 막 달려들어서 구해줄 수 있는 그런 의로운 사람들이 많이 없는 것 같아요.” 김 씨는 “윤리와 도덕을 지키며 잘못을 인정하고, 서로 도우며 사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남의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사’지만, 하다 보면 본인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김 씨는 “‘나’라는 사람은 정말 부족한 점이 많았다”며 “수업을 듣고 상담사 활동을 하다 보니 조금씩 변화가 있었다. 노년의 삶을 위해서 무엇이 이익이 되고, 무엇이 해가 되는지 조금씩 알아간다”고 말했다. 또, “옥천은 노년 인구가 30% 이상을 차지한다”며 “노년의 삶을 어떻게 돌볼 것이고 우울증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교육들을 더 많이 해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인물일반 | 윤수진 인턴기자 | 2021-11-04 23:45
네팔에서 온 청년 이주여성 구릉소니 씨.“처음 옥천에 왔을 때 등산가자고 해서 제가 ‘산이 어딨는데요?’ 하면서 놀렸어요. 네팔에서 저렇게 낮은 건 산이라고 안 불러요. 저희 동네에도 저런 언덕들이 많았는데 산이라고 안 불렀거든요.”네팔 수도인 카트만두에서 7시간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온 구릉소니(31, 읍 가화리). 그는 재밌는 청년이자 이주여성이었다. 그의 인생은 흔히 노출되는 ‘수동적인’ 이주여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 남편이 네팔에 처음 왔을 때 만나게 되어서 이야기를 했는데 결혼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는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뒤이어 말했다. “못생긴 것 같았어요.” 그렇게 생각했다가 남편과 계속 페이스북(소셜네트워크)으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마음이 열렸다. 결혼을 결심하고 7년 전 처음 한국으로 왔다. 남편과 시부모님이 있던 울산이었다. 거기서 울산대학교 어학당을 다니며 한국어를 익혔다. 젊은 나이에 시작한 시집살이와 타국 생활이었다. 당황스러운 순간들이 많았다. 그는 처음 한국에 와서 “하루 종일 인사만 했다”. “적어도 저희 집은 자주 보는 가족끼리는 인사는 하루에 한 번만 했거든요. 근데 여기 오니까 어른들한테 나갈 때 인사하고, 들어와서 인사하고, 계속 인사만 했어요.” 식문화도 힘들었다. 네팔에서 즐겨먹던 닭고기에 비해 한국 닭은 맛이 없었다. “네팔에서는 토종닭을 먹었어요. 근데 여기 와서 마트 닭을 먹었는데 맛이 없더라고요.” 된장찌개도 특유의 냄새로 먹지 못했었지만 지금은 ‘먹고 살 만큼’ 한국 요리를 할 줄 안다. 그는 또 한 번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잘하지는 못해요. 딱 먹을 만큼만 해요.” ■ 친구들을 만난 옥천옥천은 그에게도, 남편에게도 연고가 없던 곳이었다. 남편이 지리산고등학교(경남 산청군)에 있을 때 제자였고, 남편과 연결을 시켜준 사촌오빠가 도립대를 나와 옥천에 살고 있었다. 든든한 오빠가 있다는 사실만 믿고 4년 전, 옥천으로 남편과 아이와 함께 올라왔다. 대도시에 살다가 올라와서 그랬을까. 처음 만난 옥천은 ‘시골’이었다. 그래도 그는 괜찮았다. 옥천에서는 외롭지 않았다. “여기 와서 다문화센터에서 수업도 듣고, 결혼이주여성협의회에도 참여하면서 친구들을 만났어요.”그는 결혼이주여성협의회에서 네팔 국가 대표를 맡았다. 남편 김원희(44) 씨는 구릉소니씨의 협의회 활동을 적극 지지한다. 김원희 씨는 아예 협의회 자문 위원을 맡았다. “저는 사실 집에 있는 게 좋을 때도 있거든요. 집에서 넷플릭스로 인도 드라마 보면서 놀아요. 그런데 남편이 항상 협의회 행사가서 친구들이랑 놀고 오라고 말해요.” 구릉소니씨의 집은 네팔인들의 만남의 장소다. 주말마다 옥천에 사는 네팔 이주여성 2명과 남성 이주노동자들이 집에 모여 네팔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몇몇 남편들은 남자인 친구를 부르면 싫어한다고 들었는데, 제 남편은 오히려 ‘불러 불러’하고 말해요. 남편도 제 친구들하고 다 알고 친하게 지내요.” ■ 일하고 목소리 내면서 살아간다구릉소니씨는 꾸준히 일하는 이주여성이었다. 교동식품에서 알바도 하고, 진영포장산업(동이면)에서 저번달까지 일했다. “포장작업을 했어요. 선별,포장,벤딩까지 해서 무거운 걸 많이 들었어요. 그렇게 2년을 일했어요.” 다음 주부터는 엠케이메커닉스(옥천읍)에서 일한다. 여성회관에서 연결해준 일자리다. 계속 노동을 해왔지만 이주여성 일자리 문제는 그에게도 큰 문제로 다가온다. “이주여성은 일자리 찾기가 힘들어요. 고용노동부나 여성회관에서 일을 연결 안 해주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아요.” 옥천 생활을 말하면서 계속 웃고,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던 그는 이주여성들이 겪는 문제를 말하기 시작하며 목소리가 단호해졌다.구릉소니씨는 또 아이들 교육의 어려움을 말했다. 그는 “한국 사람들도 학교에서 나오는 안내문을 읽으면 이해를 못 하는 경우도 많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아이들 학교에서 오는 안내문을 남편한테 보여주면 남편도 이해가 안 된다고 할 때도 있어요. 다른 이주여성 남편들 중에는 글을 못 읽는 경우도 있어서 큰 문제죠.”그래도 구릉소니씨는 “이주여성협의회가 있어서 서로 도우면서 살아간다”고 말했다. 그는 이주여성협의회에서 하고 싶은 일로 ‘쉼터’를 꼽았다. “한국 사람들은 친척이나 친구 집이라도 가잖아요. 근데 이주여성은 친구한테 가고 싶어도 친구 집에서도 싫어해요. 너 이런 사람이랑 친구 하냐, 너도 얘랑 놀다가 나중에 나가면 어떡하냐고 그런 말도 한다고 해요. 또 시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이주여성도 많잖아요. 이주여성들이 본인만의 공간에서 쉴 수 있는 쉼터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 국적에 얽매이지 않는다구릉소니씨는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 아이가 다 크면, 남편과 함께 네팔로 돌아갈 계획을 짜고 있기 때문이다. “고민 중이에요. 네팔 국적을 포기하는 게 쉽지도 않고, 또 국적을 꼭 따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아이가 조금 더 크면 네팔에서도 살고, 여기서도 살고 싶어요.” 또 다른 바람은 아이와 함께 네팔에 가는 것이다. 이미 간단한 단어 정도는 익힌 네팔어도 아이가 배우고 싶어한다면 가르쳐주고 싶다. 비록 옥천에는 부족한게 많지만, 그는 ‘친구들과 함께’ 옥천에 있다. “옥천이 시골이라고 해도 친구들이랑 함께 있어서 외롭지 않아요.”
인물일반 | 이상현 인턴기자 | 2021-11-04 23:43
시니어클럽에서 청소를 담당하는 '공공기관 가꾸미'들 (왼쪽부터 이숙자,강은경,황복여 씨)지난달 15일, 금구천 걷기 행사에 참가했던 이숙자씨(77, 읍 금구리)는 통합복지센터 청소노동자다. 올해 처음 시니어클럽 노인일자리 사업에 지원해 현재 통합복지센터 4층을 담당하고 있는 이씨는 강은경씨(70, 읍 신기리), 황복여씨(70, 읍 문정리) 함께 일하고 있다. 동네이웃도, 친구도 아니지만 서로의 마음이 잘 통한다는 그들에게서 즐거움이 엿보인다. 이심전심으로 통합복지센터의 청결을 책임지는 3명의 청소부들을 만나봤다.이들은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통합복지센터 화장실 청소 일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3시간 내내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1시간마다 10분씩 쉬는 시간이 있어 잠시 목을 축이고 가벼운 휴식을 취한다. 군에서 시행하는 노인 일자리 사업 중, ‘공공기관 가꾸미’ 활동을 하고 있는 이들은 올해 3월부터 시작해 12월까지 계약돼 있다. 조은정 사회복지사에 따르면, 원래는 1월부터 시작이지만 올해는 활동이 늦어져 3월부터 시작하게 됐다. 현재 공공기관 가꾸미로 활동하고 있는 인원은 총 58명이다. 노인 일자리 사업은 1년 단위로 운영하기 때문에 내년에 재신청을 해야 한다.이씨는 “노인들에겐 이런 일이 딱 좋다. 업무 시간이 너무 길지도 않고, 그렇다고 업무 강도가 그리 세지도 않으니깐”이라며 업무에 대해 만족감을 내비치는 한편, “그래서인지 돈은 좀 적다. 개인적으로 30만원 정돈(현재 27만원) 받았으면 좋겠다”며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이들은 계약조건에 따라 근무기간이 한 달에 열흘을 넘길 수 없으며 따라서 주 2~3일, 하루 3시간이라는 고정된 시간동안 근무하고 있다. 시니어클럽에서 일하기 전엔 각자 다른 일을 했었다는 그들. 이씨는 당구장에서 카운터를 봤으며 강씨는 대전 소재의 회사 식당에서, 황씨는 자전거 부품회사, 전기회사 등을 돌며 업에 종사했다. 또, 이씨는 도서관에서도 근무를 했고 일을 잘한다며 3년 동안 채용했었다고 전했다. 올해 12월이면 계약이 끝나는 이들은 무슨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내년에도 신청할 것이라며 호의적인 의사를 밝혔다.집에서 마냥 쉬고 있는 게 싫어서 나온다는 이들은 “코로나 때문에 여기 못 나오게 되면 집에서 엄청 답답하게 지낸다”며 일이 즐겁다고 말했다. 쉬는 날엔 주로 운동을 하는 등 취미생활을 즐기면서 틈틈이 손주들도 돌보는 어머님들은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고 있다. 할 일을 손에서 놓지 않는 어머님들은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지금처럼 즐겁게 일하고 싶다”고 답했다. 이씨는 “첫째로 중요한 것이 건강이니깐, 사무실에서도 건강이 최고라고 하면서 직원들이 그냥 건강하시라고 얘기하더라”고 전했다.한편, 어머님들이 꼽은 통합복지센터의 장점은 건물이 신식이라 청소하는데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헌 건물은 깨끗하게 청소해도 티가 잘 안 나는데 새 건물은 금방금방 티가 난다는 것. 올해 5월에 있었던 사무실 이전도 함께 했다는 어머니들은 어느새 통합복지센터에 스며들어 있었다. 또한, 복지센터 직원들의 친절함을 이야기했다. 관장, 직원할 거 없이 마주치면 인사를 하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는 그들의 대답에서 긍정적 에너지가 샘솟는 듯하다.
인물일반 | 윤석준 인턴기자 | 2021-11-04 23:40
이지숙씨는 발달장애를 앓는 동생들을 위해 사회복지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진은 지난달 20일 옥천신문사 2층에서 만난 이지숙씨.누구나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한다. 9월부터 사회복지사로 바하센터에서 일하는 이지숙(35, 읍 문정리)씨도 그랬다. 기업의 안전관리 일을 꿈꾸던 그는, 발달장애를 앓는 두 형제를 맡고자 후자를 택했다.해야 하는 것으로부터 보람을 얻었고 깨어나게 되어 좋다고 말한 이지숙씨. 그는 중증 발달장애인의 가족으로서 야간 활동보조서비스와 중증장애인을 위한 교육·주거시설, 장애인 가정과 관련 기관의 연계를 강조했다. 그리고 발달장애인 가족 중 수직 관계인 ‘부모와 자녀’만큼 수평 관계인 ‘형제자매’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난달 20일 이지숙씨를 옥천신문사 2층에서 만났다. ■ 중증 발달장애 앓던 그의 동생 지선씨청성면 대안리에서 2남 2녀 중 첫째로 태어난 이지숙씨. 그의 어머니와 동생 지선(33), 성복(30)씨는 발달장애를 앓고 있다. 성복씨는 고등학교도 졸업한 만큼 어느 정도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선씨는 어릴 적부터 말을 하지 못했고 종종 울었다. 변을 못 가렸고 때때로 밤에 밖으로 뛰쳐나갔다.이렇듯 ‘이상하다’는 이유로, 부모님께선 의무교육과정도 거치지 않게 했다. 동네 어른들은 ‘좋아질 거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생각으로, 지선씨는 가둬진 채 자랐다. 그러다 10대 후반부터 시설에 보내졌다. 20대부터는 옷을 벗는 버릇이 심해져, 10년 전쯤 시설에 있었다. 어느 시설에선 항상 묶여 있어서 몸에 욕창이 생겼다.그동안 기존 증상과 옷을 벗고 타인을 때리는 행동은 계속됐다. 면사무소나 군청에 가서 이걸 알렸고, 사회복지사가 지선씨를 맡았다. 하지만 다들 그의 행동을 감당하지 못해 담당자가 열 명쯤 바뀌었다. 시설도 감당하지 못해 종종 퇴소 처리됐고, 옥천 사회복지 쪽에서 지선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지선이가 어렸을 땐 다들 발달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아예 없었던 것 같아요. 특히 교육적인 부분이 그랬어요. 특수학급도 생긴 지 얼마 안 됐고, 의무교육대상이었을 때 누구도 ‘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교육 부분을 많이 놓친 것 같아요.”가족들이 첫 여행지인 울진 앞바다에서 찍은 사진. 옥천장애인가족지원센터의 2020년 가족여가지원사업 일환이다.■ 작년 9월부터 삶이 바뀌다그러다 전화가 걸려왔다. ‘지숙이 얼굴 좀 보고 싶다’는 옥천장애인가족지원센터 신봉기 센터장의 연락이다. 그는 동생 성복씨가 종종 센터에 찾아와 상담하면서 지선씨 이야기를 알게 됐다. 그리고 지선씨와 같이 식당으로, 센터의 가족여가지원사업으로 울진 앞바다에도 갔다. 그를 만나며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이때부터 여태껏 못했던 일을 시작했어요. 그동안 제 동생은 그런 걸 못할 거라고, 그런 게 안 되는 애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예요. 시도를 안 했던 것뿐이에요. 말을 못 할 뿐이지, ‘뭐 가져와 줄래?’라고 말하면 그걸 다 해요.”옷을 아예 싫어했던 게 아니었다. 예쁜 걸 입으면 좋아하는 자기 취향이 있었다. 예뻐하는 옷과 신발, 가방의 가짓수를 늘려줬다. 밖에 나가면 옷을 입도록, 제때 화장실에 가서 용변을 볼 수 있도록 일상생활훈련을 도왔다. 지금도 밖에 나가면 훈련한 대로 잘 행동한다고. “20대에는 저도 몰랐고, 아무도 이런 걸 얘기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때는 힘으로, 강압적으로 옷을 입혔어요. 지금은 이 아이의 생각에 맞춰 ‘어디 가려면 옷을 입어야 해’라고 접근해요.”그동안 사회복지사들도 지선씨의 일로 언니 지숙씨에게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 ‘잘 지내시죠?’와 같은 안부 인사뿐이었다. 그러나 신봉기 센터장은 그와 상담을 진행했다. 사회복지사가 동생 일로 서로 얼굴을 보며 상담한 적은 없었다. 그러면서 발달장애인의 비장애인 형제의 중요성을 느꼈다.그리고 신봉기 센터장은 그에게 동생들을 돌볼 수 있도록 그에게 사회복지사의 길을 알려주었다. 부모님은 연세로 지선씨와 성복씨를 돌보기 어려워졌다. 아예 돌볼 거면 사회복지사로서 하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는데, 제 삶이 해야 하는 쪽에 가까워서 그렇게 됐죠.” 작년 9월부터 세 남매의 삶이 달라졌다. 장애인가족지원센터의 지원으로 같이 일상생활을 누리기 시작한 것. 사진은 세 남매(왼쪽 성복씨, 가운데 지선씨, 오른쪽 지숙씨)가 여행 가서 찍은 것이다.■ 발달장애인 동생들을 위해 사회복지사 되다작년 10월부터 사회복지사 공부를 시작했고, 두 동생은 12월부터 바하센터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쯤부터 4개월 반 동안, 이지숙씨는 읍 문정리 집에서 지선씨와 함께 살았다. 동생은 밤에도 잠을 자지 않았고, 여러 행동으로 민원도 들어왔다. 잠을 못 자다 보니 예민해지고 우울해졌다. 그래서 동생과는 일주일에 1~3번만 혹은 낮에만 함께 있었다. 이렇게 올해 9월부터 사회복지사로 바하센터에서 일하게 됐다.“앞으로는 청소년 발달장애인 방과후활동서비스를 주로 담당할 것 같아요. 가족이 가족을 돌보는 건 원래 안 돼요. 지선이가 돌발행동할 때 너무 급하면 제가 가서 제지해요. 대신 다른 선생님으로부터 어떻게 뭘 하는지 다 듣고, 지선이 컨디션이 좀 안 좋다 싶으면 시간(성인의 경우 오전9시~오후5시까지다) 중간에 같이 나오죠.”이지숙씨가 바하센터에서 일하며 느낀 점은 ‘이렇게 장애인이 많았구나!’였다. 장애인 가족이 세 명이나 있는데도, 여기에는 다양한 종류의 장애와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더 공부하고 경험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장애인들을 살리는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어요. 제때 적절한 개입으로 최대한 자립이 가능하도록 한다는 의미예요. 그걸 생각하면 보람찬 일이죠.” 바하센터 성인 발달장애인 주간활동서비스 중 요리 시간에 음식을 만드는 지선씨.■ 이지숙씨가 느끼고 바라는 것사회복지사로 산 지 한 달 반밖에 안 됐기에, 이지숙씨는 스스로 발달장애인이나 중증장애인에 대해 모르는 점도 많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언제나 전문적으로 자문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요. 매번 충북장애인부모연대와 가족지원센터에서 자문받고 있지만, 직접적인 행동 중재에 대한 인력 부족을 느끼고 있어요. 활동지원사나 바하센터 사회복지사만으로는 행동 수정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충북대학교병원에서 진행 중인 행동 중재 솔루션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 최우선적으로 배치되었으면 합니다.”지선씨와 같이 살았을 때, 공부할 때나 일하고 집에 오면 지치다 보니 동생을 돌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야간 활동보조서비스가 필요했는데 옥천에선 이를 담당하는 사람이 없다. 청성에 사는 동생들이 바하센터로 올 땐 성복씨가 지선씨의 보호자 격으로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하는데, 동생 지선씨의 행동들로 연락이 왔다. 이런 행동은 주의해달라고.“지선이의 경우가 되게 심각해요. 20대 후반에 중증장애인 시설에 보내려고 전국에 연락했는데, 어떤 곳에선 ‘장애가 너무 심해서 입소하지 못할 것 같다’라고 할 정도였어요. 경력 많은 여러분들이 맡아야 해요. 그러려면 군내 인력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아요. 그리고 지선이를 담당할 수 있는 전문적인 선생님이 있으면 좋겠어요.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많이 바뀌다 보니까.”지선씨를 위한 특수교육도 필요하다. 이지숙씨는 바하센터에서 사회복지사가 하는 교육보다 순회교육(직접 방문으로 진행되는 특수교육과정)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옥천에서 순회교육을 받으려면 교육기관 혹은 시설에 입소해야 하고, 그러려면 바하센터의 성인 발달장애인 주간활동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지선씨는 고향 집에서 살고 있고, 이지숙씨는 여건상 주말에만 고향으로 간다. 유달리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중증장애인을 위한 주거·교육 시설도 있으면 좋겠어요. 탈시설과 자립이 목표지만, 갑자기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어린 시절에 지선이를 떠올리면 항상 웅크려 있었던 모습이었어요. 지금 떠올리면 참 외로웠겠다고 생각해요.”지금도 그렇게 집에만 있는 장애인들이 있다. 이지숙씨는 그런 사람들을 발굴해서 기관과 연계해서 자립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올해 9월 기준 군내 발달장애(지적장애·자폐성 장애)를 겪는 사람은 589명이며, 현재 바하센터를 이용하는 발달장애인은 28명(성인 14명, 청소년 14명)이다. 바하센터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043-732-2111, 010-6378-2111로 하면 된다.
인물일반 | 김재석 인턴기자 | 2021-11-04 23:39
편집자주_청년들이 일자리를 찾고자 지역 바깥으로 나가는 게 마치 당연한 일처럼 보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가 되면 고민은 서서히 시작됩니다. 더 많은 기회가 보장되는 일자리를 찾아 정든 고향을 두고 시선은 대도시로 향합니다. 멀리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타향살이를 하며 일에 매달리다가도 마음 한 켠에는 가족, 친구, 이웃들이 있는 고향을 떠올립니다. 어렸을 땐 잘 몰랐지만 떠나고 나서야 깨닫는 고향의 소중함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청년들이 지역에 오래 머무를 수 없을까. 그래서 현재 옥천에 사는 청년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지역에서 터전을 일구는 청년을 만나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20일 동이농공단지에 있는 ㈜바이오크래프트 플랜팅팀 이준희(36) 대리를 만나봤습니다.바이오크래프트 플랜팅팀 이준희 대리■ 바이오크래프트 회사는 어떻게 입사했나요?2019년에 입사해서 근무한 지는 1년 반 정도 됐습니다. 구미에 있는 대학에서 조경설계를 전공했고요. 제가 살던 이원에 부모님께서 조경 일을 했는데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조경 일은 접고, 묘목농원 일을 같이 했어요. 그러다가 공기정화장치 ‘아이림’을 개발하는 바이오크래프트 회사를 알게 됐습니다. 식물을 가지고 공기정화를 이루는 기술에 대해 제가 갖고 있는 조경 지식을 접목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채용공고를 보고 면접을 통해 들어왔습니다. 현재 아이림은 형태가 어느 정도 잡혀있지만 제가 입사할 때만 해도 나무로 만든 임시적인 틀로 식물들을 식재하는 기본 초안만 잡힌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 회사에 들어오게 되면 도전적으로 일을 해볼 수 있겠다 싶어서 면접 과정에서 제 전공과 그동안 해왔던 일들을 적극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고향이 원래 이원면인가요?이원면 강청리에서 나고 자랐고요. 이원초, 이원중 그리고 지금은 충북산업과학고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옥천상고를 나왔습니다. 본가는 그대로 강청리에 있지만 현재 회사 기숙사에서 상주하며 출근하고 있습니다. ■ 취업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요?취업하려는 모든 분들이 그렇지만 전공과 맞는 일을 찾는 게 어렵기도 했고요. 특히 원예나 조경을 전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지역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관련 회사들이 서울에 집중돼 있고, 같이 대학교를 졸업한 동기들을 보더라도 수도권에서 일자리를 찾았거든요. 그런 면에서 제가 사는 지역 내 중견기업에서 전공을 찾았다는 것은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왔기 때문에 어려움이라기보다는 기회를 잘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공기정화장치에 필요한 기술을 배우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처음에는 어려웠는데요.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연구실이 있고, 또 연구원 분들께서도 많이 알려주셨습니다. 인공지능이나 사물인터넷(IOT) 센서, 거기에 들어가는 부품의 기능들을 제가 직접 찾아보면서 공부하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 옥천 바깥에서 일한 경험이 있나요?서울 2년을 포함해 타지 생활을 하며 일을 한 적이 있었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일과 관련된 업무는 아니었는데요. 예전부터 느끼고 있고, 지금도 그렇지만 제가 머물렀던 대도시와 비교하면 옥천이 정말 살기 좋은 곳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요즘 들어 더 느끼고 있습니다. 대도시에 살면 아무래도 출·퇴근 길에 교통체증이 자주 생기니까 교통편에서 가장 어려움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업무 계획과 장기적인 플랜이 있다면? 오늘은 아이림 셀(CEL) 모델을 좀 더 안정화하기 위한 도면 변경을 진행할 예정이고요. 공기정화장치의 프레임, 뼈대 부분인 포맥스의 가공을 맡아주시는 외주업체에 방문해서 좀 더 안정적인 제품으로 완성될 수 있도록 모니터링을 시행할 예정입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많은 분들이 공기정화장치 아이림을 쉽게 구할 수 있고, 접할 수 있도록 일조하는 게 가장 큰 목표입니다.■ 지역에 있는 학생들을 매년 채용한다고 들었는데요.현재 충북산과고에 다니는 3학년 학생들과 지난 18일부터 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내년 1월까지 출근하는데요. 어렵지 않은, 위험하지 않은 일들로 업무를 분담해 주려고 합니다. 실습생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올해 중순에도 연암대학교 학생 7명이 와서 업무 분담을 도와 열심히 지도했습니다. 졸업 뒤 저희 바이오크래프트 회사로 문을 두드려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 바이오크래프트에 들어오려면 어떤 걸 공부해야 하나요?제가 소속돼 있는 플랜팅팀에 들어오려는 친구들이 있다면, 우선 식물에 애정만 가지고 있으면 충분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와서 적응할 수 있습니다. 그밖에 필요한 업무 지식은 다 이끌어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들이 많지 않아 식물에 관한 관심과 애정만 있으면 누구라도 입사지원을 해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이원 토박이로서 지역에 있는 기업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바이오크래프트는 공기정화장치 ‘아이림’을 지난 8월에 출시하는 과정에서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시행착오를 겪었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개발하고 보완해가는 정말 도전적인 회사라고 생각합니다. 분위기 자체도 굉장히 좋고, 항상 열려 있고, 깨어있는 회사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는 대전에 아이림 직영샵을 오픈하는 데 매진할 예정입니다.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1-10-29 13:31
왼쪽부터 송차순, 강점순, 황순자 씨 “일을 하니까 한달이 금방금방 지나가고 1년도 금방이더라고요. 몸을 움직이니까 시간이 더 빨리 간다고 느껴지는 것 같아요. 행복이 별거 있나요? 일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한 거죠. 우리가 움직일 수 있고 건강하기 때문에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니깐.” 도란도란 식당 종사자 황순자씨(74, 읍 문정리)와 주방장 강점순씨(75, 읍 문정리)의 일에 대한 소감이다. 그들이 느끼는 행복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가까이에 있었다. 오늘도 식당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그들을 만나봤다. 처음부터 시니어클럽에 도란도란 식당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13년 9월 노인일자리사업이 실시한 뒤, 2015년까지 ‘꽃밭에서’라는 상호를 달고 현재의 코너13카페 위치(읍 금구리 191-51)에서 칼국수와 만두를 판매했다. 7년 전 꽃밭에서부터 시작해 도란도란 주방장을 맡고 있는 강씨는 도란도란의 산증인과도 같다. 꽃밭에서는 시니어클럽 시장형사업의 1호점이었으나 운영상의 문제로 폐점하고 같은 해 2월에 개업한 2호점 도란도란 향수할매식당만 남아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온 것. 단돈 6천원만 있으면 제육볶음과 각종 반찬을 즐길 수 있는 도란도란 식당은 그렇게 시작됐다.식당은 주로 노인, 직장인을 비롯해 혼자 밥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로 붐비는데 그날그날 메뉴가 다르다. 주방장이 매일 시장으로 나가 사오는 식재료가 그날 점심 메뉴이다. 단, 제육볶음은 매일 나오는 음식이다. 손님 대부분은 읍에서 오는 사람들이지만 가끔 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올 때도 있고 근처를 관광차 들렀다가 맛집이라 해서 방문하는 사람들도 꽤나 있다. 강씨는 “처음에 CJB(청주방송)에서 방송할 때 서울, 대구 등 전국 각지에서 많이 찾아왔었다”고 전했다.식당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운영하며 일요일과 공휴일은 휴무일이다. 기본적으로 점심만 제공하고 저녁은 예약만 받는데 단체 손님 10명 이하는 인건비의 문제로 받지 않고 있다. 저녁 식사는 백반이 아닌 닭볶음탕이나 갈비찜과 같은 요리를 제공하고 있다. 종사자들은 각각 주방과 서빙 조로 나뉘어 주방은 이틀마다, 서빙은 사흘마다 돌아가며 일에 종사한다. 허나, 5년 전만 해도 일을 하지 않았다는 황씨. 그는 “5년 전에는 집에서 그냥 놀고 있었다. 60세 때부터 집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5년을 그렇게 흘려보내다가 노인 일자리 사업 얘기를 듣고 나오게 된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말했다. 강씨 또한 “정해진 시간동안 일을 하고 있다는 보람이 더 크다. 집에만 있으면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가선 밭일을 한다는 그들의 말에는 열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한편, 강씨는 도란도란 식당에서 인정받는 주방장이다. 주변 사람들은 ‘손맛이 다르다’, ‘집에 가서 똑같이 따라하면 그 맛이 안 난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강씨는 인공조미료도 쓰지 않기 때문에 맛있으면서 건강도 챙길 수 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그는 “음식은 많이 해야 맛있다. 조금 해놓고 내놓으면 그 맛이 안 난다”며 “100-150명분은 거뜬하게 해낼 수 있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맛으로 뒤지지 않는 도란도란이지만 위생만큼은 군내 어느 식당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깨끗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식당 구석구석을 살펴봐도 먼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위생에 신경 쓴다는 점에서 어르신들의 생활 감각이 엿보인다.“여기 옆에 손가락으로 쓰윽 문질러봐도 먼지 하나 없을 거예요. 매일 아침, 저녁으로 닦고 수시로 청소하거든요.” 식당 청소를 담당하고 있는 황씨와 송차순씨(71, 읍 문정리)는 세척기가 해주는 식기세척도 미덥지 않아 손수 닦아서 진열해놓는다. “저기 부엌에 가보시면 바닥 틈 사이에 기름기가 하나도 없을 거예요. 매일 바닥에 세제 뿌려서 문질러 닦기 때문이죠.” 위생과 맛 두가지 모두에 정성을 쏟는 도란도란은 이제 30명의 직원으로 구성된 식당으로 성장했다. 처음 16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거의 2배가량 인원이 늘어난 것이다.앞으로의 여생을 어떻게 보내고 싶냐는 질문에 지금처럼 즐겁게 일하며 보낼 수 있었으면 한다는 그들의 대답은 행복에 대한 의미에 또 다른 시사점을 제시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면 행복이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모두 70이 넘은 나이지만 여전히 일이 할 만하다고 말하는 그들은 입을 모아 “함께하니깐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답했다. “마음이 편안하고 몸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행복이고 바람이다”라고 말하는 이들의 표정이 사뭇 행복해 보인다.
인물일반 | 윤석준 인턴기자 | 2021-10-29 11:24
자원관리도우미 신주철, 강대식씨 기름기가 묻은 피자 상자는 종이류에 배출할 수 있을까? 지난 18일, 마암리 양우내안애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만난 강대식(68, 읍 금구리), 신주철(70, 읍 금구리)씨는 “안 된다”고 단호히 말한다. “기름 묻은 건 재활용이 안 돼요. 일반쓰레기에 버려야 해요.”아파트 주민도 아니고, 경비원이나 관리사무소 직원도 아니다. 그럼에도 매주 월요일 오후 1시면 이곳에 나타나 분리수거장 앞을 떠나지 않는다. 분리배출 하러 나온 주민을 돕거나 직접 쓰레기를 분류하기도 한다. 벌써 5개월째다.이들은 환경부의 ‘재활용품 품질개선 지원사업’으로 공동·단독주택의 분리수거장에 배치된 자원관리도우미다. 읍내 공동주택 4명, 단독주택 7명 등 총 11명이 올해 6월1일부터 오는 11월19일까지 근무한다. 주민들에게 올바른 생활폐기물 분리배출 방법을 안내하고 홍보하며 필요시 재활용품 선별 작업도 한다. 이를 위해 3억3천280만원(국비 2억9천952만원·군비 3천328만원)의 예산이 편성됐다.주민에게 분리배출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분리를 잘 해주셨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각, 양손에 쓰레기를 들고 온 주민에게 신씨가 격려의 말을 건넸다. 5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주민이 분리배출을 하고 떠나자 강씨와 신씨가 다시 쓰레기를 살펴본다. 플라스틱 수거함에 버려진 커피우유 컵을 꺼내자 안쪽에 가득 담긴 담배꽁초가 보인다. “이렇게 담배꽁초를 넣어두면 재활용이 안 돼요.” 매의 눈으로 작은 쓰레기도 놓치지 않는다. 이번에는 요구르트병을 집어 들어 알루미늄 뚜껑을 제거한다.가장 분리배출이 잘 되지 않는 쓰레기는 택배 상자다. “운송장 스티커와 테이프를 떼야 하는데 그냥 버려요. 개인정보도 있는데 안 떼더라고요.” 택배 상자 더미 앞에서 일일이 커터칼로 운송장 스티커와 테이프를 제거하고 있지만 온종일 여기에 매여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개개인이 하는 건 쉬워도 모아놓으면 다 처리하기 힘들어요. 주민 분들이 스스로 해주셔야 합니다.”공동주택에 배치된 강씨와 신씨는 주중 매일 다른 아파트를 방문한다. △마암리 현대아파트 △마암리 양우내안애아파트 △문정리 문정주공3단지아파트 △문정리 하늘빛아파트 △죽향리 옥향아파트 △장야리 더퍼스트이안아파트 △죽향리 향수마을아파트를 차례로 순회한다. 여러 곳을 돌다 보니 자연스레 아파트끼리 비교가 된다. 이장까지 나서 주민들이 잘 협조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말을 해도 달라지지 않는 곳도 있다. “앞에서만 알겠다고 하고 뒤돌면 똑같아요. 귀찮거든요. 어떤 주민은 음식물 쓰레기를 플라스틱에 버리기도 하고, 어떤 주민은 분리도 안 한 쓰레기를 까만 봉지에 담아 던지고 가는 경우도 있어요. 그럼 우리가 그 봉지 열어서 분리배출 하는 거예요.” 아파트마다 비가림막이 없는 분리수거장도 있어 비 오는 날에는 고무장갑을 끼고 일을 해야 한다. “비가 오면 종이고 뭐고 다 젖어요. 그래서 비 오는 날이 싫죠.”주민들에게 욕이라도 듣는 날이면 밤잠을 설친다. “잘 때도 안 잊히고 내가 왜 이 일을 하는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관리사무소에 주민이 신고를 한 일도 있었다. “박스를 접어서 버려달라고 부탁드렸더니 아저씨들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 이거죠. 불편해도 주민들이 불편할 거니까 관여하지 말라고 하더니 신고를 하더라고요. 우리는 피해주려고 하는 게 아닌데…” 일 자체보다 주민들의 차가운 반응이 더 힘들다. 여름에는 무더위를 잠시 피하려고 경로당에 들어갔다가 “코로나 시대에 어디 들어오느냐”는 냉정한 소리를 들었다. 결국 나무 아래서 햇빛만 겨우 피해야 했다.강씨와 신씨 모두 1년 전만 해도 분리배출 전문가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강씨는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다 코로나19 영향으로 폐업을 했고, 이후 낚시터에서 매점 등 시설을 관리하는 야간 근무를 했다. 신씨는 기능성 신발을 제작하는 일을 하다 그만둔 상태였다. “이 일이 좋아서 한 것도 아니고 마냥 놀 수 없으니 지원한 거예요.”환경에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일을 시작하고 마음가짐이 달라졌다.분리배출·수거에 대한 뉴스를 챙겨보고, 정부에서 제작한 ‘내 손안의 분리배출’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틈틈이 분리배출 방법을 공부한다. 강씨는 투명 페트병 수거에 대해 지적했다. 지난해 12월25일부터 공동주택은 투명 페트병을 별도 분리수거함에 넣어야 한다. “이렇게 투명 페트병을 따로 버려도 수거업체가 일반 페트병과 섞어서 한 번에 가져가요. 업체도 고충이 있죠. 투명 페트병 분리수거에 대한 환경부 지원이 있어야 하는데 이익이 남지 않으니 안 하는 거예요.” 신씨는 우리지역의 분리배출 방법에 대해서 쓴소리를 했다. “비닐 버리는 데가 있어야 하는데 없어요. 음식물 쓰레기도 그렇고요. 다른 지역은 아니거든요. 말이 안 되는 거죠.” 단독주택 거주자로서 단독주택의 분리배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고도 입을 모았다. “아파트보다 더 심각해요. 주택은 대부분 분리수거장이 없잖아요. 분리배출 없이 종량제 봉투에 쓰레기를 모아 버리니까요.”이들은 마지막까지 주민들에게 올바른 분리배출에 관심을 가져주길 당부했다. 신씨는 “요즘 두세 명만 모여도 화두가 환경 문제인데 당장 일상에서 환경을 보호하는 실천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씨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하지 않고는 우리 힘으론 아무리 해도 부족하다”며 “주민 분들이 스스로 잘 해주시면 좋겠다”고 전했다.한편 이달 중으로 면 단위에도 자원관리도우미가 배치될 예정이다. 환경과 자원순환팀 김호성 팀장은 “남은 예산으로 최대한 10월 중 자원관리도우미를 추가로 뽑아 한 달 동안 마을회관을 돌아다니며 분리배출 방법에 대해 홍보할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자원관리도우미에 대한 계획은 아직 미정이다.
인물일반 | 박지원 인턴기자 | 2021-10-29 11:18
진여정(34)씨 “Bây giờ là mấy giờ?”(버이 져↘ 라↘ 머이↗ 져↘?) 우리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지지만, 베트남에서는 일상적인 표현이다. 이 표현은 “지금 몇 시 입니까?”라는 뜻이다. 그런데 청성초 학생들에게는 익숙한 문장이란다. 매주 수요일마다 방과후에 베트남어 수업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방과후 수업이 시작되자 학생들의 고사리 같은 손이 바빠졌다. 진여정(34, 청성면 도장리) 씨가 칠판에 베트남어를 쓰자 고개를 갸웃대며 노트에 받아 적는다. “선생님 한글 표기가 틀렸는데요.” 아차 싶었던 진여정 씨가 재빨리 손으로 글씨를 지운 뒤에 다시 적는다. “저도 아이들과 함께 배워요”라며 진여정 씨가 멋쩍은 미소를 보였다.누군가는 “선생이 저렇게 아이들을 가르쳐도 되는 거야?”라며 핀잔을 날릴지 몰라도 기자의 눈에 진여정 씨는 그야말로 돌봄을 몸소 실천하는 ‘마을교사’의 모습이었다. ■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 다녔던 학교…진여정 씨는 21살에 호치민에서 한국으로 이주해왔다. 아이들과 함께 배움을 나눈 게 4년이나 됐다. 처음 그가 한국어를 배우는 과정은 지난하기만 했다. 사과농사를 짓는 그에게는 읍에 있는 다문화센터가 멀게만 느껴졌다. 정규수업 시간에 한글교육을 이수해야 하는데 교육이 농번기에 실시되기 때문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았다. 청성면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3~40분이나 걸리는 읍내로 나와서 교육을 받고 다시 버스를 기다려서 오는 과정은 농사꾼이었던 그에게는 버겁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그는 다문화센터로 나가서 수업을 듣고, 집에서는 한국드라마를 챙겨보면서 한글을 익혔다.진여정 씨가 이렇게 교육에 열정적이었던 이유는 그가 호치민에서 학교를 다녔던 기억 때문이다. 어린 시절 학교에 등교하려면 2시간에서 3시간을 걸어가야 했고, 자전거로는 1시간 반이 걸렸다. 오전 7시부터 수업이 시작되는 탓에 매일 아침 5시 반부터 전쟁을 치러야 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공부가 재미있어서 힘든 줄도 몰랐다던 그는 차곡차곡 교사의 꿈을 채워나갔다. 진여정씨가 학생들에게 베트남어를 가르치고 있다. 학생들과 함께 고민하고 학습하는 진여정씨. ■ “제가 교육자로서 자질이 있을까요?”교육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사범대를 나온 것도 아니었던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교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다며 눈물을 훔친 적도 많았다. 이주민에 불과했던 그의 눈물에는 아이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교사 자질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보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앞섰다. 그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베트남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각 주차에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다. 그래도 자신의 역량이 닿는 한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며 수업을 이어왔다. 베트남어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칠판에 직접 한국어로 발음 표기를 해주며 이해를 도왔고, 문화의 날에는 베트남 복장을 입고 서로의 문화 차이를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설계했다. 이렇게 그는 마을교사로 거듭나고 있었다. ■ “돌봄, 마을과 학교 사이”진여정 씨가 4년째 도맡아서 진행 중인 방과후 수업에서는 매주 40분씩 일상적인 베트남어 표현을 배운다. 청성초 방과후교실은 1,2,3학년 학생과 4,5,6학년 2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듣기·쓰기·말하기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베트남어 수업의 주제는 시간표현에서부터 시작해서 인사말, 식사, 예절, 가족, 문화 등 다양한 표현을 담고 있다. 그가 2016년에 청성초에서 학부모회장을 맡았던 것이 어제 일 같은데 벌써 5년이나 지났다. 유치원에 다니던 아이가 청성초 4학년생이 됐고, 청성초 2학년이던 아이가 보은중학교 1학년생이 됐다. 계속해서 베트남어를 가르치는 이유는 본인의 자녀가 초등학교에서 다녀서만은 아니다. 그는 “학생들이 제 자식이라 생각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며 수업시간에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고 전학 온 아이들의 이름도 반복해서 되뇐다. 분명 교육학적인 차원에서 ‘질 떨어지는 교육’이라며 제도적 잣대를 들이댄다면 부정적인 평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마을교사’로서 마을과 학교 사이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아이들이 베트남어 학생이라면 저는 아이들에게 한국어 학생이라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함께 배워야 한다”며 ‘서로 돌봄’의 장을 만들어가고 있다. 진씨는 4년째 방과후 수업을 하고 있다.진씨의 수업은 단순히 언어만 다루지 않는다. 베트남 문화를 함께 공유하고 관계를 맺도록 돕는다. 청성초가 2016년부터 방과후 수업교과에 베트남어를 편성한 이유는 다문화 가정이나 다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타파하기 위해서였다. 태어날 때부터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은 본인의 선택과 상관없이 다문화 가정이기 때문에 사회적 편견과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청성초는 2020년까지만 하더라도 아이들의 70% 이상이 다문화 가정이었다. 최근 청성초로 교육이주를 희망하는 가구가 늘어나면서 그 비율이 낮아지긴 했어도 농촌사회에 다문화가정은 꾸준히 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청성초 유공순 방과후 담당교사는 “전교생의 절반이 넘는 가정이 다문화 가정이기도 하고 친구의 학부모가 학교에서 와서 수업을 하기 때문에 아이들과도 정서적 유대감이 깊다”며, 다문화가정과 다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져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비록 베트남어 수업이 정규수업교육과정에 속한 것이 아니지만, 외딴 섬에 떠 있는 방과후 수업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베트남어와 베트남 문화를 접하면서 아이들끼리 상호 이해의 관계망을 형성한다는 점과 마을사회와 학교를 이어주는 마을교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인물일반 | 안진수 인턴기자 | 2021-10-29 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