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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환향. 처음 골프를 접했던 고향에 다시 돌아오는 기분은 어떨까? 골프는 ‘누구나’ 쳐도 ‘아무나’ 프로되기는 힘들다. 전국에 KPGA프로골퍼 회원이 2천여 명 밖에 안 될 정도로 희소성이 있는 것이 ‘프로’다. 정말 삶을 하얗고 작은 골프공 안에 갈아넣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프로’ 작위다. 골프인들이 선망하는 프로가 옥천에도 떴다. 다른 프로도 아니고 옥천이 고향인, 옥천에서 골프를 시작한 이규윤(51, 청주 복대동) 프로다. 그는 인연을 놓지 않았다. 과거 골프에 입문 시켜준 거나 다름없었던 옥천골프랜드 박효근 대표의 ‘강습할 골프 강사 좀 소개시켜달라’는 요청에 본인이 직접 건너온 것이다. KPGA정회원 프로로서 포털에 검색을 하면 이름이 나오고 여타 대회나 방송에도 언급이 되던 그였기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잡아끄는 고향의 힘은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그렇다. 이제 옥천골프랜드 연습장에는 돌아온 이프로가 있다.  KPGA홈페이지에 가면 당당히 코리안투어 프로로 소개되는 이규윤 선수는 95년 7월21일 입회를 한 이래 투어프로에는 99년 8월20일 입회한 선수다. 제네시스 상금순위 670만6천857원으로 106위에 랭크되어 있고 평균타수는 75.39타수로 92위다. 동부화재 프로미배, GS칼텍스 마스터즈, 신한동해 오픈, 코오롱 하나은행 한국오픈, 금호아시아나 오픈 등에서 수상한 내역과 획득 상금은 어렵지 않게 검색된다. 당장 2017년에는 대전골프존에서 열린 ‘2016-17시즌 삼성증권 mPOP GTOUR챔피언십 결선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당시 결선 마지막날 버디 6개를 몰아치며 2언더파를 기록했다. 최종합계 13언더파로 4년7개월만에 승수를 추가했다. 당시 받은 우승상금이 2천만원, 그는 여전히 이름이 회자되는 프로선수다. 그런 그가 온 것이다. 옥천읍 삼청리 하삼 출신으로, 군남초등학교, 옥천중학교(36회), 옥천고등학교(11회)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공던지기 종목을 하다가, 중 고등학생 때는 중장거리 달리기를 하며 모든 학창시절을 육상에 쏟아부었다. 골프를 전문적으로 시작하게 된 시기는 1991년도. 21살 되던 해 평소 그를 눈여겨 보던 박효근 대표가 골프 알바와 배움을 권했고 그가 응하면서 약관의 나이에 골프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 해가 89년도였다. ■ 비주류 스포츠 독학을 통해 프로에 오르기까지그가 공식 KPGA 프로로 성장하기까지는 7~8년의 세월이 걸렸다. 당시 골프는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못한 스포츠였기 때문에 텔레비전 등 골프 영상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담당 강사조차 없는 상황이었던 이규윤씨는 매일 쉬지 않고 골프를 치며 독학으로 성장해왔다. 그 결과 95년도에 KPGA 세미프로(준 회원, 반직업 선수)가 되었고 4년 후인 99년도에 치열한 경쟁 속에서 드디어 KPGA 공식 투어프로로 선발되었다.“프로 자리로 오르기까지가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에요. 웬만해서는 사법고시 합격보다 더 어렵다고들 하네요. 경쟁률이 치열해서 세미프로로 남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한국 최초 프로였던 연덕춘 선수가 1963년도에 첫 한국 프로 골프회를 결성하고 나서 지금까지 프로 회원 수가 한 2천명 남짓 안된다고 하네요. 예전 같은 경우에는 프로 골프 테스트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입회하기가 쉽지가 않았는데 요즘 같는 경우는 조건이 조금 완화되었다고 해요.”옥천 출신 KPGA 투어프로는 이규윤씨가 최초이자 유일한 존재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KPGA 투어프로로 발탁된 이규윤씨는 도시로 나가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골프가 대중화되어 있지 않았을 당시에는 시합이 요즘처럼 많지가 않았지만 말이다. 생활 여건이 안되니까 팀에 소속되지는 못하고 자신이 연습하게 된 골프장에서 알바를 하며 돈을 벌면서 선수 생활을 했다. 2부 투어에서 공동 5.6위권을 달성했고, 공식 정규 투어에서는 30~40위권에 달성한 기록이 있다. 공식 정규대회에서는 우승한 기록이 없지만, 전국 프로들끼리 하는 스크린골프 대회 우승기록이 몇 회 있다. 2017년 대전골프존에서 열린 ‘2016-17시즌 삼성증권 mPOP GTOUR 챔피언십 경기에서 61타를 쳐 11언더파가 나온 것이 그의 최고기록이다.■ 귀족 스포츠? 잘못된 선입견골프를 처음 시작하게 되었던 당시 이규윤 씨는 집안 형편이 그리 좋지 못했다. 골프장에서 일해 돈을 버는 것과 동시에 그곳에서 골프도 같이 배우게 됐다. 그렇게 계속 옥천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다가 점점 재미가 붙게 되고 골프를 배우기 위해 사촌 매형이 운영하던 용인에 있는 골프장부터 시작하여 여주, 대전 등 많은 골프장을 돌아다녔고 마찬가지로 생활비, 교육비 등을 벌기 위해 여러 골프장에서 일하면서 같이 골프를 치게 되었다. 그렇게 세미프로 이후에는 쭉 대전에서 선수 생활을 해왔다.“골프의 장점은 친분이라고 생각해요. 남녀노소 관계없이 어울려 할 수 있는 유일한 스포츠예요. 아직도 골프라고 하면 고급 운동이라고들 하고 부자들이 하는 스포츠라는 이미지가 어느 정도 남아있긴 해요. 그래도 요새는 직장인들도 많이 와서 치고 젊은 층들도 와서 쳐요. 골프장 와서 주 4회씩 하면 한 달에 25만원 정도 들고 장비도 그렇게 비싼 편이 아니에요. 가격이 딱 적당한 편입니다.”이규윤씨는 2002년도부터 부인이 거주하고 있는 청주로 거주지를 옮겨 현재는 은퇴 후 이글골프연습장이라는 스크린 골프 아카데미 사업을 하고 있다. ‘귀족 스포츠’라는 골프에 대한 선입견은 많이 줄고 있는 추세지만 여전히 전 연령대로 대중화되어있는 상태는 아니다. 아직 젊은 층보다는 연령대가 높은 사람들이 주로 하고 있는데 이규윤씨는 스크린 골프 아카데미를 통해 젊은 인재들을 육성하면서 ‘고령층스포츠’라는 선입견을 바꾸기 위해 노력 중이다. 프로 생활을 시작한 이후 이규윤씨는 바쁜 스케줄로 인해 명절 이외에는 고향인 옥천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그랬던 그가 다시 골프생활의 시발점이 되어준 옥천골프랜드 연습장에 돌아와 고향에서의 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학창시절 그는 오로지 육상에만 집념했던 터라 고향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다고 한다. 50대 초반 다시 들른 고향길이 예사롭지 않다. 직계가족은 이제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골프를 처음으로 시작한 옥천에 다시 온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고 했다. 이규윤씨는 앞으로 고향 사람들이 골프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골프를 여유있게 즐겼으면 한다고. 아울러 옥천에서 프로 선수들도 많이 배출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이규윤 프로골퍼가 삼성증권배에서 수상한 모습. 

인물일반 | 이종은 인턴기자 | 2021-06-18 14:12

사진제공: 월간 옥이네무언가 단단히 홀린 게 분명했다. 읍내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학교 끝나기 무섭게 매일 면에 사는 할아버지를 찾아온다는 것이. 더구나 힘든 농사일을 매우 즐겁게 거든다는 것은 쉬이 떠올릴 수 없었다. ‘정말?’이란 반문이 조건반사적으로 튀어 나왔다. 한창 친구랑 스마트폰으로 게임 하고, 유튜브 시청에 목맬 나이인데 그는 어김없이 농사일을 하러 찾아왔다.할아버지와 끈끈한 애착 관계가 있는 게 분명했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농사일 자체가 그에게 분명한 몰입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특히 논에서 이앙기를 직접 몰고, 소형 굴착기로 밭을 개간하는 일이 그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온 듯하다. 할아버지의 논밭에 이끌린 열한 살 김대성 학생, 요즘 정말 보기 힘든 자발적인 ‘소년 농부’의 탄생이었다. 농부를 꿈꾸는 그는 ‘흙의 감촉과 자연이 주는 풍광’을 벌써 알아버렸다. 할아버지가 어디 있는지도 귀신같이 찾는다. 할아버지의 흔적, 발자국, 농기계가 남긴 바퀴 흔적을 마치 셜록 홈즈처럼 쫓아서 어디 숨어도 꽁꽁 찾아낼 태세였다. 아무리 꼭대기 논밭에 숨어도 기가 막히게 찾아냈다. 조그만 오솔길을 따라 두발자전거의 페달을 굴려 바람을 가르며 할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그의 모습은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보다 할아버지가 좋다는 김대성 학생(11), 이앙기가 미처 못다 한 모내기는 손 모내기로 하라니까 할아버지도 같이하자고 투덜거리면서 곧잘 하는 그의 모습에, 50년 세월을 넘는 할아버지와의 찐한 우정과 연대가 느껴졌다. 흙이 군데군데 묻어있는 영락없는 농투성이 신발에 농부가 되고 싶다는 진심이 와닿았다.더 다양한 농사일에 도전하고 싶고, 더 많은 작물을 심어보고 싶다는 그의 말에 앞으로의 삶이 더 궁금해진다. 벼농사를 직접 짓는 만큼, 밥에 대한 사랑도 각별했다. 다이어트 열풍을 넘어 상식으로 자리 잡은 요즘, ‘저탄고지’가 모두가 숙지해야 할 사자성어로 자리 잡은 가운데 그의 고봉밥 사랑은 어찌나 반가운 것이었던지. 월간옥이네 소혜미 기자가 무려 3~4시간이나 기다려 찍었던 사진, 이앙기 위에 올라앉은 귀여운 꼬꼬마 4학년 그 아이를 단숨에 만나보고 싶은 이유였다. 할아버지와 주고받는 대화는 정겹기 그지없었으며 도농리 황촌을 배경으로 한 산과 논밭, 그리고 오솔길은 장대한 산수화 같았다. 사람 한 명 지나가지 않은 그곳에서 태양은 작열하고 있었고, 논은 물을 그득 담아 아래 뿌리를 식히며 광합성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더블캡 트럭 앞에 장화 하나를 툭 던져놓자, 신발을 벗고 신기 시작했다. 손모내기는 처음이라는 데 익숙하게 빈 곳에 툭툭 꽂기 시작했다.“네가 이앙기로 가지고 다 안 심어서 손으로 하는 기여.”, “아니야!”. 한가롭고 조용한 안남면 도농리 황촌 논두렁, 조종수(59) 할아버지가 손자를 약 올리는 소리가 들린다. 대성이가 이앙기로 모심은 논이기 때문이다. 작년 할아버지께 조작 방법을 배운 뒤 계속 이앙기를 활용하다가 손으로 직접 심는 건 처음이다. 이앙기로 심기 어려운 구석은 사람이 논에 들어가서 직접 심어야 한다. 대성이는 가져온 장화로 갈아신고, “할아버지도 장화 신고 논에 같이 들어가자!”라고 재촉했다.아홉 살 때부터 농사일을 돕고 농기계를 다룬 열한 살 소년 농부. 기계를 언제부터 만졌냐는 물음에 삼양초등학교 4학년 김대성 학생은, “언제부터 만졌지?”라고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조종수씨는 “굴착기는 한 2~3년 됐고, 이앙기는 작년부터 했어요. 애가 이앙기로 직접 모를 심어요. 굴착기는 조그만 거라서 면허가 필요 없어요.”라고 덧붙였다. 이앙기를 논에서 모는 건 위험하다. 논둑이 높고, 조작 미숙으로 논 끝에서 멈추지 못해 사고가 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성이는 한 번 알려주면 뭐든 잘한다. 대성이가 소야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서 이앙기를 몰고 오면, 할아버지가 모를 심는 식으로 농사일을 돕는다. 대성이는 할아버지랑 다니는 게 재밌다. 힘든 것도 있지만, 그냥 할아버지랑 하는 일이라 좋다. 농사일이 항상 재밌고 쉬운 것은 아니다. 굴착기를 몰 때 덥기도 하고, 고구마나 감자 캐는 것도 힘든 일이다. 할아버지는 “이앙기 몰고 가다 모가 떨어지면 기계다가 다시 넣고 하는 게 대근하디야. 혼자 움직이니까 모도 혼자 넣어야 하잖아. 근데도 할아버지랑 하니까 좋디야”라며, “학교 끝나면 바로 논밭에 와요. 엄마한테 빨리 여기로 데려다 달라고 난리를 피워. 며느리가 고생이 많지”라고 말했다. 대성이의 이동은 어머니가 책임지고 있다. 삼양초등학교서 여기까지 20km 거리다. 어머니는 대성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다시 도농리에 와서 농사짓는다. 학교가 끝나면 할아버지의 논밭으로 데려오고. 저녁까지 같이 농사지은 뒤 대성이와 함께 읍에 있는 집으로 간다. 조종수 씨는 대성이가 안남초등학교를 다니면 되지 않냐는 물음에 “어차피 중학교는 읍으로 가야 하잖아요? 그런데 안남에서 다니면 중학교 올라갈 때 아는 애가 없잖아. 학교가 막 폐교된다는 얘기도 있고. 적응을 못 할까 봐. 며느리도 고생 많이 하지만 시골이 좋디야”라고 답했다. 이렇게 대성이가 소야에 오면, 할아버지가 외진 데서 일해도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 항상 찾아낸다. 할아버지가 낸 바퀴 자국을 보고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것저것 다 배웠다. 관리기로 피복도 하고, 트랙터도 할 줄 안다, 콤바인은 잘 뒤집혀서 위험하지만, 올해 가을에 가르칠까 생각하고 있다. 대성이는 바로 콤바인은 몰기 싫다고 답한다. 콤바인이나 트랙터는 클러치에 발이 잘 안 닿아 껄끄럽기 때문이다. 키가 더 큰 뒤 할아버지가 가르쳐주면 배울 생각이 있다고 했다.어린 시절 농기계를 집에서 다 직접 고치는 할아버지를 보고, 대성이는 알게 모르게 옆에 와서 연장을 만지고 손에 기름을 묻히곤 했다. 계속 그를 따라다니다가 “할아버지 내가 한번 해 볼까?”라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한번 해보라고 말한 게 지금에 이른 것이다. “관리기로 피복 하는 건 뒤로 걸으면서 해야 하니까 되게 위험해요. 애 엄마도 위험하다고 그래요. 근데 애는 하고 싶어서 계속하고 있어요.”대성이는 농부가 꿈이다. 좋아하는 밥을 위해서라도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이다. 조종수 씨는 “한 해 동안 먹을 쌀을 40kg짜리 몇십 포대 저장해요. 그럴 때 애가 “할아버지! 내가 밥 많이 먹으니까 더 쌓자.” 이래요.”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대성이는 여기 살면서 이것저것 다 농사짓고 싶고, 친구들을 여기에 초대하고 싶다. 친구네 엄마는 허락하는데, 엄마가 허락하지 않는단다. 할아버지가 ‘친구들은 여기서 뭐 하려고? 논둑에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하지.’라고 약 올리면, 대성이는 “친구들 일 시키면 되죠! 걔들이 모판 주면 되지”라고 말한다.할아버지는 “친구들이 모판을 어떻게 주냐! 힘들어서 못 나르지”라고 말하고, 대성이는 조용히 장화를 신고 물에 잠긴 논바닥을 밟는다. 다닥다닥 붙은 모 뭉치에서 한 손으로 잡을 정도만 적당히 떼어, 논바닥에 박아 심는다. 처음 하는 데도 능숙한 모습이다. 장난스레 아빠가 좋냐, 할아버지가 좋냐고 물었다. “아빠보다 할아버지가 더 좋아”, “아빠보다 더 좋으면 어떡해, 인마!”사진제공: 월간 옥이네사진제공: 월간 옥이네 

인물일반 | 김재석 인턴기자 | 2021-06-17 13:24

청성면 장연리에서 언덕 골짜기를 거쳐 저수지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울창한 수풀 사이로 귀재 마을이 있다.서울에서의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 산청에서의 귀농생활을 거쳐 청성 장연리에 자리 잡은 지 3 년차. 잔뜩 땀 흘리며 한창 푸르게 자라나고 있는 작물들과 흙을 만지고 음미하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는 주정화(59) 변종만(66)씨를 만났다.“농사일을 더 일찍 알았더라면 직장 일은 안 했을 겁니다” 사실 두 부부는 농사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 변종만씨는 기업은행 지점장으로, 주정화씨는 서울신용보증재단에서 근무했었다. 안정적인 생활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울에서의 삶은 치열하고 고단했다. 그러다 평소 책을 좋아하던 변종만씨가 장일순 선생과 윤구병 선생의 책을 읽고 농사에 푹 빠진 것이 귀농생활의 시발점이었다. 그리고 귀농을 통해 농사에 매력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몸을 움직여 내가 먹는 것을 내 손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자존감이 높아졌다는 변종만씨. 이러한 농사의 매력에 빠진 건 주정화씨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지만 서툴어도 다양한 작물을 가꾸다 보니 뿌리내리고 있는 귀재 마을도 삶의 터전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저수지 너머 한적하고 안락한 마을이고, 집 주변으로 물줄기가 흐르기 때문이다. 주정화씨와 변종만씨는 더욱 빠져들었다.부부는 귀농하기 전 귀농운동 본부에서 주관하는 생태학교와 귀농학교에서 약 1년간 교육을 받으며 점차 농사 의미에 대해 이해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두 교육과정에서 중요시한 것은 제초제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부부도 자연과 함께 하는 친환경농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초제와 농약의 사용과 땅에 비닐을 치지 않는 것은 기본. 풀도 시원하게 뽑지 않는다. 풀과 함께 살고 풀이 자원이라는 변종만씨의 굳센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정화씨도 풀과 함께하는 삶이 쉽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풀은 자원입니다. 풀뿌리가 땅에 박혀야 모든 영양분, 산소 공급, 미생물 공급이 이루어지니까요. 다만, 길게 자란 풀을 잘라 퇴비로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3년 정도하다 보니 실제로 땅이 살고 지렁이와 땅강아지가 수두룩합니다. 땅의 냄새도 달라졌습니다. 흙을 움켜쥐고 씹어먹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게 합니다.”재배 예정인 작물들까지 포함 하면, 두 부부가 지배하고 있는 작물은 60가지가 넘는다. 물론 전부 친환경 작물이다. 약 1천 평의 복조 대추와 400평가량의 앉은뱅이 밀, 집 뒤편에 있는 2평가량의 토종 박하와 야생 박하, 그 외에 다른 작물들도 700평가량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두 부부는 귀농 귀촌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전지, 순지르기 등에 관련된 유튜브(유튜브 ‘주주농장’)를 운영하고 있다. 주정화씨는 지역 활동에도 몸담고 있다. 청산 복지관에서 발달 장애 아동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3년째 참여하고 있다. 발달 장애 아동들이 치유를 얻고 언젠가 스스로 자립을 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1주일에 한 번은 꼭 봉사활동에 참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다. 이러한 와중에 로컬푸드 직매장이 두 부부와 같은 소농들이 판매를 할 수 있는 판로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고. 더불어 유기농 인증을 위한 비용도 군에서 전액 지원하고 있어 상당히 만족스럽다는 두 부부. 그리고 두 부부같은 소농에게 로컬푸드직매장같은 판로가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친환경농업은 두 부부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소농의 삶과 자연환경, 생명의 가치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적 삶과 정반대인 새 시각과 대안. 그것이 바로 친환경농업의 가치라고 힘을 주어 이야기했다. “소농의 어려움은 자급입니다. 자급이라는 것은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하고 교육을 받으며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농으로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자녀들을 교육까지 시킬 수 있는 단계까지가 자급이라고 할 수 있겠죠. 물론 어려운 과제입니다.”두 부부가 농사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자급자족과 소농으로써의 삶이다. 소농의 삶이 소중한 미래의 표상이 되고, 젊은 사람들에게도 비전이 되면 좋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작은 농사를 짓더라도 충분히 자급이 가능한 정책이 펼쳐지기를 희망했다. 기본소득과 소농 직불금 등 젊은 사람들이 농업에 대해 긍정적이고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여러 정책들이 필요하다고 두 부부는 이야기했다.여러 작물들을 가꾸며 내 몸을 움직이는 삶, 그것이 농사를 짓는 의미라고 부부는 이야기한다. 일도 시간에 쫓겨서 급하게 하지 않는다. 많이 쉬어가며 한다. 어떤 날에는 일부러 게으르게 일 하기도 한다. 목표 달성보다도 자연과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이 농사를 짓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식물이 싹을 틔고 올라올 때의 감동, 파 뿌리에서 나는 향, 이렇게 소소한 일상들을 경험하는 게 농사의 의미라고 변종만씨는 말했다.“농사를 지으면서 생각합니다. 기쁨과 평화는 훌륭한 말과 생각에서 오기보다는, 함께 땀 흘리고 부대끼는 데서 찾아온다고요. 파 뿌리에 코를 박고 얻을 수 있는 느낌, 흙 일을 하다가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을 느낄 때 그건 도저히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죠. 앞으로도 자연과 함께 하는 소농의 삶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인물일반 | 김기연 기자 | 2021-06-16 17:18

 “3~5월에 바빴지 지금은 한가해요” 동이면 세산리에서 캠벨포도밭을 운영하는 임근재(75), 정난순(71) 부부는 아침 6시부터 나와 하우스를 지켰지만 손에 잡히는 일거리는 딱히 없는 모양이었다. 바닥 위로 듬성듬성 튀어 올라온 풀을 뽑고, 포도 알이 실팍하게 자랄 수 있도록 남은 잔알들을 빼내고 나서 임근재씨는 “오늘 작업은 이만하면 됐다”며 간이식 휴게 공간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3~5월에 흘렸던 땀방울이 결실로 맺어지는 수확기 7월까지 알들이 보기 좋게 잘 크는지 지켜만 볼 수밖에 없는 상황. 임근재씨는 “이제 우리 손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라며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놨다.  동이면 세산리에서 캠벨포도밭을 운영하는 임근재(75), 정난순(71)씨.■ ‘서울 살이’만 53년... 이만하면 내려올 때 됐다 싶어  지금 임근재씨는 귀농귀촌인연합회 옥천읍 회장을 맡고 있다. 동이면에서 태어나고 자란 임근재씨는 젊은 시절 일거리를 찾아 서울로 떠났다가 2015년에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배우자인 정난순씨는 전남 무안군에서 태어나 친척에게 한복 제작 기술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가 남편을 따라 옥천에 왔다. 둘은 1972년 서울에서 중매로 만나 결혼을 했다. 악착같이 살았다. 정난순씨의 말 그대로 맨손으로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안 쓰고 안 먹어야 했다. 처음 둘은 삼립빵 대리점을 운영하다 10명이 넘는 인력을 감당할 여력이 안 되자 문 닫고 곧장 신발 장사에 뛰어들었다. 용산구 재래시장인 용문시장에 상가를 하나 얻어 장사를 시작했는데 신발 장사도 생계에 큰 보탬이 안 됐던 모양이다. 날이 갈수록 쑥쑥 커가는 아들 둘까지 옆에 있다 보니 보다 큰돈을 만져야 했다. 신발 장사를 접고 우연히 그 자리에 차린 ‘닭집’이 인생의 변곡점이 될 줄 둘은 몰랐다. “우린 IMF도 피해갔지요” 임근재씨가 말했다. IMF사태 직후 주변 상인들이 길거리로 내몰릴 때 시장 바닥에서 건사했던 집은 오로지 이 부부의 닭집이었다. 임근재씨는 생닭을 음식점에 납품하는 배달을, 정난순씨는 상가 앞에 마련된 가마솥에서 통닭을 튀기는 일을 했다. 그 때 바짝 모은 돈으로 두 아들의 신혼집을 마련해주었고, 대방동에 부부가 머물 집도 구했다. 부부가 옥천으로 내려온 지금, 그 닭집은 둘 째 아들이 넘겨받아 운영하고 있다. ‘이룰 것 다 이루고 내려왔네요?’라는 질문에 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임근재(75)씨가 자신의 캠벨포도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지난했던 ‘서울 살이’에 상한 몸과 마음, 치유 방법 찾고 싶어‘서울 살이’는 가히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증표는 몸에 상처로 새겨졌다. 정난순씨는 옥천으로 내려오기 직전인 2014년 간암 판정을 받고 수술대에 올랐다. 오랫동안 서서 장사를 하다 보니 하지정맥류도 생겼다. 이 부부가 서울을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다행히 지난해 완치 판정을 받았다. 정난순씨는 “스트레스성이었대요. 서울에서 장사를 하면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만나다보니 힘들었나 봐요”라고 밝혔다.   임근재씨에게도 서울은 경제적인 부를 안겨준 곳이지만, 마냥 고맙기만 한 곳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 서울의 북적북적한 지하철이나 버스, 도로 상황을 떠올리면 지금도 숨이 턱턱 막혀요. 그런데 옥천은 도로가 잘 뚫려있어서 마음이 얼마나 편해졌는지…”라고 귀농 생활에 십분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젊은 날부터 밥벌이에만 매달리느라 이제야 맞이하게 된 삶의 여유를 이곳 옥천에서 만끽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귀농을 하고 나서는 봄, 가을에 여행도 다니기 시작했다. 국내 여행은 물론 태국, 중국, 캄보디아, 베트남, 이탈리아까지. 특히 임재근씨는 “여행을 다니면서 그 나라, 지역의 생활습관들을 유심히 지켜봐요. 맛이 가지각색인 음식들을 즐기는 것도 좋아하고요”라며 여행에 푹 빠지게 된 배경들을 늘어놓았다. 물론 여행길은 항상 정난순씨와 함께 한다. 정난순씨는 “남편이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가끔 피곤할 때가 있지만, 이제야 조금씩 다니기 시작한 여행이 좋긴 하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임근재(75)씨가 하우스 한 편에 걸려있는 영농일지를 작성하고 있다.■ 텃밭 만들려다 1천평 밭으로... 만만치 않은 귀농 생활사실 둘은 옥천으로 내려오게 되면 자그마한 텃밭 정도만 가꾸어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간 억척스럽게도 살아온 몸의 관성이 작용한 탓이었을까. 막상 내려와서 보니 내가 먹을 만치만 키우기엔 성에 안찼던 모양이다. 부부는 400평의 캠벨포도밭 외에도 벼, 옥수수, 고추, 상추, 호랑이콩 등의 작물을 심은 600평의 밭도 가꾸고 있다. 임근재(75)씨가 하우스에서 재배하는 호랑이콩을 선보이고 있다.다작은 아니지만 공들여 키우기 딱 좋았다. 캠벨포도 수확기를 마냥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지금처럼 수입이 없을 때를 대비해 여러 농작물들을 조금씩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임근재씨는 “로컬푸드직매장이 참 고맙지. 우리 같이 농작물을 조금씩 키우는 사람들도 받아주니까”라고 말했다. 한편 옆에 있던 정난순씨는 “서울에서 장사하는 것보다 농사일이 훨씬 힘들게 느껴져요”라며 결코 만만치 않았던 귀농 생활에 대한 소회를 드러냈다.하지만 앞으로 부부는 샤인머스켓에도 손을 대볼 예정이다. 부부가 키워온 캠벨포도나무 아래에는 샤인머스켓 새 순이 올라오고 있었다. 6년간 쌓은 포도 재배 경력으로 올해부터 겸작을 시작해 내년엔 샤인머스켓을 수확해보려 한다. 임근재씨는 “샤인머스켓이 캠벨포도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이에요”라면서도 “그런데 한 번 시도해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많은 작물을 키우고 있는 실정에 한편으로는 걱정이 뒤따를 수 있겠지만, 하우스 한 편에 걸려있는 부부의 빼곡한 영농일지를 보면 못할 일만은 또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인물일반 | 이 훈 인턴기자 | 2021-06-16 16:41

고향 마을에 발품을 팔고 계신 김용주 선생님. 일흔이 넘은 김 선생님의 새벽을 깨우는 건 텃밭의 갈증 난 고추들 숨소리다. 6시에 아침을 열고 대전으로 다시 나오신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시며 향토사에 깊은 관심을 두고 역사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 있는 학교 선생님들에게 숨겨진 역사를 강의하고 계신다. 고향마을에 꿈을 심고 노년에 친구들과 같이 모여 옛이야기 하면서 살 집의 터를 개간하고 계신다. 그렇게 선생님의 장년은 하루하루 농익어간다. 단순한 소일거리가 아닌 결과를 내는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윤기 나는 노년을 준비하고 계신 선생님은 굵직한 농협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주인공이셨다. ■ 유년의 결핍이 성장의 발판이 되다.눈 내리는 밤이렇게 흰 눈이펑펑 쏟아지는 밤이면등불 밑의 나는 또 하나 다른로댕의 사람이 되어 버린다.눈 덮인 아득한 마을이여!포근한 숲 속을 나는 예쁜 산새들이여!산토끼 잘 쫓는 내 동무들이여!모두 잘들 있었느냐?이 밤도 또눈 내리는 창가에 나만 남겨두고그리운 내 생각은 훨훨 날아정든 내 고향집에 가 버렸다.  강소천님의 ‘눈 내리는 밤’이다. 요즘 부쩍 그 시가 내 가슴에 폭 안겼다. 고향마을의 정경이, 유리처럼 들여다보이는 그 시가 지금의 나를 크게 위로한다. 나이 들고 있다는 반증이다.시골아이 용주는 여름이면 개심저수지 수로에서 친구들과 자맥질하느라 땅거미 내려앉는 줄도 모르기 십상이었다. 겨울이면 저수지에 키가 크고 뻣뻣한, 말이라고 부르는 수초를 한웅큼씩 뜯어 어머니에게 갖다 드렸다. 어린 시절 엄니의 손은 마술사의 손과 다름없었다. 뻣뻣한 수초가 엄니 손안에서 참기름 한 방울에 식초 한 숟가락으로 조물조물 버무려지면 어느새 꼴까닥 숨이 죽었다. 무를 채 썰어 곁들이면 폼 나는 반찬이 밥상에 올려졌다. 뾰족한 먹거리가 없던 우리 5남매는 젓가락 들락거리느라 분주했다. 6학년 때 여느 개구쟁이들처럼 재미삼아 불장난하다 불씨가 산불로 이어져 지정리 우봉이씨 선산으로 옮겨 붙어 온 마을이 발칵 뒤집어 졌다. 겨우 불을 껐지만 저녁 내내 흠씬 두들겨 맞았다. 장난으로 시작한 불씨가 화마로 둔갑해서 번져나갈 때는 숨이 멎을 듯이 두려웠다. 뒷일을 생각하면 화마보다 두려운 건 아버님의 회초리였다. 봄에 찔레순 대가 촉촉한 이슬 머금고 있으면 우리는 뱀이 도사리고 있는 걸 바로 알아차리고 냅다 도망을 쳤다. 습기가 있다는 건 뱀이 지나는 자리라는 것을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도 자연의 섭리로 알아갔다. 손길이 닿고 발길이 머무는 곳에서 자연의 이치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시골아이들에게 축복 같은 일이었다. 유년의 기억은 그렇게 결핍 가운데서도 추억으로 남아 내가 어려운 여건 속 에서도 성장통을 호되게 앓지 않고 발판이 되었다. 그래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으로 매일 고향마을에서 발품을 팔고 있다. 나는 원고향이 이원이다. 개심저수지 뒤 동쪽으로 가면 고향 마을 수묵리가 있다. 버스 종점이라 지나는 동네가 아닌 머무는 동네가 되었다. 마음까지 머무는 마을이다. 그 옛날에는 먹뱅이라고 불렀고 근방에 숯막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숯을 구워서 생계를 잇던 곳 까막동네, 마을이름만으로도 과거를 짐작할 수 있다. 사연은 얼마나 많을지...역사적 유적이 많다. 안타깝게 기록된 건 없지만 그래서 향토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책임이 크다. 내가 향토사에 관심 갖는 이유기도 하다.농협 연수원 근무농협 간부시절■ 인생의 무대, 조연에서 주연으로 올라서다 이원에서 중학교를 졸업하며 따뜻한 아랫목에서 빠져나왔다. 부모님 슬하를 벗어나 내 인생을 개척하는 시기였다. 충남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성적으로 앞머리에 이름을 올렸던 나는 연세대학교 상대를 넣었다가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담임선생님도 내 성적이면 가능하다고 추천하셨는데 아쉬운 결과를 낳아서 선생님도 나도 못내 속상한 마음이 빨리 거둬지지 않았다. 나는 심기일전하여 외대 스페인어과에 합격을 했다. 내키지 않은 출발이었다. 고향 문중에서 일류대에 가면 장학금을 보태주지만, 그 여건이 안 돼서 벼 한가마니가 4천원 할 때 50가마니 값을 등록금으로 썼다. 50년 전 시골에서 서울로 학교를 보낸다는 건 지금 외국 유학과 맞먹는 부담이었다. 아버지는 가정경제나 살림에 큰 관심이 없으셔서, 어머니께서 우리 5남매를 키우고 집안일이며 농사일을 도맡아 하셨다. 어머니 이야기는 책으로 써도 열권도 더 나올법한 구구절절 애환이 서렸다. 그런 어머니에게 내 욕심만 차리는 학교공부를 계속 하자니, 죄스러운 마음이 많았다. 50년 전의 스페인어과는 장래도 불투명한 전공이라 학업을 이어가는 것을 포기하려고 했던 시점에 최  선생님이 연락을 주셨다.  최 선생님은 당신이 나에게 연세대학을 추천하여 낙방의 고배를 마신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크셔서 나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와서 지체 없이 연락을 주셨다. 충남고등학교 최 선생님이 “용주야 내년에 농협대학이 개교를 한다. 더 한번 지원해볼래? 그 학교를 나오면 농협 간부로 가는 지름길이다.” 학비 면제는 기본이고 농협에서 임원까지 미래가 보장되는 농협대학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연세대학교에 낙방한 것이 나에게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다. 물론 전교 성적이 10% 이내에 들어야 되는 통과의례가 있었지만 성적이 좋았던 나는 농협대학 1기로 당당히 합격을 했다. 학비 면제 혜택에 한 달에 밥값 4천원만 지불하고 공부에 전념하면 장래를 보장받았다. 당시 충남고등학교 480명 그중 전교 40등 안에 들어야 농협대학에 합격을 할 수 있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때 지역 거점에서 활동하는 간부가 되는 전문학교였다.■ 굵직한 농협사에 이름을 얹다어려운 집안의 수재들에게는 최고의 기회였다. 1970년 농협대학 1기로 입학을 했다.당시 세무대, 체신대, 철도대 등 관비로 공부하는 전문학교들에 이어 농협대학이 개교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라 농촌을 일으키는 사명을 갖고 거점맨을 만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취지였다. 입학해보니 서울의 명문고인 서울고, 경복고, 광주일고 출신들도 있었다. 농협대 1기생들은 다들 농협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2년 동안 기숙사에서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전문학교 시스템의 특수학교였다. 농협의 경영과 정보, 작물학, 축산학, 농업을 가르친다. 졸업할 때 주판 3급까지 마무리하고 우리는 농촌 경제를 살리는 사명을 안고 고향으로 보내졌다.졸업 후 옥천으로 내려와 청산 지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하숙을 하면서 사회초년생으로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하숙집 마당에서 낯선 처자를 만나게 되었다. 청산 강가로 산보를 나가면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스쳐가면서 인연의 고리를 맺었다. 그 처자는 바로 하숙집 딸이었다.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던 딸은 고향집에 내려왔다가 농협 다니는 청년을 만나 결혼이라는 운명의 카테고리에 들어왔다. 아내와 나는 그렇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하숙집 딸과 하숙생으로 결혼행진곡을 울렸다. 그 때부터 내 인생은 고속기관차처럼 달리게 되었다.1973년 10월에 서울 중앙본부로 발령이 났다. 하늘의 별 따기였던 그 자리를 옥천 농협의 ‘김서기’가 거머쥐었다. 실력을 인정받았다. 기획, 판매, 60만 군부대에 군납품 관리 등의 업무를 맡았다. 당시 울진에서 북한 공비가 출몰해서 명주까지 추격전을 벌이느라 군 병력 이동에 맞춰 부식 등 물자를 공급하는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노른자위 자리였다. 일머리가 좋고 성실했던 나는 농협에서 인정받으면서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그 즈음 날아든 군 입대 영장은 갑자기 인생이 정지된 시간처럼 안타까웠지만 내 능력을 인정받은 후라 나는 농협중앙회로 파견근무를 하며 군복무를 하게 되었다.  파견 가서 아내는 연년생으로 3남매를 출산하며 육아로 너무 힘든 날들을 보냈다.  나도 정신없이 바쁜 일정의 연속이라 아내 육아를 도울 수가 없어서 아내는 내조하랴 육아하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때였다. 지금의 나는 순전히 아내 덕분이다.  농협 책임자 고시에 합격하고 28세 최연소 상무가 되어 농협에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영동농협에 내려왔는데 새파랗게 젊은 내가 나이 드신 선배님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책임감도 컸지만 죄송한 마음도 같이 맞물렸다. 장날이면 어르신들이 나를 원숭이처럼 들여다보면서 젊은 녀석이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구경난 듯이 보고 계셨다. 도지부장 할 놈이라면서 눈여겨 봐주셨다. 청춘을 불사르고 역량을 다 바쳐 치열한 농협의 시간을 보냈다. 2007년 농협중앙회 충남 지역본부 부본부장을 퇴임하고 농협에서의 34년을 마감했다.은퇴 후 소일을 걱정하지 않고 향토사를 연구하면서 뿌리는 내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실천하면서 내가 노년을 보낼 땅을 두텁게 다지고 있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부쩍 서정주님의 시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나이든 내 마음의 현주소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고향에서 다시 유년의 뜰을 개간해보련다.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은 온기로 가득차고 흙냄새는 어머니의 살 냄새처럼 살갑게 다가온다. 고향 길에 발품을 파는 매일 매일은 노년 마중을 준비하는 나에게 다시 찾아 온 설렘이다.

인물일반 | 김경희 시민기자 | 2021-06-11 10:51

 104살의 어머니, 그 어머니와 봄날이 절정일 때 이별하신 손일등 어르신.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 어머니와의 추억이 더 깊고 애틋해지셨다. 여한 없이 모셨다고 위로하지만, 더 잘해드리지 못한 마음의 빚을 탕감받기에는 아쉬움이 켜켜이 쌓여 먼 하늘을 올려다보셨다. 물빛 담은 눈동자 한가운데 분명 어머니께서 다소곳이 앉아 계실 것이다. 어머니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질세라 한참이나 먼 하늘을 올려다보신다.여든이 넘은 남자, 세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난 무쇠 같은 남자도 ‘어머니’라는 이름 앞에서는 그저 작은 사내아이가 된다. 어머니의 치마폭이 아닌 어머니 가슴에서 뛰어놀고 싶은 그 마음이 사정없이 파고들 때는 눈물을 참을 수 없다.어머니 먼 길 떠난 날 당신이 걸어온 길을 다시 걸어 보았다는 어르신. 시시때때로 만났던 그 사람들, 그 일들을 회억하며 마음을 진정시켜보신다.■ 그리움이 화석이 된 그 사람들아내를 보내고 어머니를 7년간 모셨다. 아내를 보낸 허망한 가슴을 달래느라 어머니에게 더 깊은 마음을 드렸다. 3년 5개월 동안 아내 없는 빈자리를 지키며 어머니를 돌보았다.남자 손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한계가 있어서 나는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실 수밖에 없었다. 기저귀를 때때로 갈아드리는 것도, 나의 무딘 손마디가 해내기에는 어줍기 시작했고 어머니가 거동이라도 할라치면 넘어지기 일쑤였다. 결국, 한시도 눈을 떼면 안 되는 어린아이가 된 어머니를 나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그날을 만났다. 이미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나의 나이든 몸과 기력을 청춘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셨다. 몸은 요양원에 모셨지만 발길은 내내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한쪽 팔로 어머니를 감아 안을 수 있을 만큼 어머니는 여위고 사그라들었다. 하루하루 어머니의 숨소리가 낮아지면서 어머니는 그렇게 머나먼 길을 떠나셨다.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맛보고 다시 봄날을 맞은 그 햇살이 따사로운 날에 멀리멀리 떠나셨다.그리운 이들을 떠나보내는 날에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빛이 아주 멀다. 눈동자에 가득 들어찬 그 이들을 머금고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아쉬운 마음자리에 모시고 아내는 죄스러운 마음자리에 묻었다. 4남매 중 먼저 간 우리 아들은 애통한 자리에 묻지도 못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날처럼 가혹한 날은 없다. 어느 누구도 그 시간을 피해갈 수 없다면 우리 인생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떠난 자리를 지키면서 지나온 그 길을 한번 돌아본다. 치열했던 젊은 날, 뜨겁게 사랑했던 청춘, 주름이 나이테가 되어버린 노인의 얼굴이지만 아직도 아이 같은 웃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청년기의 결핍, 인정으로 채우다면 단위에서 모든 단체에 가입해서 활동한 사람은 사실 드물다. 나는 그 흔치 않은 기록의 보유자다. 그만큼 열심히 살았고 가족을 위해, 마을을 위해 두 팔 걷어붙이는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1938년 1월29일 태어난 나는 6남매로 자랐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지만 장남 부채의식이 있었다. 내 것을 모르고 자라던 어린 시절, 우리 6남매는 가난했지만 서로 정을 부비면서 부족함을 채웠다. 일등이 이식이 일선이 일수 기한이 이한이 종말이 얼마 만에 불러보는 우리 형제들 이름인지.묘금리에서 청산중학교까지 30리를 걸어 다녔다. 새벽밥 먹고 책보를 둘러매고 학교에 가려면 2시간 넘는 시간을 걷고 또 걷는다. 하교 후 돌아오는 길도 걷고 또 걷는다. 저녁이면 지쳐서 돌아와 공부는 뒷전이다. 5시간을 왕복하는 거리, 돌도 씹어 먹을 때지만 배불리 밥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기진맥진할 수밖에 없다. 호롱불 아래서 공부하기도 어려웠지만 내려앉는 눈꺼풀을 이겨낼 장사가 없었다. 우리 마을에는 고속도로 개통 후 1년 만에 전기가 들어왔다, 내 나이 마흔이 되었을 때다.이장을 보던 친구와 같이 한전 심천 출장소에 가서 읍소를 하고 전기를 끌어들였다. 학창시절에는 전기 구경도 못 했지만 고속도로 개통 후에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곳곳에 전기가 필요하게 되었다. 시골마을들이 전기가 들어오면서 전기 들어오는 날은 온 마을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초등학교 졸업 후에 2년간은 집에서 농사일을 도왔다. 아버님이 월사금 낼 돈이 없어 중학교에 바로 갈수 없다고 하셔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어린 마음에 입술도 깨물어보고 애꿎은 물수제비도 떠보았다. 2년 후에 급우들보다 두 살 더 먹은 형님으로 중학생이 되었다. 그때는 우리보다 키가 한 뼘이나 큰 형님들도 학교에 다니고 아이 업은 누이도 학교에 다녔다. 제 때에 제 나이에 인생의 단계를 밟는다는 건 그래도 살만하다는 방증이었다.옥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 진학은 내 형편에 그림의 떡이라 포기하고 농사에 전념했다. 청성면 소서리 사는 송순애를 중매로 만나 신랑 각시가 되었다. 아내는 이름처럼 예쁘고 순했다. 피 끓던 청춘, 순애는 내 마음에 불을 지펴 나는 색시를 품에 안고 결혼이라는 인생의 다른 골목으로 들어섰다. 신혼의 단꿈에 젖을 시간도 없이 나는 군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내 혼자 조부모 시부모에 시동생들까지 거기에 농사도 손을 보태야 하고 21살의 여인네는 하루하루가 그저 고단하고 외롭고 힘들었다.키 크고 훤칠했던 나는 헌병으로 차출돼서 강원도 양구 화천에서 군복무를 하게 되었다. 21살의 젊디젊은 청춘에게 강원도 첩첩산중은 유배지나 다름없었다. 강원도 화천은 지금도 하루를 써야 도착하는 거리인데 60년 전 옥천에서 화천으로 가는 길은 태평양을 건너는 것처럼 멀고 먼 길이었다. 휴가 한 번 나오려면 꼬박 하루가 걸렸다.첫 휴가, 화천에서 군용트럭을 타고 우리는 어둠을 뚫고 춘천역에 내렸다. 날이 밝아오면 춘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용산역에 내린다. 이미 한나절이다. 용산역 출발 군용열차는 옥천을 지나 칠흑같이 어두운 그 밤에 영동역에 정차했다. 새벽에 출발한 나는 이미 깊은 어둠에 불빛도 찾아보기 힘든 영동역에 내려서 청성 묘금리까지 걷고 또 쉼 없이 걸었다.  3시간을 걷는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그저 한 발 한 발 내딛는다.강원도 화천에서 군기 바짝 들었지만 산속에서 서낭당을 지날 때는 뒷목이 쭈뼛하다. 산짐승의 포효소리도 간담이 서늘하지만 아내 만날 생각을 하면서 진정시킨다.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마을 어귀에 도착하면 저 멀리 작은 불빛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아내가 밝혀둔 호롱불이다. 깊은 밤, 아내를 한 번 안아보는 것도 꼬박 하루 걸린 그 고단한 여정의 황홀한 마무리였다. 나에게도 그런 청춘이 있었다니…. 이른 아침, 온 가족이 툇마루에 둘러 앉아 아침을 먹었다. 다들 재빨리 숟가락을 놓고 할머니가 먼저 “00야 00야 마실 다녀오자”며 마당 한가운데서 집에 있는 조카와 동생들을 불러냈다. 아버님과 어머니도 소를 몰고 밭으로 나가셨다. 아침부터 다들 바쁘다. 시골의 일상이기도 했지만 모처럼 휴가 나온 내가 아내와 단둘이 회포를 풀 시간을 어른들이 배려해주신 것이다. 못된 시어머니 같으면 둘이 있는 꼴을 못 볼 텐데 우리 어머니는 그렇게 단둘이 있는 시간을 일부러 마련해주셨다. 아내와 정을 나누는 그 꿀맛 같은 시간을 가슴에 품고 나는 이른 점심을 먹고 아내와 눈도 못 마주치고 다시 군대로 들어갔다. 등에 꽂힌 아내의 아쉬운 눈빛을 애써 외면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건실한 농사꾼으로, 마을의 위원장으로 허투루 살지 않았다제대 후에 아버지 농사를 도와 새로운 영농법도 개발해서 동네 사람들이 나를 보고 농사박사라고 불러주기도 했다. 도열병이 한창이던 때라 벼가 튼튼하게 자라는 수확방법이 절실하던 때다. 농사만 지어서는 아이들 월사금 낼 때 마다 전대를 뒤지고 또 뒤져야 했다.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우리 마을 근방에도 고속버스 정류장이 생기면서 사람들이 수시로 오고갔다. 아내가 구멍가게를 시작했다. 뻑뻑한 나무 미닫이문을 열고 닫는 구멍가게. 막걸리도 한 잔 마실 수 있고 요모조모 필요한 생필품들이 소소하게 구색을 갖췄다. 개인 차량이 없을 때라 대전 가서 물건을 뗀 후에 고속버스로 물건을 실어왔다. 1970년대는 고속도로 개통 후에 고속버스가 대중교통의 선진화를 이끌고 있었다. 당시 주름잡던 고속버스는 ‘그레이하운드’, ‘한진고속’ 등이었다. 고속버스가 묘금리에도 정차해서 가게 물건을 수월하게 날랐다. 그레이하운드는 미국에서 들어온 2층 버스로 화장실까지 갖춘 대단한 버스였다. 당시 고속버스 안내양은 지금 스튜어디스처럼 미모를 갖춘 여인들이었다. 낑낑거리며 물건을 들고 오면 기사님들이 손을 보태서 차 트렁크에 짐을 실어주기도 했다. 몸은 불편했지만 사람 냄새나던 그 시절을 우리가 그리워하고 있다. 제사만 지내도 동네사람 다 술 한잔씩 돌리던 그 시절이 좋았다고 말한다. 묘금리도 80호 정도 적지 않은 마을이었고 내가 다니던 청산중학교도 운동장에 아이들이 꽉 들어찼던 호시절이 있었다.  한창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때 시골 마을의 취락구조 주택개량 사업이 전국적으로 펼쳐지게 되었다. 나는 마을에서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집집마다 130만원가량 보조를 해주지만 실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돈들이 많이 들어가다 보니 추진위원장인 내가 할 일들이 많았다. 취락구조 사업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동네는 길을 내게 된다. 취락구조 사업을 추진하지 못했으면 우리는 한동안 좁은 소롯길을 다녀야했을 것이다. 마을 이장도 보면서 우리 묘금리가 잘 먹고 잘사는 방법을 실천하는 역할을 해냈다. 아직은 4시에 거뜬히 일어나고 있다. 그때부터 움직여 7시25분 첫차를 타고 복지관 노인 일자리 일터로 출근한다. 한창 수업을 많이 들을 때는 일본어 중국어 풍수지리학까지 배우고 싶은 것들을 죄다 배우기도 했다. 우리 마을에서 옥천 나오는 버스가 이런 저런 통로로 9개나 있다. 나이든 시골 노인이 무료하지 않게 살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서 좋은 시절을 잘 만났다는 생각이다. 혼자만 누려 아내에게 미안하지만 아내 몫까지 알토란 같이 살아야 한다. 훗날 아내를 만났을 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그날을 위해 나의 하루를 늙은이가 아닌 ‘어른’으로 채워가는 중이다.  

인물일반 | 김경희 시민기자  | 2021-05-28 11:20

김연분 어머니 1950~ 흑백사진 속의 청년과 새댁은 50년의 시간 속에서 이승과 저승으로 갈 길이 달라졌다. 만날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꿈에서 안 보이면 서운하고 보이면 걱정이다. 고속버스 안내양이던 시절 만나 연애결혼을 한 어머니. 어머니에게는 고속버스 안내양으로 근무한 2년간의 짧은 기억이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하신다.  ■ 50년 전 선망의 대상, 고속버스 안내양 이제 추억으로만 남은 나의 22살. 옥천여중을 졸업하고 대전여상에 합격을 했다. 생활이 어려운 가정의 딸들 중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다니던 대전여상, 인물이 좋고 공부 잘하던 아이들이 은행으로 취업을 하거나 고속버스 안내양이 되었다.지금은 사라진 많은 직업이 있지만 고속버스 안내양도 손꼽을 수 있는 추억의 직업이다.1970년 7월7일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고속버스 안내양을 채용했다.단순한 버스 안내양이 아니었다. 고졸필수이며 미모, 매너 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가수 김세환님의 ‘긴 머리 짧은 치마 아름다운 그녀’가 바로 우리들 이야기였다.선망의 대상이었고 지금 항공사 스튜어디스보다 더 각광받던 직업이었다.나는 은행에 갈까 고속버스 안내양을 할까 고민하다 고속버스 안내양 시험에 합격을 했다.이유는 단 하나였다. 고속버스 안내양은 전국을 다닐 수 있는 매력적인 일이었다.촌 아가씨가 언제 전국 일주를 해 볼 것인가.그레이하운드 버스의 안내양으로 취직을 했다. 그레이하운드는 미국에서 들여온 고속버스인데 2층 버스였고 장갑차처럼 무시무시하게 생긴 버스였다. 한진고속 천일고속 그레이하운드 등 내로라하는 버스회사들이 있었다.그 때는 버스 안에서 담배도 피던 시절이다. 담배 피는 사람들 설자리가 사라지는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세상에 공짜가 없어서 담배 냄새는 고역이었지만 월급을 꼬박 꼬박 모아서 집에 포도밭을 사드리기도 했다. 겨우 스무 살 넘었던 우리 세대는 지금의 아이들과 비교할 수 없이 성숙했다. 돈 모아서 시골 집 땅 사드리는 게 당연한 때였다. 궁핍할 때 살려는 욕구는 더 커진다. 가난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더 잘살고 싶은 욕구가 많았다. 대전에서 서울 구간을 다니고 있을 때 남편을 승객으로 만났다.버스가 출발 할 때는 안내양이 마이크를 들고 “이 버스는 서울을 출발해서 대전에 도착하는 그레이하운드 0000 버스입니다.”하면서 안내 인사를 하고 네모박스 작은 의자에 다소곳이 앉는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몸은 불편하지만 자존감은 하늘을 치솟았다. 아무나 앉는 의자가 아니다.서울에 버스가 도착하고 손님들이 차례차례 내리고 있었다. 어깨 각도를 낮춰 한 분 한 분께 인사를 드린다. 남편이 넌지시 손에 쪽지를 쥐어주었다. 사실 출발 인사 할 때 이미 눈이 마주쳤다. 맨 뒤 자석 가운데 앉아 있던 남편과 눈이 마주쳤는데 앉아 있는 뒤통수가 따갑기는 했다. 그때는 휴대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에 전화기도 다 보급될 때가 아니었다. 남편은 치밀해서 내 일정을 모르니까 만날 날짜를 세 가지를 써주었다.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첫 번째 날짜는 내가 운행하는 날이라 못 나갔고 두 번째 일정에 맞추어 그 자리에 나갔다.우연인 듯 필연인 듯 그렇게 남편과 만나서 연애를 하고 24살에 결혼을 했다.우리 언니 세대는 부모님이 정해준대로 결혼하던 시절이지만 우리 나이부터는 간간이 연애하면서 결혼을 하던 시절이었고 나는 그렇게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했다.그 시절은 결혼과 동시에 퇴직하던 때라 좋은 시절 다 보내고 나는 옥천으로 내려와 시골아낙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고향이 옥천이기도 했지만 남편은 옥천 국제기계에 다니고 있었다. 남편은 서울 출장길 고속버스 안에서 신붓감을 만났고 이래저래 우리는 천생 연분이었다.■ 콧바람 든 고속버스 안내양이 붙박이 시골아낙이 되기까지2년 동안 그레이하운드 타고 다니면서 콧바람이 잔뜩 든 내가 시골에 정착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의 시간을 담보로 했다. 남편 월급으로 3남매 키우면서 밥걱정 없이 살던 때라 나는 전업주부로 50년을 살았다. 밥걱정이 없다고 살림이 여유로운 건 아니었다.시골 직장인 월급이 뻔하고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하면서 20대를 보냈다.삶의 가치기준을 어디에 둘 것 인가에 따라 인생의 흐름도 달라지고 행복지수가 달라진다.나는 자발적 포기를 선택했다. 넓은 세상에 나가는 꿈보다 아이들을 잘 키워서 넓은 세상으로 내보내는 엄마로 만족하자고. 20대 때는 좌충우돌이었다. 스물다섯부터 서른 살까지 3남매를 낳고 정신이 혼미한 채로 20대를 보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서른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 육아에서 살짝 벗어났더니 그 때부터 아이들 교육에 혼신을 다했다. 고등학교부터 대전으로 보내고 반찬이며 김치를 싸들고 주말마다 아이들 자취방으로 다녔다. 갈 때마다 큰 다라에 이불 넣고 척척 밟아가면서 아이들 이불을 빨아줬다. 힘들어도 뽀송한 이불 덮고 잘 우리 아이들 생각에 고단한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이들 상급학교에 진학해서 약사로 공무원으로 밥값을 하고 있다. 잠시 쉴 틈을 얻었다가 나는 다시 이름표를 얻었다. 베이비시터, 우리 3남매의 막내아들이 나한테 선물한 막내 손자, 그 녀석 보느라 등골이 휜다. 힘들어하면 사돈한테 맡긴다니 나는 짝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 손자 사랑에 나는 다시 나에게 올가미를 씌웠다.사랑의 포로라는 이름으로 씌운 올가미라 기꺼이 견뎌낼 수 있다. 인생이 올가미 안에서 헤매다 보니 70고개를 넘기고 말았다. 나한테 이런 나이가 찾아오다니. 간간이 22살 고속버스 안내양 시절을 떠올리면 50년 전으로 돌아가 잠시 기쁨을 맛본다. 추억은 때때로 우리한테 달달한 주스처럼 피곤을 물리게 한다. 물론 노인이 됐다는 증거지만 추억할 수 있는 시절이 없다면 가슴이 텅 비어 더 허기질 것이다.긴 머리 짧은 치마 김연분도, 손자 보느라 낑낑 대는 할머니 김연분도 똑같은 나였다. 인생은 시절마다 행복을 느끼는 마음의 자리가 다르다. 22살이 짐작할 수 없는 72살의 행복이 있다. 그래서 그저 오늘을 잘 사는 게 답이다. 좀 더 솔직해지면 22살의 행복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지만 일흔 두 살의 행복은 그 때를 만나봐야 알 수 있다. 노년의 우리가 주눅들 필요가 없다고 토닥여 주고 싶다.우리 힘내요, 역전의 용사들!!

인물일반 | 정주희 작가 | 2021-05-20 16:14

 송종순 1938년  어르신댁 대문을 들어서자 바로 눈에 띄는 건 처마 밑에 나란히 걸린 호미 세 자루였다. 티끌하나도 묻지 않은 호미는 반짝반짝 윤이 났다. 어르신의 애정이 담긴 말씀이 이어져서 뭉클했다.“365일 내내 새벽부터 텃밭 가꾸느라 수고한 녀석들인데 세수를 깨끗하게 시켜줘야지.” 소리 없는 미물들까지 살뜰히 보살피시는 어르신, 그 마음 하나로도 어르신이 풀어주실 추억 보따리, 애틋한 기억들이 기대됐다.■ 딸 부잣집, 흑백사진 속에서는 허물, 칼라사진 속에서는 자랑거리죽향국민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집안 농사를 돕다가 열아홉 살에 동이면으로 시집을 갔다. 고생문이 훤한 집으로 시집을 간 것도 부족해서 나는 줄줄이 딸만 낳았다. 첫딸을 낳고 살림밑천이라 좋았다. 둘째 딸은 서운했지만 셋째는 아들을 낳고 싶었다. 아, 하지만 셋째도 딸을 낳았다. 6촌동서랑 비슷한 시기에 출산을 했는데 동서는 아들만 쑥쑥 낳고 있었다. 딸 낳는 게 내 죄도 아니건만 죄인마냥 몸 둘 바를 몰랐다. 밖에서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면 모여서 내가 또 딸을 낳았다고 숭(흉)보는 건 아닐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넷째 출산, 온 몸의 뼈마디가 다 부서지는 고통이 지난 후에 기진맥진한 내 귓가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째 울음소리가 딸들보다 더 우렁찬 거 같기도 하고, 남편이 손 하나를 못 쓰니 우리 집은 더더군다나 아들이 많아야 농사라도 지어서 먹고 살 텐데 …“동서 아들이야 아들 아들이라고”눈물은 그칠 줄 몰랐고 나는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죄인처럼 지내온 시간들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것 같았다. 우리 아들 영욱이는 그렇게 내 애를 태우다가 우리 집 넷째로 태어났다. 큰 딸 영신이도 남동생 본 날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착한 것이 내가 줄줄이 여동생을 낳았더니 지도 괜히 기가 죽어서 속을 끓이고 있었다. 영자 영숙이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영욱이는 그렇게  온 식구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남편도 점잖은 양반이라 아들을 언제 보게 될까 내내 마음만 졸였을 텐데 영욱이가 태어나면서 한시름 놓았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남편은 딸들한테는 천하 없이 자상했다. 그 시절이야 아버지들이 술 한 잔 들이키면 딸들한테 이년저년 소리 내지르는 건 흉도 되지 않았다. 그 틈에 남편은 딸들한테 지지배 소리를 한번 안했으니 다정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남편 회갑때, 딸 부잣집 풍경■ 고단한 시골아낙, 밤새 누에 밑 가리고 물옴 잡히다1953년 휴전 이후 전쟁이 할퀴고 간 우리 땅은 끼니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 시점에 집집마다 누에고치 농사를 시작했다. 우리 부부도 누에고치 농사를 지어서 아이들 학교에 보내고 살림을 꾸려나갔다. 밤새 누에 밑 가리고 새벽에는 텃밭 일구고 낮에는 모심느라 24시간의 8할은 일하느라 몸이 고단했다. 365일 내내, 쉴 틈에 살림하고 아이들 돌보느라 쪽잠을 청하기 일쑤였다. 앉으면 꾸벅꾸벅 졸고. 고생 안 시킨다고 첫날밤에 약속한 남편의 호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큰 동서는 내가 졸고 있으면 간간이 지청구를 했는데 누에 치고 모 심느라 몸을 가누기 힘들 때가 다반사였다. 누에는 깨끗한 뽕잎만 먹고 자라는 애들이라 고추밭에서 농약이라도 날아와 우리 뽕밭을 스치기만 해도 금새 누에들이 알아차린다. 잘 자라지도 않고 애를 먹인다. 우리 애들이 학교 다녀와서 잠실에 들어가서 누에도 치고 먹이도 챙겨주느라 다들 애썼다. 간간이 잠실에서 잠들어 있는 딸내미들을 보고 있으면 자고 있는 걸 깨우자니 안쓰러워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에똥이 잔뜩 있어도 너무 졸려서 그 방에서 잠들어 있는 딸내미 보면 어린 거까지 고생시키니 애미 속은 다 타들어 갔다. 그래도 군말 안 하고 엄마 일손 돕는 우리 애들은 참말로 착했다. 우리 친정어머니도 뽕도 잘 따고 일도 많이 하셨다. 뽕잎을 딸 때도 내가 반 포대 하는 동안 어머니는 한 포대씩 땄다. 뽕농사는 둘째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했으니까 근 20년은 농사를 지었다. 온 가족이 십시일반 일손을 보태면서 누에 농사를 짓느라 다들 애 많이 썼다.정작 힘든 건 누에치는 것 보다 모심고 다리에 물옴이 생길 때였다. 밤이면 다리가 퉁퉁 부어서 걷기도 힘들었다. 그때는 장화도 딱히 없어서 시원찮은 양말 신고 들어가면 거머리에는 안 물리지만 물에 젖은 양말은 물옴이란 녀석한테는 못 당했다. 살가죽이 부풀어 올라 속에 물이 잡힌다. 추측해 보건데 외양간 오물이며 농약들이 물댄 논으로 흘러올 수밖에 없다.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독소가 만들어 졌을 거다. 그래서 우리는 모내기철에 물옴으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살이 얇아서 물옴이 올라 밤마다 퉁퉁 부은 다리를 달래느라 힘들었다. 피부는 울긋불긋, 간지럽고 긁기라도 하면 더 부어올라 종아리가 허벅지 만해졌다. 그 시절 고생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참으로 사는 게 고역이었는데 딱히 방도가 없어 미련하게 또 그렇게 하루하루 보냈다.■ 남편의 그림자, 달빛아래 숨기놀이 하는 8남매 그리고 아버지  누에를 치던 우리 집 뒤꼍은 뽕나무 밭이었다. 남편과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김치에 된장찌개 한 그릇으로 밥 한 공기 뚝딱 비우며 저녁상을 물렸다. 8남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쪼르르 달려 나갔다. 어느새 남편도 막내를 업고 아이들 무리에 끼어 신이 났다. 그날도 숨바꼭질 하느라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뒤꼍으로 나가자마자 깔깔대는 웃음소리에 같이 살던 친정어머니는 ‘’딸만 잔뜩 낳아놓고 뭐가 좋다고 저리 신이 났냐 망신스럽다“ 며 혀를 끌끌 차셨다. 내심은 사위가 든든하고 고마웠을 게다. 어머니 입가의 미소가 이미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천하의 호인이던 남편은 참 좋은 사람이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슬며시 올라가보면 아이들은 달빛이 드리운 그림자 뒤로 요리조리 잘도 숨었다. 꽁꽁 숨은들 남편 손바닥 안이지만 그래도 숨어보겠다고 뽕나무 잎 사이로, 언덕배기 수풀 속으로 … 한 녀석 한 녀석 남편 손에 붙들려 나올 때 마다 까르르까르르 다들 더 신났다.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소리가 저 멀리 안동네까지 넘어갔다.■ 희로애락의 올가미, 세월의 나이테를 쌓다공짜도 싫어하고 대충 하는 것도 싫어하는 나는 살아오는 내내 야무지고 똑소리 난다는 말을 듣고 살았다. 40년 전쯤인가 이웃 아낙들이랑 포도밭에 가서 포도송이 한 아름씩 사들고 왔었다. 과수원은 타과들이 많아서 이웃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가지를 잘 못 만나 떨어지기도 하고 이런 저런 사연으로 타과가 된다. 타과가 단맛도 더 있고 먹는 데는 지장이 없다. 과수원 주인장들은 덤으로 타과를 얹어주기도 한다. 그날도 포도 사러 갔다가 타과가 된 포도들을 굳이 주인이 가져가라 하지 않아도 알아서들 챙기고 있었다. 다들 가져갈 만큼씩 거두고 있었는데 나는 남의 일인 양 손도 대지 않았다.주인장이 “아줌마는 왜 안 챙겨요?”“가져가라고도 안했는데 내가 남의 포도를 왜 가져가요?”“아니 꼭 말을 해야 하나 가져갈만하면 챙겨가는 거지”고지식한 건지 유난스러운 건지, 나는 그랬다.가져가도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지만 공짜는 싫었다. 남의 집 지푸라기도 안 묻히고 다녔다. 우리 아이들도 나를 닮아서 공짜 싫어하고 자기 맡은 건 똑소리 나게 한다.아이들이 어린 시절에는 우리 부부가 넉넉하지 않아 물질로 풍부하게 해줄 것이 없었다. 바른 태도, 정직한 마음 밖에 물려줄게 없었다.넉넉하지 않아도 욕심 없었고 삶이 고단해도 인정 많은 남편과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들, 그 맛에 견뎌냈다. 남편은 먼 길 떠난 지 오래지만 40년이 지나 그 때 그 날처럼 우애 좋은 남매들은 노년의 내가 서글플 겨를을 안 준다. 한숨 쉴 틈을 안 준다.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우리 아이들, 그래서 사랑이 넘쳐 나이든 내 차지까지 온다. 주말이면 마당은 아이들의 차로 꽉 들어찬다. 아이들은 나를 차에 싣고 꽃놀이를 떠난다. 꽃대궐 이룬 꽃밭에서 나는 모델이 되어 아이들의 카메라 셔터 앞에서 웃고, 하트를 날려본다. 팔도의 산해진미는 덤이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엄마 얼굴이 뭐 볼게 있다고 여기서 찰칵 저기서 찰칵!! 나만 행복해서 미안하다고 남편한테 간간이 신호를 보내는데 알아들을 리 만무하다. 부모님 슬하로 태어나서 남편을 만나서 8남매를 얻었다. 8남매와 우리 아이들의 배우자 그리고 손주들 … 송종순으로 태어나서 딸이란 이름을 가장 먼저 얻었고 아내, 엄마, 장모, 할머니로 세월 속에서 내 이름들을 하나씩 늘려나갔다. 나의 식구들이다. 이제 딸 자리 아내 자리는 물리고 엄마로 할머니로 살아가고 있다. 명절이면 방안에 한 가득 들어찬 우리 자식들. 70을 바라보는 사위부터 중학생 손녀까지 열 손가락을 두 번이나 꼽아도 모자란다. 나도 투병생활하던 남편을 20년 전에 먼저 떠나보냈고 사랑하는 자식도 잃어 보았다.애간장이 끊어지는 아픔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었다. 나에게만 다가온 아픔이라고 하소연 할 틈도 없이 누구나 인생의 고비마다 희로애락의 올가미에 갇혀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아가면서 세월의 나이테를 쌓아간다. 나도 꽃 같은 시절이 있었고 여자로 살고 싶던 나이에 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오래 전 그 애끓는 시간의 값을 보상 받기라도 하듯이 아이들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느라 어질어질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혀를 깨물며 번뇌의 널을 뛰었다. 이제 그 날들을 뒤로하고 잔잔한 항구에 닻을 내렸다. 우리 딸 영주가 차려준 된장찌개를 먹고 창가로 스며드는 따뜻한 햇살을 받고 싶다. 혹여 그 햇살이 한낮의 졸음을 데려온다면 꿈을 꾸고 싶다. 그 졸음을 타고 오래 전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달빛 아래서 우리 8남매가 까르르 웃으면서 남편과 숨바꼭질 하던 그 뽕나무 잎 사이로 나도 숨을 것이다. 그 속에서 나도 같이 웃고 마냥 행복 하고 싶다. 그 꿀 같은 단잠이 오늘 찾아오기를 …누에고치 치던방(잠실)에서 남편과 함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인물일반 | 김경희 시민기자 | 2021-05-14 10:51

편집자주_시민이란 자신의 권익을 스스로 지키는 사회적 존재이다. 한 마디로 나를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것마저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바로 발달장애인들이다. 자기 결정과 의사표현이 어려워 권익을 침해당해도 알릴 수가 없다. 군내 발달장애인은 약 600명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목소리는 잠겨있기만 했을까. 아니다. 발달장애인들이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돕는 ‘시민옹호인’들이 있었다. 그 중 한 명인 김하석 목사(군북면 이백리교회) 만나 그 이야기를 들어봤다.시민옹호인 3년차 김하석 목사가 시민옹호의 개념과 시민옹호인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보이지 않아서 낯선 단어, ‘시민옹호인’한국장애인복지관협회는 ‘시민옹호’를 ‘권익옹호를 받는 사람들도 시민들과 유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장애인과 같이 자신의 권익을 스스로 지키기 어려운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지원한다는 의미이다. 다소 어렵다. 그래서 김 목사는 보다 더 쉽게 정의했다.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일반 주민들에겐 낯선 단어일 테지만, 김 목사가 시민옹호인으로 활동한 지는 벌써 3년차다. 한 마을교회의 목사, 지역 봉사단체인 ‘가족봉사단’ 대표 등 지역 내에서 다양한 활동들을 펼친 그이지만, 그가 시민옹호인으로 활동 중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사람들이 발달장애인을 상대로 하는 활동에는 관심이 적다는 이유에서다.  사실 2년 전 옥천군노인장애인복지관은 한국장애인복지관협회에서 주관하는 ‘장애인 권익옹호 지원체계 확산을 위한 2019년도 발달장애인 당사자 및 시민옹호 지원 사업 수행기관’에 선정됐다. 협회는 전국 장애인복지관을 대상으로 공모해 이 중 10개 기관을 선정했는데, 옥천군노인장애인복지관이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런 희소식은 군내에서 관심을 끌지 못했고, 시민옹호인을 상시 모집 중이지만 현재 13명만이 활동 중인 상태다. 김 목사는 초창기 멤버였다. ■ 등산, 영화관람, 케이크 만들기… 일상을 함께 그리다시민옹호인은 거창한 행사장이 아닌 발달장애인들의 일상으로 침투한다. 일회성 행사에서 그치는 일반의 봉사활동들과 다르다. 정해진 활동 시간은 없다. 보고 싶을 때마다 만나 함께 산을 오르고, 영화를 보고, 케이크를 만들어보기도 한다. 인위적인 만남이 아니라 서로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함께 그려나가는 게 핵심이다. 김 목사는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자주 만나지 못해 아쉽지만, 수시로 전화하고 편지를 쓰며 안부를 묻는다. 최근에는 내 ‘짝꿍’이 보고 싶어 선물할 책에 안부 문구를 적어 보냈다”고 서로간의 유대감을 자랑했다. 당연히 옥천군노인장애복지관도 이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들의 월 2회 만남에 활동비 3만원을 지급한다. 이들이 서로 만남을 갖고 일지를 작성해 제출하면 활동비를 지급하는 식이다. 옥천군노인장애인복지관 김양욱 사회복지사는 “상시적으로 간담회도 열어 이들의 만남이 건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피옹호인들과 상담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 우리는 친구, 그래서 우리는 ‘더치페이(각자 내기)’ 한다일반의 봉사활동을 생각하면 ‘베풂’, ‘희생’, ‘시혜’ 등의 단어가 떠오르기 쉽다. 하지만 시민옹호 활동은 그것과 다르다. 동등한 위치에서 관계를 맺는다. 말 그대로 친구다. 때문에 같이 밥을 먹더라도 자기가 먹은 음식은 자기가 계산한다. 이는 옥천군노인장애인복지관이 최근 들어 추구하는 패러다임의 변화와도 궤를 같이 한다. 김양욱 사회복지사는 “보통의 사람들은 장애인들의 권익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단순히 시혜적 성격으로 보려는 경향이 짙다”며 “시민옹호인들과 피옹호인들은 독립적인 관계를 통해 서로의 일상생활을 지원하는 동등한 관계”라고 설명했다. 이어서 그는 “우리 복지관도 기존에는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시혜적) 측면이 강했다면, 이제는 발달장애인이 지역 내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 수 있을지 지원해주는 쪽으로 초점이 이동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목사도 시민옹호인으로서의 자질을 물은 질문에 “누구나”라고 말하면서도, 한 가지 단서조항을 달았다. 그는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틀리다’가 아니라 ‘다르다’에서 시작한다”라고 말했다.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래서 김 목사는 시민옹호인을 “비장애인과 장애인은 다르다는 인식을 지워나가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그동안 우리는 타인을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인정하고 포용하는 자세로 대해야 한다고 배웠는데 이 ‘다름’마저 틀렸다고 김 목사는 강조한 것이다. ■ 취지만큼 중요한 모니터링과 시민옹호인 교육 시민옹호라는 아름다운 명패만큼이나 중요한 게 있다. 이들의 만남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이다. 인간사회란 만남 속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갈등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신의 의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발달장애인들에게 관계 속 갈등은 버거울 수 있다. 이에 김양욱 사회복지사는 “우리는 시민옹호인과 피옹호인들 간의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며 “이들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옹호인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도 중요할 수밖에 없다. 갈등 상황을 사전에 예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민옹호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옥천군노인장애인복지관에서 진행하는 16시간의 초기 교육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 시민옹호인에 대한 개념과 역할을 충분히 인지한 상태에서만 활동이 가능하다. 시민옹호 활동이란 일반의 봉사활동처럼 베풂과 희생으로만 채워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1년에 네 번 복지관에서 실시되는 교육도 이러한 시민옹호인으로서의 역할과 책무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 “시민옹호인들이 더욱 많아지길” 얼마 전 김 목사에겐 한 가지 바람이 생겼다. 군내 13명의 시민옹호인들이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단체’에 소속되어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해달라고 복지관에 건의했다. 현재 시민옹호인들은 어느 단체의 구성원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독립된 존재들이다. 복지관에서 관리, 감독만 받고 따로 활동한다. 그래서 주민들의 눈에 더욱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김 목사에겐 시민옹호인들의 활동 범위와 횟수를 보다 넓혀 더 많은 시민옹호인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복지관은 김 목사의 요구에 적극 응답했다. 이번 달 옥천군노인장애인복지관에서 시민옹호인 단체 발대식을 갖기로 한 것이다. 소소하긴 하지만 의미 있는 날이라고 김 목사는 부풀어 오른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에 김양욱 사회복지사도 “사실 우리 복지관에서 시민옹호인분들을 일일이 관리하고 지원하는 게 힘들기도 했는데, 김 목사님께서 자처해 주도적으로 단체의 활동을 펼쳐나가겠다고 하니 고마울 따름”이라면서도 “시민옹호인 단체에 대한 지원과 감독은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인물일반 | 옥천닷컴 | 2021-04-09 13:54

미디어세림 신채원 대표미디어세림 신채원 대표(39)가 옥천을 다시 찾았다. 2018년 지역문화창작공간 둠벙(읍 금구리)에서 일본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1923)을 기록한 오충공(67) 감독의 다큐멘터리 순회상영회를 연 지 3년만이다. 보은취회* 기념행사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한국전래놀이협회 아자학교 고갑준 대표를 만나러 잠시 들렀다고. 신채원 대표는 순회상영회로 옥천을 방문하기 전부터 ‘문학’과 ‘동학’으로 옥천과 인연을 맺었다.“문학도였을 열아홉, 스무살 당시 해마다 지용제에 참여하기 위해 옥천으로 왔어요. 민예총 충북지회에서 문화활동가로 일하며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기 때문에 정천영 선생님, 김성장 선생님을 비롯해 옥천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도 알고 지냈죠. 당시에는 옥천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했는데 그땐 젊은 사람이 일할 만한 기반이 없어서 정착할 수는 없었죠”소원했던 옥천과의 관계를 다시 이어준 것이 ‘동학’이었다. 동학에 관심이 있으니 자연스레 옥천과 인연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지역 청산면 일대는 보은에 이어 동학의 주요 거점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동학 지도부는 지금의 청성면 거포리에서 보은취회를 결정했다. 보은취회 이후 보은대도소*가 관군들에 의해 발각되자 최시형 선생은 임시대도소와 거처를 청산 한곡리로 옮겼다. 보은취회 다음해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 장군을 필두로 한 고부민란이 시작되자 최시형 선생은 한곡리에서 모든 교도들을 동원해 고부민란을 지원하는 기포령을 내렸다. 당시 민란에 참여하기로 한 7명의 동학군 이름을 새긴 ‘문바위’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신채원 대표는 2013년 보은취회 120주년 행사를 보며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구호에 감명받아 동학 정신을 이어가는 인물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동학정신 계승활동에 힘써온 문화 운동가이자 민예총 옥천지회 지부장을 역임한 김성장 시인(옥천작가회 회원)도 이 중 한 명이다.“대학을 중퇴하고 불과 열아홉, 스무살에 민예총 충북지회에서 문화활동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선배들은 대학도 가고 평범한 직업을 가져서 보통의 사람처럼 살아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만두고 나와서 서울로 올라가 잡지사, 신문사에서 계속 글 쓰는 일을 했죠. 도종환 선생님 시에 나오는 ‘창자 속 같은 길’을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며 남들처럼 똑같이 지내다 보은취회 120돌 때 신세계를 접한 거예요.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거룩할 수가 있어? 사람이 하늘이래. 그래 동학이다!’며 동학에 꽂힌 거죠”*보은취회: 1893년 3월11일 2만 명에 이르는 동학 교도들이 충청북도 보은에서 ‘척왜양창의(일본과 서양 세력을 배척하고 의를 일으킴)’와 ‘보국안민(국가를 도와 백성을 편안하게 함)’을 명분으로 모인 집회다. 기존 집회들은 처형당한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죄를 풀어달라는 교조신원운동 위주의 종교적 성격의 집회였다. 보은취회는 여기서 나아가 민중들의 보편적인 요구까지 포용한 현실적·정치적 성격의 집회라는 평가를 받는다.*대도소: 동학의 교세 확장을 위해 설치된 교단의 중앙 사무 조직■동학, 삶의 이정표가 되다신채원 대표는 보은취회 120돌 기념 행사에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정신을 기리고 현대사회에서도 그 정신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을 주목했다. 사회 불평등과 모순에 맞서 인권 신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시작은 동학을 소설로 풀어낸 <동트는 산맥>과 <흰 옷 이야기>로 알려진 채길순 교수 인터뷰였다.“보은집회를 해산시키려 파견된 어윤중의 기록에 따르면 집회에 온 사람들은 ‘재능이 있으나 뜻을 펼치지 못한 자’, ‘세금을 감당하지 못해 도망한 자’에요. 현대의 노동자, 농민, 여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사회 곳곳에서 모순과 불평등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시대의 어른들을 만나 인터뷰하기로 했죠. 지금은 폐간한 월간 개벽신문(대표 박길수)에서 먼저 제안을 해 채길순 교수님을 인터뷰한 기사를 기고하기도 했어요. 이를 계기로 2015년부터 월간 개벽신문에 인터뷰물을 연재하기도 했죠”동학은 언론활동 뿐만 아니라 신채원 대표의 삶의 이정표가 됐다. 인터뷰를 하고 나면 자신 또한 동학 정신을 실현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의무감이 들었다고 한다. 인터뷰를 마치면 단지 인터뷰이의 삶을 응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함께 사회 운동에 뛰어들곤 했다.“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동학에 관한 역사적 진술 규명에 힘써온 일본 나라여자대학 나카츠카 아키라 명예교수는 올해 90세이고요, 100세가 넘은 할아버지를 인터뷰하기도 했죠. 이분들이 ‘나는 이런 꿈을 꿨어. 나는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갖고 있고’라며 방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는데 이걸 들은 저는 좀 다르게 살아야 하잖아요”■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최초로 영화화한 재일교포 오충공 감독을 만나다2016년부터 일본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1923)을 기록한 오충공 감독의 다큐멘터리 순회상영운동을 시작한 계기도 이 때문이었다. 오충공 감독과 일본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를 알게된 후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학술적 기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신채원 대표는 성공회대 대학원에 입학해 연구 활동에 돌입했다. 동시에 청주, 부산, 제주도, 서울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오충공 감독의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고 학살 피해자 유족을 찾아 나섰다. 이 과정을 기록한 오충공 감독의 새로운 작품 제작을 지원하는 작업까지 병행했다.“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를 다룰 학술적 기반이 없더라고요. 현장에서 활동하는 것과 더불어 학술적인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해서 성공회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밟으며 연구를 시작했죠. 영화상영운동을 함께 진행했고요. 오충공 감독의 작품은 1983년 작품인데 제 나이하고 같은 영화를 5년 동안 들고 다니며 배급사를 찾았어요. 하지만 배급사를 찾기 어려워 직접 배급사를 설립하고 전국으로 상영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학살 피해자들은 과연 누구인지, 그들의 고향과 이름, 가족을 찾으려고 유족을 찾아나섰어요. 유족들은 자신들이 유족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에 어려운 작업이었죠”2018년 우리지역 지역문화창작공간 둠벙에서 상영된 오충공 감독의 작품 <감춰진 손톱자국>(1983)과 또 다른 작품 <불하된 조선인>(1986)은 청주를 시작으로 부산 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성황리에 상영을 마쳤다. 제주도에서는 한 대형영화관에서 상영할 기회를 얻었다. 신채원 대표가 그토록 바라던 1924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주기 추도회가 열린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도 상영에 성공했다. “제주도에서 영화 상영 중에 감독님이 뒤에서 눈물을 흘리고 계시더라고요. 30여년 전에 만들어진 자기 영화가 팝콘을 먹을 수 있는 영화관에서 상영이 될 줄은 몰랐다면서요.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진행한 상영회와 추모문화제는 공간의 역사적 의미가 커요. 당시 종교시설에서만 집회가 가능했거든요. 청년들이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모여 1주기 추도식을 가졌다는 것 자체로 의미가 큰데 언론에서 다뤄주지 않아 아쉬웠죠. 저는 이곳에서 상영하는 게 간절한 소원이었어요”■앞으로의 과제, 오충공 감독의 새작품과 월간 신채원앞으로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신채원 대표는 오충공 감독의 새로운 작품이 완성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오충공 감독은 영화순회운동과 유족찾기 전 과정을 담은 새로운 다큐멘터리 작품을 제작 중이다.“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일본시민이 일방적으로 저지른 범죄가 아닌 군과 경찰이 개입한 범죄예요. 그럼에도 우리 정부에서는 임시정부 때를 제외하고 100년이 다 되도록 공식적으로 항의를 한 적이 없습니다. 오충공 감독이 세 번째 작품을 완성해가고 있으세요. 작품이 잘 완성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게 제 당장의 목표입니다”동학 정신이 이끄는 대로 살아온 신채원 대표는 그러한 자신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기는 월간 신채원 프로젝트도 준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월간 신채원 프로젝트를 준비 중입니다. 제가 여태까지 해 온 이러한 일들을 기록하는 거죠. 저는 글을 통해 생명의 가치,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사람으로 계속 살아갈 겁니다. 구독자보다는 함께 걸어갈 친구를 찾고 있습니다”

인물일반 | 허원혜 기자 | 2021-04-07 11:17

인생극장 ‘산 넘어 산’의 은막스타는 이제 ‘커튼콜’에서 자유로워졌다.어르신이 주인공을 맡았던 인생극장의 제목은 ‘산 넘어 산’ 이었다고 고백하셨다. 물론 한 마디 곁들이셨다. “어디 나 뿐이겠어, 다들 인생극장 ‘산 넘어 산’의 주인공들이지” 세상이 내 것 인양 환희에 전율하던 때도, 속울음 삼키며 피눈물을 흘리던 날도 수없이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는 어르신.서울내기인 어르신은 꿈 많은 학창시절 서울 후암동이야기, 치열했던 삶의 현장 대전, 시골집 툇마루의 나무 향이 배인 옥천에서의 나날들이 모여 추억이 한가득이라고 하시며  당신을 추억 부자라고 소개하셨다. 더불어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가슴에 간직하고 속내를 터놓는 사람들이 불러주는 이름, ‘안순진’으로도 기억되기를 바라셨다. ■ 후암동 예쁜이 후암동 골목길에 쭉 늘어섰던 일본식 가옥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방귀 꽤나 뀌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후암동, 정부 기관의 관사들이 행렬로 늘어섰고 담장은 내 키를 넘고 또 넘어 안을 들여다 볼 수도 없던 집들이 즐비했다. 그들만큼은 아니어도 나도 의식주 걱정 없이 까르르 웃으면서 후암국민학교, 상명여중과 상명여고를 다녔다.전쟁 후에 폭격을 맞아 어수선한 동네에 새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할 즈음이라 동네는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과 2층 양옥집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전쟁의 상흔과 개발의 설렘을 한 번에 맛보는 현장에 섰던 우리들은 시대의 변화를 온몸으로 체득하며 성장 통을 앓았다.유년시절에는 어머니와 검찰청 수사과장이던 외삼촌 슬하에서 성장했다. 본시 아버님은 평안북도 출신인데 1.4 후퇴 때 가족들이 내려오다 아버지는 임진강 전투에서 할 수 없이 다시 올라가게 되었다. 아버님은 쌀 한말 지고 내려오다가 끝내 남녘땅을 밟지 못하셨다. 우리 가족의 아픔은 거기서부터 비롯됐다. 이산가족 찾기를 통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결국 만날 수 없었다. 시대의 아픔으로 아버지 품에서 성장하지 못하는 유년을 보내면서 인생은 양손에 땅콩이 쥐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힘 있는 외삼촌 슬하에서 성장하면서 어려움 없이 자랐지만 상명여중시절 큰 오빠의 도미(渡美)로 이별의 쓴맛을 알게 되었다. 당시 26살인 오빠는 공무원신분으로 공보부 장관 비서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경복고등학교 출신중 수재로 인정받았다. 미국에 나가있던 친구들이 오빠를 미국으로 불러들였고 오빠도 워낙 대단한 분이라 미국이 오빠의 꿈을 펼칠 땅이라는 판단으로 도미를 결정했다. 아버지 없이 성장한 나에게 큰 오빠는 아버지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팔 한 짝이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아팠지만 나도 오빠의 갈 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빠는 아메리칸 드림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큰 오빠의 부재는 사춘기의 나에게 텅 빈자리를 남겼지만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사랑받으면서 그 외로움을 달래기도 했다.사춘기 때 예쁘지 않은 소녀들이 있을까 만은 통통한 볼 살에 보조개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나는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남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아서 어린마음에 우쭐한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 일게다. 보조개가 네 개씩 이나 들어가 한번 웃으면 다들  나를 주목해주었다. 상명여중 다닐 때는 생물 선생님이 ‘백곰’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다. 성이 백씨였고 볼 살이 통통하게 올라 귀엽다고 붙여주신 이름인데 친구들도 덩달아 ‘상명 백곰’이라고 나를 불러줬다. 사랑 많이 받던 학창시절을 뒤로하고 나에게도 인생의 풍파는 여지없이 다가왔다. 누구도 예외일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나도 장미 꽃길과 가시밭길을 번갈아 걷게 되었다. ‘딸들과 함께’‘치열하고 뜨거웠던 청춘’■ 스무 살, 후암동에서 대전 삼성동 빨간 벽돌집으로.여고를 졸업하고 어머니가 편찮으시면서 외삼촌 계시는 대전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스무살 어린 나에게 대전행은 잠시 귀향 살이 같은 마음이었다. 이내 위로의 마음을 얻은 건 삼성동 삼성국민학교 옆에 지어진 우리 집, 나는 서울에서 이사 온 빨간 벽돌집 딸이었다. 동네에서는 보기 드문 집이라 나는 대전에 와서도 눈길을 끄는 아가씨였다. 엄마를 간호하면서 20대를 보내고 있을 때 이웃에서 중신이 들어왔다.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는 앞뒷집 사이로 이웃사촌이었다.언니집 딸, 우리 집 아들 결혼시키자며 어른들의 혼담으로 남편을 만났다.내 나이 스물여덟, 조금은 늦은 결혼을 하게 됐다. 남편은 대전의 명문 D 고등학교와 서울 H대 공대를 나온 실력자로 사업을 하고 있었다. 결혼이 말처럼 달콤하지는 않았다. 그 시대를 살았던 먹물이 든 사람들의 특징인 실리적이지 못한 성향에 집안의 단도리를 내가 맡으면서 생활을 꾸려나갔다.여성이라는 이름들이 운명처럼 걷게 되는 고단한 여정들이 나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묵묵히 참고 견뎌내면서 내 길을 걸었다.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줄 알았지만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 하지는 않았다. 나도 경제활동 현장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성격상 섬세한 여성의 일보다는 배포 크던 시절이라 부동산이 활황이었을 때 집을 지어서 팔고 수익을 내곤했다. 허름한 집을 사서 예쁘게 고쳐서 팔고 수익금을 남겼다.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운명을 받아들였다. 인생의 이면은 다 고단하다. 내색하지 않을 뿐이다.허름한 집을 구하러 다니려면 수많은 발걸음으로 발품을 팔아야 했다. 권위적인 남자들은 바깥세상에서 자기 이름 남기기를 원하지, 가정은 그림자 같은 존재라 아내에게 맡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남편도 예외일 수 없었다.내가 아이들을 챙기고 거두었다. 여자들의 희생이 당연하던 시절이었다.“지금 내 트레이드 마크가 된 도르르 말린 앞머리는 그 때 만들어졌어. 앞머리를 구리포로 말고 뒷머리는 올려 핀으로 고정 시켰지. 남들 보기에는 영화배우 같은 스타일이지만 숨겨진 이유가 있어. 알고 보면 미용실에 가주 가지 않아도 되는 머리 스타일이야. 아이들 키우고 경제 활동하는 일들이 쉽지 않아서 내가 절약할 수 있는 것들은 절약을 해야 했어. 그때 멋도 놓치고 싶지 않고 생활인으로서도 살아야 해서 만들어진 헤어스타일인데 지금 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어. 가려진 이면은 다 애잔하고 아파.”한창 건설 경기가 붐을 이루던 시기라 남편도 사우디에 1년을 다녀오고 나도 집을 사고파는 일을 계속하면서 우리는 남부러울 것 없이 한 시대를 풍미했다. 물론 화려한 외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남모르는 속앓이를 담보로 해야 했다. 나만의 자녀 교육 방식도 시간이 흘러 돌이켜보면 결과적으로 옳았다. 딸 셋을 키우면서 한 번도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고등학교 졸업하면 한 달씩 해외여행을 시켰다. 강요된 공부보다 넓은 세상에 발을 디디고 손으로 만져 보는 것이 아이들의 미래에 더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라 믿었다. 딸 셋은 각각 큰 딸은 캐나다에서 당당하게 입지를 굳혔고, 대전에서 살고 있는 딸은 나에게 좋은 친구로 내가 병원에 갈 때마다 좋은 벗이 되어준다. 막내딸도 상해에서 본인이름을 알리면서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큰 딸이 “엄마 나 결혼자금으로 외국에 나가서 제 꿈을 펼쳐볼게요.”라고 선전포고를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우리 큰 딸이 50을 바라보면서 캐나다에서 입지를 굳힌 여성이 되었다. 당시는 몰아치는 폭풍우에 힘들었지만 견뎌낸 시간이 주는 보상은 달콤하다.■ 황홀한 안식처 옥천대전에서 치열한 현역을 마치고 옥천에 정착한지 8년이 되었다. 서울에서의 유년과 학창시절 추억은 달콤하다. 대전에서의 치열한 삶의 현장도 짠 내 나지만 끝 맛은 달콤했다.옥천에서 8년, 석양아래 반짝이는 윤슬처럼 보드랍고 따뜻하다. 고즈넉한 하루하루는 나에게 큰 휴식이다. 나에게 큰 관심 안 가져주는 이곳이 이렇게 편안할 줄 미처 몰랐다.연고가 없던 옥천은 돌아가신 엄마가 사후에 화장(火葬)을 원치 않으셔서 매장지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다. 안남면에 땅을 사고 나무를 심었다. 아직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나는 가화리에서 안남을 오가며 내 땅에 나무 한 그루씩 심다보니 어느새 야산을 이뤘다. 100세 시대라지만 지금 우리나이는 연장전에 들어간 나이다. 현역에서 전반 전 후반전 치열한 승부를 펼치고 이제 막 연장전에 돌입했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지만 그저 별 탈 없이 노년을 보내면 그게 바로 나와의 승부에서 진정한 승자가 되는 것이다.복지관에서 영어 중국어를 배우고 인문학 강의를 들으면서 내실 있는 소일을 하고 있었다. 코로나가 잠잠해져 다시 강의를 듣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 아파트 앞 로컬푸드 직매장에서 건강빵을 사들고 산보를 한다. 고소한 빵을 식탁에 올리고 창가로 내비치는 햇살을 마주 한다. 홍차 한 잔 곁들이는 이 고즈넉함이면 됐지 더 이상 무엇을 바랄까.속이 불덩어리처럼 열망으로 가득 했을 때 애써 태연한척 버티느라 힘들었던 때도 견뎌냈다. 분홍빛깔 홍연을 감추느라 타들어가는 속도 달랬다. 돌아보면 고비가 아닌 때가 없었다. 인생은 산 넘어 산 이었다.감정은 시시때때로 오선지의 음표처럼 오르내렸다. 힘줄은 팽팽해지고 시선은 끝 모를 위를 향하느라 다리가 휘청거렸다.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번뇌의 널을 뛰던 날들을 뒤로하고 이제는 그저 고요하다. 이 고요함이 곧 행복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아 차렸다.이름처럼 예쁜 곳 가화리, 내가 여정을 마치고 여생을 보내는 곳이다.이제 무대에서 내려와 커튼콜이 없어도 서운한 감정이 일지 않는다. 시시때때의 감정 선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저 지그시 내가 섰던 무대를 바라볼 수 있다. 이제 진짜 나를 만났다. 이제 진짜 나를 만났다. 커튼콜을 꿈꾸지 않아도 되는 소박한 하루하루는 황홀한 안식처 옥천이 안겨준 선물이다.  

인물일반 | 김경희 시민기자 | 2021-03-05 10:41

‘삶의 방정식이 성실’인 사람들의 얼굴이 있다. 어르신의 얼굴은 “나는 성실한 사람이오” 라고 말하고 있었다. 소복이 눈 쌓인 앞마당 장독대며, 나무장작 더미까지 어르신을 닮아 가지런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켜켜이 쌓인 눈까지 그림을 보태 한겨울에 보는 수채화를 연상케 했다. 유복래 (41년생. 80세. 백운리)■ 흙손, 내 삶의 지평을 열었던 회억의 흔적이 되다나무가 쉬는 숨소리를 들었다. 산에 가면 나무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 내음도 코끝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무를 평생 만지고 싶어서 목수가 되는 꿈도 꿔 보았다. 내 본적은 청산면 백운리 301번지다. 백운리에서 태어나 돈 벌러 타지를 나간 몇 년을 제외하고 줄곧 내 주소는 백운리 301번지였다. 마을 밖의 주소에 내 이름을 심지 않았다.일찍 아버님을 여의고 어머니와 삼형제가 어렵게 살았다. 비빌 언덕이 없어 식구들은 다들 제 밥벌이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시골마을의 여느 청년처럼 소꼴을 베고 돼지를 쳤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움직이지 않으면 쌀독은 금방 바닥을 보였다. 남들만큼 일해서는 끼니를 제대로 때우기도 어려웠다. 그저 하루하루 성실하게 사는 것이 내가 풀어갈 인생 숙제의 정답이었다. 25살이 되었을 때 아는 형이 미장일을 같이 하자고 권했다. 황토 흙을 고르고 짚을 썰어 반죽하여 벽을 바르는 일을 배웠다. 처음에는, 마당 한 곳에 둥근 홈을 파고 맨발로 흙을 짓이겨는 것부터 시작했다. 무거운 황토 흙을 퍼 나르고, 작두로 볏짚을 자르고,  흙짐을 지기도 했다. 처음 일을 배우려면 가장 힘든 일, 가장 무거운 것부터 져야 하는 것이다.차츰 일이 손에 익었다. 눈썰미가 있었고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재빠르게 일하는 모습을 보고 남들보다 먼저 일거리를 배당 받았다. 맡은 일을 게으름 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처리했다. 집을 한 채 한 채 지어나가는 기쁨은 아이를 낳는 것처럼 내 새끼들이 늘어나는 것 같았다.상량식 날이면 몸을 단정히 하고 의미를 배가 시켰다.온 힘과 정성을 다해 집을 짓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야무지게 흙손을 놀렸다.흙손질에 손이 성할 날이 없고 어깨며 다리도 고달플 수밖에 없는 것이 미장일이다.한 땀 한 땀 내 손으로 집이 올라가는 맛에 몸 상하는 줄 모르고 그 일을 수십 년을 했다. 어느 순간 온 몸 여기저기 상처가 훈장으로 남을 때 미장일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유복래 어르신■ 나도 열사의 나라에 꿈을 심었다마흔 살 즈음에 5개년 계획을 세워 금오건설 소속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갔다. 돈을 벌어서 땅도 사고 산도 사고 싶었다. 4남매의 학비도 마련하고 노후 준비도 할 요량이었다. 2년 동안 사우디의 흙먼지는 건조하고 지독했다. 저녁이면 일을 마친 동료들이 서로 때꾼한 얼굴을 바라보며 눈시울 붉어진 눈빛을 나누기도 했다.내가 너의 심정을 다 안다는 마음으로.그래도 가족들을 생각하며 쉬지 않고 일했다. 별이 총총히 박힌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고향에 두고 온 집사람과 4명의 아이들 얼굴이 별이 되어 내게로 쏟아져내려오는 것처럼 그리웠다. 5년의 세월을 쥘부채로 접고 싶었다. 2년이 지난 뒤에 기침이 나오고 가래가 끊더니 폐가 나빠졌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지만 더 이상은 열사의 사막에서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내에서 받는 월급보다 훨씬 많던 품삯이 아까웠지만 가방을 싸고 귀국을 서둘렀다. 수십년간 해온 미장일이 성실한 내 삶의 방정식과 많이 닮았다.■ 쉬지 않았던 삶의 책임감돌아와서 전국을 돌며 객지 생활을 했다. 객지에 나갈 때마다 가족들이 그리웠다. 시간이 날 때면 밭에 감나무를 심었다. 100여주의 감나무를 심어 몇 년이 지나니 감이 열렸다. 미장일이 없는 겨울이 되면 곶감을 깎았다. 사그락사그락 감의 껍질을 벗겨내고, 줄줄이 매단 감들이 익어갈 때 그 주황빛 빛깔이 너무나 탐스러웠다. 일요일에는 온 식구가 매달려 감을 깎고 줄에 끼우고 매달며 오순도순 단란했다. 곶감을 팔면 아이들에게도 용돈을 넉넉히 주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용돈을 벌어 쓰는 재미를 알게 되어 다음 해에는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일했다. 가족이 함께 손을 모으고 아이들은 그 속에서 자기 역할의 책임을 지는 경험을 했다. 어린손이 모아진 작은 일이었지만 이렇게 키우면 제 밥벌이를 하는데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특히 사내아이들은 제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집안이 평안하다. 남자가 자기 몫을 못하면 분란이 일어나기 마련이다.시간이 나면 산에 올랐다. 죽은 나무의 삭정이를 잘라 지게에 지고 내려와서 불을 피웠다. 불이 붙을 때 타닥타닥 내는 소리를 들으면 심장이 뜨거워졌다. 나무가 타면서 나오는 연기를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산림청에서 나무를 벌목한다고 사람을 찾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자원해서 나무를 베는 일에 나섰다. 베어낸 나무를 가져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곧고 결이 단단한 나무들을 골라 집으로 가져왔다. 그 나무들을 알맞은 크기로 잘라 장작나뭇단을 쌓았다. 켜켜로 쌓이는 장작을 보니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보기에도 좋고 마음이 흐뭇해졌다. 통장에 돈이 쌓이는 것처럼 뿌듯하고 행복해졌다. 겨우 내내 군불을 피우고 나면 장작더미가 헐빈해졌다. 그 자리에 다시 나무를 올렸다. 마당에 장작이 그득 쌓여야 안심이 되었다. 어릴때부터 원했던 목수는 되지 못했지만, 미장이로 밥벌이를 했지만 나무에 대한 애정은 버릴 수가 없었던 거였다.이천 년이 되는 해 새 집을 짓기로 했다. 미리 마련해 둔 터에 내가 설계하여 고안한대로 집을 짓게 된 것이다. 백운리 11-6번지에 있던 낡은 오두막을 헐어내고 100평 땅을 어떻게 활용할지 한동안 고민한 뒤였다. 그동안 미장일을 하며 알았던 인맥을 총동원하여 누구보다 튼튼하고 야문 집을 지었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수많은 일손이 필요하고 각 공정마다 다른 일손이 필요로 한다. 터를 파고 철근 기초를 하고 벽돌을 쌓으며 기둥을 세우고, 수도와 전기, 배관공사를 하고, 지붕과 서까래를 올리고, 보일러를 깔며 미장을 하고, 전기를 연결하며 타일을 붙이고, 페인트와 마감재를 하고, 벽지를 바르고 장판을 깔아야 한다. 중간중간 들어가는 공정 또한 만만찮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내가 알고 있으니 어느 하나 빠진 것 없이 꼼꼼히 챙겨가며 집을 지었다. 어디든 내 손이 거치지 않은 곳 없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허술하지 않도록 두 번 세 번 점검하다보니 일이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공정은 한 곳도 빈틈이 없었다.  유복래 어르신■ 곶감한테 배우는 인생의 마감질 옥상엔 곶감을 말리는 덕장을 따로 올렸다. 1층에 비해 바람도 자유롭게 드나들고 사방이 틔여 햇볕바라기도 좋았다. 농촌의 겨울은 농한기라서 일감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비어있는 시간을 놀거나 마실 다니기에 열중할 시기였지만 쉬지 않고 곶감을 말렸다. 내 나이 70살이 되던 해 흙손을 놓기로 했다. 45년 동안 살던 미장이의 삶을 내려놓기로 한 것이었다. 남은 것은 골병든 몸 뿐이었다. 무거운 벽돌을 쌓고 무거운 흙과 시멘트를 개어 바르는 동안 몸이 망가졌다. 미련없이 버릴 때와 떠날 때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70이 넘으면서 곶감에 매달렸다. 일하던 몸이라 가만 있을 순 없었던 것이다. 쉬고 있으면 편안한게 아니라 더 몸이 쑤시고 아팠다. 1월부터 설 전에 감나무를 전정하고 거름을 뿌렸다. 4월에 꽃이 피면 5월부터 감을 솎았다. 가을이 되면 꼭지를 알맞게 잘라 감을 땄다. 우리 과수원의 감이 부족하다 싶으면 주위의 감밭에서 주문하여 수량을 확보했다.많이 할 때는 곶감을 10동까지 했다. 100접이 한 동이니 1천접까지 깎아서 말린 거였다. 대부분은 가락동 공판장으로 보내고 특상품은 명절 선물용으로 비싼 값에 팔았다. 작년까지 곶감을 깎았으나 올해부터는 그만두기로 했다. 집사람이 교통사고로 많이 다쳤다. 병원에 입원했다가 5개월만에 퇴원 했는데 오른쪽 움직임이 둔해졌다. 얼굴에도 흉터가 남았고 팔고 다리도 성치 않아서 움직임이 불편하다. 병원에서는 재수술을 하라는데 집사람은 그냥 살겠단다. 걸어다닐 수 있으니 지금보다 더 아프지만 않으면 된다고 한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사람 특유의 여유와 인내심이라고나 할까? 평생 호강을 시켜주기는커녕 이제 아프고 저린 상처만 남은 몸이 되었다.묵묵히 뒤따르며 일만 하던 사람, 한 번도 대들거나 바가지 긁거나 잔소리 하지 않던 사람, 내가 하던 일이면 뭐든지 인정하고 믿어주던 사람, 네 명의 자식들도 살뜰히 보듬어 키운 사람, 아픈 몸이지만 나를 위해 따끈한 밥을 짓고 구수한 숭늉을 끓이는 사람.나무처럼 뿌리를 깊이 내린 우리, 나무 향처럼 은은한 우리, 곶감처럼 깊은 단내로 생을 마감하는 우리가 되자고 아내와 소리 없이 약속한다. 나도 약속을 지킬 것이며 당신도 나를 따라와 주오. 고마운 사람, 나도 내내 보답하리다. 해마다 백운리를 찾는 철새들, 아직 청정지역을 지켜내고 있는 내 고향 백운리.해마다 백운리를 찾는 철새들, 아직 청정지역을 지켜내고 있는 내 고향 백운리. 

인물일반 | 김경희 시민기자 | 2021-02-05 11:30

코로나19로 우울증도 인다는 코로나블루의 시대입니다. 경제가 어려우니까 삶도 팍팍해지고 오락가락하는 한파 때문에 한층 움추려드는 시절입니다. 그럼에도 바닥에서 변방에서 온기는 여전히 흐르고 있습니다. 고마운 사람, 고마움은 느끼는 사람 모두가 소중합니다. 이번 주에는 새벽 일찍 마을 눈을 싸그리 치운 옥천읍 대천리 최갑석 이장의 선한 미담 소식을 전합니다.  아울러 안남면 종미리 전병례씨 역시 마을에 쌓인 눈을 깨끗이 치웠다고 하는데 그 소식을 아름답게 전한 윤정옥 할머니의 이야기를 싣습니다.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입춘을 앞두고 마음에 봄을 들이게 합니다.윤정옥 어르신 / 사진 윤지영 인턴기자‘백만매택(百萬買宅) 천만매린(千萬買隣)’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좋은 집을 구하는데 백만금을 지불하고 좋은 이웃을 구하는 데는 천만금을 지불한다는 뜻이다. 나 하나 건사할 집 한 채 구하기조차 쉽지 않은 세상에, 좋은 이웃을 고를 여유가 어디 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온기를 전해주는 이웃 한 명이 절실하다.2016년 127만 명이던 홀몸노인 수가 2020년 158만 명까지 늘어났다. 노인 고독사도 급증하고 있다. 국가가 노인 돌봄이나 방문 요양 서비스 같은 대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급속한 노령화 속도에 비해 제도의 완성도는 턱없이 떨어진다. 게다가 고독은 타인과의 관계 단절에서 비롯된다. 제도만으로 개인의 내밀한 영역을 완전히 보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장 내 옆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부터 일상 속에서 위로받고 연대할 때, 비로소 고독을 이겨낼 수 있다.그래서 이웃과의 소통 증대를 통한 마을 공동체 복원은 시대적 요청인 것이다.안남면 종미리 미산마을에 홀로 사는 윤정옥(89)씨는 요새 좋은 이웃을 만난 행복감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윤씨는 “요즘 시골에는 저렇게 좋은 양반이 참 드문데, 내가 신문에 꼭 한 번 내고 싶어서 전화를 했다”며 신문사에 제보를 해왔다. 어떤 이웃을 만났기에 용기를 내 제보 전화까지 했던 것일까. 지난 20일 안남면 종미리 윤정옥씨의 집에서 윤씨를 직접 만나 자세한 사연을 들어봤다.옥천 토박이인 윤정옥씨는 안남면 독락정 부근에서 태어나 안남초등학교(11회)를 졸업했다. 결혼 후 종미리 미산마을로 온 뒤 10년을 살다가 5남매 교육을 위해 상경했다. 사글셋방까지 얻어 악착같이 5남매를 키워냈지만, 서른 살짜리 큰아들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기쁨과 슬픔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미산마을로 되돌아온 것이 지난 1986년, 올해로 35년째다. 평생 함께해오던 남편과는 6년 전 영원히 이별했다. 자식들은 모두 서울 부근에 살고 있어서 1년에 두 번도 보기 힘들다. 양 무릎과 척추 수술을 했던 탓에 혼자서는 화장실조차 다니기 어려운 윤씨다. 그나마 반려견 초코가 적적함을 달래주고 있었고, 매일 오전에 다녀가는 요양보호사도 거동이 불편한 윤씨에게 의지가 되어주고 있었다.그러던 지난해 봄, 이웃 주민 전병례씨가 마을로 이사를 왔다. 전씨의 고향도 종미리다. 전씨의 부모님이 이곳에서 한약국을 운영했었는데, 전씨가 정년퇴직 후 여생을 보내기 위해 부모님이 살던 곳으로 내려온 것이다. 그는 다른 젊은이들과는 첫인상부터 달랐다. 요즘 사람답지 않게 동네 어르신마다 살갑게 인사하며 다가갔다. 병원에 가야 하는 어르신이 있으면 전부 차로 데려다주고, 가는 길에 홀로 걷는 노인이 보이면 태워 갈 정도로 이웃 주민을 지극히 살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산타 분장까지 하고 동네 전체에 과일, 과자 음료수 등을 돌렸다. 덕분에 미산마을 사람들은 예년보다 훈훈한 연말을 보낼 수 있었다.“지난주에는 눈이 많이 왔는데 저기 들어오는 경율당에서부터 동네 구석구석 땀을 철철 흘리면서 2시간 넘도록 눈을 쓸더라고요. 노인네 미끄러진다고 우리 집 앞마당까지 와서 다 쓸고 갔어요. 나는 저런 사람 처음 봤어요. 요즘 시골에 저런 양반이 참 드문데 너무 감사하고 고마워서 한 번 신문에 내고 싶었어요.”고마운 이웃을 꼭 신문에 내고 싶다는 할머니의 바람을 전하기 위해 전병례씨 배우자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전씨는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일이 아니라며 인터뷰를 정중히 사양했다. 그가 왜 그렇게까지 이웃을 정성스럽게 대하는지 자세한 이유를 들어볼 순 없었지만, 그의 선행이 주민들의 찬 마음을 따뜻하게 녹이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윤정옥씨에게 사연을 전해 듣는 동안, 하늘로 떠나보냈다는 큰아들이 스쳐 지나갔다. 큰아들이 살아 있었다면 전씨와 비슷한 연배였을 터. 윤씨가 전씨에게 느끼는 감정은 단지 이웃에게 느끼는 그것을 넘어선 듯 보였다. 그들은 조금씩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가고 있었고, 미산마을에는 공동체적 유대감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렇게 미산마을 사람들의 고독은 서서히 옅어져 갔다.

인물일반 | 홍석희 인턴기자 | 2021-01-27 16:32

바르게살기 옥천군협의회가 새해를 맞아 어려운 이웃들에게 성금과 물품을 전달했다.바르게살기운동 옥천군협의회(회장 공건표)가 새해를 맞아 연이은 기부로 눈길을 끌고 있다. 22일에는 지역 내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달해달라며 옥천군에 210만원을 전달한 데 이어, 30일에는 복지관 등에 설 선물을 전달할 예정이다.바르게살기는 매년 설과 추석마다 기관과 사회단체에 기부를 하고 있다. 매년 공건표 회장이 활동하는 국사암에서 모인 성금을 모아 지역사회에 전달해오고 있는 것. 22일에 전달된 성금은 충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로 전달돼 지역내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달될 예정이다.오는 30일에는 설을 맞아 물품을 전달한다. 먼저 옥천군 노인장애인복지관에 KF94 마스크 1천200장과 과자 400상자를 전달하고, 옥천군고엽제전우회에도 성금 122만원과 과자 100상자, KF94마스크 1천200장, 쌀 130kg을 전달할 예정이다. 이어 군북면 소정리에도 과자 55상자와 KF94마스크 160장을 전달할 계획이다.공건표 회장은 “매년 명절이 되면 어려운 이웃들과 고마운 분들에게 선물을 전달하고 있다. 매년 국사암 신도들과 회원들의 도움으로 해왔다”라며 “연 네 다섯 번씩 기부를 한다. 어려운 시절이지만 훈훈한 설 명절 되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인물일반 | 권오성 | 2021-01-27 16:04

지난해 1월16일 취임한 이철순 체육회장은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사실상 대부분 체육회 사업을 못했다. 생활체육 활동 대부분이 중단되거나 연기되고, 도민체전도 순연됐다. 비록 2020년은 별다른 두각을 내지 못했지만 2021년은 옥천군체육회 법인화라는 중요한 과제가 있어 기대를 모은다. 법인화를 통해 체육회가 보다 자율성을 확보하고 지역 생활체육인들의 권익향상에 이바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18일 이와 관련한 이철순 체육회장의 생각을 들어봤다. 이철순 옥천군체육회장■ 체육회장으로 활동을 시작한지 1년이 지났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그간 코로나19 감염병 확산으로 모든 분야 활동이 중단된 상태다. 우리 체육회도 활동을 전혀 하지 못했다. 지난해에는 정구대회 등 두 가지 정도만 했는데, 아쉬움이 많다. 올 해는 보다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취임 초기 이사회와의 갈등으로 홍역을 치른 바 있다. 이후 봉합은 잘 이뤄졌는지 궁금하다.무슨 일이든 변화가 시작되는 시점에는 갈등과 이견 등이 있게 마련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다섯명 이상 모이지 못하고 있어 서면으로 이사회를 진행하고 있고, 갈등도 해소했다. 앞으로 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 지난 1년은 코로나19로 제대로 된 활동을 못했다. 어떻게 평가하시나.본의 아니게 이렇다 할 활동을 못해 체육인들에게 죄송한 마음이다. 우선 체육시설을 개방하지 못하면서 체육인들의 불편이 컸다. 정부 방역지침에 따라야 해 불가피한 점이 있다고 본다.당초 계획했던 거의 모든 행사가 취소됐다.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알기 어렵다. 묘안은 없지만 홈페이지나 유튜브, 밴드 등을 통해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운동 동영상을 지난 6월부터 매월 3건씩 업로드 하고 있다. 체육회 차원의 봉사활동도 다양하게 했다. 여름 수해시 복구작업도 하고 체육관 및 체육시설 방역소독, 하천정화활동, 헌혈 등 공동체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사무국 운영을 투명하게 하고자 업무추진비 사용내역을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다. 하나하나 차분하게 해나가겠다.■ 지방체육회 법인화로 옥천군체육회에도 변화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바뀌나?대한체육회 차원에서 전국에 일률적으로 가이드라인을 보낼 것으로 예상한다. 아직까지 구체적인 지침은 없는 상황이다. 6월8일까지 지방법원에 설립등기를 마쳐야 해 하반기에는 법인화가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법인화가 되면 무엇보다 독립성이 크게 향상될 것으로 기대한다. 체육회 직원들이 법인소속 정규직이 된다. ■ 실질적인 옥천군체육회 법인화를 위해서는 재원과 자율성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평가된다.지금은 지자체 예산이 체육회 예산 전부를 차지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예산이 모두 군에서 나오고, 군의 판단에 따른 예산편성을 받아야 해 독립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법인화가 되면 아무래도 기준이 생기니 자율성이 더 보장될 것으로 기대한다. 체육회 활동이 보다 활발해지려면 결국 자율성 확보되어야 한다. 기존에는 군수가 회장을 했고 지금은 민간이 하지만, 제도적 변화가 없다보니 일종의 과도기적 상황이다. 법인화가 되더라도 단체장의 관심도나 의중에 따라 좌우될 환경이긴 하나, 어느 정도 과제가 해결될 것이라 기대한다. ■ 마지막으로 주민들에게 한마디.코로나19로 힘들었던 지난 1년이 올 해도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 조금만 더 힘내면 곧 자유로운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옥천군체육회도 올 해 더욱 열심히 뛰겠다.

인물일반 | 권오성 | 2021-01-22 11:11

정지영 담당자“가계 사정이나 부모 가치관에 따라 ‘용돈’은 후순위로 밀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청소년에게는 교우관계를 형성하고, 자기결정권을 주는 소중한 수단입니다. 청소년 수당은 청소년이 자신의 권리를 찾고 성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옥천군청소년수련관 청소년팀에 ‘청소년 수당’ 담당자가 생겼다. 바로 정지영 담당자(39, 가화리)다. 군청소년수련관 청소년팀은 2019년 열린 충북동남부4군 청소년정책토론회에서 청소년 당사자들이 ‘바우처 카드’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청소년 수당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지난해 우리 고장에서 열린 청소년기본소득 공론장과 옥천군의회 유재목 부의장의 청소년 바우처 조례로 청소년 수당 정책은 활력을 얻었다.청소년 수당은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현금을 지급하는 기본소득과 맞닿아 있다. 옥천군은 1년에 한 번 만13~15세 청소년에게 7만원, 만16~18세 청소년에게 10만원을 향수OK카드로 지급하는 것으로 포문을 열었다. 현재는 보건복지부의 협의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 마무리되면 올해 4~7월 조례 신설 및 예산반영을 통해 하반기 내에 시행할 계획이다.■ 향수OK카드 접목 … 지역과 연계정지영 담당자는 “향수OK카드를 통해 지역과 청소년이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며 눈을 반짝였다. 재난지원금 등으로 이미 효과를 보았던 카드형 지역화폐가 청소년 수당과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라는 판단이다. 앞서 청소년 바우처 정책을 시작한 전북 김제시에서는 만16~18세의 청소년에게 매월 10만원 이내의 포인트를 청소년드림카드로 지원한다. 경남 고성군은 만13~15세 청소년에게 월 5만원, 만16~18세 청소년에게 월 7만원을 청소년 꿈키움 카드로 지급한다. 옥천군의 경우 연 1회 지급으로 금액은 적지만, 바우처보다 사용처가 훨씬 다양하다는 특징이 있다.그는 “지역소비를 통해 ‘지역’을 알아가는 것은 물론 지역상권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본인 명의로 수당을 지급받고 휴대전화 앱을 통해 소비습관도 형성할 수 있고, 분실 위험도 적다”고 말했다. 이어 “1년에 한 번으로 시작해 점차 늘려갈 계획이다. 시스템을 구축하고 매달 지급할 때 청소년 수당의 긍정적 효과가 드러날 것”이라고 덧붙였다.다만, 향수OK카드 발급 연령이 14세이상인 만큼 13세 청소년에게는 제약이 있다. 2018년 금융위원회와 금융 감독원이 ‘카드이용 관련 국민 불편 해소방안’을 통해 만 12세 이상이 체크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도록 했지만, 향수OK카드를 담당하는 코나아이와 계약 당시 약관은 만14세 이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 약관이 개정되지 않는 한 13세 청소년은 어쩔 수 없이 지류형 지급이나 보호자가 대신 발급해 준 카드에 충전하는 방식 등을 고려하고 있다.■ 청소년기 관계와 자아형성 돕는 수단 … 지역문화 형성도 기대청소년 수당은 단순히 금전적 지원이 아니다. 경제적 자립이 어려운 청소년이 관계를 형성하고, 자기 결정권을 갖도록 만드는 수단이다. 정지영 담당자는 청소년 수당이 용돈의 차이에 따른 불평등 완화를 통해 ‘친구들과 함께 무엇을 할지’ 논의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것이라고 봤다.지역에 대한 청소년의 유대감, 청소년 정책을 고민하는 지역문화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하기도 했다. 그는 “지역에서 벌어지는 논의를 통해 다시 한 번 지역과 ‘청소년의 시각’에 대해 생각해보았다”고 말했다.이어 “필요할 때마다 달라고 하는 것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의 의미가 청소년들에게 많이 다르다는 것을 어른들이 생각해야 한다”며 “청소년 수당은 건물을 짓는 것처럼 대규모 자금이 들지 않으면서 청소년 본인과 지역이 연결될 수 있는 꼭 필요한 정책”이라고 덧붙였다.군 단위라고 못할 일이 아니며 오히려 지역에 대한 애정을 가져오는 정책이 될 것이라는 정지영씨. 그는 향후 청소년과 지역이 모두 ‘행복한 곳’이 되도록 청소년 수당 확대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예정이다.우리 고장에 처음 생긴 청소년 수당 담당자, 청소년 수당이 청소년과 지역이 더 행복한 옥천을 만들어 나가길 기대한다.

인물일반 | 이해수 | 2021-01-22 11:07

옥천여중 2학년 5반 학생들이 옥천읍 행정복지센터를 방문하여 성금을 전달했다. (사진제공:옥천군)2학년5반 학생들부터 담임교사까지 24명의, 우리 이웃을 향한 따뜻한 정성이 모였다. 지난 8일 옥천여자중학교 2학년5반 이름으로 옥천읍행정복지센터에 성금 20여만원이 전달됐다. 지역 내 어려운 이웃들에게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였다. 이날 2학년5반 반장과 부반장, 담임교사 세 사람은 성금을 전하기 위해 옥천읍행정복지센터 민원실을 찾았다. 전 학급 학생 23명이 모두 센터를 찾을 수 없어, 학급 대표로 성금을 전하러 온 것. 성금은 2학년5반 학생들이 6월부터 12월까지 모았던 학급비였다. 학급끼리 정한 규칙을 제때 안 지켜 벌금을 내거나 학급에 필요한 것들을 사기 위해 곰돌이 저금통을 교실 한 곳에 비치해 돈을 모았다. 저금통 안에는 10원부터 지폐까지 학생들의 손때가 묻은 돈으로 가득했다. 학급비가 성금이 된 건 2학년5반 연말 학급회의의 결과였다. 2학년5반 학생들은 학급비를 보다 의미 있게 쓸 수 있는 방안에 대한 회의를 진행했다. ‘학급비를 기부하자’는 의견에 학생들은 만장일치로 동의했고, ‘위안부’ 할머님들에게 기부하자는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학생들은 최종적으로 ‘우리 지역을 위해 쓰자’고 결정했다.총 20만 1천410원. 2학년5반 학생들이 모은 학급비와 담임교사가 돈을 일부 더 보태 마련한 성금이었다. 학생들의 따뜻한 마음을 옆에서 계속 지켜본 김나영(42) 담임교사는 “아이들이 학급회의에 나온 ‘학급비를 기부하자’는 의견을 만장일치로 받아들인 게 참 기특했다. 우리가 사는 지역 이웃을 위해 직접 성금을 기부하면서 지역에 대한 마음을 생각해보는 기회가 된 것 같아 좋았다”고 말하며 ‘2학년5반 학급의 조용한 선행’이 알려진 것에 쑥스러워했다.  특히 성금을 전하러 온 학생들과 담임교사를 만난 김성종 옥천읍장은 “크지 않더라도 뜻깊은 돈이었다. 아직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며 “학생들은 오히려 선행을 칭찬받는 것에 부끄러워했지만, 학생들이 정성가득 모은 성금에 담긴 따뜻한 마음을 잘 전달하겠다.”며 2학년5반 학생 모두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2학년5반 학급에서 전한 성금은 겨울 한파로 인한 난방취약계층에 지원될 예정이다. 김윤주 옥천읍행정복지센터 맞춤형복지팀장은 “요즘 혹한기인데도, 난방취약가정에서는 난방비가 많이 나오는 게 무섭고 그 돈이 아까워 불을 안 때는 곳이 많다”며 “20만원이면 기름 한 드럼 넘게 지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취약계층 한 가정에 난방 연료인 기름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인물일반 | 민영빈 인턴기자 | 2021-01-15 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