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은 반전의 연속인 분이셨다. 옥천이 고향일까 여쭈었더니 충남 연기군 동면이 고향이셨고 유년시절에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성장하셨다. 다시 월남하셔서 천안, 부강을 거쳐 옥천으로 오셨다. 한창 경기도 광주 신도시 개발 중이던 때 인쇄소를 하시며 돈을 쓸어 담아 본 적도 있으셨다. 시골 살이를 마음속에 품고 있던 어르신은 옥천으로 다시 내려오셨다. 지금 어르신의 직업은 뻥튀기 사장님. 하얀 피부에 영화배우처럼 미남이신 어르신은 “아휴 말도 마! 기가 맥혀”를 수십 번이나 되뇌셨다. 인생의 굴곡진 길도 걸었고 돈, 명예도 가져보았다. 이제 무명인(無名人)이 되었지만 어르신의 발자취가 누군가에게 사랑 하나, 버틸 수 있는 힘 한번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삶을 존중해야 한다.■ 시대의 위협에 정착할 수 없던 유년시절연기군 동면에서 살던 나의 유년은 풍족했다. 일본말을 잘하시던 아버지는 우체국에 다니셨다. 우리는 그 덕에 남들 끼니 걱정하던 시절에 귤을 먹는 호사를 누려보기도 했다. 평화롭던 내 유년은 큰아버지가 이북으로 올라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우리 가족을 데리고 함경도 원산으로 올라가셨다. 내가 여섯 살 남짓 됐을 나이에 원산항은 어린 나에게 호기심 천국이었다. 원산항 갈마반도는 물 반, 고기 반 이었다. 간간이 주인 없는 물고기들은 우리 차지였는데 팔딱거리는 물고기가 손에서 미끄러지면 그걸 잡느라 한바탕 소동을 치렀다. 원산항 주변을 키 크고 얼굴이 굳은 러시아 군인들이 지나갈 때는 소름이 돋기도 했다. 동생은 네 살, 내가 여섯 살 무렵이었다.우리는 회령으로 터를 옮겼고 아버지는 회령에서도 우체국에 다니셨다. 아버지가 우체국에 다니니까 살림의 여유가 있어서 이북에 정착할 수 있었다. 한 날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러시아 군용기가 일본 군인들을 폭격했다. 러시아군인들이 조선인 이쪽, 일본사람 저쪽으로 가라며 손가락을 가리켰다. 목숨이 그 손끝에 달렸다. 러시아 군인들이 관직에 있는 일본 사람들을 죽이는 광경을 동네에서 목격했고 사람들은 겁에 질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일곱 살 무렵의 나는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만 오줌을 지릴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어린 나도 시대의 불행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군 복무시절그때 벌써 이북에 공산주의가 들어왔다. 공직자나 부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해서 우체국에 다니시던 아버지가 짐을 싸자고 하셨다. 이불이며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기고 소 구루마를 세 얻어서 마을에서 회령까지 걸어 나왔다. 회령에서 기차타고 청진까지 왔다. 큰아버지와 청진항에서 만나 청진 연락선을 타고 나진까지 오는데 파도가 요란했다. 마치 우리 앞에 불어올 회오리바람처럼 말이다. 나진에서 하루자고 이튿날 원산으로 왔다. 그 때는 38선이 열려 있을 때라 원산에서 열차를 타고 경기도 연천 전곡까지 왔다. 밤에 한탄강을 걸어서 건너야 했다. 어른들 허벅지까지 물이 차올라 우리들은 어른들 목말을 타고 강을 건넜다. 순간순간에 목숨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때였다. 어린아이들은 다들 겁을 잔뜩 먹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아휴 말도 마! 기가 막혀. 우리 가족은 다들 강을 건넜는데 나만 못 건너고 강 건너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얼마나 애가 타는지, 한탄강이 다 떠내려 갈 정도로 울고 또 울었지. 큰 아버지가 나를 목말을 태워서 겨우 건넜어. 걷다가 또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려서 그걸 찾겠다고 또 울고불고...꼭 총소리가 나야 전쟁인가. 그런게 전쟁이야. 아휴 말도 마! 기막혀. 전곡역에서는 미군들이 줄을 서서 우리들한테 DDT를 뿌려 대는 거야. 그때는 머리에 이들이 많았잖아. 그 살충제를 사람들한테 그냥 사정없이 뿌려. 그냥 벌레취급 하는 거지. 아휴 말도 마, 기가 막혀”우리는 용산역으로 와서 천안 외갓집에 짐을 풀었다. 외할아버지는 백영사라는 한약방을 하시면서 영사약이라는 한약을 만드셨는데 솥단지에 불을 떼서 한약을 만들던 그림이 눈에 선하다. 우리는 천안 풍세면에서 살다가 충남 연기군 동면 명학리로 이사를 갔다. 충북 부강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 6.25 전쟁이 터졌다.부강초등학교 연흥 분교에서 졸업을 했다. 나는 학교 다니는 내내 반장을 했었다. 우리는 옥천 안내 동대리에 친척이 살고 있어서 열다섯 살 정도에 다시 옥천으로 내려왔다. 부강에서 걸어서 걸어서 안내면 동대리까지 왔다. 새벽같이 출발해서 밤이 되어 안내에 도착했는데 친척집에서 된장찌개를 저녁밥상으로 받아먹었다.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된장냄새가 날 때부터 연신 부엌 쪽을 바라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 떴더니 아, 입안에 퍼지는 그 된장 맛에 하루 종일 걸었던 고단한 여정이 다 녹아내렸다. 이날까지 그때 먹어본 된장찌개만큼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다. 물론 산해진미는 먹어봤지만 그 입안을 감아 돌던 구수한 맛은 어떤 요리도 흉내 낼 수 없었다. 동대리에서는 밥 먹으면 나무 하러 다니고 그날이 그날이었다. 형님과 나는 둘 다 머리가 좋아 그 시골생활이 운신의 폭이 너무 좁아서 고민하던 끝에 결단을 내렸다. 형님은 서울로 나는 대전으로 나왔다.■ 대전에서 첫 직장, 동방 제책사대전 대흥동 동방 제책사라는 노트 공장에 취업을 했다. 공장에 여직원이 150명, 남직원이 50명인 규모가 큰 노트공장이었다. 전국으로 노트를 보급할 정도였고 한창 유행하던 바둑이판 공책 등을 인쇄하는 회사였다. 나는 낮에 일하고 밤에는 중도 극장 골목의 영어수학 학원을 다니며 못 다한 공부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고 있었다. 나는 성실하게 일했고 인사성이 좋았다. 아침에 제일 먼저 출근해서 사장님이 오시면 공장이 떠나가라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다. 가진 것 없던 나의 유일한 승부수였다. 일머리도 좋아 어린나이에 공장장까지 했다. 제대 후에 2년 더 공장을 봐주고 내가 직접 운영하는 인쇄소를 1967년도에 시작했다. 당시에는 대전에 열군데 정도 인쇄소가 있었다. ‘예광 인쇄소’라는 간판을 내 걸었다. 그날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원동 사거리 뒷골목에서 비싼 기계도 폼 나게 들여놓고 종업원을 고용했다. 처음 시작인데 분수에 넘치는 장만을 하고 3년 만에 막을 내렸다. 내 나이 서른 살에 25살 엄순녀와 결혼하면서 인생의 새로운 반전을 꾀하게 됐다. 아내는 총명하고 배포가 큰 여자였다. 인쇄소를 그만두고 서울 숭실대 앞으로 이사 가려고 서울에서 집도 알아봤다. 이사준비를 마치고 고속버스 안에서 우연히 ‘주간한국’ 신문을 보게 되었다. 신문을 펼치자마자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타이틀은 ‘경기도 광주 대단지 조성 계획’, 대전만한 도시가 경기도 광주에 들어선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바로 이거다 라고 결정했다. ■ 1970년대, 신도시 경기도 광주에서 풍운아가 되다 형님과 함께 천호동에서 버스를 타고 경기도 광주에 도착했다. 광활한 벌판에 천막들이 뿌연 연기에 가려 날개만 펄럭이고 있었다. 서부 개척 영화의 한 장면을 옮겨 놓은 듯이 미래가 보였다, 희망이 보였다. 서울 판자촌을 철거하고 그 이주민들이 대거 광주로 터전을 옮겨왔다. 1972년도, 광주에 정착하는 시점에 관청이 들어오고 서서히 학교들이 생기면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12만까지 차올랐다. 나는 재기를 선언하고 ‘숭문당’ 이라는 인쇄소 간판을 걸었다. 내 인생 최대의 황금기였다. 관공서와 학교에서 쏟아지는 인쇄물이 차고 넘쳤다. 동사무소의 기본 서류인 초본 등본 인감 전입신고서부터 학교 출석부, 연초에는 계획서, 졸업 때는 상장, 밀려드는 인쇄물에 밤새는 줄 모르면서 일하고, 돈 세면서 아침을 맞았다. 짧은 시간에 집을 몇 채나 샀다. 급히 번 돈은 화를 불러일으키는 법이다. 인쇄소 하면서 일식 집 ‘미락’을 운영했다. 규모가 엄청 났는데 개업 날은 문전성시를 이뤘지만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이야 횟감 양식을 하지만 그때는 대부분 손으로 잡아 올린 횟감들인데 너무 비싸서 마진을 제대로 챙길 수 없었다. 지인에게 당시 억대의 큰돈도 빌려주며 화근을 불러일으켰고 일식집도 너무 큰 규모라 오래 버텨내지 못했다. 병행하던 인쇄소가 큰 버팀목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큰 딸이 공부를 잘해서 주소를 강남으로 옮기고 서울로 여고를 보내면서 학구열까지 남한테 뒤지지 않았다. 경기도 광주에서는 회오리바람처럼 풍운아가 되기도 하고 쇠락의 씁쓸함도 맛보았다. 일장춘몽 같은 시절을 보내고 나는 옥천으로 내려왔다.그리운 아내, 사랑하는 손주들■ 1992년도 옥천으로 귀향하다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시골, 안내면 동대리에 땅을 사고 1992년도에 옥천으로 오게 되었다. 집식구도 서울 큰 교회 전도사로 재직했던 경험이 있어서 동대리 수양관을 개관했다. 학생들 수련회 시설이나 농촌 체험학교 시설도 계획했었다. 계획만큼 성과가 없었지만 남들 보다 항상 앞서가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먹고 살 궁리를 하다가 보은 5일 장날에 튀밥 튀기는 장사를 보게 되었다. 일도 재미있어 보이고 돈도 제법 될 것 같았다. 시골에 마땅한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이라 뻥 튀기도 수요가 많았다. 호기심이 생기면 바로 추진하는 성격이라 나는 대구 칠성시장에 가서 뻥 튀기 기계를 사가지고 와서 시작했다. 마음만 앞서서 구식 기계만 사고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다시 대전으로 나가 한번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막상 전을 펼쳐놓고 입을 제대로 떼지 못했다. 아는 사람이라도 보면 어쩌나 뒤통수가 따갑기도 했다.“뻥튀기 사세요” 라는 말이 도저히 입 밖으로 안 나왔다. 뭐든 처음은 낯설고 내 옷이 되려면 숙련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도 예외일 수 없으며 지금 나는 그 세월을 지나 옥천시장의 뻥 튀기 사장님으로 상인회장을 맡고 있다.5년 전, 2016년 2월 투석 중 이던 아내를 너무 황망하게 보내는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다. 아내는 그날 거실에 나와서 외출준비를 하며 오버코트까지 입었는데 어지럽다고 안방에 잠시 누웠다. 그 잠깐 사이에 숨이 넘어갈 지경에 이르렀다. 아내는 이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나도 내 정신이 아니었다. 119를 불러서 성모병원으로 갔다가 시간만 지체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로 떠났다. 서울 있는 큰딸이 헬리콥터까지 띄워서 혼신을 다했지만 아내는 골든타임을 놓치고 말았다. 곁을 지키던 아내를 준비 없이 떠나보내면서 회한과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와 견뎌내기까지 시간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아내 떠난 빈집을 지키고 있지만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청년처럼 일할 수 있는 내 사업장이 있어 마음이든 살림이든 궁색하지는 않다. 우리 삼남매가 사회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어 애비로서도 흐뭇하다. 고즈넉한 옥천에서 소박한 일터를 가진 노년의 삶이 내게 족하다. 이제 항구에 닻을 내리고 잔잔한 파도를 지그시 바라본다. 감읍(感泣)한 하루다.아빠, 오늘이 소한이에요.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들이 이어질 거래요. 새해 첫날 옥천 집에서 태어난 지 일주일 된 강아지 새끼들을 걱정하는 제게 아빠는 그러셨지요. “토리가 품어주니까 괜찮아” 겁 많은 진돗개 토리가 엄마가 되어 새끼를 품은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삼남매를 품어 키운 엄마아빠의 시간들을 생각했어요. 돌아보면, 기억하는 것보다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들의 사랑으로 살 수 있었어요.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빠와 8남매를 키우셨듯이, 손주들을 품어 주셨듯이. 앞으로도 아빠와 삼남매, 손자손녀인 가람, 산, 숲, 들, 단과 함께 엄마 품 같은 시간을 채워가길 바래요. 더 많이 더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하늘나라에 계신 엄마가 기뻐하시겠지요. - 서울에서 아빠의 딸 올림
인물일반 | 김경희 시민기자 | 2021-01-15 11:24
대문 없는 집에는 햇살이 한가득 들어와 마당을 꽉 채우고 있었다. 얼마 만에 눈살을 찌푸리며 햇살을 맞이한 건지 셀 수도 없다. 어르신 집 뒤로 키 큰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쭉쭉 뻗어 호위무사 마냥 어르신을 지켜주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든든했다. 어르신이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며 푸념대신 추억으로 곱게 싸맨 지난 시절 인연들을 꺼내놓으셨다.■ 시대의 잔상들 1942년생 보은군 삼승면 원남이 고향이다. 원남에 살다가 마항리로 시집왔으니 옥천 끝에서 끝으로 시집을 왔다. 6,25전에 능월초등학교 다니다가 전쟁 통에 공부 끈도 놓아버렸지만 살면서 얻은 경험들로 물리가 트였다. 6,25때는 청산까지 피난을 가보기도 했다.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다. 동네에 들어온 인민군들이 물 떠와라, 밥 내놔라, 총부리를 보여주면서 겁박을 했지만 큰 불상사 없이 그 험한 시절을 넘겼다. 9살 무렵이니 한창 겁 많을 때라 자다가 가위도 눌려봤지만 사람 죽어나가는 무시무시한 꼴을 눈앞에서 보지는 않아서 무사히 넘겼다고 위로할 수 있겠다. 한적한 시골살이라 집안일 돕는 게 내가 밥 값하는 전부였다. 부모님 농사지으실 때 새참도 날라드리고 쇠풀도 뜯어 먹였다. 농사며 집안일에 내 손을 보태면서 큰 애기 시절을 보냈다. 시골 사는 큰 애기들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집올 때 가져온 재봉틀, 60년 친구다. ■ 베틀 만들던 아버지, 팥 각시 같던 어머니부모님이 농사를 짓다가 베 짜는 틀을 만드는 일을 하시면서 그 놈을 팔러 상주며 경상도를 같이 돌아다닌 그 시절은 남달랐다.아버지 함자는 박용하, 키가 작고 순한 양반이었다. 어머니는 조정자, 아버지보다 키가 컸던 여장부였다. 훤칠한 키에 미인이셨고 배포도 있던 분이라 팥 각시 같았다.부모님이 베 짜는 틀을 만들어서 팔러 다니셨는데 나도 따라다니면서 장사하는 걸 어깨 넘어 구경하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길쌈이 생활의 큰 방편이라 아버님의 베 짜는 틀 제작 기술이 돈 벌이가 제법 됐다. 아버지가 베틀을 등짐으로 지고 어머니와 나는 보따리를 챙겼다. 며칠 타지에 나가 숙식할 수 있는 채비를 보따리에 담아 가슴에 안고 아버지 뒤를 따랐다. 탈것이 마땅치 않던 시절, 무작정 걸어서 상주까지 간다. 원남에서 보은 화령을 지나 상주까지 뚜벅뚜벅 걸어서 갔다. 새벽에 나가 저녁 무렵이 돼서야 우리가 그날 묵을 동네에 들어서면 남의 집 행랑채라도 얻어 하루 묵을 준비를 해야 한다. 어깨가 빠질 듯이 무겁던 등짐을 벗어던지고 아버지는 한시름 놓으셨다. 그 사이 어머니는 행랑채를 얻고 저녁 끼니거리도 챙겨오셨다. 어머니가 보여주신 그 미덕이 바로 내조였다. 땅거미가 금방 내려앉는 겨울이면 서둘러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어야 돼서 하룻밤을 지새울 집을 찾는 발걸음은 잰 걸음 일 수 밖에 없다. 그 시절에는 봇짐하나 매고 전국방방 곡곡을 돌면서 장사하는 봇짐장사들이 많았다. 저녁 무렵이면 시골 장터 옆 부락에는 장돌뱅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다들 어느 집 행랑채를 얻어 하룻밤을 묵었다. 주인장 인심이 더 후하면 다음날 아침까지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양푼을 들고 동네 이집 저집을 돌아 찬거리를 챙겨 와야 한다. 타지사람이 모르는 동네 와서 남의 집 문을 두드리고 밥을 얻어오는 일은 보통 얼굴 두껍지 않고는 못하는데 어머니는 그 일을 해내셨다. 어머니는 남편과 딸내미 먹이겠다고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오신다. 애처로워 보이지만 그 시절 그저 평범한 어머니들이 살아가던 방법이다. 별 뾰족한 수가 없던 우리네 삶이 다들 그랬다. 그렇게 부모님은 땀 흘려 돈을 모아서 논도 사고 밭도 사 모았다.지금 그 논밭이 어디 갔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그저 지난일이라고 말하겠다. 부모님이 마련했던 땅뙈기들은 그 시절에는 다들 아들 몫이지, 딸 차지가 어디 가당키나 한가. 시절을 탓할 수밖에.아들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집안을 건사하면서 땅도 세월도 사그라들었다. 그 옛날이야 그저 집안의 대소사며 굵직한 돈벌이는 다 남자들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세상의 진리인줄 알고 살았다.요즘 여자들은 우리를 바보라고 생각하겠지만 미련스럽게 살았던 삶이 부끄럽지는않다.물론 자랑도 아니다. 시대의 흐름 속에 몸을 맡기고 거슬러 왔다.그리움으로 남은 부모님.■ 29살에 남편을 떠나보내고 앞만 보고 살았다세상물정 모르는 시골여인으로 살다가 21살에 마항리로 시집을 왔다. 중신애비는 먹고 살만하다고 늘 그러하듯이 달콤한 말로 혼담을 건네지만 막상 시집와보니 손바닥만한 방 한 칸 부엌 한 칸 짜리 집이었다. 지금 지붕이며 안채 넓힌 것도 남편 먼저 떠나보내고 내가 벌어서 살만하게 하나씩 고쳐나갔다.시집와서 이집에서 60년이다. 남편 떠나보내고 50년이다. 남편은 나와 8년 남짓 살고 먼저 훌훌 떠나버렸다. 내 나이 스물아홉 살, 남편나이 서른네 살에 허망하게 떠나고 말았다. 남편은 옥천 건설경기가 좋을 때 모래 퍼 나르는 트럭을 운전했는데 차에서 떨어져 뇌진탕으로 우리 얼굴도 못 보고 떠난 안쓰러운 사람이다.그때 우리 큰아이가 6살, 작은 아이가 4살 이었다. 서울 시숙이 아이가 없어서 우리 큰 아들 키운다고 큰아들과 내가 서울 불광동 시숙 집에 올라가 있었다.아침밥상 물리고 나서 집배원이 찾아왔다. 집배원은 전보를 먼저 확인하고 오던 길이라 얼굴빛이 안 좋았지만 나는 정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전보를 꺼내더니 “박광씨 앞으로 왔네요.” 한마디 건네며 휭 하니 가버렸다. 나는 전보를 보자마자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던 다섯 글자가 내 가슴을 후벼 팠다.‘서정운 사망’6살 먹은 석태가 뭘 알기나 한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는데 하늘이 노래지고 말문이 막혀버렸다. 아이를 들쳐 업고 정신없이 기차를 타고 내려왔다. 석태 6살 석영이 4살 때였다. 29살, 서른이 되기도 전에 나는 두 아들과 함께 세상으로 나왔다. 이제 남편의 그늘은 없어졌다. 아이들을 건사하고 살거리를 마련하는 것이 온전히 나 혼자 만의 일이었다. 내 슬픔을 세상이 알아 줄 것도 아니며 나는 그저 내 길을 걸어야 했다.젊은 날 내 삶의 동력이던 두 아들.■ 알토란같은 마항리 여인들마항리 여자들이 생활력이 강해서 우리는 새댁 때부터 같이 먹고 살 거리를 찾아 나섰다.아침이면 골목 어귀에 모여 산 넘어 나무하러 다녔다. 여자들이 다 억척스럽게 살림을 일궜다. 우리는 전우들이다. 생활 이라는 전쟁 통에서 살아난 전우들이다. 새벽에 깊은 산속까지 들어가서 나뭇가지들을 꺾는다. 이리저리 손은 손대로 긁혀가면서 퇴침마냥 동그랗고 짱짱하게 묶는다. 발로 꾹꾹 눌러서 소담하지만 꽉 들어차게 묶는 것도 기술이다. 어깨에 척 둘러매면 몸이 기우뚱하지만 다리에 힘 바짝 넣어서 중심잡고 그길로 산을 내려온다. 무슨 힘으로 어떤 정신으로 그 무거운 걸 둘러매고 마을까지 왔는지...지금시간으로 따져보면 한 시간 정도를 그렇게 걸어왔다. 그것도 맨몸으로 걸어도 힘에 부치는 거리를 나무등짐을 매고 온다.고구마라도 삶아갔으면 또 몰라. 점심도 아까워서 빈속에 나무 짐을 하고 점심이 지나고 나서야 집에 도착했다. 부엌 아궁이에서 찬밥을 찾아 물에 후루룩 말아먹고 다시 밭 매러 호미 들고 나갔다. 일하러 태어난 사람들처럼 하루 종일 밭 매고 나무 짐하고 그렇게 사는 게 삶인 줄 알고 살았다.대전 인동 아이스깨끼 공장에도 다녀보았다. 아침이면 공장에서 차가 와서 우리 마을 아낙들을 데리고 간다. 우리는 그 차에 몸을 싣고 출근을 해서 그 작대기를 꽂은 아이스깨끼를 만든다. 그 시절 누군가 어깨에 양철통을 메고 다니며 “아이스깨끼”를 외치던 그 아이스깨끼를 우리가 만들었다. 그 얼음덩어리를 한 번 먹어보겠다고 아이들은 아이스깨끼 장사가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지금처럼 생크림이 어디 있고 온갖 치장을 해댄 아이스크림을 상상으로 그려보지도 못하던 시절이다. 대전 가수원 넘어 진잠에 있는 통조림 공장에도 다녔다. 공장 인력이 없어서 옥천까지 와서 사람들을 데리고 갔다. 복숭아 간소매 공장 이었다. 황도와 백도가 설탕물에 푹 담긴 그 복숭아 간소매가 그 시절에는 명약이었다. 피곤해도 한 입 떠먹으면 씻은 듯이 낳았고 속이 더부룩할 때 먹어도 체증이 훅 내려갔다. 그 설탕덩어리가 뭔 특효가 있었을까. 그저 먹거리없던 그 시절에 혀를 달래주던 그 맛에 모두 혼을 뺏긴 것이다. 다 마음먹기라는 거다. 그 때가 50대 초반이었다. 나도 산업역군으로 한 몫을 하면서 살아왔다는 반증이다.지금은 시니어클럽의 9988 사업으로 동네 다른 이와 2인1조가 되어 동네 사람들 8명의 안부를 챙기고 있다. 나보다 형님도 있고 나보다 어린 몸이 불편한 동생도 있다. 가사 일을 돕지는 않지만 집에 가서 말벗도 되어주고 필요한 것들을 챙겨준다. 9시에서 12시 까지 집집마다 방문한다. 아직 내 다리가 튼튼해서 돌봄 대상이 아니라 챙겨주는 이로 출근할 수 있어서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다. ■ 햇살 가득한 양달 집혼자 남아 어린 두 아들을 바라 볼 때는 빨래 방망이라도 실컷 두드리며 시름을 달랬다. 젊은 나이라 새 출발 하라며 부추기는 이들도 있었지만 우리 석태 석영이 보면서 하루하루 살아왔다. 후회가 없는 것 보니 내 나름으로 자립해나가며 하나하나 일궈가는 인생도 가을걷이 끝난 들판처럼 소담스러웠다. 80넘으면 다 소용없다. 덜 아픈 사람이 양반이다. 우리는 고생하면 살았어도 좋은 세상 구경은 하지만 우리 어머니들은 좋은 세상을 꿈도 꿔보지 못하고 살다 가셨다. 평생 일만 하면서 살아왔지만 그건 허물이 아니라 돌아보면 훈장이었다. 부모님을 위해 자식을 위해 살아왔고 이제는 오롯이 나를 돌보는 시간을 만났다. 동무들과 서로 안부를 챙기고 뒤꼍의 키 큰 소나무들이 떠 버티고 나를 지킨다. 이 강추위에 한낮의 햇살 때문에 눈이 부시는 양달 집에 살고 있다. 지금 내 삶이 양달이다. 이만 하면 됐지, 뭘 더 바랄까.
인물일반 | 김경희 시민기자 | 2020-12-21 15:41
내 몸에는 아무래도 바람이 가득 들어찬 모양이여,날이 풀리고 동풍이 불어오면 남녘의 갯바람이 못 견디게 그립단 말이지. 훌훌 날아가서 갯내음이 가득찬 포구로 가고 싶은 맘이 꿀떡이여. 마산(지금은 통합 창원시가 되었대) 양덕동 터미널에서 내려 10분만 걸어가면 어시장이 나와. 아줌씨들이 길거리에 쭈욱 고무대야를 펼쳐놓고 생선을 팔아. 손님이 이놈, 저놈, 골라서 주문만 하면 금방 회를 떠서는 상을 차려 주는데 대가리는 살아서 꿈틀거리고 투명한 살점은 윤기가 쫘르르 퍼져. 그야말로 빛이 반짝반짝 나는 것 같단 말이야. 초봄엔 도다리 쑥국을 먹었고, 쭈꾸미와 낙지를 데쳐 먹고, 보리누름엔 딱새라는 갯가재가 있는데 고놈도 참 맛났어. 미더덕이라는 해산물은 그 근처에서만 자란다더라고. 된장국으로 끓이면 아주 맛이 좋아. 뜨거운 걸 잘못 터트리면 입천장이 데여서 벌겋게 부어도, 맛에 취해 아픈 것도 모를 지경이었어.■ 노년을 싱겁지 않게 보내는 맛 거리들 요즘, 집에만 갇혀 있으니 살맛이 안 나. 나이가 있으니 어딘들 함부로 나다니지도 못하지만 요새는 또 코로나19 때문에 꼼짝달싹을 못하고 사네. 집에서 혼자 소주나 몇 잔 마시고 티비 보다가 노래 듣다가 그러고 사는게지 뭐. 채널만 돌리면 얼마나 많은 프로그램이 있어? 바다에 가고 싶은 맘을 달래려고 낚시프로를 자꾸 보게 돼. 이즈음에는 갯바위 낚시를 하면 감성돔과 노래미가 잘 문다지 아마. 꽁치도 잡히고 도다리도 자주 올라 올테지. 저수지에는 주로 붕어가 잡힐거야. 붕어 몇 마리 건져서 찜 해 놓고 꼴꼴꼴 소리 나게 소주 따라서 마시면 최고지. 재수 좋으면 메기나 가물치도 잡는데, 그건 열 번 낚시 갔다가 한 두 번 있을까 말까한 정도지만 말이야. 수초 사이로 돌아 댕기던 붕어가 배고플 때 입질을 한단 말이지. 그래서 붕어의 식사 시간을 맞춰나가면 잘 물어. 낚시꾼들이 새벽녘과 저녁 해질 무렵 낚시에 집중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겨.스포츠 방송도 자주 들여다 봐. 골프니 탁구니 이런 것보다 축구 배구를 좋아해. 나는 큰 공이 좋은가벼. 축구와 배구는 선수들이 자꾸 움직여야 되잖아. 나는 그런 활달하고 왁자지껄한 모습이 맘에 들어. 잔디밭에서 공 한 개를 놓고 22명이 두어 시간 뛰어다니는 축구를 보고 있으면 속이 시원해져. 내가 축구 선수가 되어 공을 따라다니며 바람을 가르는 게 느껴지거든. ‘슛’으로 골대가 철렁하고 흔들릴 때면 내 온 몸이 짜릿해져. 직접 볼을 찰 수는 없으니 티비 보면서 대신하는 게지. 외국팀은 레알마드리드팀을 좋아하지. 음바페라는 선수 볼 차는 것 보면 환상이지. 우리나라 손흥민 선수가 프리킥 넣을 때 봤어? 손흥민은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야. 아들을 고등학교 때부터 유럽으로 데려가서 유학을 시켰다잖아. 부자가 대단해. 참말로 대단한게지. 아들의 재능을 어릴 때부터 눈여겨 본 부친도 대단코, 아버지를 믿고 물설고 낯선 곳에서 열심히 훈련하여 세계적인 선수가 된 것도 대단한거여.이쯤 얘기했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어?나는 말이야. 청산면 백운리에서 태어났제. 그 시절 농촌이 다 그랬지 뭐. 우리 집이라고 별 수 있었겠어? 군대에서 운전을 배웠어. 내가 젊을 때 상당히 빠릿빠릿 했거든. 제대하고 나서 경찰서에 운전수로 취직을 했지. 경찰서라는 곳이 얼마나 바쁘고 일이 많아? 자다가도 불려나가서 운전하고, 또 사회에 뭔 일이 생기면 몇 날 며칠을 꼼짝없이 사무실에서 밤샘을 하고 10여 년을 그렇게 지내고나니 사람들이 싫어지더라고. ■ 코오롱 고속버스로 전국을 누비다그런 중에 결혼을 하게 된 겨. 내 나이가 29살 이었어. 색시는 나보다 7살이나 어린 처자였지. 나는 결혼 할 생각도 별반 없었는데 부모님이 큰일 이라고 서두르시대. 서른 넘기면 아무도 안 쳐다보는 노총각 소리 듣는데다가, 뭔 깊은 병이 있어서 장가를 못 가는 거라고 수군댄다는 거여. 부모님의 그 말씀을 들으니 나도 정신이 번쩍 드는 거여. 중매로 만나 선 한 번 보고 두 달 뒤에 바로 결혼식을 올렸어. 내 색시는 곱고 얌전한 사람이여. 그래 결혼하고 나니까 경찰서에 가는 것이 더 싫어지는 거여. 색시한테 서울로 가자고 했어. 내가 운전 기술이 있으니 뭐든지 가족 건사할 자신은 있더라구. 여기저기 소문을 들어보니 택시는 서울시내 길을 잘 알아야 한다지, 사장차를 몰면 부르면 언제든 가야 한다지, 맘에 안 들더라구. 우연히 친구가 고속버스 회사에서 기사를 모집한다잖아. 혼자 조용히 할 수 있고, 여기저기 팔도 유람하면서 돈을 벌 수 있겠다 싶어 마음이 동하더라구. 그래서 고속버스 운전을 하게 된 거여.서울서 출발하면 전국 팔도 안 가는 데가 없어. 내가 일한 곳은 코오롱고속이었는데 우리 회사가 전국적으로 버스를 운행했단 말이지. 나는 웬만하면 먼 곳으로 배차 받았어. 운전을 하려면 너댓 시간 정도는 달려야 제 맛이 나는 거 아니겠어? 부산과 마산을 많이 다녔어. 내가 내륙에서 태어났지만 바닷가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서울서 출발하여 대구를 지나고 창녕쯤 가면 내 코에 갯내음이 들어오더라고. 차 문이 꽉 닫혀있어도 느낌으로 알게 되는 게야.터미널에 손님들 내려드리고 일지 작성이 끝나면 보고한 뒤에 사복으로 갈아입고 부둣가로 나가는 게지. 거기가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잖아. 서로 우리 가게에 와서 물건 사라고 막아서기도 하고 옷도 잡아당겨. 경상도 사투리가 얼마나 억센지 말하는 것 듣고 있으면 꼭 싸우는 것 같어. 그래도 얼마나 재미져? 생선회에 매운탕 맛나게 먹고 숙소에서 자고 다음 날 아침에 또 서울로 올라오는겨. 넘쳐나는 사람들 틈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 색시가 반겨주지. 아이들은 올망졸망 자라고, 월급은 따박따박 나오고, 색시는 나붓나붓 다정하고 행복했어. ■ 인생이 마냥 좋기만 할 수 없지인생은 아무도 몰라. 나도 가슴에 대못 박히는 일이 있었어. 내가 고속버스 몰고 전국 팔도로 돌아다닐 때 국민학교 4학년짜리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한거야. 나도 운전하지만, 100% 운전자의 잘못으로 생때같은 아들을 잃고 나니 제 정신이 아니었어. 그 놈을 죽이고 싶었지. 몇 년 동안 아들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질 못하겠더라구. 한동안 운전도 못하고 폐인처럼 술만 마시고 살다가, 이렇게 살면 나도 죽겠더라구. 그래서 털고 일어났어. 그 위에 딸이 하나 있는데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 눈길 때문에 어째? 내 딸 경화는,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머리가 좋았어. 상장이 수북이 쌓일 만큼 공부를 잘했지. 지 애미가 뒷바라지도 잘해 줬고. 그 유명한 이화여대에 턱, 합격한겨. 기분 좋았지. 사실 나는 법대나 상경대를 갔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서양화과에 갔어.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 나를 닮아서 혼자 조용히 사부작사부작 움직이는 것이 맞았나 봐.나는 이만큼 늙었는데 이젠 뭐 바랄게 있겠어? 건강하게 잘 지내다 갈 때 되면 훌훌 떠나는 게지. 지금도 눈에 선~~해. 전국을 누비며 운전대를 잡던 그 시절이 참 좋았지. 가만, 내 인생은 누가 여기까지 데려다 주었을까? 나는 또 얼마나 더 가야하는 걸까?공허한 물음에 답일랑 세월이 알려줄테고 오늘은 흘러간 세월과 지난날 추억을 안주 삼아소주 한잔 기울여 보려네.
인물일반 | 남외경 시민기자 | 2020-11-27 11:28
전통시장에 들어서면 복작복작한 소리와 고소한 냄새가 사람들을 반긴다. 대형마트의 등장으로 전통시장이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요즘, 아직 옥천에는 전통시장이 주민들의 삶 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시장을 방문하는 손님들은 대폭 줄었지만, 여전히 옥천 주민들이 찾아오는 식자재 상회가 있다. “내가 호박 10개 사가니까 남은 2개는 서비스로 줘요.”, “그래요.” 오고 가는 말속에서 정이 쌓이는 이곳은 남부상회이다.■ 3대째 내려온 최대 식자재 상회남부상회 사장 조영미(41)씨는 부모님께 가게를 물려받은 후 남편 하충오(40세)씨와 8년째 상회를 운영하고 있다. 남부상회의 역사는 5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희 친할머니가 옥천읍 마암리에서 남부상회라는 간판을 걸고 청과물을 18년 정도 팔았지요. 할머니가 연세가 있으셔서 부모님이 이어 받았어요. 당시엔 1970년대 소도읍가꾸기, 새마을운동으로 집과 땅이 새 도로에 편입되면서 옥천올갱이 식당 앞 과거 시장터로 옮겨 남부상회를 하셨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 30년간 운영하시다 어머니께서 허리가 아프셔서 제가 물려받았아요.” 그렇게 남부상회는 할머니부터 부모님, 조씨까지 3대에 걸쳐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남부상회는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에는 100여 곳 이상의 식당에 육류·생선류·채소류·가공식품을 납품했다. 현재 식자재를 납품하는 식당은 40~50곳에 불과하지만 남부상회는 시장 내 최대 식자재 상회이다. “코로나19 이전에는 남편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대전 오정동 도매시장에서 물건을 떼왔어요. 그리고 7시에 여기 도착해서 식당에 다 배달하고 나면 오후 2시가 되어서야 겨우 밥 한 끼를 먹을 수 있었어요.” ■ 대전에서 옥천으로 다시 돌아오다.조씨는 옥천에서 태어나 장야초-옥천여중-청주 소재의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대전 출신의 남편과 만나 결혼했다. 조씨는 남부상회를 물려받기 전, 대전의 한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다가 허리가 아픈 어머니를 대신해 남부상회를 이어받기 위해 옥천으로 돌아왔다. 남편 하씨도 오정동에서 하던 중개업을 정리하고 함께 왔다.사무직 노동자에서 시장 상인이 되는 것은 조씨에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런데 후회한 적은 없어요.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게 장사라서요.” 그때부터 조씨는 새벽 4시에 출근해 오후 6시가 되면 퇴근을 한다. 김장철과 정월 대보름, 지역 특산물 출하 시에는 쉬지도 못하고 오후 7시까지 일해야 하지만 열심히 버텨냈다.■ 가장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조달하다.“우리 상회의 장점이요? 저희는 전날 밤에 선주문을 받아요. 그리고 새벽에 시장에서 제일 좋은 물건을 받아와요. 매일 신선한 재료를 식당에 배달하는 거예요.” 조씨는 선주문을 통해 수량을 파악하여 그날 사온 재료를 모두 소진한다. 그래서 매일 새로운 재료로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다.조씨와 남편 하씨는 양파와 감자를 재배해 봤기에 좋은 농산물을 보는 눈이 있다. 그래서 충북불고기, 초량순대, 안박사면옥, 토계촌 등 옥천의 다양한 식당에서 조씨의 안목과 성실함을 믿고 재료를 주문한다. ■ 전통시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깨뜨리고 부흥을 바라다.“시장이라고 하면 카드 사용이 어렵고 주차도 불편하고 위생적이지 않다는 인식이 있잖아요. 그래서 이런 부정적인 인식을 없애기 위해서 가게 주인들이 더욱더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재 카드 결제가 가능한 곳은 남부상회와 요거밸리, 그리고 반찬가게까지 3곳밖에 없다. 사업자등록을 하지 않아 카드 결제기 사용이 불가한 것이다. 조씨는 만약 사업자등록을 하고 상인들이 자신의 사업이라는 인식을 하면 위생도 더 신경 쓰고 시장의 불편함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할 거라고 생각한다. 상인들의 주체적인 노력은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인식을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전통시장을 기피할 이유는 없거든요. 마트보다 훨씬 싸요. 이윤을 최소화하기 때문에 좋은 물건을 값싸게 살 수 있어요.” 조씨는 코로나가 빨리 종식되고 예전처럼 많은 사람이 시장에 오길 희망하며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할 예정이다.
인물일반 | 김영하 청년인턴/이혜원, 전채원, 이민지(옥천여중) 청소년기자 | 2020-11-27 11:03
연고도 없는 낯선 농촌지역에 새롭게 터전을 잡아 정착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일평생 도시에 거주하다가 귀농귀촌을 목적으로 지역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부담이나 고민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생활 속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해야 할 뿐 아니라, 귀농의 경우 농사에 대한 전문 지식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옥천귀농귀촌인연합회는 이런 예비 귀농귀촌인들을 포함해 이미 농촌지역에 정착한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예비 귀농귀촌인들에게 지역에 대한 이해와 공감대 형성을 돕고, 농사와 관련된 지식들을 공유해 잘 안착할 수 있도록 견인하는 역할을 한다. 이미 정착한 귀농귀촌인들과는 교류를 통해 공동체를 형성하고, 지역 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에 적극 나선다.옥천, 군북, 군서, 동이, 이원, 안내·안남, 청산·청성 7개 지역에 각각 읍면 지회를 두고 있는 연합회는 전체 회원 수가 280명에 육박하지만, 회원 수가 꾸준히 늘고 있다. 연합회의 활동이 옥천 귀농귀촌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올해 초 연합회 회장에 취임한 강강수(68) 연합회장을 필두로 임원진인 김서헌(67) 사무국장, 정순점(58) 재무국장은 매일같이 옥천군다목적회관 1층에 위치한 사무실에 출근하며 귀농귀촌인들이 지역사회에 잘 스며들도록 힘쓰고 있다.■ 귀농귀촌 활성화로 인구 증가 일조올해 1월11일 취임한 강 회장은 경기도 평택 출신이다. 옥천에 귀농한지는 올해로 5년째로 안내면 현리에서 케이올 땅콩 농사를 짓고 있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그가 옥천으로 귀농을 결심한 이유는 ‘그냥 옥천이 좋아서’다. 대전에 연고가 있어 자주 다니다보니 우연히 옥천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옥천에 조그맣게 집을 짓다보니 점점 일이 커져 지금에 이르게 됐다.“옥천에 배산임수의 명당이 많아서 너무 살기 좋은 거 같습니다. 게다가 사계절 풍경을 다 볼 수도 있고 맑은 공기는 덤이고요. 특히 내가 먹을 것을 직접 농사를 지어서 자급자족 할 수 있고, 남은 것들은 주변 지인들에게 나눠주는 기쁨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주변에 옥천 홍보도 되고 정착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점점 넓혀가는 거죠.”강 회장은 2년 임기의 귀농귀촌연합회 회장으로 있는 동안 ‘옥천 인구 늘리기’를 목표로 중점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옥천으로 귀농귀촌을 생각하고 있는 ‘예비 옥천인’들과 이미 옥천에 정착한 연합회 회원들 간의 연결고리를 형성해 시행착오 없이 귀농귀촌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 외부 인구 유입을 늘리겠다는 것이다.“귀농귀촌을 꿈꾸는 대부분이 전문 농사꾼들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예비 귀농귀촌인들에게 충분한 정보 공유를 하고 부족한 점이 있다면 우리 회원들을 활용해서 멘토·멘티 관계를 형성해 드립니다. 서로 같이 협조하면서 옥천 생활에 자연스럽게 적응해가도록 하고 현지 주민들하고 같이 융화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유기적으로 살아 숨 쉬는 옥천에 큰 만족옥천군귀농귀촌연합회에서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김서헌씨는 충남 당진이 고향으로 동이면 적하리에 귀농한지 6년째다. 그는 올해 장마기간 동안 농지 400평 정도가 물에 잠기는 수해를 입었지만, 다른 귀농귀촌연합회 회원들이나 마을 주민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수해복구 봉사활동에 나섰다. 지난 8월11일 동이면 청마리에 수해피해가 났을 때도 떠내려온 5톤 트럭 3대 분량의 나뭇가지들과 쓰레기들을 연합회 회원들과 함께 치우기도 했고, 침수된 집들의 석고보드도 제거했다.그는 수해복구 과정에서 군과 주민이 재난피해에 발 빠르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며 옥천에 대한 기존 시각이 많이 변했다고 한다. 기존까지는 느낄 수 없던 옥천 지역사회의 역동적인 모습에 귀농귀촌지로 옥천을 선택한 것에 대한 만족감을 내비쳤다.“이번 수해 때 관과 민이 한데 뭉쳐져 호흡하며 피해 복구하는 모습을 보고 옥천 전체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면사무소에서는 직원들이 직접 나와 진두지휘 하고, 또 우리 주민들도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들을 하면서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더라고요.”■ 내가 겪은 시행착오, 예비 귀농귀촌인들 겪지 않도록연합회 재무국장을 맡고 있는 정순점씨는 경남 산청이 고향이지만 어렸을 적 상경해 귀농하기 전까지 쭉 서울에서 살았다. 서울에서 34년간 직장생활을 마치고 귀농을 하기 위해 3년간 전국을 돌아다녔다. 전국을 안 가본데 없이 다 가보고 나서야 마지막에 옥천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현재 정착한지 4년 정도 되었지만 아직도 농촌생활이 힘들다고 말한다. 일평생 아파트에서 살아온 그에게 농촌 생활에 어려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관리소에서 해결해주던 아파트 생활과 달리 농촌에서의 생활은 스스로 해결해야만 한다. 굴삭기 운전이 가능한 남편은 그 기술을 이용해 마을에 필요한 일들을 하고, 재능을 살려 안내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드럼교사로 일 하는 등 농촌생활에 크게 만족하지만, 정씨는 밤농사와 포도농사 등 농사일을 도맡다보니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예비 귀농귀촌인들이 최대한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연착륙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저희는 5년 전에 와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비싼 수업료 낸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이제 새롭게 귀농귀촌하시는 분들은 사전에 그런 것들을 최대한 줄일 수 있도록 선배로서 멘토 역할을 해줘야죠. 그들이 이곳에 잘 적응하면서 지역민과 최대한 갈등 없이 잘 융화할 수 있도록 상담해드리는 게 우리가 할 일입니다.”■ 예비 귀농귀촌인들 ‘덜컥수’ 두지 않도록, 체험기간 필요해 연합회 임원들이 가장 걱정하는 부분은 예비 귀농귀촌인들이 덜컥 귀농귀촌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매몰비용이다. 귀농귀촌을 결심한 사람들이 처음에 지역에 와서 집과 땅을 비싸게 주고 사는 경우도 빈번하고, 특히 농사를 지어야하는 귀농인의 경우 무작정 값비싼 농기계를 구매하는 경우 등 정착과정에서 많은 비용을 낭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원들은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귀농귀촌인들이 6개월에서 1년 정도 미리 농촌생활을 경험하며 관련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와 관련해 김서헌 사무국장은 귀농귀촌인의 집 증설을 포함한 합숙시설, 귀농귀촌 관련 교육프로그램 등 제반 시스템이 확충되어야한다고 제언했다. “귀농귀촌을 결심한 사람들이 옥천이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며 많이들 찾아오세요. 그 분들 말이 실제로 얼마나 좋은지 3개월이나 6개월 정도 살아보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연합회가 이런 부분을 어떻게 충족시켜줄지 늘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고 있습니다. 거점을 만들고 예비 귀농귀촌인들이 합숙을 하면서 교육도 받는 그런 연결된 시스템이 필요한 거죠.”실제 다른 지자체의 경우 예비 귀농귀촌인들의 시행착오를 줄이고 지역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제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전북 순창의 경우 예비 귀농인들을 위한 전용 합숙소를 만들고 1, 2개월의 합숙기간 동안 작목 선택 및, 농사 훈련 등에 대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충북 괴산의 경우 시골 지역에 빌라단지를 짓고 자녀를 작은 학교에 전학시키는 귀촌인들에게 임대료를 받지 않고 주거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에 대해 강 회장은 “우리도 예비 귀농귀촌인들에게 그런 것들을 제공해주고 싶지만 빈집이 없다. 있더라고 흉가수준이다”라며 “군과는 이미 제반시설 확충과 관련해서 공감대는 형성이 됐기 때문에 비용 등의 문제만 해결된다면 우리도 가능하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 “옥천 위한 귀농귀촌연합회의 행보 지켜봐 달라”연합회 임원들은 올해 초 집행부가 꾸려진 이후 매일 아침마다 옥천군다목적회관 1층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급여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군 차원에서도 사무실을 제외하면 지원받는 것이 없지만 귀농귀촌인을 위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임원들은 자신들의 활동들이 옥천군 전체가 풍요롭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입을 모았다.“있는 힘껏 활동해 귀농귀촌인 유입을 늘리는 데 일조해 옥천군 전체가 풍요롭게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옥천 군민들도 우리 귀농귀촌연합회라는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인물일반 | 안형기 기자 | 2020-09-18 13:53
옥천살림에서 일하는 이소희씨올해 충북산업과학고를 졸업하고 4월부터 ‘옥천살림협동조합’에서 일을 시작한 이소희(20)씨는 요즘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학교 급식관련 회계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데 코로나19로 등교 일정이 자주 바뀌는 탓에 관련업무가 늘었기 때문이다.선배들과의 나이 차이가 제법 커서 막내 노릇하기도 벅차지 않을까 싶지만 ‘막내라서 힘든 건 하나도 없다’며 당차게 주어진 일을 해낸다. 집에서 3남매 중 막내이기도 하지만, 어르신이 많은 동네에서 나고 자라서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게 어렵지 않다고 한다. 고등학교에서 배운 내용들이 업무에 많은 도움이 돼서 일도 금방 익숙해졌다고.“같이 일하는 분들 모두 저를 잘 챙겨주시기도 하고, 또 제가 사는 곳에 어르신이 많다보니까 어릴 적부터 어른과 소통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힘들지 않아요. 집에서도 늦둥이 막내인걸요. 고등학교에서 금융회계를 전공해서 일도 금방 손에 익었어요” ■ 우연한 기회로 맺은 ‘옥천살림’과의 인연, 이제는 일에 자부심 느껴 이소희씨의 고향은 군북면 비야리. 아욱과 갓 등을 재배하는 부모님도 비야리가 고향인 옥천 토박이다.소희씨가 증약초, 옥천여중, 충북산업과학고를 졸업하고 ‘옥천살림’에서 일하게 된 건 지역의 청년이 일자리를 찾아 타지로 떠나지 않아도 되도록 지역 내 기업 취업을 지원하는 ‘지역정착형 청년일자리 사업’을 통해서다. 대학 진학보다는 빨리 사회경험을 쌓고 싶었던 소희씨에게 모교 취업부 선생님께서 ‘옥천살림’에 지원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소희씨와 ‘옥천살림’의 연이 시작됐다.사실 소희씨는 입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옥천살림’이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잘 몰랐다고 한다. 학교에서 먹었던 급식 식재료를 ‘옥천살림’에서 공급한다는 사실도 입사한 뒤에 알았다. 옥천에서 일자리를 찾겠다고 생각한 적도 딱히 없다고. 하지만 지금은 친환경 급식 식재료를 공급하고 로컬푸드 매장을 통해 지역 농산물을 유통하는 ‘옥천살림’에서 일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지역의 친환경 농가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뿌듯해요. 아직 일을 배워가는 중이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서 일하다보면 보람을 느낄 때가 많아요” ■ 넓은 세상 궁금하지만 일찍 끊기는 버스 탓에 오늘도 ‘집으로’ 넓은 세상을 느끼고픈 소희씨.‘직장인’ 소희씨의 첫 번째 목표는 ‘자동차 구입’이다. 평소에 오빠들의 차를 빌려 드라이브 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코로나19 탓에 대중교통을 이용해 여행을 다니기 어려운 점도 크지만 무엇보다 오후 6시40분에 읍내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버스가 끊기기 때문이다. 저녁 시간에 친구들을 만나기 쉽지 않아 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넷플릭스 보는 게 취미가 됐지만 빨리 차를 사서 친구들과 좀 편하게 놀고, 여행다니고 싶어요. 시골에 살다보니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너무 불편하거든요. 비야리에서 버스를 타면 자모리에 들려 돌아가는 것도 불편하지만 대전 외곽 버스 합쳐도 하루에 고작 8번 정도만 버스가 있고, 막차도 너무 빨리 끊겨요. 순환버스가 있으면 좋을텐데... 퇴근하고 읍내에서 친구를 만나면 친구집에서 자거나 택시를 타고 집에 가야해서 보통 퇴근하면 막차를 타고 바로 집으로 가요. 첫 차 산다고 하면 부모님이 조금 보태주시겠죠? (웃음)”■ 청년에게 옥천은 심심해, 젊은 아이디어 가득한 옥천 됐으면 소희씨는 앞으로 도시 지역에서도 살아보며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다고도 했다. 옥천이 싫은 건 아니지만 여행을 좋아해서 다른 지역의 삶이 궁금하다고 옥천을 떠나 타지에서 일하고 있는 두 오빠의 모습을 보면서 ‘옥천 밖의 삶’에 호기심을 가졌다. 청년에게 옥천은 조금 심심한 곳이라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여행을 가는 것과는 별개로 옥천에서도 청년의 취향에 맞는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를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하는 소희씨. 옥천에서 사는 청년으로서 ‘청년이 살고 싶은 옥천’을 위한 몇가지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옥천에도 청년들 취향에 맞는 맛집이 좀 생기면 좋겠어요. 놀거리나 문화시설도 부족해서 옥천은 좀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커다란 멀티플렉스 영화관이나 유명한 프랜차이즈 매장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게 아니에요.청년들의 아이디어로 채워진 소소한 공방이나, 로컬 푸드를 활용하는 예쁜 카페처럼 젊은 아이디어로 생기가 넘치는 옥천이 된다면 타지로 떠난 청년들도 고향을 다시 보게 되지 않을까요?”넓은 세상이 궁금해 옥천 밖의 삶을 꿈꾸는 ‘막내’ 소희씨지만, 청년이 즐거운 옥천을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 한 켠에는 고향 사랑을 늘 품고있는 듯 했다.옥천살림에서 일하는 이소희씨
인물일반 | 유하빈 | 2020-09-18 13:52
저는 옥천군 군북면 비야리 이장 신선혜입니다. 7월 30일 발생한 폭우로 인하여 수해를 당한 우리 비야마을에서는 크고 작은 민원이 23건 발생했습니다. 이재민 2건, 도로붕괴 및 통행불편 5건, 하천이나 구거부실로 인한 농작물피해 6건, 밭둑 전봇대 무너짐이 3건, 산사태로 인한 피해 7건 등입니다. 이런 아수라장속에서 한 달 가까이 지내다 보니 몸도 맘도 다 지칩니다. 그런데 면사무소 직원들 특히 산업팀에서는 군북면 전체를 아우르라고 노고가 많았던 점들을 헤아리지 못하여 이제야 글이라도 써 봅니다. 겨우 지자체가 해야 할 것은 지자체가 개인이 해야 할 것은 개인이 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아간다고 생각했는데, 옥천에 코로나19확진자가 생기면서 그날 일들이 묻혀져 가버리니 안타깝기만 합니다.2020년 7월 30일 새벽, 요란한 천둥소리와 번개가 번쩍이고 창을 때리는 폭우소리에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던 중 갑자기 핸드폰이 울려 받아보니, 5시 25분, 앞집 아주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장님, 우리 집에 물이차서 어떻혀“ 두려움이 가득찬 울부짖음이었습니다. 남편을 앞세워 가보니, 마당에 물이 한 가득 찬 상태에서 하마와 같은 물살이 집안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골목길이 토사와 부유물로 막혀 물살이 모두 집으로 밀려들고 있었고, 물이 빠지지 못해 순식간에 벌어진 긴급한 상황이었습니다.남편이 허리 가까이 차있는 물을 헤치고 들어가더니, 잠시 후 아주머니를 업은 채 나왔습니다. 아주머니를 집으로 모셔 함께 안정을 취한 다음 면사무소 산업팀장님의 핸드폰에 글만 남겼습니다. “아랫집이 침수되어서 사람을 업고 나왔어요. 어떻하면 좋아요?” 했는데 바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이장님 우리가 지금 비상근무중이니까 걱정마세요. 사람이 중요하니까 이재민을 마을회관에 대피시키고 급하면 연락주세요.” 라는 그 말에 아 벌써부터 비상근무를 하고 있으니 안도가 되었습니다.이후부터 시작된 주민들의 폭우피해민원이 신고 될 때마다 면직원에게 상황이 이러저러하니 빨리 좀 해결해 주세요, 뭔가 맡겨 놓은 듯이 해결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군북면에서는 그런 일들이 너무 많다보니 전 직원이 나누어 일을 맡아도 결정적인 해결은 산업팀장의 몫이 되었습니다. 우리 마을 만해도 민원인들이 자기밖에 모르고, 막무가내인 분들은 면에 찾아가서 따지고부터 봅니다. 여기저기서 빗발치는 민원을 해결해야 하는 산업팀장님은 무슨 죄가 많아서일까요??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기보다 모두 정부에서 알아서 해 주기를 바란다는 점이 민심을 더 사납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우리 비야마을의 경우, 천재지변에 대처하기에는 너무 취약한 상태입니다. 여기저기 난개발을 해놓고, 분양도 되지 않은 채 방치하면서 배수로도 제대로 안되어 있는 곳이 태반입니다. 비만 오면 도로가 물바다가 되고 토사가 밀려오면서 통행을 막고, 도로가 유실되고, 전봇대가 넘어질 지경입니다. 이것이 누구의 탓인지 물어봐야 소용없습니다. 다만 현재 담당부서가 책임을 떠안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나로써는 이번 물난리를 겪으면서 산업팀장님이 너무 고생을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몇 날을 밤샘치기하고 이저 저리 발로 뛰고 민원인의 악다구리를 몸으로 받아야 하는 스트레스는 어디에서 보상받아야 한단 말인가요?. 본디 김영걸 팀장님은 천성이 착하고 열정이 많은 분인데 이런 일을 겪으면서 실망과 낙담이 쌓이지 않을까 걱정이 될 뿐입니다. 아직 장마로 인한 피해복구도 응급조치만 된 상태인데, 코로나19로 인하여 연일 우리사회가 갈등 속에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서로 조금씩 참고 남을 배려하는 자세가 절실한데 현실은 그렇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서로 격려하고 창찬하면서 힘을 합쳐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에서 이글을 씁니다.
인물일반 | 옥천닷컴 | 2020-09-04 10:40
지난달 30일부터 1일까지 옥천전통문화체험관 관성관에서 '옥천군민과 함께하는 사진전'이 열렸다.지난달 31일 옥천전통문화체험관 전시실에서 사진전을 기획한 박종우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지난달 31일 오전 옥천전통문화체험관 관성관 입구 앞에 축하 화환이 관람객들을 맞이했다. 한옥으로 지어진 전시실 안에 들어서자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조명 아래 사진 18점이 벽면에 걸려있었다. 장소도 계절도 다른 풍경 사진들이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백두산 장백폭포, 인도 자이푸르 암베이성, 인제 자작나무, 보성 녹차밭, 안성목장, 법주사 미륵대불, 부소담악, 장령산 설경… 풍경 이름만 들었을 땐 사진들의 접점을 찾기 어렵지만 멍하니 사진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자연 풍취, 유적지의 고즈넉함을 즐길 줄 아는 사진작가의 여유로움이 물씬 풍겨온다.“그동안 사진작가협회 회원들과 출사해서 찍은 사진들이 많은데 다른 사람에게 홍보할 기회가 부족했던 것 같아요. 마침 군에서 옥천 문화예술인들을 위한 전시 사업이 있었는데요. 운이 좋게 공모에 당선됐어요. 김재종 군수님이 작품 전시사업에 신경 써주셨고, 심대보 사진작가협회 옥천지부장님이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덕에 전시를 열게 됐죠. 감사드릴 분들이 많네요.”■ 계절마다 다른 매력을 선사하는 풍경 사진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박종우(63) 작가는 사진에 입문한 지 20년 정도 됐다. 한국농어촌공사 옥천·영동지부에서 33년 동안 공직생활을 하면서 취미로 카메라를 잡은 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는 정년퇴직한 공무원 중에 특별한 취미가 없어서 등산하는 사람들을 대전 식장산에 오르면 쉽게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사진은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 취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현재 한국사진작가협회 옥천지부 사무국장을 맡은 그는 협회 안에 여러 사진 분과 중에 풍경을 주로 찍는다. 풍경 사진에 빠지게 된 이유는 제일 무난하기 때문이라고. 사진 찍는 비법은 단순하다. ‘사진은 하나의 표현이자 전달하는 수단’이니 있는 그대로의 순간을 잘 포착해서 찍으면 된다는 것이다. 계절 흐름에 따라 봄이 되면 개화시기에 맞춰서 꽃을 찍고, 여름에는 연꽃을 찍거나 비가 오면 폭포 내리는 모습을 찍는다. 가을에는 알록달록한 색을 자랑하는 단풍잎을 찍고, 장령산에 올라 용암사 일출을 바라보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 그게 사진이 된다. 겨울에는 정지용 생가에 가서 눈이 쌓인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이번 사진전을 열기까지 박종우 작가는 전국 방방곡곡 발품을 많이 팔았다. 협회에서 주관하는 사진교육강좌을 찾아 들었고, 각종 공모전이나 촬영대회에 응시를 했다. 그렇게 여러 수상 경력을 거쳐 6년 전 사진작가협회 정회원이 됐다. 보통 사진에 빠져 열심히 활동해도 정회원이 되는데 최소 3년이 걸린다고 한다. 이전에 옥천 나인포토(9 Photo) 동아리 회장을 역임하고, 제21회 옥천지부 회원전 우수작품상과 제31회 충북예술인대회 우수예술인상을 수상하는 등 그가 오랫동안 활동을 이어간 비결은 그저 사진 찍는 게 재밌기 때문이었다. 최근 코로나가 발생하기 전인 올해 1월에는 옥천, 대전 사진동호회 회원 6명과 함께 사진을 찍으러 인도에 다녀오기도 했다.■ 신기리가 고향인 박종우 작가, 자연에서 예술을 찾아그가 20년 동안 사진을 찍어오는 동안 시대도 변하고 카메라 기능도 많이 향상됐다. 현재 쓰는 니콘 DSLR 카메라까지 합하면 총 4대째 쓰고 있는데 박 작가는 ‘농부가 장비 탓을 할 수 있겠냐’며 멋쩍게 웃었다. 사진을 배우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본 그는 예술을 하는 사람들 특유의 감각이 있다고 들려줬다. 많이 찍어서 숙달되는 경우도 있지만 금방 깨우치는 사람들은 촬영 이론을 알려주면 바로 습득하고, 사진 구도도 나름의 방식으로 터득한다고 설명했다.옥천읍 신기리가 고향인 박종우 작가는 삼양초등학교 26회, 옥천중학교 23회 졸업생이다. 그는 대전에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오고 군대를 제대한 뒤 현대건설에 입사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한국농어촌공사(전 농지개량조합) 옥천·영동지부에서 33년 세월을 함께하고 현재 신기리에 살고 있으니 옥천과 인연을 떼려야 뗄 수 없다. 박 작가는 오는 10월에 있을 중봉 충렬제와 지용제 행사 때 사진작가들과 함께 사진전을 하나 더 기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전이나 미술전이나 마찬가지지만 보통 한 곳에서만 전시를 하잖아요. 어디 큰 도시에 있는 전시장에만 여니까 이런 예술 활동을 가까운 곳에서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우리고장 주민분들이 편하게 문화생활을 접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싶어서 이번 순회전을 열게 된 거죠.”이번 순회사진전은 군에서 시행하는 ‘전시자+전시공간 연계 활성화 사업’의 하나로 추진됐다. 박 작가는 지난 3월 공모를 통해 군의 충북문화재단 기금지원사업에 선정돼 창작지원금 300만원을 받고 이번 전시회를 준비했다. 앞으로 8월4일~7일 옥천읍행정복지센터 로비, 8월11일~13일 농업기술센터 로비에서 전시되고, 박 작가가 상주하며 사진 안내를 할 예정이다.박종우 작가가 지붕에 눈이 쌓인 정지용 생가 사진을 설명하고 있다.박종우 작가가 충북 보은에서 찍은 '법주사 미륵대불'박종우 작가가 옥천에서 찍은 '부소담악'박종우 작가가 옥천에서 찍은 '정지용 생가'박종우 작가가 인도에 다녀와서 찍은 '자이푸르 암베이성'박종우 작가가 중국에 다녀와서 찍은 '백두산 장백폭포'박종우 작가가 강원도 인제에서 찍은 '자작나무숲'
인물일반 | 윤종훈 인턴기자 | 2020-08-04 16:55
충북농업기술원 포도연구소장 이경자 연구관 전국의 유일한 포도연구소지만, 포도연구소는 다소 애매한 위치에 놓여져 있다. 포도를 많이 재배하는 동이면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남부3군을 아우른다고 하지만, 이도 저도 아닌 위치에 섬처럼 존재하는 것이 포도연구소다. 사실 위치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포도연구소가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면 포도연구소 자체만으로 그 지역 전체가 활력이 돋을 수 있다. 하지만, 옥천은 점점 포도 면적이 줄어들고 있고 포도연구소에서 개발한 품종도 제대로 안착되었다고 평가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품종개발이란 것이 하루 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맛과 소비 트렌드가 실시간으로 변하기 때문에 꾸준한 입맛을 가져갈 품종을 개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지금이야 저물어가는 해 취급을 받지만, 캠벨얼리 품종은 30년 이상을 풍미해 온 명 품종이었다. 이제 그 자리에 샤인머스캣이 필두로 ‘군웅할거' 품종시대가 다가온 것이다. 이런 포도의 세대교체 시대적 흐름이 있는 가운데 이경자 소장이 새 사명을 받고 부임했다. 포도연구소 사상 첫 여성 소장이다. 충북농업기술원은 7월7일자로 이경자 연구관을 포도연구소장으로 임명했다. 이경자 신임 소장은 충북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식물보호기사 등 농업관련 기사 자격증을 3개 취득하는 등 남다른 연구열정으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아울러 친환경연구과 근무하면서 토양 및 수질분석 연구 등 이 분야에서 수많은 연구성과를 거두었고 보은의 대추연구소 설립과 연구기반조성에 초석을 다지는 등 보은 대추산업 명성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인터뷰 첫 일성으로 내부 연구원들을 개별 분야의 최고수 전문가로 키워내고 어디가서 인기 강사가 될 만큼 키워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포도연구소 인원이 공무직 2명 포함해서 전부 9명이에요. 일단 내부를 다지고 각자가 각 분야의 전문가로서 성공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줄 예정이에요. 포도연구소는 여러가지 분야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게 품종이죠. 포도연구소에서 그간 여러품종을 개발했지만, 안착시키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좋은 품종을 개발하여 농가들에게 보급하고 이로써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는 농가들이 포도를 재배하면서 겪는 어려움을 연구를 통해 하나씩 해결해나가는 일들이죠.”■ 28년 역사 포도연구소, 활력 불어넣겠다포도연구소는 벌써 역사가 25년이 훌쩍 넘었다. 92년에 옥천시설포도시험장 설립 이후 93년에 청사를 준공하고, 98년에 옥천포도시험장으로 명칭을 변결하고 2007년에 포도연구소로 다시 명칭을 변경했다. 그리고 2010년에 포도홍보관을 준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포도 홍보관은 너무 비좁고 시설이 열악해 제대로 된 홍보관 구실을 못한다는 평가도 있다. 포도 연구나 품종에 대한 것을 외화하는 과정에서 포도홍보관을 지었지만, 시설도 인력도 예산도 다 부족한 상황이다. “지금에 와서 보니 포도홍보관이 너무 아쉽게 지어졌어요. 꼭 포도 농가가 아니더라도 와서 포도 관련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고 포도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알 수 있도록 좀 크게 짓고 인력이나 예산도 편성해 별도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했어야 하는데 지금은 세미나실로 가끔 쓰이고 포도 관련 인테리어를 해놓은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여력이 된다면 제대로 다시 한번 지었으면 하는데 어떻게 예산이 될 지 모르겠어요.”청성면 산계리와 청산면 신매리에 바로 인접해 포도연구소와 내수면연구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둘은 어떤 시너지 효과도 내지 못하고 지역과 유리된 섬처럼 방치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물었다. ‘단양에는 내수면 연구소를 기반으로 민물고기 아쿠아리움도 만들어 주민들의 인기도 상당하더라구요. 포도홍보관과 민물고기 수족관 등을 함께 어우러지게 하면서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으면 어떨까요?’“괜찮은 아이디어인 것 같아요. 두 연구소 다 충청북도 소속이니까 협의를 적극 고민을 해봐야 겠는데요. 어째튼 포도 연구 뿐만 아니라 많은 주민들이 포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자주 찾는 포도연구소가 되었으면 한다는 데는 공감하고 있습니다.”그래도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포도산업의 변화이다. 캠벨얼리가 서서히 퇴출되고 샤인머스캣이 그 자리를 차지하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형국이다. “아무래도 샤인머스캣 열풍 때문에 공급이 늘어나면서 가격은 떨어지긴 할텐데 그래도 많이 떨어지지는 않을 거라 봐요. 샤인이 일단 먹기 편하고 당도도 높으니까 당분간 인기는 내려가지 않을 거에요. 저희의 과제는 거기에 버금가는 품종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소비자 욕구가 빠르게 변화하는데 반해 한 품종이 제대로 나오려면 적어도 10년 이상은 걸리거든요. 뚝딱 나오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10년을 내다보고 육종을 해야 하는데 쉽지 않은 거죠. 저희는 샤인 계통으로 하면서 조금더 색깔을 다양하게 하고 굳이 지베렐린 처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무핵재배가 될 수 있도록 하는 품종을 만들려고 해요. 다만, 품종이 다양화 될 필요는 있다고 봐요. 한 품종으로 획일화되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거든요. 한쪽으로 몰리지 않게 수급조절을 해야죠. 소비자들도 폭넓게 고를 수 있도록.”그 외에 포도연구소가 할 일은 많다. 농가들이 겪는 기술적 애로사항, 포도생리장애를 극복하는 거, 토양, 병해충의 문제까지 포도연구소는 이를 해결해주고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그는 무엇보다 지자체 역할이 중요하가도 말했다. “한-칠레 FTA때문에 포도 폐원이 많이 되었거든요. 아쉬운 측면이 많죠. 포도를 폐원시키기 보다 포도 산업의 축적된 노하우를 조금 더 진일보시켰다면 하는 생각이 있어요. 포도에 대한 다양한 가공과 6차 산업까지의 결합, 이렇게 해서 부가가치를 더 높인다면 포도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거든요. 영동이나 보은은 지자체가 같이 예산을 들여 대추연구소와 와인연구소를 만들었는데 이런 열의가 더 필요합니다. 옥천과 영동은 같이 포도를 주품목으로 재배하기 때문에 협력을 통해 같이 나갔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요.”그는 옥천이 시설포도 최초 재배지라는 명성에 걸맞게 포도 산업의 부흥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포도 면적이 자꾸 줄어들면 포도연구소가 굳이 옥천에 있을 명분이 점차 사라지는 거거든요. 옥천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수십년째 내려오는 포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고민했으면 합니다. 포도연구소가 적극 돕겠습니다.”
인물일반 | 옥천닷컴 | 2020-07-25 12:56
시크릿 당구장 한쪽에는 천사불여일행(千思不如一行)이라 적혀있는 액자가 걸려 있다. 천 번 생각하는 것이 한 번 행하는 것만 못하다는 뜻이다. 누구나 천 번은 아니더라도 한 번쯤 취미 활동을 하며 돈을 버는 것을 꿈꾸지만 취미를 업으로 삼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우연한 기회를 통해취미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 있다. 옥천 동물병원 옆에 위치한 시크릿 당구장 새로운 주인 유재영 대표의 이야기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찾던 당구장에 늦게까지 남아 즐겁게 노는 그의 모습을 보고 사장님이 인수 제안을 했다. 고민 끝에 올해 2월 당구장을 인수했다. 유대표는 자신이 있었다. 옥천 출신 토박이에, 여러 생활 스포츠 클럽 활동을 하며 자연스럽게 성장한 소통 능력이 무기라고 생각했다. 규모는 작지만 자신의 친근한 성격을 가지고, 손님과 소통하고, 가족같은 분위기를 가진 당구장을 꿈꿨다. 이러한 포부와는 다르게 사업 초기에는 당구장 운영에 전념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1남2녀의 자녀가 있다.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안정적이고 일정한 수익이 필요했다. 고정된 급여가 나오는 회사를 포기하기 어려웠다. 겸업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본래 직업은 순대 공장의 생산 과장이었다. 낮에는 생산관리를 하고, 밤에는 당구장으로 출근했다. 50세의 나이에 두 가지 일을 병행한다는 것은 고된 일이었다. 3개월 만에 급격한 신체 변화가 생겼다. 체중이 19kg 감소하고,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했다. 체력 저하와 스트레스로 인해 회사 업무에 소홀해지고, 당구장 운영에도 소홀해졌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당구장 운영을 포기하거나,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오랜 고민 끝에 당구장에 집중하기로 하고 퇴사를 결정했다.■ 다양한 생활체육 섭렵, 만능 체육인유재영 대표는 옥천에서 나고 자랐다. 삼양초, 옥천중, 옥천고를 나오고 대전의 한밭대학교에서 금속공학과를 졸업했다. 2007년에는 제이씨아이 코리아(JCI KOREA, 옥천청년회의소) 회장도 맡았다. 소방 설비 분야의 베테랑이다. 소방설비기계기사, 소방설비전기기사 자격을 취득하고, 소방설비업체, 소방공사업체, 설계사무소, 소방현장대리를 했다. 한때는 차량 외형복원 업체인 세덴(SEDEN)의 옥천점 대표도 했다. 바쁘게 살았던 유재영 씨의 삶의 원동력은 생활체육이었다. 학창 시절 옥천고등학교 농구 서클 피닉스로 활동했다. 대학교에서 선배에게 당구를 배우고, 탁구 동아리 활동도 했다. 테니스는 20년째 치고 있다. 우리 지역 스포츠클럽인 ‘옥천다이나믹스’ 야구단 초대 연합회장과 보람 조기축구회 부회장도 지냈다. “얼마 전에 조기축구회 청백전에서 해트트릭도 했어요” 그의 말에서 생활체육인으로 자부심이 느껴졌다. 생활 체육을 즐기며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의 왼쪽 다리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30년 전 사고로 전방십자인대가 파열됐다. 빠른 수술이 필요했지만, 당시 병원에서 수술보다 물리치료를 권했다. 물리치료 과정에서 부상은 더욱 악화되었다. 파열되었던 인대가 수축되었고 뒤늦게 재건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유증으로 대정맥이 막히는 정맥부종이 생겼다. 재활 치료가 필요했다. 대전에 있는 한밭 수영장을 등록했다. 재활로 시작한 수영을 3년간 꾸준히 했다. 선수반까지고 올라갔다. 아직도 그의 왼쪽 다리는 아프다. 컨디션 좋지 않으면 통증이 오고, 붓는다. 주변 사람들도 그의 이러한 고통을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 다리를 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큐대 대신 십자 드라이버를 잡다일과 취미는 다른 영역이다. 취미가 직업이 되는 이상 더 이상 취미가 아닌 일이 된다. 유 씨는 실컷 당구를 치면서 당구인들과 교류하고 싶어 인수한 당구장에서 당구 큐대보다 십자 드라이버를 오래 잡고 있었다. 8월1일 정식 오픈을 앞두고 당구장을 손수 고쳐가며 새 단장을 하느라 손에 물집이 잡힐 정도다. 시크릿 당구장에서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 힘들다. 개인 큐장을 추가로 설치하고, 테이블 천갈이를 하고, 휴대폰 충전기를 설치했다. 신나는 분위기를 위해 블루투스 오디오를 설치하고, 국제식 대대를 도입했다. 찢어진 의자 시트를 교체하고, 수예 강사인 사촌 동생의 도움을 받아 쇼파 쿠션에 자수를 놓았다. 유 씨는 시크릿 당구장의 강점을 규모가 작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고객이 필요한 것을 빠르게 알아챌 수 있고, 바로 실행이 가능합니다. 가족 같은 분위기를 원합니다. 당구장을 넓힐 수는 없습니다만, 있는 환경 안에서 최대한 깔끔하고 상쾌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공자는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 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 한다고 하였다. 유재영 사장은 당구장 운영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즐기고 있었다. 당구장 운영에 전념하면서 못 잤던 잠을 푹 자기 시작했다. 주말도 반납하고 밤낮으로 즐겁게 일하고 있다.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움 주신 당구장 전 사장님과 건물주에게 감사해요. 여러모로 도움을 주는 규천 아우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싶습니다. 가족들한테는 미안해요. 집사람은 가족한테 시간 내는 게 어려우니, 소방 쪽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냐고 물어봐요. 그래도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으로 시크릿 당구장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당구 치고 갈 수 있게 만들 거에요. 자리 잡으면 가족들이랑 한가한 시간에 같이 당구 치며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유 씨는 당구장을 운영을 통해 지역과 공생하는 당구인의 사랑방을 꿈꾸고 있다. 그는 당구장 정식 오픈을 앞두고 다짐했다. “모든 것에 앞서서, 최고의 서비스는 친절이고 고객에 대한 선물은 만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 오시든 쾌적한 분위기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는 주변 상인들과 함께 성장하고 싶다. 손님이 배달 주문을 요청하면 주변 상인들의 음식을 골고루 시켜준다. 리모델링을 위한 조명도 인터넷을 통해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조명 가게에 찾아가 구매해 설치한다. 당구장을 기반으로 한 커뮤니티를 꿈꾸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 지역에 700 다마 당구 3대 천왕이 있다고 한다. 3대 천왕의 비밀이 궁금하다면 시크릿 당구장의 유재영 사장을 찾아가기를 추천한다. 손님을 향한 마음가짐과 당구장에 대한 애착을 보니 시크릿 당구장이 앞으로 우리 지역 생활 스포츠 문화에 미칠 영향이 궁금하다. 주소 : 충북 옥천군 옥천읍 삼양로7길 9-17문의 : 043-733-8338
인물일반 | 이성민 인턴기자 | 2020-07-22 15: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