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고 3학년 이봄이씨.유난히 이번 연도는 빨랐다. 벚꽃이 100년 만에 가장 빨리 피었고, 첫눈도 작년보다 한 달 빠르게 왔다. 지구에 살아가는 옥천고등학교 3학년 이봄이(19, 읍 마암리)씨는 이번 연도를 보내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지구온난화가 심한 건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게 더 심각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10월인데도 여름처럼 덥더니 갑자기 11월에는 한파가 찾아오고 첫눈이 내렸다. 그는 100년 안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기사를 봤다.누군가는 50년 안에 멸망한다고 말했고, 어떤 이는 이미 늦어버렸다고 한다. 어느 순간 기후위기가 북극곰이나 미래세대의 문제가 아닌 ‘나’의 생존의 문제로 다가왔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인간 것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 “채식이 그렇게 종류가 많은지 몰랐어요”봄이씨는 기후위기에 대한 심각성을 통해 채식의 필요성을 느꼈다. 평소에도 기후위기를 생각해 일회용품을 자제하고 있었지만, 텀블러 사용이 탄소 중립에 도움이 되는지 몰랐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던 그때 친구가 선물로 준 비건 립밤을 통해 ‘비건’을 처음 접했다. 비건이라는 단어가 잊힐 때쯤 ‘나의 비거니즘 만화’ 책을 보게 됐다. 그림체도 귀엽고 어려운 내용이 없는 책을 보며 채식에 대해 알게 되었다.채식은 크게 동물성 식품을 일절 먹지 않는 ‘비건’부터 유제품, 해물, 가금류(닭고기, 오리고기 등)를 먹는 ‘폴로 베지테리언’ 등 6가지 종류로 나누어져 있다. 최근에는 비건을 지향하지만 때에 따라 육식을 먹는 ‘플렉시 베지테리언’이라는 신조어가 나오기도 했다. 그는 완벽한 비건은 아니지만, 하루 한 끼 정도는 채식하기 위해 노력하는 플렉시테리언이 되기로 결심했다. 하루 한 끼만이라도 채식을 하는 것이다. 일단 뭐든 해보자는 마음이 컸다.학교에 다닐 때는 급식 때문에 채식이 어려웠다. “반찬이 주로 고기 중심이었어요. 공부해야 해서 밥을 안 먹을 수는 없어서 채식을 잘 못 했어요.” 수능이 끝난 지금은 식사를 집에서 먹으며 채식을 이어나가고 있다. 직접 요리를 해 먹을 땐 의식적으로 채식을 하지만 가족끼리 같이 먹을 때는 채식이 어려울 때가 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채식의 장점을 알려주면서 채식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쌓는 중이다. 그는 기사를 볼 가족들에게 “채식은 몸에도 좋고 환경에도 좋으니까 하루에 한 끼 정도는 채식해보는 건 어떨까?”라고 말했다. ■ 비건? 그냥 하면 되는데요처음 비건에 관해 관심이 생겼을 때 어떻게 비건을 실천해야 할까 막막했다. 고민을 담아 그는 옥천고등학교 유혜빈 윤리 선생님께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답장에는 ‘선생님도 채식을 늦게 시작했고 부족한 부분도 많지만, 실천에 의의를 두는 것이 좋겠다’고 적혀 있었다. 사람이란 완벽할 수 없고, 자신의 가치관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대단하다는 말이었다. 선생님의 영향 덕분인지 봄이씨가 강조하는 것은 ‘완벽하지 않음’이었다. “사람인데 완벽할 수 없죠.” 덧붙여 선생님은 학교에 채식하는 다른 이를 소개해주었다. 주변에 채식에 관심 있는 사람이 없어 막막했던 그는 선생님의 진심이 담긴 답장을 보며 용기가 생겼다고 말했다.봄이씨는 비건은 예민한 사람들이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권리에 신경을 쓰면서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각도 했다. 하지만 채식을 해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별 거 아니더라고요. 그냥 하면 되던데요.” 어렵게만 생각했던 예민함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된다는 의미로 바뀌었다. 매일 채식하는 게 어렵다면 하루 한 끼만이라도 채식을 하는 방법과 마라탕을 먹을 때 추가재료로 고기를 넣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 "일상에서 비건이 자연스러웠으면 좋겠어요"봄이씨는 비건을 일상에서 자주 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비건을 채소만 먹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라며 “음식 말고도 제품에도 비건이 있다”고 전했다. 그가 입고 온 옷도 인조털로 만든 패딩이라며 동물 보호도 비건이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비건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본인이 생각하고 행동함으로써 바뀌는 것이 있어서 주저하지 않고 도전해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물일반 | 박진희 인턴기자 | 2021-12-09 21:21
목공방 '와일드터키' 대표 전학승씨.이원면 칠방리에 위치한 평범해 보이는 가정집 한 채. 집 근처로 다가가자 개 두 마리가 매섭게 짖어댄다. 집 왼편에는 나지막한 공방이 보이고, 나무 팻말에는 ‘와일드터키’라고 적혀있다. 그곳에서 미색 모자를 쓰고 감색 앞치마를 두른 목공방 와일드터키 대표 전학승 씨(56)를 만났다. 그는 이제 옥천에 내려온 지 10년이 다 된 어엿한 옥천인이지만, 사실 그전까진 서울에서 태어나 45년 동안 수도권에서만 산 도시 사람이었다. 초·중·고를 모두 서울에서 졸업하고 경기도 성남의 대유공업전문대학교(현 동서울대학교)에서 전자계산을 전공했다. 우연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알게 된 카페 일에 흥미를 느끼고, 전공과 전혀 관련 없는 호텔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대학을 그만뒀어요. 스물다섯인가 여섯에 지인의 소개로 호텔에 들어가게 됐죠.”음료 파트를 맡아 바텐더로 일하던 학승 씨는 IMF가 터지고 나서는 호텔 일을 그만뒀다. 이후 경기도 안산에 PC방을 차려 운영했지만, 곧 ‘이 일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친구가 사는 과테말라와 미국에 방문해 함께 지내며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방황했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는 인터넷 쇼핑몰을 열고 차량용 GPS, 네비게이션 등을 판매했다.그 무렵 학승 씨의 아버지가 크게 다쳤다. 넘어지면서 뼈가 부러졌는데 이 일을 계기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그의 아버지는 그렇게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그는 또 다시 비보를 접했다. “사촌 형이 간암이었어요. 오래 투병 생활을 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두 달 만에 돌아가셨죠. 그리고 얼마 후 외삼촌도 폐암으로 돌아가셨어요.”그 전까지, 학승 씨는 자신이 시골에서 살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몸과 마음이 도시 생활에 완전히 최적화되어 있었다. “나도 공기 좋은 데서 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모든 장례가 6월에 끝이 났다. 그는 7월이 되자 운전대를 잡고 옥천으로 향했다. 목공방 와일드터키(왼쪽)와 전혁승 씨가 현재 거주 중인 집(오른쪽)목공방 내부 모습■ 무작정 내려간 옥천, 우연히 살고 싶은 곳을 만나다학승 씨는 안산에서 PC방을 운영하던 시절 김천까지 국도를 타고 달린 적이 있었다. 그는 그 때까지 대전 밑으로는 어릴 때 부산 한 번, 고등학교 때 대구 한 번 가본 게 전부였다. 국도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레 옥천 앞을 지났다. 주위를 둘러보면서 생각했다. ‘와, 우리나라에 이렇게 경치가 좋은 곳이 있구나.’ 나이가 들어 공기 좋은 곳으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가장 먼저 ‘옥천’이 떠올랐다. 무작정 친구 세 명을 데리고 옥천으로 향했다. 톨게이트를 지나 제일 먼저 보이는 부동산으로 들어갔다. 그 날 공인중개사의 소개로 땅을 대여섯 군데 정도 봤고, 그 중에 지금 살고 있는 칠방리 땅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공인중개사는 이 땅에 대해서는 그다지 자세한 설명이 없었다. 학승 씨도 한두 군데를 더 둘러본 후 더 묻지 않고 서울로 돌아갔다.인연이란 게 뭔지, 서울로 돌아온 학승 씨는 그 때 본 칠방리 땅에 자꾸만 마음이 갔다. 그러나 당시엔 주소를 몰랐다. 같이 갔던 친구가 우연히 ‘그 때 그 동네 같다’며 인터넷 신문에 실린 땅 매물을 보여줬다. 매물로 나온 땅 주소의 지적도를 검색해 공인중개사와 함께 봤던 땅 주소를 역추적했다. “지적도를 보면 그 땅 주소뿐만 아니라, 가까운 옆 땅 주소도 적혀 있어요. 이 방향이겠다 싶어서 옆 주소를 쳐서 그 옆 주소를 알아내고. 그렇게 몇 번 해서 지금 사는 이 땅 주소를 알아냈어요. 아마 그 친구가 인터넷에서 발견하지 못했다면 부동산을 찾아가서라도 확인했을 거예요.”드디어 땅 주소를 알아냈다. 땅의 모양이나 앞에 난 길을 보니 틀림없었다. 인터넷 지도에 주소를 검색해 스카이뷰를 확인하니 역시나 맞았다. 이젠 땅 주인을 만나는 일만 남았다. 학승 씨는 등기부등본을 떼 땅 주인의 주소를 확인했다. 주인은 강원도 춘천시 모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학승 씨는 서울에 남아 계약금 부칠 준비를 하고, 그의 어머니가 춘천으로 가서 당일 가계약을 성사시켰다. “막상 찾아갔는데 사람이 없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웬만한 집은 일요일 오후에 다 쉰다며 전철을 타고 가셨어요. 그렇게 그 날 바로 계약을 한 거죠.” 앞으로의 꿈에 대해 질문하자 전학승씨가 생각에 잠겨 있다.■ 모든 게 낯설었던 도시 남자, 우연히 목공을 시작하다“좀 신기하더라고요. 아파트에선 층수가 높으니까 베란다 밖으로 저 멀리 산이 보이거나 밑에 집들이 보이잖아요. 근데 여기선 마당에 있는 제 차가 정면으로 딱 보이니까요.”처음엔 적응하는 게 일이었다. 아파트에선 집을 나서 현관문을 닫으면 끝이었고, 그다지 관리할 것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시골 주택은 끊임없이 관리를 요한다. “부지런해야죠. 마당에 돌멩이를 깔아 놓으면 그 사이로 풀이 계속 올라와요. 시멘트로 바르지 않는 이상 계속 자라거든요.”학승 씨는 밤이 되면 동네가 완전히 암흑에 잠기는 것도 낯설었다. “서울에는 저녁 아홉 시, 열 시 돼도 놀만 한 곳이 많잖아요. 그런데 여긴 집에 들어와서 밥 먹고, 텔레비전 뉴스 한 번 보고 나면 할 게 없어요. 잠은 안 오고, 누워서 멀뚱멀뚱 있었죠.”새로운 일거리를 찾게된 건, 우연히 집을 찾아 온 개 한 마리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부터다. 집을 짓는 두 달 동안 학승 씨와 어머니는 이장님의 배려로 마을회관 2층에서 살았는데, 그 때 이 개가 매일 집 짓는 현장에 출근했다. “처음엔 그냥 동네 개인가 싶었는데,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나오더라고요.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매일 우리 집에 오니 먹이고 재우고 했죠. 그래서 나무로 만든 집을 만들어줬어요.”평생 못질 한 번 해본 적 없던 그는 그렇게 목공을 시작했다. 하다 보니 개집 하나를 짓더라도 ‘어떻게 하면 더 멋있게 지을 수 있을까’ 고민이 됐다. 인터넷으로도 알아보고 각종 동호회, 카페에도 가입했다. 학승 씨는 기존 게시글을 훑을수록 궁금한 게 늘어났다. 활동 반경을 조금씩 넓히다가 4,5년 전 우연히 네이버 밴드 ‘함께하는 초보목공’을 알게 됐다. “나중에 보니 밴드 리더랑 공동리더가 옥천에 사는 거예요. 그러니 서로 왕래를 하고, 만나고, 일이 점점 커진 거죠.” 전학승 씨가 목공 기계 사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처음엔 이런 공방도 없었어요. 이것저것 만들다보니 장비도 좀 넣어야겠고, 욕심이 생겼죠.” 공방 이름은 호텔에서 바텐더로 일하며 가장 좋아했던 술 ‘와일드터키’의 이름을 땄다. “술 중에 와일드터키란 술이 있어요. 병에 야생칠면조 그림이 그려진 버번위스키(옥수수와 호밀로 만든 미국 위스키)였죠.” 또, 그는 야생칠면조가 갖는 자연의 느낌이 옥천과 이어지는 것 같다고도 했다.“저는 낙천적으로 살려고 노력해요. 모든 걸 긍정적으로, 여유 있게, 편하게, 순리대로 생각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죠.” 서울에서 호텔 바텐더로 일하던 그는 이제 옥천에서 목공 밴드 회원들, 이웃들, 심지어 동물들과도 인연을 맺으며 평화롭게 살고 있다. 그는 “옥천에 조금이라도 일찍 오지 못한 게 후회될 정도로 만족하며 살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앞으로의 꿈은 옥천에서 목공학원을 열어 많은 사람들이 목공을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시대가 발전할수록 목공은 누구나 하고 싶어 하는 분야일 거예요. 그런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어요.”
인물일반 | 윤수진 인턴기자 | 2021-12-09 20:56
■ 난춘(暖春)젊은 날부터 옷이 참 좋았다. 크게 보면 ‘멋’이라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누구나 그렇듯 젊은 시절은 참으로 힘들게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멋’을 부리며 사는 것에 대한 동경이 유난히 컸는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에 처음으로 본 빠알간 잠바가 어찌 그리 곱던지… 아마 그것이 ‘멋’을 동경하기 시작한 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뜻과는 다르게 먹고사는 것이 급한 탓에 젊을 적에는 하고 싶은 것들은 가슴 깊이 꾹꾹 눌러 담으며 살았다. 그러니 흐르는 세월이 야속할 따름이다. 그간의 세월을 뒤돌아 보니 꽃이 피고 지듯, 젊은 날은 다 지나갔더라. 그것이 여태 미련으로 남아 나이 70. 그간 부려보지 못했던 멋을 제대로 한 번 부려보려 했다. 누군가는 지나가며 “나이를 그렇게 먹고 이제는 점잖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라며 핀잔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멋을 부리고 사는 데에 있어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이렇게 늙어왔어도 여전히 오늘을 ‘청춘’이라 부르고 싶거늘.■ ‘멋’을 꿈꾸던 박종옥씨, 이제는 모델이 되다‘청바지’, ‘청재킷’ 등 ‘진(jeans)’을 가장 좋아한다는 박종옥(70,청산면 교평리)씨. 최근에는 ‘옥천공동체허브 누구나’에서 진행한 ‘장롱 속 오래된 미래’ 발표회에도 참여했다. ‘장롱 속 오래된 미래’는 50~70대 연령층을 대상으로 본인의 추억이 담긴 옷을 직접 리폼하고 그것을 입어보며 화보를 찍어 자서전으로 남기는 프로젝트였다. 박종옥씨는 89년 남편과 처음으로 떠난 동남아시아 여행을 기념하기 위해 입었던 청재킷을 리폼했다. 리폼은 누군가에게 손을 빌렸지만 디자인은 오로지 박종옥씨의 아이디어였다. 사실 처음부터 시니어 프로젝트에 참여를 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길을 지나다 플래카드가 눈에 띄어 곧장 전화 통화로 일사천리로 신청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지난 6월부터 모임을 시작으로 10명의 참가자들과 함께 박종옥씨는 자신만의 작품과 사진을 남겼다. “평소에도 옷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옷이 너무 좋아서 양재점을 차리고 싶어서 양재학원을 다니기도 했을 정도니까요. 제가 잘했는지 못했는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제게는 참여 자체만으로도 큰 도전이었고 너무나 행복했어요”■ 인생살이가 산 넘어 산이더라박종옥씨는 청주가 고향이다. 1975년에 결혼을 하고 2년간 보은에서 살다 남편의 고향인 청산에 1977년부터 터를 잡았다. 그리고 청산에서 농기계 대리점을 운영했다. 수완이 나쁘지는 않았으나, 위기는 예상치 못한 시점에 찾아왔다. 본의 아니게 남편의 막내 여동생에게 보증을 섰던 것이다. 막내 여동생이 채무를 이행하지 않자 차압이 들어왔다. 어찌하겠나. 다 갚는 수밖에. 남편과 박종옥씨는 채무를 이행하고자 보은 마로면 방면에 약 5천 평 가량의 평야를 임대해 인삼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10년간의 고군분투를 시작으로 2010년, 빚을 모두 청산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1년 뒤, 남편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유난히 야속한 해였다. 남편이 떠남과 동시에 태풍이 거세게 몰아부쳤다. 그간 애지중지 키워온 인삼밭이 쑥대밭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찌 그리 서럽던지… 어느 날에는 밭에 나와 창피한 줄도 모르고 길 한가운데서 펑펑 울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하겠나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것을.■ 힘겹게 살아온 세월에 ‘멋’은 ‘삶’의 이유가 됐다.“멋이라는 것은 저에게 위로였습니다. 힘들게 살아오던 지난날에 그간 포기 해야했던 나의 삶을 다시 한번 살아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삶의 이유가 된 것 같아요”남편을 떠나보내고 10년. 박종옥씨는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먹고사는 데에 급급하다 보니 그간 꿈꾸던 멋을 잊고 산 것이 참으로 아쉬웠다. 나이 70에 박종옥씨는 그간 꿈꾸던 멋을 부려보며 살고 싶었다. 그러다 알게된 것이 바로 ‘장롱 속 오래된 미래 발표회’였다. 디자인 수업을 통해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보니 언젠가는 큰 곳으로 나가 ‘자신의 이름을 낸 양재점’을 차려보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그리고 그것이 70이라는 나이를 먹은 지금에 와서는 ‘꿈’이 됐다. 꿈은 젊은이들만이 꾸는 것이 아니다. 꿈은 기회다. 그리고 “기회는 자신만의 때가 있는 법”이라 박종옥씨는 말한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박종옥씨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못다 핀 청춘에 대한 갈망이 됐다.■ 남들이 뭐라던 나는 ‘나’대로 살고 싶다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아니 무슨 배우야?”, “탤런트도 아니고 왜 저러나?”, “패션쇼를 하나?”라며 말이다. 사실 그럴 때면 상처도 많이 받았다. 젊어서부터 갈망해온 ‘멋’이라는 것이 남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것 같아 서럽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하나 대꾸를 하는 것이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남들이 뒤에서 하는 말에 신경 쓰지 않고 내가 그동안 해 온 것들에 대해 떳떳하면 그뿐이다. 박종옥씨는 말한다. “남들이 현재에 순응하고 살 때 새로운 것을 갈망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자부심”이라고.젊은 사람이든, 나이를 먹은 사람이든 기회는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다. 젊은 나이에도 도전을 마다하는 이들은 수두룩 하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이 나이에 무슨 도전이야!”라며 기회를 뿌리치곤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얼마나 기회가 있을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찾아온 기회에 망설임은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되고 의심은 이내 포기가 된다. 그리고 포기는 언젠가 후회로 찾아오기 마련이다. 박종자씨는 말한다. “차라리 해보고 나중에 후회를 하는 것이 나아요”라고.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읽고 있을 이들에게 전한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꿈이 있고, 뜻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청춘”이라고.
인물일반 | 김기연 기자 | 2021-12-03 14:22
친구 이수현(왼쪽)씨와 사진 찍는 남인숙(오른쪽)씨.“취미요? 딱히 그런 거 없어요. 삘 꽂힐 때마다 아무거나 하고 있어요” 퍼즐 맞추기, 뜨개질, 펀치니들, 보석십자수, 비즈공예 등 손으로 하는 취미를 좋아하는 충북산과고 3학년 남인숙(19, 읍 금구리)씨를 만났다. 그는 800개 조각 퍼즐을 3, 4일 만에 완성하기도 하며, 뜨개질로 자신의 목도리를 뜨기도 한다. 빠른 손놀림이 대단하다는 말에 그는 별것 아니라며 겸손하기 바빴다.손으로 하는 취미의 장점이 뭐냐는 물음에 단번에 잡생각이 사라진다고 대답했다. 학업과 취업에서 받는 고민,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오는 자잘한 생각들은 퍼즐을 맞출 때마다 하나둘씩 생각 저편으로 흩어진다. 가장 심혈을 기울인 퍼즐은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조각이 800개나 되는 ‘빨간머리 앤’ 퍼즐이다. 핸드폰 앱으로 맞춘 퍼즐과 친구들이 학교에 가져오는 100개 조각 퍼즐과는 다르게 엄청난 크기의 퍼즐이었다. 그는 조각 크기도 작고 비슷한 색깔도 너무 많은 퍼즐을 일일이 대조하며 맞추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도 받았지만, 완성됐을 때의 뿌듯함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 감정을 간직하고 싶어 액자를 주문하고 보관하고 있다는 소식도 알려주었다.남인숙씨가 직접 뜨개질 해 만든 목도리충북산과고 3학년에게 유행하는 것은 모두 인숙씨의 취미가 되었다. 어느 순간 같은 반 친구들이 비즈공예를 하고, 뜨개질하고 있으면 그는 같이 어울리곤 했다. 이런 유행은 학교 선생님들의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특히 “미술 선생님이 '한번 해볼래'? 라고 자주 물어봐 주세요.” 이번에 처음 접해본 펀치니들도 선생님의 권유를 통해서 하게 되었다. 그는 “학교 선생님들이랑 다 친하다”며 “특히 정소리 미술 선생님이랑 자주 이야기한다”고 말했다.인숙씨는 뭐든 하나 진득하게 하지 않아 이것들을 취미라고 부르기 애매하다고 말한다. 그것을 들은 친구 이수현(19, 읍 구일리)씨는 “그래서 네가 할 수 있는 게 많은가 보다”라며 받아쳤다. 그는 인숙씨가 모르는 그의 재능을 계속해서 말해주었다. “얘는 처음 보는 것도 잘해요. 펀치니들도 오늘 처음 한 건데 금방 배우더라고요” 손으로 하는 매력에 푹 빠져 못하는 것을 찾기가 더 어려운 인숙씨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유리 공예를 통해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들고, 대바늘로 하는 뜨개질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색 조합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뜨개질로 목도리를 한번 떠봤으니 파우치 같은 뜨기 어려운 것을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인물일반 | 박진희 인턴기자 | 2021-12-03 11:30
11월18일에 실시된 수능이 끝나고 여유를 즐기는 옥천고등학교 3학년 박채은(19, 읍 문정리)씨를 만났다. 옥천고등학교 재학시절 학생회장으로 활동했던 그는 졸업을 앞두고 싱숭생숭한 감정과 새로운 사회를 만나러 가는 설렘을 가득 안고 있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차가운 비를 뚫고 만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해주세요.안녕하세요. 옥천읍 문정리에 사는 옥천고등학교 3학년 박채은입니다. 수능도 면접도 다 끝나서 대학 합격 발표만 기다리고 있어요. 수능이 끝난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수다 떨고 집에 와서 놀며 여유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 졸업을 앞둔 지금, 학교생활을 돌아보자면?친구들이랑 쉬는 시간에 소소하게 떠들고 논 게 제일 기억에 많이 남아요. 진짜 돌아보면 그 시간이 제일 소중한 것 같아요. 쉬는 시간에는 그때그때 유행하는 걸 했는데, 몇 개 말해보자면 1학년 때는 아이패드 가지고 그림을 그렸어요. 3학년 때는 코로나19 때문에 핸드폰을 안 걷었어요. 그래서 친구들이랑 쉬는 시간에 핸드폰 앱으로 루미큐브를 했어요.학생회를 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데 그 이유는 제가 3년 내내 학생회 활동을 했었거든요. 1학년 2학기부터 2학년 1학기까지 봉사부 차장을 했고, 2학년 2학기부터 3학년 1학기까지 학생회장을 했어요. 멋모르고 멋있어 보여서 시작한 학생회였는데 학생회장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봉사부 차장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거는 언니들 따라서 정혈대(생리대)를 채워 놓은 거였어요. 그때 공약이 학교에 무료 정혈대 배치가 있었거든요.학생회장에 출마하게 된 건 옥천고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나 봐요. 옥천고 학생들이 주변 사람들한테 옥천고 오지 말라고 말하는 게 자기 학교에 대한 애정이 없어 보였거든요. 그래서 제가 회장이 돼서 학교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생회장이 됐을 때 무료 정혈대 배치 공약은 유지했어요. 여성으로서 꼭 필요하다고 느꼈거든요. 졸업한 선배들에게 대학교 합격 수기를 받아 학생들에게 공유하는 합격 수기 공약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일일이 연락 돌리며 다양한 학과 이야기를 담고, 공부할 때 심리관리나, 학생부 종합관리 같은 비교과 팁도 받았어요.학생회를 해보니까 다양한 공약을 이행했을 때 만족하는 학생들을 보며 뿌듯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간을 조금만 더 투자해서 좋은 공약을 만들고 이행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어요. 그래도 잘 한것 같아요.(웃음) ■ 이제 뭘 하고 싶나요?코로나19 때문에 여러 가지를 못하는 상황이잖아요. 해외여행을 제일 가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되니까 친구랑 몇 박 며칠 여행을 가고 싶어요. 코로나 피해를 안 받는 선에서 대외활동도 해보고 싶어요. 봉사나 연합동아리 같은 거요. 그리고 카페 아르바이트도 하고 싶어요. 예전부터 커피를 내리고 음료를 만드는 게 멋있어 보였거든요. 그리고 콘서트도 가고 싶어요.엔시티 드림을 좋아하고 있어요. 사실 인터뷰하기 전에 기자님 아이패드에 엔시티 드림이 배경화면에 있어서 놀랐어요. 저는 제노를 제일 좋아해요. 얼굴은 순딩한데 반대되는 몸이 너무 매력 있거든요. 얼사몸도(얼굴은 사모예드, 몸은 도베르만)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데 별명이랑 너무 잘 맞아요. 제노를 좋아하게 된 건 열심히 하는 모습이 멋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힘들었을 때 제노 영상을 진짜 많이 봤어요. 그게 힐링이었어요. ■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학교 생활하느라 고생 많았어. 입시 체제 속에서 남들하고 비교하고 비교당하고 하는 상황에서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거든요. 그때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남들하고 비교할 필요 없으니까 자신감 느끼고, 공부하느라 잠 줄이지 말고 그냥 많이 자. 니가 제일 소중하니까.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수고했어.현재 대한민국 입시체제는 계속 경쟁을 부추기는 구조잖아요. 저는 이런 입시체제를 후배들에게 절대로 물려주고 싶지 않아요. 친구를 친구로 보지 않고 경쟁자로 보게 하고 가식으로 대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 매우 힘들어요. 사실 옥고는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친구 사이여서 경쟁이 덜하긴 한데, 국제고나 외고를 간 친구들 말을 들으면 많이 힘들어하더라고요. 학교가 입시 공장처럼 느껴져요. 성적이 좋아야 하고, 상장을 많이 받고, 활동 열심히 해서 나오는 생활기록부 가지고 저희를 평가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런 입시체제가 유지되기를 원하지 않아요.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수능이 끝났을 때 싱숭생숭한 마음이었어요. 목표가 사라진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저희는 대학만 바라봐야 하는 구조잖아요. 단 한 곳의 대학을 가기 위해서 그동안 잠도 줄여가면서 공부를 했는데 너무 허무했어요. 이제 다른 목표를 잡아야 하는데 어떤 목표를 잡아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근데 이렇게 가족이랑 친구랑 했던 대화를 인터뷰에서 말하니까 후련한 마음이 들어요. 머릿속이 정리되고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인물일반 | 박진희 인턴기자 | 2021-12-03 11:13
전태형(사진 왼쪽)씨와 함께 호형호제 한다는 ‘은아아빠’ ‘고 서방’이라 소개한 또다른 이는 사진을 찍는것이 부끄럽다고남자 둘이 영화를 틀어 놓고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그 안쪽 작은 방에서는 다른 남자가 낮잠을 자고 있는 듯 했다. 이곳을 찾는 단골손님들도 짧게는 20년, 길게는 40년 이상이 태반이다. 평화로운 오후, 늘 그래왔듯 오늘도 어제처럼 이 곳에 모여 이야기도 나누고 휴식도 취한다. ‘류집 슈퍼’의 내부■ “이곳은 우리의 마실터입니다”자신들을 ‘고 서방’과 ‘은아 아빠’라고 소개한 이들은 이 가게 최고 단골들이다. 그리고 가게 사장인 전태형(56,청성면 산계리)씨와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사장은 “나보다 고서방이 우리 엄마랑 더 친해요”라며 허허 웃었다. 이들은 자주 슈퍼를 찾는다. 일을 마치거나 일을 하던 중 잠시 이곳에 와서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나눈다. “여기가 우리한테 마실터죠. 저 아랫집 청성슈퍼에는 어머님들이 많이 가고 옆 집에는 우리보다 연세가 조금 더 있으신 어르신들이 가요. 우리 같은 머시마들은 주인장이 머시마인 여기를 많이 오죠. 요즘은 이런 구멍가게 말고도 없어지는 게 많은 것 같아요. 요 근처에 양조장도 있었는데 그것도 없어져서 아쉽네”‘류집 슈퍼’의 내부■ 잘되든 못되든 60년간 한자리에서청성면사무소 맞은편에는 오래된 두 개의 구멍가게가 있다. 두 슈퍼 모두 간판이 없다. 면사무소에서 바라봤을 때 오른쪽이 ‘금잔디 슈퍼’고 왼쪽에 있는 곳이 ‘류집 슈퍼’다. 류집 슈퍼는 어머니가 40년도 즈음부터 시작해 2대째 운영되고 있다. 장장 60년이라는 세월, 아들인 전태형씨가 이어받아 한자리를 지켜오는 중이다. 장사가 잘되나 안되나를 따지기 보단, 그저 이 자리와 이곳에 오는 사람들에 의미를 두고 문을 여는 것이다. 40년도 즈음부터 슈퍼의 문을 열었으니 지금의 슈퍼는 그간 청성의 역사를 담아온 역사 바가지라고 해도 무방하다. 5천원으로 물건을 떼 오면 “이걸 언제 다 파나?”라고 걱정하던 때도 있었다. 그때와 지금의 화폐가치가 크게 다르니, 그만큼 오랜 시간 문을 연 것이다. 슈퍼 앞에 놓인 오래된 뽑기 기계■ 어머니를 따라 1년 만에 다시 문을 열다 전씨는 청성초, 청산중, 청산고를 나온 청성의 토박이다. 그러다 다들 그렇듯 고향을 떠났다. 어머니로부터 슈퍼를 이어받기 전에는 경기도 일산에 살았고 의류 계통 일에 몸을 담았다. 그런 그가 20여 년 옥천을 떠나 살다가 다시 돌아오게 된 까닭은 건강이 좋지 않은 어머니와 함께 있기 위함이었다. 이곳 류집 슈퍼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슈퍼가 된 것은 오랜 기간뿐만은 아니다. 그의 어머니가 오랜 세월 청성면 일대 관공서에 근무하는 이들의 점심을 책임졌던 것이 크다. 온 동네 사람들이 어머니의 밥을 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 전씨의 말이었다. “어머니가 몸이 안 좋아서 한 1년은 문을 못 열었어요. 어머니도 모실 겸 다시 문을 열었죠. 장사가 당연히 쉽지는 않아요. 일단 청성에 사람들도 많이 없으니까요. 그래도 항상 문은 열어요. 농번기가 되면 일하다가 와서 목도 축이고 막걸리도 한 잔 하시라고요. 사실 여기는 슈퍼도 슈퍼인데 동네 마실터 같은 곳이죠”동네 구멍가게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네 사람들은 이 곳에서 커피 한 잔 하며 앉았다 가기도 하고, 막걸리 한 잔에 목을 축이기도 한다. 그런 그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사라져가고 있지만 여전히 있어 좋다”고 말이다. 당연하게 생각되던 것들도 시간이 흐르며 세상의 변화로, 저마다의 사정으로 자리를 뜨곤 한다. 그래도 청성면사무소 앞 구멍가게들은 영원할 것처럼 예전 모습 그대로를 하고 있다. 고집 있게 흐름을 거스른 것이 까닭이 아니라, 자신들이 중요하다 여기는 것들을 따르고 있기 때문 아닐까. 하루 가게를 방문하는 한 두명의 단골들에게 의미를 두고, 해가 뜨면 문을 열고, 해가 지면 파하듯 말이다.주소 : 청성면 산계길 50영업시간 : 해 뜰때~해 질때 / 연중무휴
인물일반 | 김기연 기자·박나혜 인턴기자 | 2021-11-26 14:24
10살도 되지 않았을 적 자주 갔던, 전라북도 순창 금과면의 한 구멍가게가 기억 난다. 너무 조용해서 새 지저귀는 소리마저 크게 들리던 동네, 할머니 동네에 있던 그 가게를 나와 동생은 어른들 말을 따라 ‘구판장’이라 불렀다. 대형마트에 익숙해져 있던 탓에 살만한 것들이 별로 없을 걸 알았지만, 동생과 꼭 한번씩 들러서 무엇을 살 지 고민했다. 할머니 집은 지루하지만 구판장에 갈 때는 재밌었다. 가게 안 쪽 방에서는 동네 할아버지들이 막걸리를 마시고, 가끔 가게 앞에서 윷놀이 판도 벌어졌다. 그 작은 구멍가게에서 뿜어지던 소음이 좋았다. 중학생이 되던 무렵, 그곳은 사라졌다. 다시 그런 곳을 만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찾아 나섰다. 그리고 사라져버렸을 것이라 단정지었던 같은 모습의 구멍가게를 청성면과 군서면에서 발견했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갔다.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과자들, 술이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안 쪽 방까지 같은 구조였다.■ 점심마다 밥을 차려 내놓던 구멍가게지나가다 들렀다며 군청에서 일하는 공무원 안씨가 가게 문을 드르륵 열었다. 10년도 더 전에 청성면사무소에서 일했던 그는 지금 군청에서 일하고 있다. 청성에 일을 보러 온 참에 사장님 볼 겸, 가게 볼 겸, 이 곳에 들렸다고 했다. “여기 진짜 그대로예요. 예전에 여기서 일할 때 외상도 몇 번이나 했었는데… 하하. 어머니도 저를 기억해 주시더라고요. 기억 못하실 줄 알았는데, 고맙죠. 변한 게 하나도 없어요. 다시 와보니 정말 좋네요” 30년 간 물건만 팔았다면 섭 할 정도로 몇몇 사람들의 삶의 일부를 책임졌던 구멍가게였다. 25년 전 즈음, 어느 날은 20살이 조금 넘어 보이는 면사무소 직원 셋이서 사장인 박옥란(84,청성면 산계리)씨에게 부탁을 하러 왔다. 구멍가게에서 점심밥을 해줄 수 있겠냐는 부탁이었다.“젊은 여직원 셋이서 나이 많고, 계장 부장 되는 남직원들이랑 밥 먹기가 얼마나 불편 했겠어. 그래서 나한테 부탁을 한 거야. 그래서 이 곳에서 점심을 해주기 시작했지”당시 청성면에는 오가는 차도 없고 길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청성면사무소, 학교, 농협직원, 소방관 할 것없이 청성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의 식사 공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밥 먹는 시간만큼은 숨통 트이는 곳에서 먹겠다며 결국 다섯 명의 젊은이가 그 가게에 모였다. 그러나 그것이 시기의 대상이 될지는 몰랐다. 하루는 한 위생과 공무원이 식당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군 위생과에서 업무를 하던 그는 안절부절 못하며 “허가 없이 밥장사를 한다고 신고가 들어왔다”고 입을 열었다. 근처 몇 없는 식당들이 신고를 한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속상하고 화가 났다고 했다. 그 공무원도 마음이 아팠는지 여차여차해서 결국 식당 허가증을 받아내 그 이후에는 마음껏 밥을 차렸다. 그는 그 때 냈던 화가 아직도 미안했는지 “그 위생과 직원 이름이라도 좀 알아 놨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고 말했다. ■ 이름도 잊지 못한 그 때 그 하숙생들이 그립다가게를 운영하며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 기억에 남는 사람을 물어보니 그는 바로 이름들을 줄줄 읊었다. 이 곳에서 하숙을 하던 사람들이라 했다. “힘들긴 했어도 참 재미났지. 그 때 20대였던 애들이 이제는 어디 가서 한자리들 하고 있을 거야”타지에서 오게 된 면사무소 직원의 권유로 사장은 하숙생을 받기 시작했다. 한 두 명으로 시작했지만 10명이 넘는 하숙생으로 북적일 때도 있었다. 돈이 많지 않고, 타지에서 오고 갈 여건이 되지 않는 이들에게 이곳은 언제나 든든한 공간이었다. 그렇게 1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마냥 즐겁다며 많은 이들의 보금자리를 책임졌다. 하숙을 시작한 지 10여 년 즈음이 되었을 무렵에도 몸은 힘들었지만 즐거웠다고 했다. 그러다 사람 하나 오가기 어려웠던 궁촌제에 길이 생기고 버스가 오가기 시작했다. “버스에 익숙해지려 하니까, 이제는 다들 승용차를 몰고 다니 더라고”청성에 머물렀던 이들은 떠나고, 새로 오는 이들은 출퇴근을 하니 하숙집에는 오는 발자국보다 나가는 발자국이 더 많이 남았다. 그래도 가끔씩 찾아오는 하숙생들이 있다며, “커피 한 잔 씩 마시며 잠시 몇 마디 나누면 그보다 반가운 일이 또 어디 있겠냐”고 말했다. ■ 50여년이 걸려서 그제야 이룬 꿈30년 전 큰 딸과 사위가 200만원으로 가게를 차려주며 시작한 구멍가게, 하지만 자식들은 “이제 힘드시니 가게일 좀 그만뒀으면 한다”고 말한다. 그래도 그는 청성에서, 그리고 이 가게에서 세월의 모든 변화를 지켜보고 따라갔으니 이 자리에서 계속 있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는 어린 시절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도 기억이 쨍쨍하다고 했다. 8살이 되던 해에 광복을 맞이했다. 11살에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ㄱ’부터 ‘ㅎ’까지 쓰는 법을 물어봤다. 글을 쓰고 읽고 싶은데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렇게 1년을 여기저기 물어 봐가며 용을 쓰니 조금은 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큰 책에 나온 소설 같은 것은 읽기가 어려웠다. “한 아저씨가 ‘ㄱ’부터 ‘ㅎ’까지 쓰는 걸 알려줬어. 막내동생 등에 업고 틈 나는 대로 맨날 한글 공부를 했지. 나는 글이 그렇게 알고 싶더라고”19살이 됐을 때 그는 27살 먹은 남편과 결혼했다. 바깥일도, 집안일도 안하는 뭐하나 잘난 것 없는 남편이었다. 스스로가 나서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물장사, 두부 장사, 막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 와중에 ‘글’은 그에게 도전하고 싶은 목표였다. 두꺼운 성경책을 두 번이나 따라 쓰며 문장 보는 연습을 했다. “내 또래들 중에 내가 글을 그나마 쓰니까, 교회에서 글 써야할 일이 생기면 나를 찾아줘. 그게 참 즐겁고 뿌듯해” 시간이 한참 흘러 몇 년 전에는 복지관 직원이 가게에 와서는 글쓰기 대회가 있으니 살아온 수기를 한 번 써달라 부탁했다. 줄 간격이 넓은 초등학생 공책을 펴놓고, 일제강점기부터 남북전쟁 지나 결혼해서 온갖 고생을 한 이야기를 거쳐 남편이 일찍 세상 떠난 얘기까지 썼는데, 술술 써졌다고 했다. 그 수기는 3위에 올라 과천청사까지 가서 상을 탔다. 학교도 안 가고 혼자 배워 쓴 글이라 더욱 뿌듯 했다고 말했다. 청성면사무소 앞에는 30년 전 그대로인 구멍가게가 있다. ‘아직도 있냐’는 말이 어색하지 않지만 동시에 ‘여전히 있음에 고맙다’는 말들도 따라붙는 곳이다. 구멍가게 안 난로 위에는 주전자가 놓여있고, 커피 물이 조용히 끓고 있다. 여는 시간과 파하는 시간이 분명치 않다. 그저 날이 밝으면 나가서 문을 열고, 날이 지면 문을 닫는다. 이제 물건 사러 오는 손님은 손에 꼽지만 오고 가는 주민들에게,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에게, 이 곳은 지금도 숨통 트이는 곳이다. 주소 : 청성면 산계길 52-1영업시간 : 해 뜰때~해 질때 / 연중무휴
인물일반 | 김기연 기자 / 박나혜 인턴기자 | 2021-11-26 14:17
김부규씨올해 2월 동이면사무소로 귀농신청을 하러 갔던 김부규씨는 금암리에 축사를 지어 소를 키우고 있었다. “군에도 가고 면에도 가보고 다 가봤는데 허가를 내는 과정이 꽤나 복잡했다”며 그때의 심정을 토로했다. 허나, 면사무소에서 만났던 채송희 담당자가 너무 친절했다며 “서울에서 살다가 시골에 와가지고 어떤 절차를 거쳐야하는지 잘 모르는데 이 직원이 세밀하게 잘 알려주더라”고 전했다.동이면 지양리가 고향인 김씨는 서울대학병원에서 약 37년간 근무를 했었다. 퇴직하고 나서 소를 키우는 것이 꿈이었다는 그는 서울 생활을 하면서도 조금씩 소를 키웠다고 전했다. “직장 다니면서 연습 삼아 7마리 정도를 먹였었는데 그때는 주로 아버지께서 관리를 하셨다”며 “소 키우는 법을 배우기 위해 주말마다 내려와 일도 도와주고 하다보니까 자연스럽게 퇴직 후에 이 일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허나, 아버지가 일을 하던 중, 다리를 다치는 사고가 생기면서 평상시에 소를 봐줄 사람이 없어졌고 결국, 7마리를 모두 팔 수 밖에 없었다.이후, 퇴직을 1년 정도 남겨둔 시점부터 축사를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허나, 축사 일을 한 것은 처음이기에 행정 처리에 있어 어려움이 많았다고 전하는 그. 그런 그에게 채 담당자는 너무도 친절한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일한 병원에서도 내원객들을 상대하다보면 짜증이 날 때가 있다. 근데 이분은 가족같이 대해주는 것을 보고 제보를 결심했다. 처음 갔을 때는 잘 몰랐는데 두 번, 세 번을 가도 항상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에 큰 감동받았다. 솔직히 형제지간에도 그렇게 대하는 경우는 없지 않나 싶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한편, 김씨는 교통조사 기간제 근로자로 일할 당시에도 채 담당자가 친절히 대해줬다고 이야기했다. “동이면사무소에서 부락에 차량 이동하는 것을 숫자로 파악해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급여를 제공하기 위해 계좌번호와 주민등록번호를 찍어달라고 하더라. 시키는 대로 찍어오니까 담당자가 출장 갔다고 하니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 채 담당자가 본인 소관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휴대폰에 입력을 해서 담당자한테 문자 메시지를 남기더라”며 적극적으로 안내해준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전했다. “어떤곳에서는 서류처리를 하러 가면 '담당자가 없다', '내일 오시라' 등의 말로 회피하곤 하는데 우리 입장에서 내일 오라는 식의 말을 들으면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채 담당자는 몇 번으로 가시라고 구체적으로 말하며 농민들을 배려했다” “사소하게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상대에겐 와 닿는 것이 다르다”고 말했다.고향에서 받은 따뜻한 친절에 힘입어 현재 김씨는 소 23마리를 키우고 있다. 앞으로, 70마리까지 더 키울 생각이라고. “연말도 다가오고 하니, 면장이 주는 상이 있나 싶었다. 이렇게 본인의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들은 주변에서 소리를 내줘야만 효용이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한테 미담을 알려 당사자한테도 좋은 일만 생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한편, 채 담당자는 “주민들 가운데에는 차를 타고 오시는 등 시간을 들여서 오시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이 헛걸음하지 않도록 잘 응대해드리려하고 좋은 결과가 있으면 좋겠지만 항상 그렇지는 못한 점이 아쉽다”며 미담 제보의 당사자가 된 소감으로 “굉장히 보람된다. 소통이 잘 안될 때도 많은데 이렇게 제보를 해주시니 너무 감사할 따름이 라고 남겼다.
인물일반 | 윤석준 인턴기자 | 2021-11-26 14:01
윤석준·박진희 인턴기자와 낚시를 하던 두 어르신이 전통문화체험관 앞 연못에 붕어를 방류한다는 제보를 듣고 바삐 나선 어느 날.한 달에 몇 번은 “아 이번주는 망했다”라고 생각하는 날이 있다. 아마 누구든 그런 날이 있으리라. 글은 글대로 안 써지고, 취재는 취재대로 안 되는 그런 날 말이다. 아마 콘텐츠를 구상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생각이지 않을까? 수첩과 펜을 집고 카메라를 든 지 7개월. 여전히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당황스럽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전화를 해도 거부를 당할 때가 있고, 또 어떤 날은 전화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에 길을 지나가다 곧장 머리부터 집어넣고 “혹시 취재가 가능할까요?”라고 물어보면 “그런 거 안 합니다”라며 퇴짜를 맞을 때가 있다. 붕어를 방류한다는 두 어르신을 찾아 교동방죽을 함께 오르다.유난히 취재가 어렵던 어느 날. 시간을 내어주신 군서 서화슈퍼 사장님을 촬영하던 모습을 안진수 인턴기자가 찍어줬다어디 그뿐이랴, 막상 인터뷰 약속을 잡고 3~40분을 운전해서 약속장소에 도착해보니 한참을 찾아도 시골개 짓는 소리밖에 안 나더라.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다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닿으면 “아이고 미안합니다. 여차여차해서 잊어버리고 멀리 나와있네요. 허허”라며 멋쩍은 웃음소리를 듣기도 한다. 어쩌겠나. “아이고 괜찮습니다. 다음에 오도록 하겠습니다” 하는 수밖에… 차라리 읍내에서 있는 일이라면 그려려니 하겠으나 저 멀리 청산이나 청성에라도 갔다가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아… 그냥 돌아가면 안 되는데…”라며 초조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급하게 여기도 들어갔다가, 저기도 들어갔다가 결국에는 축 처져 사무실로 복귀하던 날도 있다. 그럴때면 “와! 이 콘텐츠 대박인데?”라고 김칫굿을 장독대로 퍼마시며 당당하게 사무실의 문을 열고 나선 나 자신이 참으로 민망해지기도 한다. 하도 부끄러워서 어디다 얘기하기도 민망하다. 하지만 어느 날에는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곳에 “당연히 안 되겠지?”라는 의구심을 품으며 밖에서부터 혼자 궁시렁 궁시렁거리다 다시 한번 머리부터 들이밀고 취재를 요청하니 “이야 그거 괜찮네! 까짓것 한 번 해봅시다”라며 취재에 응해주는 취재원을 만나기도 한다. 혹여나 그럴 때면 그보다 행복할 수 없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 콘텐츠라는 것이 생각한 데로만 되는 것이 아니구나”라고 말이다. 그렇게 원래 하려던 콘텐츠에서 돌고 돌아 더욱 기깔난 아이템을 찾을 때, 그때는 “이야! 하루 온종일 돌아다닌 값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기도 했다.고백하길, 기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뭐라도 된 것 마냥 오만해질 때가 종종 있다. “당연히 해주겠지!”, “대체 왜 안 해주는 거야!”라며 말이다. 그리고 괜히 아무도 모르게 씩씩대며 심술을 부려보기도 한다. 한 번 잘 됐다고 그 다음도 잘 될 것이라는 생각에 기세 등등해진 스스로를 돌아보니 참으로 부끄럽다. 푹푹 찌던 8월, 윤수진·이상현 인턴기자와 청성면 산계리서 고추수확을 하던 어르신들을 만났다 푹푹 찌던 8월, 윤수진·이상현 인턴기자와 청성면 산계리서 고추수확을 하던 어르신들을 만났다곰곰이 생각해 보면 갑자기 기자라는 작자가 찾아와 명함 하나 툭 들이밀고 카메라를 갖다 다며 “취재 한 번 해도 될까요”라고 물어보면 누가 “아이고 감사합니다”하면서 “한 번 해볼까요?”라고 맞이할까? 그리고 당황하지 않을 이가 어디에 있으랴, 혹여나 그런 상황이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특히나 가장 바쁜 농번기에 시간을 내어주는 농부가 그렇고,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주는 가게의 주인장들이 그렇다. 그들은 그들의 시간이 있고 그들의 의무가 있음이다. 세상 어디에도 당연한 것은 없다. 나를 만나주는 이들이 있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고 혹여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또 한 가지, ‘꼭 특별한 것을 취재해야 기사가 되는 것도 아니더라’, 취재가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이걸 하려다 저걸, 혹은 저걸 하려다 이것을 할 수도 있다. “할 게 없네, 할 게 없네” 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시야가 좁은 스스로를 탓할 일이다. 흘러가는 주변의 소소한 소식들이 모이면 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 어찌 그리 어려운지… 그리고 이제야 1/10을 알아가기 시작한다. 지나가던 어린아이들의 소꿉놀이, 마실방 나온 어르신들의 이야기, 동네 텃밭에서 수확한 고추농사, 저수지에서 물고기를 낚는 낚시꾼들의 이야기들처럼… 글감이 될 이야기들은 수두룩하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 “옥천에서는 어떤 이야기든 기사가 될 수 있다”고말이다. “아 이번주는 망했다”고 생각을 할 때면 다시 생각해 보자. “생각한 대로만 콘텐츠가 만들어지면 그걸 누가 재미있게 읽겠냐고!”
인물일반 | 김기연 기자 | 2021-11-26 13:21
영동중학교 장성찬 학생회장.“3차 개정위원회에서 탈색과 염색 허용, 귀에 걸 수 있는 액세서리 허용, 교복 대신 무채색의 옷을 입을 수 있는 안건을 다룰 예정이고, 가능하면 학생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학칙이 개정됩니다.”영동중학교는 옥천의 여느 중학교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휴대폰은 점심 시간에도 허용하고 교복을 안 입어도 된다니, 그리고 탈색과 염색이 허용되고 웬만한 액세서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옥천에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영동은 학생들의 힘으로 하고 있었다. 학교생활규칙위원회에 학생이 과반수로 참여해 거기서 논의를 이끌고 있었다. 그 중 한가운데에 있는 장성찬 학생회장을 만났다.“대의원회에서 학생들이 모여 토의를 하고 안건이 결정되면 학칙 개정위원회로 올리죠.” 대의원회에서는 휴대전화 사용 문제나 교복착용 문제, 학교생활 문제 등 다양한 학교생활 의제에 대해 토론하고 선정한다고. 그는 “학교에서 휴대전화 사용 문제는 워낙 예민한 문제기도 하고 학생들에게 제일 큰 관심사”라며 입을 뗐다.“처음에 전교생에게 설문지를 돌렸을 때는 완전 자율화 쪽으로 기울었는데, 학부모님들 설문조사에서 워낙 현행 유지가 높아서 서로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며, “모두가 의견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서로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사실 이렇게 서로의 의견을 모으고 학생들이 주인공이 되는 학교로 변화시킨다는 게 말처럼 쉽진 않다.영동중학교를 조금씩 움직이게 했던 것은 “학칙위원회가 개최될 때마다 영동중학교는 다른 중학교보다 조금 더 앞서 나가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란다. 학칙위원회에 과반의 학생이 참여해 학생위원 5명, 교사위원 3명, 학부모위원 2명이 학칙개정을 위해 함께 나선 것이다.더불어, 학생회 소통부에서는 여러 장소에 소통함을 설치해서 학생들의 의견을 계속 받고 있다. 최근에는 강당 앞 쪽 쓰레기 문제가 불거져서 쓰레기통을 설치했다. 쓰레기통 설치하는 것쯤은 별일 아니라 생각될 수 있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피부로 느끼는 변화다. 이런 식으로 학교를 조금씩 바꾸어나가면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을 유심히 살피고, 선생님과 학부모가 학생을 믿을 수 있는 학교로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꿈이다.“매번 이사 다녔어요. 부산에서 영동으로 전학을 왔으니, 아마 제가 살던 곳 중에 가장 오래 살고 있는 곳일 거예요.” 그는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2학년 학교생활이 아쉬웠다던 장성찬 학생은 올해 영동중학교의 학생회장을 맡게 됐다. 그가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처음 기획했던 활동은 ‘아침맞이’ 행사란다. 새내기 중학생을 맞이하는 첫 행사로 낯선 학교에 첫 발을 디딘 아이들에게 꽃을 나눠주는 행사다. 첫 행사는 꽃 나눠주기로 시작했지만, 반응이 좋아 매달마다 진행하게 됐다. 이렇게 계속하다 보니 학생회에서도 고민이 많아졌지만, 재미있게 한 달을 시작하는 의미가 더 크다고. 시험이 있는 달에는 부모님들과 함께 응원 문구를 만들어서 서로를 응원해주기도 하고, 등교하는 학생들이 게임에 참여해 통과하면 소정의 상품을 준다. 이렇게 작은 날갯짓에서 시작된 격려와 응원은 곧장 교실 내 수업시간에도 영향을 끼쳤다.“사실 수업시간 때 가장 놀랐어요. 원래는 강의식으로 수업만 하시던 분이 학습지를 들고 들어오시더라고요. 학습지를 들고 와서 모둠활동이라는 걸 하시는 거예요. 가장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일방적인 수업만 하시다가 우리가 수업을 이끌어 나가는 형식으로 바뀐 것이죠.”영동중학교는 행복씨앗학교로 지정된 이후 수업에서 모둠활동을 하며 함께 만들어가는 교실을 지향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말에 경청해주고 존중해주는 선생님을 보면 함께 변화를 만들어간다는 마음이 들어 뿌듯하다”고 전했다.“비록 빠른 변화는 없지만 그래도 서서히 변화하는 것도 절대 나쁜 측면은 아니라고 생각이 들어요. 이런 식으로 조금씩 바뀌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행복씨앗학교가 무엇인지 학생들에게도 널리 알려야 영동중학교가 진정한 행복씨앗학교로 거듭나지 않을까 싶네요.”
인물일반 | 안진수 인턴기자 | 2021-11-26 11:19
김대수 서기관군서면 상중리가 고향인 김대수 출향인은 중소기업벤처부의 산증인이다. 1989년 중기부 전신인 공업진흥청에서 첫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중소기업청에서 중소기업벤처부로 승격하기까지 30년 이상을 같은 자리에서 중소기업 정책을 다뤘다. 지금은 중소기업벤처부 창업벤처혁신실 기술보호과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옥천은 대전과 인접한 농촌지역이고, 중견기업인 국제종합기계(주)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중소기업이다. 지역에 있는 중소기업 수는 650개가 넘지만, 매년 어려워지는 경기에 허덕이는 게 현실이다. 친인척이 살고 있는 고향 옥천을 자주 오다보니 자연스럽게 옥천의 중소기업 상황을 보게 되었다.김대수 서기관■ 탄소중립과 기술혁신 ‘남의 일이 아니다’김대수 서기관은 옥천의 상황을 담은 중소기업 정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봤다. 중소기업벤처부는 물론 충청북도에서도 다양한 기업지원책을 펴고 있지만, 대동소이한 지원책으로는 효과를 내기 어렵다고 봤다.“옥천은 대전이라는 대도시 근교에 있고, 또 농촌지역이면서 환경규제를 많이 받는 지역입니다. 그럼에도 650개가 넘는 기업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죠. 이런 조건에서 지역 기업들을 어떻게 육성할 것인지 마련하는게 가장 중요합니다.중소기업들은 해당 업종의 업황이나 장기흐름을 파악하고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당장 이익을 낼 수 있고 눈앞에 닥친 과제를 해결하기도 벅찬 게 사실이죠. 지역의 중소기업들이 어떻게 방향을 정하고 변화에 대응해야 할지는 지자체가 고민해야 합니다. 단순 지원정책이 아니라 옥천의 중소기업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함께 고민하고 제시해줘야 합니다.”김대수 서기관은 탄소중립이나 기술혁신 등 중소기업벤처부에서 꾸준히 이야기하는 정책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 강조했다. 십 수 명에서 수십 명이 일하는 중소기업이 대다수인 옥천에서도 정책적 흐름은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내년 정부는 탄소중립 관련 예산을 상당히 많이 편성했습니다. 산단을 하더라도 탄소중립정책에 맞춘 산단이라면 가점을 받고 실현 가능성도 훨씬 높아집니다. 옥천은 환경규제 때문에 어차피 일반 산단 조성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 팜을 테마로 한 산단이 마련된다면 훨씬 지역에도 맞고 정책적으로도 수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지역내 분야를 나누고 이 가운데 우수한 기업 100개를 선정해 적극 육성하는 방법도 좋습니다.” ■ 옥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공직자가 되고파군서초 60회, 옥천중 35회 동문인 김대수 서기관은 수시로 옥천을 방문한다. 누님이 옥천읍 가풍리에 거주하고 있고, 친인척들도 다수 옥천에 거주한다. 인터뷰를 한 11월1일에도 저녁에 친구와 약속이 있어 옥천을 간다 했다. 옥천은 기업하기 쉽지 않은 곳이지만, 가능성은 충분한 곳이라는 게 김대수 서기관의 평가다. 지역 기업체 상황이 악화되는 건 수도권 외 지역의 공통된 문제이나, 대전 대덕구나 유성구와 가까워 이곳에 있는 국책연구기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중소기업벤처부나 산업통상자원부도 세종에 있어 가깝다. 정책을 지역화하는데 유리한 구조라는 의미다.“제가 하고 있는 일이 기술패권시대에 중소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돕는 일입니다. 선제적인 기술확보와 기술보호 체계를 만들고 있고요, 더불어 기술 분쟁과 탈취 등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옥천에서도 많은 중소기업이 있고, 어려움에 있는 기업들도 많을 것입니다. 공직자로서 옥천만을 대상으로 일할 수는 없습니다만, 지역 중소기업들에게 도움을 주는 공직자가 되고 싶습니다. 저희 중소기업벤처부를 적극 활용해주시고요, 옥천에 맞는 중소기업정책을 마련할 수 있도록 지자체에서도 나서주면 좋겠습니다. 저도 적극 돕겠습니다.”김대수 서기관
인물일반 | 옥천닷컴 | 2021-11-19 14:13
러블리즈 및 미주 팬들 모습(왼쪽부터 황수빈 씨, 허일 씨, 이연우 씨, 섭개청 씨)‘그래, 나 빠순이(빠돌이)다!’, ‘빠순이(빠돌이) 발로 차지 마라!’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책 <빠순이는 무엇을 갈망하는가?>에서 아이돌 팬덤 공동체를 긍정했다. 철없는 사람들이 연예인을 쫓아다니고, 돈을 쏟아붓는 다며 아이돌 팬클럽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회 주류 시각과 다르다. 무엇 때문인가? ‘중요한 것은 스타가 아니라 모여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아이돌은 매개체일 뿐, 팬덤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팬들 간의 소통이 더 중요하다는 게 강준만 교수 생각이다. 공동체가 형성되고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돈독한 친구가 생기는데 무엇이 문제냐는 의미다. 친구들 만나서 밥 먹고, 여행 다니며 소통하는 것과 ‘아이돌 덕질’ 하는 건 다를 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고장 출신 아이돌 가운데 가장 왕성히 활동 중인 건 러블리즈 이미주(이하 미주)다. 미주는 죽향초-옥천여중-충북산과고를 졸업해 어린 시절을 대부분을 옥천에서 보냈다. 요즘은 MBC ‘놀면 뭐하니?’, tvN ‘식스센스’, 카카오TV ‘개미는 오늘도 뚠뚠’ 등에 출연하며 ‘옥천 여신’이라는 별명으로 활약하고 있다. 옥천 버스 미주 광고 사진 앞에서 사진 찍은 섭개청 씨■ 미주와 러블리즈로 모인 사람들 미주가 다양한 매력을 대중에 선보이다 보니 러블리즈와 미주 아래 뭉친 모임도 생겼다. 40대 맏형 허일씨, 28세 황수빈씨, 27세 이연우씨, 25세 섭개청씨는 그중 하나다. 이들의 출신 지역, 성별은 제각각이다. 서울, 부산, 전북 익산, 홍콩···. 연세대 어학당에서 한국어 공부 중인 여성 섭개청 씨는 홍콩에서 올해 8월 서울로 왔다. 한국 유학을 결심하게 한 중요한 요인은 러블리즈와 미주다.물론 이들이 꼭 미주 한 명 때문에 러블리즈에 빠진 건 아니다. 허일 씨는 친구에게 소개받아서, 황수빈 씨는 군대에서 뮤직비디오를 보고, 이연우 씨는 직장에서 힘들 때 러블리즈 노래가 힘이 돼줘서 팬이 됐다. 홍콩사람 섭개청 씨는 ‘Destiny (나의 지구)’란 곡을 듣고 러블리즈에 반했다. 이들이 모임을 형성하게 된 계기는 ‘자연스러움’ 그 자체다. 러블리즈 콘서트장, 공개 방송, 팬 사인회 등을 각자 다니다가 얼굴이 익게 되고, 식사하고 차를 마시며 친해졌다. “콘서트 같은 현장을 여러 번 가면 자주 보이는 얼굴들이 있어요. 처음에는 눈인사하고, 그러다가 인사하고, 번호 교환하면서 친해지는 거예요. (허일 씨)” “저는 이분들을 올해 10월 김제 드라이빙 콘서트에서 처음 뵀어요. 그날 저녁에 뒤풀이 식사하고 친해졌죠. (이연우 씨)” ■ 아이돌 팬덤, ‘소통 공동체’러블리즈와 관련된 행사들이 있으면 이들은 주로 함께한다. 월요일에는 SBS 라디오 ‘배성재의 TEN’에 출연하는 러블리즈 멤버 유지애를 보기 위해 SBS 서울 목동 사옥을 방문하고, 인천 월미도 등 거주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러블리즈가 행사하면 같은 차를 타고 이동한다. 지난 10월 초, 이들은 우리고장 옥천에도 다 같이 방문했다. 옥천 버스에 미주 생일 축하 광고가 실렸다는 소식을 듣고서다. (2021년 9월17일 1607호 옥천을 달리는 ‘이미주 버스’ 기사 참고) 옥천 버스 터미널에서 미주 광고가 실린 버스 앞에서 사진을 찍고, 미주가 졸업한 옥천여중, 충북산과고를 탐방했다. 미주가 학창 시절 자주 방문했다는 ‘카페하고’도 찾았다. 일종의 ‘성지 순례’인 셈이다. 강준만 교수 생각처럼 지금 이들은 친한 친구가 됐다. 러블리즈, 미주란 매개를 중심으로 함께 소통하며 2~3주에 한 번씩은 모인다. 꼭 러블리즈 때문이 아니더라도 식사하고, 커피 마시고, 술 한잔하는 사이다. “한국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외롭기도 해요. 그런 외로움을 러블리즈랑 러블리즈 팬클럽으로 달래요. (섭개청 씨)” “한 번 연이 닿으면 식사도 하고, 계속 친하게 지내는 거죠. 이것도 인연이니까요. (허일 씨)” ■ 러블리즈 위기와 상관없이...사실 현재 러블리즈와 미주 팬클럽 내부 분위기는 좋지 않다. 11월16일 자로 러블리즈가 데뷔 7년 만에 팬들과 잠시 이별을 고했기 때문이다. 리더 베이비소울을 제외한 모든 멤버가 기존 소속사 울림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하지 않았다. 미주를 포함한 멤버 8명이 다른 회사로 흩어지면 러블리즈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러블리즈에 대한 지원이 팬들 기대보단 적었던지라 소속사에 팬들이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재계약 건도 비슷하고요. (황수빈 씨)"하지만 이들은 러블리즈 활동 지속 여부와 별개로 자주 모일 계획이다. 허일 씨 언급처럼 한 번 닿은 인연은 지속해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저희가 다 친해요. 앞으로도 그럴 거 같고요. (이연우 씨)” “미주 광고를 옥천 버스에 건 일본인 팬도 저랑 친구예요. (코로나 19 끝난 뒤) 하늘길 열리면 바로 보자고 어제도 연락했어요. (허일 씨)” ‘전국의 모든 빠순이에게 뜨거운 지지와 더불어 격려를 보낸다.’ 강준만 교수는 책 <빠순이는 무엇을 갈망하는가?>를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했다. 공동체적 소통이 점점 사라져 가는 현대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아이돌 팬덤이기 때문이다. 옥천이 낳은 미주는 그 소통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예정이다.
인물일반 | 김용헌 인턴기자 | 2021-11-18 2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