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하나로 종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흔치 않다. 체력이 허락한다면 한 달 내내 서예 강의를 해도 지치지 않을 만큼 열정이 넘치는 작가다. 1979년 군생활을 마친 뒤 작가로 활동하며 우리고장에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우리고장에서 왕성한 문화 활동으로 서예인구 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하는 대표 서예가 평거 김선기(70, 읍 죽향리) 선생은 올해로 고희를 맞았지만 전통에서 벗어나 현대인의 욕구에 맞는 파격적인 예술작품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9년 23대 순조임금상량문필사본 9m×83cm, 중수기 8m×83cm를 완성해 인릉 정자각에 봉안했다. 지난달 2일 구읍 그냥찻집 인근 자택에서 만난 평거 김선기 선생이 그가 수집해온 오래된 LP판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서울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현판과 아펜젤러 기념공원 표지석 휘호, 옥천역 광장, 구읍 정지용문학관, 옥천전통문화체험관의 모든 현판, 옥천군청, 한밭대학교, 충북도립대학교, 영동법원, 영동검찰청에 기증돼 있는 대형 향수 작품을 비롯한 각종 현판이나 표지석에 그의 기품을 느낄 수 있다.그동안 평거 선생은 옥천여성회관 27년, 보은문화원 25년, 한밭대학교 평생교육원에 18년째 서예 강의를 맡고 있다. 또한 대전에서 서예학원 운영 5년을 마감하고 서예 불모지였던 1986년 옥천에 들어와 정착한 뒤 지금까지 지역 서예문화발전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평거 김선기 선생이 관리하고 있는 평거민속박물관. 그가 수십 년간 수집한 골동품들을 집대성한 장소다. 지난해 10월 옥천전통문화체험관 관성관에는 코로나 기간 중 준비한 붓놀이 작품 100여점으로 서화전을 연 바 있다. 2008년 3회 ‘연주 없는 붓가락’, 2019년 4회 ‘먼 길’에 이어 2023년 5회 ‘붓놀이’ 서화전은 서예를 비롯해 문인화 및 서양화까지 아울렀다.현재 그가 거주하고 있는 ‘평거민속박물관’에는 40여년 동안 전국을 다니며 수집해 온 귀중한 물건들이 가득 차 있다. 우리 선조들이 즐겨 쓰던 물건 하나하나에는 질박하면서 순수함이 담겨 있다. 평거 선생은 조상의 혼과 땀이 배어 있는 옛 물건들을 통해 작품 활동에 많은 영감을 얻고 있다. 평거 김선기 선생은 자택 3층에 있는 서실 '불염재'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서실에는 그의 손때 묻은 붓 수백 자루를 만날 수 있다.1층 ‘평거민속박물관’에는 조선시대 유명한 서화가들의 작품과 실생활에 즐겨 쓰였던 근현대 소품들이 빼곡히 진열돼 있다. 그리고 2층에 들어서니 그곳에는 광복을 위한 대한독립만세 태극기를 비롯해 조선광문회 서함, 120년 된 풍금, 최초 진공관 TV를 포함해 귀중한 서화 작품들이 소장돼 있다.평거 선생이 늘 붓과 함께하는 3층 붓질방은 작가가 지금까지 평생을 쓴, 다 낡은 수백 개의 몽당 붓들이 서실 한 켠에 전시돼 있다. 그리고 서재에는 과거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쓰였던 고서와 교재들이 빼곡히 진열됐고, 서예가가 작품을 완성할 때 필요한 낙관이 가득했다. 평거 김선기 선생은 지난해 10월 옥천전통문화체험관에 열린 '붓놀이'까지 개인전을 5회 하며 전시했던 작품들을 서화집으로 남겼다. 왼쪽부터 평거 김선기 두 번째 서예전, 연주 없는 붓가락(3회), 먼 길(4회), 붓놀이(5회).지난해 10월 평거 김선기 선생의 다섯 번째 개인전 '붓놀이'를 전시하며 펴낸 서화집. '고향의 앞산', '선의 본질', '삶의 무게' 등 그가 창작해낸 84개 서예 작품이 수록돼 있다. 과거 한학 공부를 할 당시 황도 유범장 선생이 내려준 아호 ‘평거’는 ‘평안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라’는 당부의 말이기도 하다. ‘불염재’는 논어에 나오는 ‘학이불염’(배움을 싫어하지 말라는 뜻) 내용 중에 당호로 삼아줬다.평거 선생이 추구하는 서화의 본질은 기운생동하는 획뿐만이 아니다. 먹색이 가진 특색을 살려 보는 이로 하여금 작품을 쉽게 이해하고 흥취를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자유분방한 가운데 획을 해체하는 것은 물론 채색을 과감히 도입하기도 한다. 평거 김선기 선생이 서실에서 그의 다섯 번째 서화집 '붓놀이'를 펼치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붓놀이' 전시 때 선보인 서예 작품 '정지용 님 시 향수'.'붓놀이' 전시 때 선보인 서예 작품 '舞'(춤출 무).평거 선생은 서예뿐만이 아니라 서양화는 물론 전각의 세계까지도 뻗어나간 예술가다. 평생을 스승이나 누구의 도움 없이 작가의 힘든 길을 홀로 걸어왔다. 그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를 통해 소품 및 컵, 도자기, 전각을 포함한 다양한 작품들을 만들어 누구나 쉽게 공감하고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차별화한 새로운 작품 세계를 선보일 계획이다.그는 말한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오로지 붓! 붓과 함께 하련다.’우리고장 서예가 평거 김선기 선생이 '정지용 님 시 향수'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서예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시대 흐름에 맞게 변화를 추구하는 그는 옥천여성회관, 보은문화원, 한밭대 평생교육원에 다년간 서예 강의를 나가며 제자를 길러내고 있다.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4-05-09 13:22
음악은 알면 알수록 묘한 힘이 있다. 다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을 이어주는 힘이랄까. 생각하는 것도, 쓰는 언어도 다른 이들을 하나로 유대하게 해주는 특별한 마력이 음악에 깃들어 있다. 유연하면서 강한 무언(無言)의 힘. 알게 모르게 타인을 경계하고, 구분 짓게 하는 세상에 사람들은 음악을 더 갈구하며 얼어있던 마음을 녹이는지 모르겠다.옥천엔 기타 공연이나 노래 공연이 많다. 트럼펫은 조금 낯설다. 흔히 아는 국민의례부터 군대 기상나팔까지 단번에 들으면 익숙한데 옥천에선 생소하게 느껴지는 악기 중 하나다. 옥천에 트럼펫 연주자로 활동하는 숨은 고수가 있다. 아마추어와 결이 다른 프로 전공자의 자부심이 엿보였다. 실력 좋은 것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소통하는 연주자가 되고 싶어 했다. 유선주(27, 읍 가화리) 씨 이야기다.유선주 씨는 충남대 관현악과에서 트럼펫을 전공해 2년 전 졸업했다. 삼양초, 옥천여중, 청주 일신여고를 나온 그는 14년째 트럼펫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옥천 와이즈뮤직 오케스트라, 대전 메시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있다. 옥천 동이면 유채꽃 음악회, 옥천군 도시재생뉴딜사업 반짝축제, 김광석 추모콘서트, 대전문화예술지킴이 감사콘서트, 제주 국제 관악제 등 여러 공연에 참여한 유선주 씨. 옥천에 보기 드문 트럼펫을 연주하는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삼양초, 옥천여중, 청주에 있는 일신여고를 나온 유선주 씨는 옥천여중 관악부 '예다움' 단원으로 활동하며 음악을 접했다. (사진제공: 유선주)■ ‘악기 하는데 와 볼래?’“자기가 하고 싶은 일하며 사는 사람이 많지 않잖아요. 같이 입시 준비한 동기들을 보면 음악을 중도 포기한 친구들이 꽤 있거든요. 저는 원하는 직업을 하고 있으니까요. 삶의 만족도도 높고요. 돈을 많이 벌고 적게 벌고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내면에 깃든 예술의 끼를 찾은 건 세 살 무렵이었다. 인천에서 열린 에어로빅 공연 때 단상에 올라 춤을 추고 문화상품권을 탔다.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다. 음악 듣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다. 춤은 잘 못 추지만 나름 흥이 넘친 아이였다.음악을 전공할 줄 꿈에도 몰랐다. 어렸을 땐 교사가 되고 싶었다. 경찰로 일하는 아버지 영향으로 경찰도 장래희망 중 하나였다. 악기를 접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당시 친하게 지낸 옥천여중 1학년 언니들이 ‘너 악기 하는데 와 볼래?’ 권유해서 악기를 접했다.옥천여중 관악부 ‘예다움’에서 단원들을 가르치던 선생님을 만났다. 중학교 입학하면 찾아오라고 했다. 그렇게 여중에 입학하고 관악부에 들어갔다. 처음엔 테너 색소폰을 배정받았다. 악기도 무겁고, 재미도 없고, 선배들 사이에 주눅 든 시절이었다.먹구름 속 한 줄기 빛은 음악하는 즐거움 그 자체였다. 열심히 불려고 피스랑 악기를 집에 가져가 불렀다. 어린 마음에 부모님에게 자랑도 했다. 그땐 가벼운 취미였으니. 어느 날 강사로 온 선생님이 트럼펫을 권유해 트럼펫을 잡았다. 중학교 1학년 중간이 지날 때였다.■ 음악의 재미 알려준 선생님달랐다. 색소폰과 트럼펫 부는 소리가 차원이 달랐다. ‘조금만 더 해볼까?’ 싶은 욕심이 생겼다. 악보 보는 법도 모르던 시절, 어느 순간 운지법 번호를 손으로 써 가며 연주하니 3~4개월 만에 웬만한 곡들을 섭렵했다. 누가 가르쳐줘서 한 게 아니었다. 스스로 터득했다.중학교 1학년 때부터 트럼펫을 잡은 유선주 씨는 취미로 악기를 접하다 음악에 소질을 느껴 전공으로 나아갔다. (사진제공: 유선주)트럼펫을 권유한 강사 선생님이 트럼펫을 전공해보라고 했다. 재능이 있다는 이야길 들은 부모님도 악기에 전념할 수 있게 지켜봐 줬다. 청주 일신여고 관악부에 진학해 3년간 악기 연습을 죽어라 했다. 관악부 특유의 규율과 딱딱한 분위기에 기가 눌렸지만 지나고 보니 음악의 지평을 넓힌 소중한 시간이었다.대전 침례신학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만족하지 않았다. 1년만 다니고 재수를 택했다. 남들은 대학 다니면서 꽃구경할 때 다시 지독한 수험생활로 돌아갔다. 뒷바라지 해주고 시험장 갈 때마다 동행해준 부모님. 충남대 관현악과 17학번으로 들어간 과정에 힘을 준 선생님도 기억에 남는다.“목원대에서 트럼펫을 전공한 김진성 선생님이 제 은인이에요. 재수 생활할 때 만난 분인데 제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셨어요. 좋아하는 음악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으니 감사했죠. 음악이 재미있다는 걸 알게 됐고요. 그때 자신감을 많이 찾은 거 같아요.” ■ 치열함 벗어난 지금이 더 행복트럼펫을 놓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다. 숨을 늘리는 건 반복 훈련으로 가능하나 슬럼프가 간간이 찾아왔다. 그럴 땐 관악기 연주자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거울을 보며 어떻게 하면 잘 불리고, 안 불리는지를 파악하며 잘못된 습관을 고쳤다. 음악은 노력하는 사람 못 따라간다. 재능보다 연습이 더 중요하다.유선주 씨가 지난해 9월21일~23일 금구어린이공원에서 열린 '도시재생반짝축제'에서 트럼펫을 연주하고 있다. (사진제공: 유선주)고등학교 때 청주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을 뿐 옥천에 줄곧 살았다. 대학 4년 내내 악기 가방, 책가방 메고 통학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재직 중인 경찰서에서 ‘경찰의 날’ 행사 때 트럼펫을 연주했다. 이문세의 ‘붉은 노을’, 김수철의 ‘젊은 그대’를 불렀다.전북 순창에서 열린 ‘수재민을 위한 콘서트’에 나가 연주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그때가 2020년 9월24일,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 긴 머리에 노란 원피스 입고 연주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참여한 공연이었다. 주최 측이 돈을 주셨지만 수재민을 위한 계좌로 기부했다.대전에서도 금관 5중주 팀에 들어간 적이 있다. 지난해 여름 대전 마치광장에서 재즈풍 곡들을 연주할 기회가 있었다. 어린 꼬마들이 와서 ‘우와, 멋있다’며 사진도 같이 찍었다. 악기를 좋아해서 부는 것뿐인데 관객들에게 즐거운 시간을 선사하며 보람을 느꼈다. “실은 악기하면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무서웠어요. 입학 실기가 끝나면 울었을 정도로 공포증이 심했거든요. 여러 고비가 있었지만, 지금은 악기를 즐기면서 한다는 게 좋아요. 시험이나 공연에 압박이 없으니까요. 지금이 더 행복하고 좋아요.”■ 트럼펫 연주와 함께 하고 싶은 일옥천 문화예술활동의 분기점은 3년째 활동 중인 ‘옥천 와이즈뮤직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면서부터다. 옥천 와이즈뮤직 오케스트라는 가화리에 있는 행복한교회(감리회)가 운영한다.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 플루트, 트럼펫 등 관심 있는 악기가 있으면 누구든 관원으로 참여할 수 있다.유선주 씨가 지난해 11월23일 옥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옥천와이즈뮤직 오케스트라'에 참여해 연주에 몰입하고 있다. (사진제공: 유선주)코로나 이전에 부활절 연합예배가 있으면 지원을 나갔다. 그때 지휘자가 행복한교회 오필록 목사님이었다. 옥천여중 관악부 생활할 때부터 알고 지낸 분이다. 오케스트라 활동하면서 자연스레 이 교회에 다녔다. 오는 11월에 있을 정기연주회도 무조건 참석이다.“행복한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악기 부는 게 그저 감사하죠. 지난해부터 옥천에서 공연 활동하면서 아는 사람들이 많이 생긴 거 같아요. 옥천은 트럼펫 자체가 듣기 어려운 장르잖아요. 제가 가르친 수강생 분한테 추천받아 동이면 유채꽃축제도 나오고, 반짝축제도 참여하게 됐어요.”옥천에 활동 범위를 넓히려고 예술인지원사업 신청도 했다. 36개월 미만 아이들을 위한 공연을 준비하려고 ‘키즈 콘서트’를 기획했다. 옥천에 없는 걸 하고 싶었는데 뜻대로 이뤄지진 않았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남녀노소 누구나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옥천이 됐으면 바람은 변함없다.트럼펫 연주자로만 살기엔 세상일이 녹록지 않았다. 학점은행제로 보육교사 아동학사를 취득해 어린이집 보조교사로 일하고, 피아노학원 이론강사로도 뛰고 있다. 향후 청소년들이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돕는 청소년지도교사도, 우쿨렐레나 칼림바와 같은 악기로 방과후수업 하는 것도 준비하고 있다.■ ‘트럼펫 알기 쉽게 가르쳐드려요’두드려보니 길이 열렸다. 일하고 있는 어린이집에서 연주회를 두 번 했다. 보육교사가 되기 전 실습 때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곡을 편성해 음원과 악기를 준비했다. 아이들에게 트럼펫 특성을 알려주는 교육 시간을 마련했다. 아이들이 좋아했다.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어린이집에 연주할 계획이다.유선주 씨는 입시와 각종 공연에 압박을 느끼던 시절을 지나 지역에서 문화예술활동을 하며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사진제공: 유선주)“피아노학원 보조교사로 일하면서 제가 실습지에서 6주 동안 함께했던 아이들을 만났어요. 아이들이 기억하더라고요. ‘트럼펫 선생님’ 이러는 거예요. 아이들이 막 놀라면 ‘나 누구게?’ 물어봐요. 그러면 ‘유선주 선생님이요’ 하는 친구도 있고, 기억 못 하는 친구들은 ‘트럼펫!’ 그래요. ‘맞아, 나 트럼펫이야.’ 그러면서 내 이름은 유선주라고 알려주죠. 나름 재밌는 삶을 살아요.”혼자만 잘하면 무슨 재민가. 트럼펫을 알기 쉽게 알려드리고 싶어 개인 레슨생을 받고 있다. 연령 상관없이 기초부터 연주까지 할 수 있게 해드린다. 악기는 따로 준비해야 한다. 악기는 기본 100만원 정도 하는 고가지만, 몇 십 년을 지나도 관리만 잘 하면 계속 쓰는 게 금관악기다. 저렴한 악기를 구하고 싶다면 중고 악기를 찾으면 된다.70대 할머니도 트럼펫을 배우니 늦은 나이란 없다. 트럼펫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겐 먼저 물어본다. ‘어디까지 해보셨을까요?’ ‘어떻게 접하셨나요?’ 소리 내는 걸 들으면서 ‘이럴 땐 이렇게 하시면 좋아요, 그럼 소리가 달라질 거예요, 한 번 해보시겠어요? 잘 하셨어요, 조금만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피드백을 드린다. 항상 그렇게 해왔다.레슨은 레슨 시간에 끝내는 게 맞지만 필요하면 보강도 한다. 수업 외적으로 악기 연주할 때 문제점도 짚어드리며 상담도 한다. ‘소리가 달라졌다’ ‘악기 부는 게 편해졌다’는 이야길 들을 때 보람을 느낀다.■ “옥천에 숨은 예술인이 많아요”대학에서 트럼펫을 전공한 유선주 씨는 트럼펫에 관심 있는 분들을 대상으로 개인 레슨생을 모집하고 있다. (사진제공: 유선주)“(트럼펫 배우는 분들이) 음악을 즐기셨으면 좋겠어요. 통과해야 할 단계들을 숙제처럼 여기지 않으셨으면 좋겠고요. 진도가 조금 늦더라도 꾸준한 사람은 못 이기는 것 같아요. 꾸준히 하면 나중에 가서는 효과가 나오거든요. 운동과 마찬가지로 악기도 정직해요. 한 만큼 나와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을 조금 내려놓으면 점차 실력이 는다는 걸 느끼실 거예요.”학창 시절 오케스트라에서 멜로디 라인을 담당하는 ‘퍼스트’도, 시간이 지나 저음 영역을 담당하는 ‘세컨’ ‘서드’ 자리도 두루 맡아봤다는 유선주 씨. 그는 자리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데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음악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음악 세계가 조금씩 깊어지고 여물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앞으로 트럼펫 연주자 유선주 씨가 옥천에 펼쳐나갈 공연이 기대된다.“옥천에 숨어 있는 지역예술인들이 곳곳에 계세요. 아마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거예요. ‘앙상블 엘’로 활동하는 클라리넷 연주자 김연주 선생님도 친한데요. 지난번에 예술인지원사업에도 함께하면서 정말 잘해주셨고, 여러 도움을 주셨어요. 고마운 분이죠. 저랑 관련된 모든 분이 알려져서 잘 되시면 좋겠어요.”문의 : 010-7512-3952 (유선주)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4-04-11 20:39
우연한 만남이었다. 지난해 6월쯤이었나. 옥천전통문화체험관에 열린 김성장 시인의 손글씨전 개막 행사 때였다. 짙은 파란색 원피스에 밀짚모자. 단정한 복장에 세상에 때 묻지 않은 온화한 인상. 방문객들 사이에 그는 조용히 작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다소곳해 보였다. 옥천에 사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김성장 시인을 보러 타지서 온 지인으로 짐작했다. 당시 현장 분위기를 담아내고자 인터뷰 차 말을 붙였다.10여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행사 때 김성장 시인과 인연이 닿아 전시장에 왔다고 했다.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자기 생각을 정제된 언어로 표현하는 게 남들과 좀 달랐다. 명함을 주고받았는데 이력이 독특했다. 대전작가회의 소속 문예창작위원장 직을 맡았다. 그런데 사는 데는 옥천이다. 군북면 이백리 주소 옆에 괄호 열고 ‘하얀집’이라 적혀 있었다.신문에 김성장 시인의 전시 소개하는 기사가 올라왔다고 그에게 문자로 알렸다. 당시 폭우가 내리던 나날이었다. 날이 밝아지면 인사하겠다고 말을 건넨 뒤 그를 잠시 잊고 살았다. 몇 달이 지났을까. 무더운 여름이 지나 가을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일터에 소포가 날아왔다. 포장을 뜯어보니 웬 시집이 보였다. 지난해 10월 김채운(55, 군북면 이백리) 시인이 펴낸 현장시집 <고(告)>였다. 내 명함에 나온 주소로 보낸 것이었다.김채운 시인이 쓴 네 권의 시집. 출시일 순으로 (오른쪽부터) 시집 '활어' '너머' '채운' '고(告)'.‘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의 시인은 불행하다. 그렇다고 현실을 도외시한 채 자신의 시세계에만 골몰한다면 무기력한 겁쟁이 작가일 수밖에 없다. 여하튼 시인은 언어로써 자기를 대변하는 족속이다. 그것은 속말이 아니라 외침이며 다소 거칠지라도 부끄러움을 걷어낼 살아 있는 말이어야 한다. 기실 현장시의 미덕은 시어가 시인의 입을 벗어나는 순간 홀연히 대기 속으로 흩어져 가뭇없이 사라지는 데 있다. 허나 바람과 갈대는 외칠 것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생기는 다 잃어 거죽만 남은 말들, 그들을 한사코 붙들어 집 한 채 지어 준다.’시집 맨 앞장에 있는 ‘시인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용은 기실 시(詩)보다 산문이 더 가까웠다. 산문이라 하기도 애매하다. 어떤 다짐 내지는 투쟁 구호였다. 세상과 불화하겠다는 선언, 그것은 평화를 되찾겠다는 시인의 간절한 외침이었다. 세월호 참사 추모제, 이태원 참사 추모제, 촛불집회, 대우조선 희망버스, 건설노조 양회동 열사 추모제, 금속노조 한광호 열사 추모제,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 민중승리 신년하례회, 전국장애인부모연대 후원의밤... 선뜻 찾아가기 어려운 집회 현장에서 자기 언어로 사람들을 위무한 흔적들이었다.■ 미사여구 덜어 현장으로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인 김채운 이전에 사람 김채운이 궁금했다. 군북면 행정복지센터 인근에 차를 대놓고 그가 사는 마을로 향했다. 몇 분 걸었더니 동네 한구석에 하얀 단독주택이 보였다. 다다르자 마당에 풀어놓은 검은색 큰 강아지 두 마리가 신나게 짖어댔다. 닭장 안에는 청계와 백봉오골계 여덟 마리가 울어댄다. 너른 집 마당 벤치에 앉아 대학 강의 ‘독서와 의사소통’ 시험지를 채점하던 그가 강아지 둘을 잠시 다른 데 묶어놓고 반갑게 맞이했다.김채운 시인이 10·29 이태원참사 100만 서명운동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제공: 김채운)군북면 이백리에 정착한 지 3년이 넘었다고 했다. 연년생 딸 둘을 독립시키고, 대전 아파트 생활을 뒤로한 채 남편과 함께 귀촌했다. 마당에 개를 풀어놓고 키우는 게 로망이었던 애기 아빠의 바람, 도시생활 속 층간소음의 긴장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김채운 씨의 바람이 만난 결정이었다. 여름엔 모기와 각종 벌레와 사투를 벌여야 하고, 겨울엔 집이 바람골에 자리해 추위가 보통이 아니지만 옥천생활에 만족한다는 그의 생애를 잠깐 들여다봤다.“예전 시집은 안 그랬어요. 저도 잘 몰랐죠. 이렇게 저항적이고 투사적인지 모른 채 고요하게 살았는데요. 한 번 나서니까 안에 분노 같은 게 오르면서 시가 막 써지더라고요. 요즘은 현장시를 잘 안 쓰기도 하고, 90년대처럼 시의 효능감이 있던 시절도 아니잖아요. 그래도 버리기는 아까워서 집회에서 발언한 말을 시집으로 묶었죠. 노동자들 앞에 미사여구 동원하고 서정적으로 읊으면 하나도 와 닿지 않아요. 현장 분위기에 맞게 그분들과 마음을 같이 하다 보니 글이 거칠어요. 진술처럼 길죠. 어떻게 보면 제가 활동할 영역이 생긴 거 같아요.”■ 억척 어머니, 글 잘 쓰던 둘째 언니수몰지구가 된 보은군 회남면 판장리에서 육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큰오빠 밑에 딸만 내리 다섯이다. 딸 중에 서열로 세 번째. 착하고 눈물 많던 아이 김혜경. 엄마가 늘 걱정하던 아이였다. 어려서부터 어렵고, 후미지고, 약한 존재들이 눈에 밟혔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유년시절,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옥천으로 이사했다. 어렴풋하지만 죽향초등학교에 처음 왔을 때 친구들이 신기하다는 듯 우르르 몰려왔던 기억만큼은 생생하다.군북면 이백리에 귀촌한 김채운 씨가 지난해 10월에 낸 시집 '고(告)'를 들고 있다. 고(告)는 사회적 참사 뒤에 남겨진 이들과 연대하는 마음으로 시대와 세상을 향한 바람을 그의 언어로 남겼다.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식구만 여덟인 가족 형편에서는 어림도 없는 말이었다. 오빠는 고모댁으로, 공부 잘하던 둘째 언니는 신협 이사장이 살던 부잣집으로 입주한 시절이 있었다. 그래도 넷이 남는다. 엄마, 아빠까지 하면 식구가 여섯이다. 결국 엄마가 결단을 내렸다. 대출받고 집을 짓기 시작해 옥천에 2년 살고 대전으로 향했다. 아버지와 달리 엄마는 억척스럽고 강인했다. 육남매를 똑같이 학교 보내고 먹여 살려야 한다는 신념이 강했다. 그렇게 육남매를 다 키워냈다.둘째 언니는 못 하는 게 없었다. 뭐든 잘했다. 언니는 육영수 여사 추모 글짓기 대회에 나가 장원을 했다. 옥천에서 1등. 언니가 상을 받아오면 아버지가 벽에 상장들을 도배하다시피 하며 자랑했다.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언제는 백일장 대회에서 3등, 언니는 1등을 했다.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특별활동으로 문예부에 들어갔다. 글 쓰는 건 좋았지만 남들 앞에 드러내는 건 자신이 없었다. 그때 만난 선생님이 첫 스승이었다. 매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글을 써도 되겠구나.“집회 현장에서 읊은 거예요. 세월호 참사 추모제 7~9주기 땐 같이 참여했고요. 예전엔 용기도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나는 심약하고, 조용하고, 서정시인으로 갈 거라는 생각만 있었는데 아니었어요. 현장에 계신 분들과 함께하고 연대하니까 나한테 이런 당참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내 시 세계에만 안주하는 모습이 비겁해 보였고요. 우연히 대전작가회의에서 활동하는 김희정 시인이 한번 해보라고 저를 쓱 밀어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김채운 시인이 세월호 참사 9주기 순직교사·소방관·의사자 기억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제공: 김채운)■ ‘아이에게 척력이 작용하고 있어’집안에서는 글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먹고 살기 편한 사범대에 가길 원했다. 그래도 좋아하는 걸 해야 한다. 소녀 감수성이 예민한 중3 때였을 거다. 언제는 육영수 추모 글짓기 대회에서 장원했던 둘째 언니가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에게 시 두 편을 가져가 보여줬다, 동생이랑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아카시아향이 그윽한 산길을 헤쳐 가는 꽃상여 그 위에...’ 지금 생각하면 어른 시를 흉내 낸 티가 나지만 나름대로 완결성이 있었는지 인정을 받았다. 대학생 시절엔 고등학교 때 썼던 시 25편을 모아 <새벽 강가에서>라는 비공식 첫 시집도 냈다. 언니가 일일이 타자를 쳐서 대학교 제본소에 맡겨 출판했다.그런데 대학은 유아교육과를 나왔다. 원하는 대학에 못 들어갔다. 방황했다. 학교생활이 엉망이었다. 대학 졸업하고 대전에 천양원이라는 시설에서 보육사로 일했지만 적응하기 어려웠다. 언제는 아이를 호되게 혼낸 게 사달이 났다. 시말서까지 썼다. 2년이 최대치였다. 안 되겠다 싶어 편입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국문학을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지인 소개로 만난 남편 도움이 컸다. 사윗감으로 아니라는 부모님을 설득해 만난 지 넉 달 만에 결혼한 남편 덕이었다.혼자 연년생 두 딸을 키웠다. 독박 육아의 시작이었다. 작은아이는 밤에 잠 안 자고, 큰아이는 낮에 잠 안 잤다. 산후우울증도 겹쳤다. 계속 우는 아이를 어찌할 줄 몰랐다. 남편은 도로 공사한다고 떠돌이 생활을 오래 했다. 늘 아이에게 메여 있던 나와 달랐다. 남편은 주말마다 스킨스쿠버하고, 단체 모임에서 술 마시고, 성게 따서 가져오고. 화가 났다. 화가 나 있었다. 애기 기저귀 갈아주고, 놀아주고, 업어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점점 시들어갔다.자택 내 작업실에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는 김채운 시인.■ ‘사탕이 하나밖에 있어요’‘공부 한번 해볼래?’ 지쳐있던 생활에 남편이 돌파구를 찾아줬다. 눈이 번쩍 떠졌다. 하겠다고 했다.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몰라도 정말 열심히 했다. 학자금 융자 받고 월급을 꼴아 넣으면서 모험하듯 공부했다. 석사과정을 신나게 뛰어다니며 공부했다. 2년 반 만에 졸업했다. 그리고 다시 두 딸과 가정에 몰입했다.“처음엔 그랬어요. 내가 뭘 안다고. 온전히 그네들과 함께하는 것도 아니고 작가라고 보듬어주는 느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 자리에 있으면 그분들은 위안을 받으시는 거예요. 유성기업 한광호 열사 돌아가시고 나서 장례도 못 치르고 저녁에 작게 판을 펼쳐놓고 추모제를 하고 계셨어요. 33일째였나. 노동자분들 만나 뵙고 시낭송을 했어요. 저녁을 챙겨 먹기 힘든 여건인데 저를 챙겨주시더라고요. 마음에 그런 게 있어요. 등한시하지 말아야겠다. 예전에 자그마하게 보이던 것들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눈이 뜨인 거겠죠.”김채운 시인이 건설노동자 양회동 열사 공동행동에 참여해 '건설노조 탄압을 즉각 중단하라!'는 메시지가 담긴 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제공: 김채운)김채운 시인이 양회동 열사 추모 대전 촛불집회에 참여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제공: 김채운)한 번 터진 둑은 걷잡을 수 없었다. 2003년부터 <큰시>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를 써 내려갔다. 2010년 계간 <시에>로 문단에 데뷔했다. 대전작가회의에 가입하고 이듬해 첫 시집 <활어>를 냈다. 쉬가 마려워 사색이 된 아이를 들쳐 안고 버스에 내려 그늘에서 해우시키던 장면(오후 두 시), 큰딸 섬진이가 주먹손을 펼쳐 ‘사탕이 하나밖에 있어요’라고 말하던 소소한 일상(하나밖에, 있어요)이 시가 됐다. 나를 다독이는 시간이었다.이름도 바꿨다. 아버지가 주신 이름 ‘혜경’에서 ‘채운(彩雲)’으로. 공부는 끝이 없다. 2015년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도 현대시를 공부했다. 첫 시집을 넘어서고 싶었다. 강을 건너면 타고 온 배를 태워버려야 한다. 올라간 계단도 부숴야 한다. 끊임없이 전복하고 나를 뒤집고 나아가야 한다. 그런 치열함 없이 편하게 가면 무던해진다. 나만의 색깔을 내고 싶었다. 단숨에 써 내려가는 시는 많지 않다. 끄적끄적하고, 고치고, 또 고치고, 사전을 뒤적거렸다.김채운 시인이 자신의 시집 앞장에 싸인을 하고 있다.■ 어둡고 소외된 자리에 함께시어는 시어여야 한다. 입 안에 넣고 오랫동안 녹여 먹는 사탕처럼 시맛을 살려야 한다. 남들과 다른 언어, 일상어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시어를 찾아다녔다. 소외된 존재에 마음으로 다가가는 작업이었다. 시상을 잡는 데 6개월도 걸리고, 잊어버렸다가 다시 쓰기도 했다.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2019년 두 번째 시집 <너머>를 냈다. 조금 달라지고 성장했다고 느낀 게 <너머>였다. 옥천에 오고 2021년 세 번째 시집 <채운>, 지난해에 낸 네 번째 시집 <고(告)>에 이르렀다.“아니요, 저는 지금이 좋아요. 내 삶이 이랬으면 좋겠다는 지점으로 가고 있어요. 첫 시집이 앳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어른으로서 당당함이 있잖아요. 현장시는 떠오르는 대로 쓰니까 감정이 격하죠. 글을 다듬고 할 시간이 의미가 있을까요. 서정시가 그네들의 가슴에 와닿을까 싶거든요. 그럼에도 책을 내니까 부끄럽긴 해요. 시답잖은 시가 된 느낌이에요. 이제는 다른 형식의 서정시가 될 거 같아요. 현장시 안에 서정을 담고 싶어요.”김채운 시인이 '채운詩공방' 팻말이 있는 자택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어둡고, 소외되고, 후미진 자리에 시인은 머물렀다. 단일한 사건으로 치부할 수 없는, 어느 누구와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을 온 마음을 다해 호명했다. 그리고 기억했다. 분노와 저항의 노래, 민족·민주·노동열사의 노래, 애도와 추모의 노래, 화해와 통일 염원의 노래는 이어진다. 머지않은 봄이다.“마음에 그런 게 있어요.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지역에 기여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요. 관심을 두고 옥천에서 시를 찾으려 해요. 옆에 이지당도 그렇고, 부소담악이나 지역적인 명소를 살려 제 언어로 풀어가는 방식으로 옥천을 새로 구성하고 싶어요. 짚어주고 싶은 점들이 있어요.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시 소재를 찾아 새롭게 부각하는 방식으로 가고 싶어요.”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4-02-15 21:55
충만한 삶의 기쁨을 안겨주는 곳에 머물고 싶어 한다. 그에게는 옥천이 그런 곳이었다. 비로소 숨 쉴 틈이 생겼던 걸까. 얼굴빛에 밝고 편안한 기운이 전해졌다. 옥천에 머무르자 삶이 여유로워지고 시야는 더 넓어졌다. 옥천서 만난 물과 바람이, 풀과 구름이, 일출과 석양의 장관이 그를 행복하게 했는지 모른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평온함이 찾아오는 옥천에 매료돼 있었다. 예술의 깊이는 점점 무르익어갔다.‘천연염색으로 작업하는 작가’라는 수식어는 어쩐지 부족한 감이 있다. 천연염료가 되는 식물을 옥천서 채취하거나 직접 재배해 색을 만든다고 하니 지난한 과정을 떠올리면 설명이 아쉬울 법도 하다. 자연에서 채취한 나무껍질, 꽃, 풀, 열매가 작품 재료가 됐다. 작품 하나하나가 옥천이 스며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위적인 화학염료로 표현해낼 수 없는, 자연을 닮은 싱그러운 천연 빛깔을 만들어 내려고 1년 내내 부단히 움직였다.전통기법으로 다양한 색을 물들인 한지를 손으로 한 땀 한 땀 자르고 붙여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를 작품 38점으로 표현했다. 말하자면 한지에 천연염색 콜라주 기법, 여기에 백토가 가미됐다. 작가노트에 ‘달을 닮은 듯 둥그런 달항아리 곡선이 자연에서 보는 비정형의 미(美)를 가장 잘 보여준다’고 나왔다. 옥천에 정착한 지 5년 된 김보영(39, 읍 가화리) 작가가 지난 11월29일부터 12월10일까지 옥천전통문화체험관에 작품 전시를 했다. 주제는 ‘달을 담다_옥천’.김보영 작가의 '달을 담다_옥천' 전시회가 지난 11월29일~12월10일까지 옥천전통문화체험관에 열렸다. 전시실에 조선시대 백자 중 하나인 '달항아리'를 표현한 작품 38점이 걸렸다. 이 작품들은 천연염색한 한지를 콜라주 기법으로 이어 붙였고, 배경에 도자기 만들 때 쓰는 백토를 발랐다.■ 출근길에 마주친 옥천 풍경“‘달을 담다’에 달은 자연을 말해요. 달항아리 안에 자연의 이미지를 보일 듯 말 듯 담고 싶었고요. 어떤 작품에는 달항아리 안에 대청호 풍경을 넣었어요. 매일 아침 신랑이랑 읍내에서 안남에 출근할 때마다 대청호를 만나거든요. 같은 공간이라도 시간에 따라 풍경이 달리 보이는 것처럼 작가의 삶도 작업에 녹아난다고 봐요. 옥천에 정착하고 작품 활동을 하면서 일상을 기록했다는 생각도 들고요. 제 삶과 자연의 형상을 달항아리 안에 담아봤어요.”경기도 화성이 고향인 김보영 작가는 그림에 소질이 있는 아버지를 따라 미술을 곧잘 했다. 자연스레 그림을 전공으로 삼아 동덕여대 회화과에 진학해 한국화를 전공했다. 동 대학원 석사 졸업, 박사 수료까지 마친 그는 지금까지 개인전 10회, 단체전 27회, 아트페어 6회 등에 참여했다. 옥천에서는 이번이 첫 전시다. 천연염료를 직접 채취하고, 염색한 한지를 붙여 작품을 만드는 게 회화 전공자들 사이에서는 흔치 않은 사례라고 한다.학부 1학년 때 천연염색 동아리에 들어간 게 계기였다. 2009년 나주시천연염색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천연염색지도사 자격증까지 딴 그는 2010년부터 본격적인 염색 작업에 나섰다. 석사과정 당시 석사청구전 주제를 천연염색으로 잡고 2010년 동덕아트갤러리에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다. 달항아리 시리즈는 2014년부터 시작했다. 그때부터 ‘자연과 전통’이라는 작업관을 달항아리에 담았다. 박사청구전까지 마친 그는 2018년 옥천에 들어왔다.김보영 작가가 옥천 대청호 풍경을 그린 달항아리 작품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옥천에 5년 전 정착한 김 작가는 축사를 관리하는 남편과 함께 안남면 화학리에 출퇴근하고 있다. 그는 안남에 천연염료로 쓸 수 있는 여러 식물을 채취하거나 쪽을 직접 재배해 전시 작품에 활용했다.'달을 담다_옥천' 전시 메인 작품. 달항아리 안에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대청호 풍경을 표현했다. 자세히 보면 해와 달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소밥 주고, 식물도 키우고“제가 옥천에 오기 1년 전에 신랑이 먼저 와 있었어요. 안남면 화학리에 소를 키우거든요. 저도 매일 같이 가서 소밥 주고요. 거기서 염색 작업을 했어요. 한지 붙이는 작업은 집에서 하고, 야외 염색활동은 안남에서 했는데요. 실은 이 활동 자체가 신랑이 많이 도와줘서 가능했어요. 올해는 천연염색에 관심 있는 지인들이랑 염료가 되는 식물을 직접 키우고 같이 활동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옥천군 청년동아리 지원을 받고 ‘오늘의 행복’이라는 이름의 천연염색 동아리를 했어요.”염료가 되는 식물을 직접 기른 건 올해가 처음이었다. 재료를 사서 염색했던 이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만족과 성취감을 느낀 김보영 작가. 화학염료는 단숨에 색을 쨍하게 내는 효과가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빠지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천연염색은 고정된 색이 아닌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다른 색을 뽐내는 매력이 있다. 자연스레 바라는 느낌이라고 할까. 김 작가는 10여년 전 천연염색한 종이를 꺼내보면 색이 더 숙성되고 고급스러워진 느낌이라고 한다. 화학염색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김보영 작가는 올해 옥천군 청년동아리 지원사업으로 '오늘의 행복' 동아리를 운영해 지인들과 천연염색 작업을 했다. 사진은 동아리원이 쪽으로 염색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 김보영)김보영 작가는 올해 옥천군 청년동아리 지원사업으로 '오늘의 행복' 동아리를 운영해 지인들과 천연염색 작업을 했다. 사진은 쪽대를 걷어내고 매염제인 조개가루를 넣은 뒤 푸른색 염액을 고무래질하는 모습. (사진제공: 김보영)염색 재료는 민들레, 돼지감자, 땡감, 머위, 봉선화, 쑥, 수세미, 가죽나무, 아로니아, 밤, 호두, 메리골드 등 다양하다. 모두 안남에서 채취했다. 김 작가는 쪽밭을 따로 키워 쪽을 염료로 썼다. 쪽 염색은 염료 중 색을 내기 가장 까다롭다. 염액 보관도 어렵고, 발효도 거쳐야 하고, 여러 차례 저어줘야 하는 등 과정이 꽤 복잡하다. 1년생 풀인 쪽은 파란 색소를 지녀 천연염료 중 유일하게 푸른빛을 띈다. 쪽빛하늘이라는 말이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자연의 선물, 천연염색 쪽 염료는 예부터 고가에 거래된 귀한 염색 재료로 우리나라에서 자주 활용했다. 조선시대에 청색 염직물을 전문으로 만드는 청염장이라는 직업이 있을 정도다. 그러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쪽 염색의 명맥이 끊어졌다. 외국 문물이 들어오고 화학 염료를 수입하면서 품이 많이 들어가는 천연염색 기술이 점차 사라졌다. 오늘날 천연염색은 우리 전통을 살리고, 자연 고유의 색을 환경친화적인 생산 방식으로 입힌다는 점에 가치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김 작가는 인위적인 물질과 색에 벗어나 조금씩 느리게 변하는 자연의 강인한 생명력을 작품에 담고 싶었는지 모른다.전시실에 김 작가가 민들레, 호두, 메리골드 등 다양한 염색 재료로 작업한 견본들을 진열했다. 지난 4월에 채취한 민들레와 매염제 '동'을 활용해 종이 재질에 따라 다채로운 색을 표현했다.김보영 작가가 작품 활동에 쓰는 여러 색상의 천연염색 한지를 뭉치 형태로 보관하고 있다.보라색 계열의 지초를 활용해 천연염색한 한지. 부채처럼 지그재그로 접고 실로 묶어 염색 작업에 들어간다. 접힌 부분에 무늬 자국이 남아있다.대략적인 천연염색 과정은 이렇다. 우선 차를 우리듯 뜨거운 물에 재료를 넣고 끓여 염액을 만든다. 접어놓은 종이를 염액에 넣고 꺼내서 말리면 매염을 한다. 매염은 색을 고착하는 과정인데 보통 백반, 철, 잿물 등을 매염제로 활용한다. 어떤 매염제를 활용하느냐에 따라 색깔이나 색의 진함이 달라진다. 종이는 한지 중에 얇고 질긴 순지를 썼다. 순지는 닥나무를 갈아 직접 뜬 종이인데 얇은 종이를 써야 색이 잘 입힌다고 한다. 보통 접은 종이를 뭉치로 염색하면 접었던 그 자리에 색이 진한 무늬 자국이 남는다.“천연염색은 제 손으로 만든 색이라는 점에 의미가 커요. 반면 화학염색은 우리 몸이나 환경에 좋지 않잖아요. 이번에는 종이를 사서 썼지만, 기회가 되면 닥나무를 심어서 종이를 직접 만들고 싶은 바람이 있어요. 닥나무를 쪄서 껍질을 벗기면 그게 한지 재료거든요. 제 작품에는 또 백토라는 재료를 썼어요. 도자기 만들 때 쓰는 흰색 흙인데 작품 배경에 바른 거거든요. 이 배경도 자연의 바탕이라고 봐요. 옛 조선시대 도자기를 소재로 하고, 천연염색이라는 전통 기법을 썼지만, 제 작품들이 현대적인 감각으로 색다르게 다가왔으면 좋겠어요.”'달항아리'라는 소재는 동일하나 천연염색 기법으로 작품마다 또 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든든한 가족의 힘김 작가는 일상에서 금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만나며 작품 활동에 깊은 영감을 받았다. 자연의 소리를 듣고 바람의 감촉을 느끼면서 자연의 일부로 살고 있다는 소소한 깨달음이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김 작가는 향후 옥천에 천연염색 체험활동을 할 수 있는 연구실 겸 작은 공간을 마련하는 게 꿈이다.올해 우리고장 청년공예인단체 ‘가온비’ 멤버로 들어갔지만 이번 전시 준비로 많은 활동을 하지 못 해 아쉬웠다는 김보영 작가. 앞으로 옥천에 있는 청년 예술인들과 교류하고 전시할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제가 쓰는 소재나 기법이 시골에 와서 하는 게 잘 맞는 것 같아요. 천연염색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져서 감사할 따름이고요. 대청호를 보고 있으면 시간에 따라 노을 지는 모습이 보이잖아요. 그때 마음이 벅차오른다고 할까요. 매일 지나가는 길이 즐겁더라고요. 이렇게 옥천을 벗 삼아 작품을 낸다는 게 큰 행운이지 않나 싶어요. 이번에 전시 준비하면서 남편이랑 시부모님, 가족분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천연염색한 걸 샘플로 보여주려고 전시장에 가져왔는데 같이 만들었거든요. 온 가족이 신경 써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옥천에 오길 정말 잘 한 거 같아요.”한편, 지난 10일까지 진행된 이번 전시는 2023 옥천군 문화예술창작 지원사업으로 300만원 예산을 지원받아 기획됐다.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3-12-20 18:04
1929년생, 출생년도만으로도 그 울림이 묵직한 95세 어머니.어머니의 작은 어깨, 와락 안아주고 싶어 잠시 주춤했다. 신문사에서 온다고 입술을 바르고 계신 어머니. 뒤돌아보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마자 열다섯 살, 큰 애기의 얼굴이 떠올라 콧등이 시큰했다. 세월이 야속하실까? 그리우실까? 너무 고운 어머니 모습에 고마움이 밀려오는 건 어떤 심정이었는지 나에게 다시 묻는다. 아마도 곱게 나이 드신 어머니에게 보내는 존경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 며느리 이거여”라며 엄지를 추켜세우신 고부의 정도 어머니의 고운 모습을 만든 힘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하고도 남았다. 아들내외와 고운 어머니, 훈훈한 수채화 한 폭 수놓아도 손색없는 어머니 댁 정경이었다.■ 이제 아득한 그리움으로 남은 유년보은 회남면 조곡리가 고향인 나는 작은 마을의 먹고 살만한 집 딸이었다. 공부는 하고 싶었지만 농사가 많다보니 살림이 크고 남동생들 챙기는 일이 내 몫이었다. 애석하지만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가난과의 전쟁이 아니라 누나로서 남동생을 챙기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인 것이 시대정신이던 때다. 여자로 태어나 원하는 것을 이뤄내기엔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았다.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자세가 여인들에게 미덕이라고 가르치던 시절이다.90세가 넘은 나이에도 학교공부를 하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어쩌면 그 그리움과 갈증이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들의 성장에 정성을 쏟아 붓는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생각나는 이름들, 이남년 윤점례 박복순 친하게 지내던 동무들이다. 90이 넘으니 온통 그리움 투성이다. ■ 우연처럼 다가와 70년 연리지를 같이 심은 남편남편(정진복)과의 만남도 우연처럼 다가왔지만 천생연분으로 맺어진 인연이다. 우리 큰집에서 새끼머슴 살던 분이 우연찮게 중매쟁이가 됐다. 이웃분이 친정아버지(황선석)에게 중신을 한다고 하셔서 아버님이 신랑자리를 보러 가던 길에 큰집 새끼머슴이던 분을 만났다. 아버님에게 “형님, 어디 가셔요?”, “응, 우리 한순이 신랑감 보러 간다” 했더니만 그럼 “내가 아는 총각 한번 만나보슈” 라고 건넨 한마디가 내 운명을 결정지었다.아버지는 예정에 없던 만남이지만 남편을 만나보고 첫눈에 마음에 들어 하시며 어머니에게 망설임도 없이 그 청년한테 시집보내자고 하셨다. 어머니는 우려되는 마음에 “사는 건 좀 보고 왔나요?” 걱정 섞인 마음에 말을 건넸지만 아버님은 ‘사람하나 보면 돼요’ 라고 즉답을 하셨다. 아버님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지만 살림 걱정 없이 살던 나에게 맨 바닥에서 일궈야 하는 시댁의 여건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세월을 거슬러 시집가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 아득히 멀리 왔다고 생각했지만 어렴풋이 연지곤지 찍었던 한순이 얼굴이 보인다. 가마타고 세천에 내려서 걸었던 길도 없는 시골의 풀숲, 돌멩이로 놓은 징검다리를 건너던 한순이. 그 이후로 어느새 성큼 달려와 75년을 살아냈다.생전남편과 함께■ 시댁 그리고 남편, 숙제같았지만 결국 내가 보듬어야 할 식구들결혼 후에 남편은 19살에 병사구사령부(현:병무청)로 입대했다. 남편 없는 집에서 기거하다가 친정으로 돌아왔다. 시집오기 전부터 손끝이 야무지고 솜씨가 좋았던 나는 재봉일을 잘해서 제품집에 취직을 했다. 속앓이 하면서 남편만 기다리는 아낙으로 살지는 않았다.그때쯤 우리 어머니가 작은 시동생을 낳았는데 결국 내 차지가 되었다. 예전에는 8남매 9남매가 예삿일이니 시집온 새댁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같은 해에 출산을 하는 경우들이 흉이 되지 않았다. 그 틈에 시누이, 시동생 키우느라 정작 내 새끼 젖은 제대로 못 물리는 여인네들도 많았다. 시댁이라는 이름은 내 새끼보다 늘 먼저인, 우리 여인들에게 넘지 못할 산이었다.나도 첫 딸내미 애영이가 생겼다. 아가씨보다 우리 딸이 한 살 위라 아가씨 똥 기저귀도 빨아서 키웠다. 나이가 비근하니 둘이 티격태격할 때는 시누이 나무랄 수도 없고 우리 딸이 안쓰러워서 내내 마음 졸였다. ■ 길도 없던 강원도 산골에서 살림을 시작하며 1등상사로 직업 군인이던 남편을 만나러 큰 딸 애영이 손을 잡고 남편의 부대에 찾아갔다. 지금도 강원도는 먼 거리이지만 대중교통 시설이 척박하던 시대 강원도는 말 그대로 두메산골인 곳이었다.꼬박 이틀이 걸려서 남편의 부대에 도착했다. 딸을 품에 안은 남편은 한손으로 내 손을 슬며시 잡고 발걸음을 뗐다. 친정에서 귀하게 자라던 큰 애기였지만 결혼을 하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면서 강원도의 그 산골처럼 길이 없던 곳에서 수풀을 헤치고 길을 만들어 갔다. 듬직한 남편과 사랑스런 딸, 길이 없는 그곳에서도 두렵지 않은 건 남편의 굳게 잡은 손과 딸의 재롱이었다. 남편의 부대 앞에서 7-8개월 살았을 무렵, 남편이 제대특명이 내렸다고 집에 가있으라고 해서 애영이를 데리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달래서 집으로 돌아왔다.찰흙공장 하던 시절■ 약방과 찰흙공장을 하며 살림을 불려나가다 군에서 약을 취급하던 남편은 총기 있고 눈썰미가 좋아서 배운 경험으로 약방 면허를 취득해서 약방을 차렸다.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은 공부해가면서 대전 전민동 허허벌판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우리는 60년 전에는 앞서가는 사업이던 찰흙공장을 했다. 찰흙, 당시 전국의 모든 초등학생들이 어느 누구 예외도 없이 미술시간에 공작용으로 쓰던 재료다. 대중화된 상품으로 공장을 운영하니 돈도 벌면서 놉도 얻어서 일을 시키고 집도 한 채 두 채 사면서 살림 불려 나가는 맛에 힘든 줄도 몰랐다. 기계를 돌려서 네모난 봉지에 찰흙을 꽉꽉 채워 박스에 넣고 납품하면 몸은 고단해도 일하는 재미는 제법 컸다. 내조하느라 힘은 들었지만 그만큼 결실이 좋았던 때라 열심히 살았다.■ 사랑이라는 이름들4남매를 두었다. 지금은 옥천에서 아들 며느리와 살고 있는 복 많은 노인이다. 우리 며느리 자랑은 참을 수가 없다. 26살에 시집 왔는데 실낱 끝 만 한 소리도 안 하는 우리 며느리. 매일 가는 주간보호센터에 가서 며느리 자랑이 빠지지 않으니 다들 웃어넘기지만 참으로 고마운 며느리다. 우리 시아버님은 우리 아들 낳고 나는 아들 한 번 업어 줄 새도 없이 손주를 금지옥엽처럼 사랑해주셨다. 우리 며느리가 그 아들의 안식구이며 내 자랑이다. 사랑도 대물림이며 거스를 수 없는 유전자이다.우리 완영이 친구가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 집에서 숙식을 한 아이가 있었다. 영동이 고향인 친구인데 그 아이 어머니가 어느 날 기별도 없이 쌀 한 자루를 갖고 우리 집에 찾아왔었다. 그 무거운 걸 어찌 들고 왔느냐 하니 자식 맡겨놓은 마음을 어떻게 보답할지 모르겠다고. 그 심정을 나도 헤아리고 남았다. 자식은 그렇다. 곁에 있어도 마음 졸이고 바라보면 마냥 좋아서 가끔씩 어디서부터 맺어진 인연인지 그 발원지를 모르는 인연이기도 하다.부모님이 그랬고 내가 자식에게 또 그렇게 했다. ■ 하루 7식으로 남편을 섬기다남편은 5년 전에 마음이 급했었나 먼저 먼 여행을 떠났다. 남편도 90세에 먼 길을 떠났으니 우리부부 18살에 만나 70년 넘게 살아왔다. 남편한테 말대꾸 한번 제대로 해 본적이 없다. 여인네의 덕목이라고 아버지에게 배우고 내내 그리 살았다. 남편에게 하루 7식을 만들어주면서 내조를 했다. 말이 7식이지.굳이 나열해보면 식전에 가볍게 준비, 아침, 샛밥, 점심, 샛밥, 저녁, 주무시기 전에 술 조금 장어 몇 점 구워서 안주로 내 놓는다. 당연하듯이 했고 남편은 감사하게 내내 나의 든든한 우군으로 곁을 주었다가 먼저 여행길에 올랐다. 나도 간간이 그 여행길에 언제 오를지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아직도 바늘귀를 꿸 만큼 눈이 밝아 손으로 설거지용 수세미도 뜨고 손녀들 옷도 재봉틀로 리폼해서 입는 신식 할머니이기는 하다. 지금까지 설거지용 수세미를 떠서 선물한 것이 족히 천장은 될 거 같다. 눈이 밝은 게 마냥 기쁘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우리 며느리한테 손이 많이 가는 시애미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잊지 않는다. 아직도 여자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 고운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 외출할 때는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다듬는다. 직전 만든 된장을 옥천군에 기증.■ 어느 틈에 여기까지 3년 전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썼던 마스크를 나는 아직도 꼭 쓰고 다닌다. 1929년생이니 살아오면서 온갖 일들을 겪었지만 ‘코로나’라는 무서운 복병은 우리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주간보호센터에 가서도 마스크를 꼭 쓰고 있다. 나를 지키고 친구들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나이 들수록 더 조심스럽다. “할머니 고우세요”라는 말을 듣고 살게 해주는 우리 사랑둥이들이 있다. 아직도 손주들한테 용돈 줄 수 있는 할미라 나의 소소한 낙(樂)이기도 하다. 우리 4남매 애영, 완영, 미영, 도영이와 손주들 상일, 상미, 상아, 유진이, 유정이, 은수, 혜련이, 혜정이, 동은이 호중이. 이름만으로도 울컥하다. 우리 영감님과 내가 심은 뿌리 깊은 나무의 실한 열매들이다.95년이 한 많은 세월로만 점철되지 않아 감사하고 지금은 내 곁을 지켜주는 우리 며느리가 나에게 가장 든든한 우군이다. 아직 한낮은 햇살이 뜨겁지만 새벽녘이면 한기가 돌아 이불을 끌어와 배위에 얹어야 한다. 계절은 어김없이 때를 맞춰 우리 곁에 머문다. 여인으로 내내 살아가다 남편 곁으로 가게 된다면 나는 족하고 족하다. 가슴 설레는 날들도 있었고 고단했지만 말없이 손잡아 주는 남편, 뒤돌아서면 한 뼘씩 자라는 아이들 덕분에 나는 존재의 의미가 있었다. 어느 새 여기까지 왔을까 반문하면 누가 나에게 그 해답을 줄 수 있을까. 허나, 지나온 시간이 쓸쓸하지 않은 건 고마운 아들 며느리 덕분이라고 말한들 흠 잡힐 일이 없다. 오늘은 이 말을 꼭 하고 싶은 날이다. “나처럼 복 많은 할매 있으면 나와 보시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인물일반 | 김경희 시민기자 | 2023-10-03 09:50
‘다 보여주지 않는 것.’ 사진을 찍어 와야 하는데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여타 사진 동호회와는 차원이 다른 주제였다. 숙제를 안은 사람들도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탁 트인 하늘을 올려다 봐도 색깔이 있고, 구름이 있고, 태양이 있고, 날아다니는 새들이 있는데 말이다. 사진에는 무언가 대상이 있기 마련이거늘 ‘다 보여주지 않는 것’이라니. 성능 좋은 카메라에 아름다운 식물과 풍경을 담아 오는 다른 모임들과 성격이 달랐다.보이지 않는 부분을 찍어야 한다, 어떤 의미일까.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생각하고, 고민하게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사물의 이면’을 찍어오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저 멀리 걸어오는 어르신들의 주름진 손을 보고 그분들의 발자취를 상상한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을 보고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유한한 삶을 떠오른다. 어두컴컴한 기차역 공간 안에서 저 멀리 비추는 환한 빛을 보고 희망을 찾는다.사진이라는 것도 어쩌면 말잔치에 불과할지 모른다. 사진작가가 거창하게 어떤 의도로 찍었다 하더라도 달리 볼 여지는 무궁무진하다. 사진을 읽는 관점은 다 다를 수밖에 없고, 자기가 경험한 폭만큼 해석의 깊이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여기에 사진 동호회 ‘동그라미 포토 아카데미’는 한 걸음 더 욕심을 냈다.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사진 그 이상을 담고 싶었는지 모른다. 조금 다른 생각, 색다른 시선을 사진이라는 매체에 투영하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했다.우리고장 사진 동호회 '동그라미 포토아카데미' 회원들이 정기 모임을 하는 모습. 지난해 12월부터 활동을 시작한 동그라미 포토아카데미는 모임 때마다 주제를 선정해 각자 찍어온 사진들을 공유하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30년 넘게 사진을 찍고 있는 서상숙(왼쪽 첫 번째) 씨가 모임에서 길잡이 역할을 한다. (사진제공: 서상숙)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은 사진 초보부터 길게는 5년까지 사진에 관심 있는 옥천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었다. 이들의 열정은 뜨거운데 사진과 카메라를 다루는 기술은 사진 전공하는 사람과 차이가 있었다. 기술은 인터넷이나 책을 찾으면 어떻게든 따라갈 수 있겠지만 이들은 사진의 깊이를 채워줄 ‘길잡이’를 간절히 찾았다. 그러던 중 옥천교육도서관 맞은편에 ‘사진카페 2월’을 운영하는 서상숙 씨를 알게 됐고,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사진카페 사장님과 인연이 되어“동그라미가 원이잖아요. 계속 굴러가잖아요. 꺾이는 데 없이 우리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바가 동글동글한 지구처럼 굴러간다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요? 유추해 보는 거예요. 그 이름을 정한 사람이 동수 형이죠? 동수 형한테 물어봐야 해요.”사진 동호회 ‘동그라미 포토 아카데미(이하 동그라미)’ 이름의 유래를 묻자 모임에 참여하는 이다경 씨가 이같이 말했다. 지난해 12월에 만든 동그라미는 현재 회장을 맡고 있는 이진영 씨 그리고 김동수 씨가 사진카페 2월 손님으로 오며 가며 하다가 서상숙 씨에게 사진을 알려달라고 부탁하면서 자연스레 생긴 모임이다. 2주에 한 번 금요일마다 정기 모임을 하는데 서상숙 씨가 사진 주제를 정하면 이에 맞게 사진을 찍고, 모임 때 1~2시간 정도 서로 사진을 보여주며 의견을 주고받는다.지난 4월7일 읍내에 있는 사진카페 2월에서 동그라미 포토아카데미 모임이 열렸다. 왼쪽부터 서상숙, 이다경, 이재규, 이진영 씨.지난 4월7일 오후 6시30분 사진카페 2월에 도착하자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오기 시작했다. 이날 ‘다 보여주지 않는 것’을 주제로 사진을 찍어 온 이다경 이재규 이진영 씨가 참여했는데 현재 동그라미 식구가 9명으로 늘었다. 회원들이 선생님으로 모시는 서상숙 씨부터 기존 회원인 김동수 씨 그리고 양금희 황은혜 이은숙 안상남 씨가 새로운 멤버로 들어왔다. 동그라미는 지난 6월20일 옥천군에서 지원하는 ‘삼삼오오 학습동아리 지원 사업’에 선정돼 모임 활동에 탄력을 받았다.■ 옥천에 또 다른 사진 문화 만들고 싶어동이면 지양리에 사는 이재규 씨는 2015년 옥천에 귀촌했다. 2019년 말 퇴직하고 취미생활을 찾던 중 옥천군미디어센터에서 하는 사진 수업을 듣고 관심을 가졌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지인에게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서상숙 씨를 소개받아 지금까지 인연을 맺고 있다. 지난해부터 사진을 시작한 그는 이제 틈날 때마다 서상숙 씨에게 사진 조언을 구하고 있다.“오늘처럼 수업 시간이 되면 긴장감이 있어요. 저는 주제에 관한 이해는 빠른데 그걸 사진으로 담아오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잖아요. 서 작가님은 30년 이상 사진을 한 전공자니까 배울 점이 많죠. 저희는 상업 사진도 아니고, 필름 사진을 하는 사람도 아니잖아요. 작가님만이 가진 고유의 사진 느낌이 좋았고요. 그래서 이런 모임을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원하는 분들이 있으면 동행해서 옥천에 또 다른 사진 문화를 만드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어요.”동그라미 포토아카데미 회원 이재규 씨가 찍은 사진. (사진제공: 이재규)지난해 4월부터 옥천군미디어센터 수업을 계기로 사진을 취미로 접한 이진영 씨는 읍내에서 명륜당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옥천향토사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는 그는 이날 사진 주제인 ‘다 보여주지 않는 것’이 어렵게 다가왔다고 한다. 난해하다고 정평이 난 철학을 전공했어도 머릿속에 있는 관념을 사진으로 표현하는 작업은 그에게 쉽지 않은 과제인 듯했다. 이진영 씨는 오는 10월 동그라미 회원들과 함께 옥천전통문화체험관에서 단체전을 열 예정이라고 알렸다.“우리 같은 초보자들이 1년간 공부한 걸 옥천에 보여드리려고요. 사진에 관해 묻고, 토론하고,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주고 싶었고요. 우리 작품을 보고 사진에 관심 있는 분들이 도전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고 싶었죠. 사진을 하면서 저 스스로 변화가 일어났어요. 생각도 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바뀌고, 더 따뜻하게 변했다고 할까요. 생각이나 시야가 더 넓어진 게 큰 변화인데 서 작가님의 지대한 공이 있었죠.”동그라미 포토아카데미 회장을 맡고 있는 이진영 씨가 찍은 사진. (사진제공: 이진영)■ 따로 또 같이 사진으로 어깨동무취미생활로 미술을 오래 한 이다경 씨는 사진을 햇수로 5년 했다. 평소 식물을 좋아한 그는 예쁜 꽃을 보면 휴대폰으로 사진 찍는 게 취미였는데 만족스러운 사진을 건지지 못 했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꽃을 예쁘게 찍어야겠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카메라를 잡았는데 남들이 찍은 사진을 보며 ‘어떻게 하면 잘 찍을까’ 고민하며 도전 의식을 키웠다고. 한때 이틀에 한 번 출사하고, 하루에 1천500컷 이상 찍을 만큼 시간과 돈을 투자한 그는 서상숙 작가를 만나 또 다른 사진 세계를 접했다.“지금은 열심히 하고 행복해하면서 이 작업을 하지만 어쩌면 옥천에 사진 판도를 바꾸지 않을까 싶어요. (서상숙) 선생님은 과제 하나 딱 던져주면 알아서 찾아보라고 해요. 각자 따로 가는 거죠. 우리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이렇게 찍어라’ 그런 게 없어요. 단체 출사도 다녀왔지만 가서도 따로 해요. ‘어디 가면 이런 스타일의 사진이 나오니까 거기 가서 찍어라.’ 그런 게 아니에요. 음식을 해서 입에 넣어주는 게 아니라 그냥 음식 재료만 던져주는 거죠. 배추 하나 주고 김치 담그라는 식인데 저는 이런 수업이 좋아요.”동그라미 포토아카데미 회원 이다경 씨가 찍은 사진. (사진제공: 이다경)이 세 사람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서상숙 씨를 만나 사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고, 더 깊어졌다고 말이다. 옆에서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서상숙 씨는 과한 칭찬이라 느꼈는지 몇 번이나 손사래를 쳤다. 그보다 연배가 높은 사람이 있는 모임을 이끈다는 건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30년 이상 사진을 했어도 부담인 모양이다. 살아온 이력도, 현재 하는 일도 다 다른 회원들의 개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모습이었다.“기술적인 것들은 여기 선생님들이 다 알아서 공부해 오셔요. 처음에는 부담돼서 올해까지만 하고 안 하겠다고 했는데 혼났어요. 너무 열심히들 하시니까 제 딴에는 부담으로 다가오죠. 가르치는 제 입장에서는 따로 공부해야 하니까 이 모임에 참여하면서 사진을 찍는 동기가 생기는 면도 있고요.”지난 5월5일 동그라미 회원들이 서로 찍은 사진들을 공유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 서상숙)동그라미 회원들은 2주에 한 번 금요일 저녁에 시간을 내 모임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서상숙)■ 대나무의 마디가 생기는 것처럼지난 4월21일 모임부터 합류한 동그라미 회원 양금희 씨는 말한다. 3~4년 전부터 사진을 배운 뒤로 주변 환경이나 동·식물과 같은 작은 존재를 더 자세히 보는 습관이 생겼고, 주변을 더 따뜻하게 만드는 힘이 내재한 사진을 지인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고 말이다.이처럼 동그라미 회원들은 사진을 찍고 서로 이야기 나누는 과정을 가치 있는 일로 여겼고, 행복해했다. 점차 자기만의 사진 세계를 정립해 가는 과정으로 보였다. 앞으로 동그라미 모임이 어떻게 나아갈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동그라미 모임 회원이 한 명, 두 명 늘어나는 모습에서 보이듯 사진으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민들레 홀씨처럼 뻗어나가 옥천만의 또 다른 사진 세계를 확장해 나갈지 모를 일이다.동그라미 포토아카데미 회원 양금희 씨가 찍은 사진. (사진제공: 양금희)동그라미 포토아카데미 회원 김동수 씨가 찍은 사진. (사진제공: 김동수)동그라미 포토아카데미 회원 서상숙 씨가 찍은 사진. (사진제공: 서상숙)30년 넘게 사진을 업으로 삼고 있는 전문가, 그리고 사진을 배우는 단계에 있는 초심자들이 함께 걸어가는 동그라미 포토 아카데미. 삶의 경험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른 이들이 그려나갈 동그라미가 앞으로 더 멋진 모임으로 커 나가지 않을까 기대된다. 동그라미 이진영 회장의 이야기로 마무리한다.“우리가 찍은 게 잘 찍었는지 모를 때 모임에서 같이 이야기하면 정리가 되는 느낌이에요. 마치 대나무의 마디가 딱 생기는 것처럼요. 아까 다경님이 얘기했듯이 사진은 예술이잖아요. 우리 삶에 예술이 필요한 부분이 있잖아요. 규범적이고 정형화한 것들을 무너뜨리는 게 예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진으로 새로운 세계를 접하니까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기도가 따로 없고, 명상이 따로 없고, 힐링이 따로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동그라미 회원들이 새벽 출사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 서상숙)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3-08-09 17:44
편집자 주_영동 매곡면을 돌아다니던 중 전문 바리스타의 카페 ‘물한모금’을 발견했다. 카페에 들어서면 진한 커피 향이 진동한다. 직접 볶은 원두로 커피를 내리는 최길호 대표(38, 대전 죽동)의 이야기를 들어보자.카페 ‘물한모금’은 영동군 물한계곡을 따라 지었다. 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이고 가라는 뜻이 담겨 있다. 카페 이름에서 따뜻한 마음이 전해진다. “그냥 카페라고 하기보다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라요.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공간이요. 커피도 마시고 고기도 구워 먹고 강아지 데리고 와서 놀기도 하고 밑에 계곡에서 쉴 수 있는 그런 공간이요.” 카페 ‘물한모금’ 대표 최길호 씨는 작년 대전에서 내려와 영동 매곡면에 카페를 차렸다. 짙은 녹음 사이로 새하얀 카페가 모습을 드러낸다. 주위에 논과 밭을 제외하면 다른 모습은 찾기 힘든 곳이다. 그런 곳에서 카페를 발견하면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카페 앞에 당도하면 한 남자가 물뿌리개로 하트를 뿌리고 있는 벽화가 보인다. 카페 사장님을 그린 것 같다. 따스하고 정감 있는 사장님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벽화가 그려진 외관을 구경하고 작은 계단을 올라 내부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아무도 없었던 밖과 달리 많은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고 그들 사이로 고소한 커피 향이 났다. 자연을 그린 풍경화와 라탄 풍의 조명은 카페의 분위기를 감성적으로 만들었다.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큰 유리창 너머로 여름의 싱그러운 풀들이 보인다. 시끄럽고 쉴 틈 없는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인 시골 힐링 카페였다. 최 대표가 그려진 벽화이다. 이 벽화는 카페에서 유일하게 전문가와 함께 만든 공간이다.카페 ‘물한모금’을 연 최길호 대표가 카페에 앉아 창밖을 보고 미소를 짓고 있다. ■ 하나부터 열까지 손수 만든 카페 깔끔하고 정겨운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카페 ‘물한모금’은 원래 설씨토정가든이라는 매운탕 집이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오래된 식당을 멀끔한 카페로 개조하기 위해 최길호 대표는 매일 구슬땀을 흘렸다. 카페 구석구석 어디 하나 손을 안 거친 곳이 없다. 작년 6월, 한 달 동안 낡은 장비와 가구를 버렸다. 꺼내서 버리는 것도 일이었다. 새 단장을 위해 간판도 직접 그리고 카페의 분위기와 어울릴 수 있는 라탄 풍의 조명등과 전기를 설치했다. 그리고 장인어른과 함께 사시사철 바깥 풍경이 다르게 보이는 창문을 만들었다. 덕분에 손님은 봄, 여름, 가을, 겨울마다 창밖에 비친 다양한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이외에도 인테리어를 위해 벽을 뚫는가 하면 의자를 조립하여 알록달록 색을 칠하기도 했다. 벽화도 그리려 했지만, 이 부분은 도저히 혼자 할 수 없어 전문가를 불렀다. 카페 곳곳 작은 소품조차 허투루 두지 않았다. 벽면에 세워둔 나무판자는 목소리가 울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도구였다. 찬장에 무심히 올려진 옛날 물건은 삼성이 최초로 낸 귀한 핸드폰이었다. 또한 크레스티드 개코라는 도마뱀이 카페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녀석들은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이라고 한다. 보일러 회사에 10년간 근무하면서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모든 걸 혼자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목이 마르다. “지금 구조가 바뀌어야 할 게 많아요. 더 심플하게 하고 싶어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작은 소품에도 기분이 달라지더라고요. 난 예민하지 않은 곰 같은 사람이었는데 예민해졌어요. 이 공간을 만들고 나서는 계속 앉아서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어요. 쓸데없는 것도 한번 해보고 좋은 것도 해보고 그래요. 같은 한 공간이라도 정성을 들여야 해요.” 무언가에 몰입한 듯 두 눈이 반짝였다. 그 공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직접 뚫은 벽 사이로 라탄 풍의 조명과 아기자기한 소품이 보인다. ■ 진심 100%의 커피를 내리다. 카페 공간뿐 아니라 손님이 마시는 커피에도 진심을 가득 담았다. 제대로 된 커피를 배우기 위해 발품을 아끼지 않았다. 일을 그만둔 후 우리나라에서 로스팅을 가장 잘한다는 홍명요리학원 강병호 원장을 1년 동안 따라다녔다. ‘물한계곡’이라는 카페 이름도 원장님의 조언으로 탄생했다. “스승님이 카페 이름을 지을 때 지역에서 유명한 데를 녹여 넣어야 기억 속에 남는다고 하셔서 여기 물한계곡이 유명하니까 이걸 붙이면 되겠다고 해서 만들었죠.” 국내 최고 바리스타에게 배운 블렌딩과 로스팅으로 담백하고 깔끔한 커피 맛을 내는 기술을 익혔다. 여느 프랜차이즈 커피처럼 쓰지 않고 고소한 향이 오래 남는 커피였다. 커피의 맛처럼 원두도 예사롭지 않다. 에티오피아, 브라질, 콜롬비아 등의 원두를 블렌딩 하는데 그 비율은 비밀이다. 커피의 맛이 궁금하다면 카페를 방문하는 수밖에 없다. “이 커피는 달라요. 제가 만드는 커피는 맛있어요. 커피 향이 담긴 후미가 오래 가요.” 이곳은 커피를 마시는 순간과 그 이후까지 생각한다. 진심이 가득 들어간 커피는 내리는 사람도, 마시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든다.■ 카페에서 뻗어나가는 꿈 “저의 최종 목표는 큰 커뮤니케이션 센터를 만드는 겁니다. 물한모금 카페 같은 공간을 전국에 여러 군데 만들어서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거예요.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와서 기술을 배우고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힘들게 살았던 과거는 꿈을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집 안에 혼자 있는 청소년에게 꿈을 꾸는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물한모금 카페는 무엇이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밖에서 고기도 구워 먹을 수 있고 맥주도 마실 수 있다. 강아지를 자주 데려오는 손님을 위해 강아지 놀이터를 마당에 짓고 있다. 입소문이 난 카페는 단골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워낙 카페가 없는 지역이고 차를 타고 가야 하니 사람들의 마음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주변 친구나 가족들에게 한 번 들었을 때 ‘카페가 있구나’ 알게 되고, 두 번 들었을 때 호기심이 생긴다. 세 번째 들었을 때 비로소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한 번 온 손님은 편안함을 느끼고 자주 발길이 닿아 단골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 5월 봄에 성백기 씨 정원(용천리)에서 열린 음악회 ‘흙, 날아오르다’에 커피와 붕어빵을 지원했다. 거리가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진다고 하던가. 마을 사람을 찾아가고, 카페에 찾아오는 마을 손님을 반기는 일이 잦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마을 주민들과 친해졌다. 최길호 대표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찾아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는 최 대표는 마을 사람들의 스타가 되었다. 물한모금 카페는 원데이클래스도 진행한다. 커피를 볶는 로스팅 과정과 마들렌과 같은 빵을 굽는 베이킹 과정을 체험할 수 있다. 원데이클래스는 미래 계획을 위한 발판이다. 교육을 통해 후임자를 찾는 과정이다. 후임자를 길러 이곳을 물려준 후 새로운 공간을 찾아 떠날 예정이다.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며 살고 싶은 사람에겐 더없이 기쁜 소식이다. 그렇게 여러 공간을 만든 뒤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다. “사실 이제 시작이죠. 이거 하려고 기술도 배우고 그랬어요. 40년 플랜 중에서 절반 지나왔고, 절반이 남았어요. 미쳤다고들 해요.” 10년 동안 배운 시공 기술과 1년 동안 스승님을 쫓아다니며 배운 커피 만드는 기술은 물한모금 카페를 위한 돌다리였다. 그의 여정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주소: 충북 영동군 매곡면 용촌1안길 3 물한모금전화번호: 0507-1345-2871영업시간: 오전9시~오후9시 (화·수·금·토) / 오전9시~오후5시 (목·일)매주 월요일 휴무
인물일반 | 임채림 기자 | 2023-08-09 17:44
편집자주_옥천의 이웃 마을인 영동으로 탐방을 왔다. 더위를 피해 정겨워 보이는 이름의 한 카페에 들어섰다. 산울림 마을협동조합이 직접 운영하는 형태로 로컬푸드에 대한 애정이 카페 곳곳에 묻어나있다. 그곳에서 시원한 팥빙수를 먹으며 영동 상촌면의 주민을 만나 상촌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영동 상촌면에 위치한 카페 이웃상촌은 산울림 마을협동조합이 운영하고 있다. 상촌의 이웃사촌이 되겠다는 정겨운 마음으로 로컬푸드를 사용한 팥빙수, 음료, 임산물 등을 판매하고 있다. 장마가 끝나고 뜨거운 폭염이 시작된 지금, 카페에서 파는 팥빙수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 같다. 여기 그 선물을 푸짐하게 주는 영동의 한 카페가 있다. 이름마저 정겨운 카페 이웃상촌에 들어서면 모든 테이블이 인절미 수제 팥빙수(1만원)를 먹고 있다. 4명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옹기종기 모여 팥빙수 한 그릇으로 더위를 나고 있었다. 레트로 느낌이 물씬 나는 오래된 선풍기는 여름의 열기를 한 층 식혀줬다. 이어 팥빙수가 하나 더 나오자, 양이 많아 더 이상 먹지 못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카페에서는 팥빙수 하나에 2인분이라고 했지만, 대접에 가득 나오는 팥빙수는 4명이 먹어도 거뜬한 양이었다. 이런 점들은 카페 이웃상촌의 분위기를 더욱 정겹게 만든다. 양도 많이 주는 이웃상촌은 무엇보다 재료에 진심이다. 영동 지역에서 나는 재료를 사용하여 판매하는 팥빙수가 그 예다. 다양한 잡곡류를 판매하는 평화쌀상회(영동읍 계산로)에서 산 팥을 직접 쑤어 빙수를 만든다. 그러니 정성이 가득한 것은 물론이고, 건강하고, 믿음직스러운 음식이 탄생할 수밖에 없다. 이웃상촌은 복숭아 빙수, 호두 파이, 자두청을 로컬푸드로 만들 예정이다. 조만간 이웃상촌은 상촌의 특산품을 개발하는 대표 카페로 자리 잡을지도 모른다. 미래의 명소를 찾아가 미리 경험해도 좋을 것 같다. 카페 이웃상촌은 영동 상촌면의 임산물을 가공하여 판매하는 산울림 마을협동조합에서 만든 공간이다. 이웃상촌이라는 이름 또한 산울림 마을협동조합원이 함께 만들었다. “우리가 좋은 이웃이 되겠다는 뜻도 있고, 상촌에 벌써 좋은 이웃들이 살고 있다는 뜻도 있습니다.” 카페 이웃상촌의 대표인 김희정(48) 씨는 이웃상촌의 두 가지 뜻을 설명하면서, 이름에 대한 만족감을 밝은 미소로 드러냈다. 조합원 만장일치로 이 이름이 선택되었다고 한다.카페 이웃상촌의 인절미 수제 팥빙수(1만원)의 넉넉한 양을 볼 수 있다.카페 이웃상촌의 대표인 김희정 씨가 이웃상촌이라는 상호명을 짓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카페의 정겨움을 더해주는 레트로풍 선풍기가 손님의 더위를 한 층 식혀주고 있다.■ 영동 로컬푸드의 변신 호두 파이를 로컬푸드로 만들기 위해 김희정 대표는 하루도 쉴 틈이 없다. 밀밭 삼천 평을 가꾸는 상촌면의 남승록 씨를 만나 밀 공급을 약속하고, 여성농민회 언니들의 텃밭에서 나는 우리 밀을 알아보기도 했다. 청주의 미원 산골 마을 빵집이 우리 밀을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추후 연락하여 조언도 구할 예정이다. 호두 파이뿐 아니라 복숭아 빙수 또한 로컬푸드로 만들 계획이다. 복숭아를 구매하기 위해 농민회 상촌 지회장 박장현 씨의 복숭아 농장을 찾았지만, 지금은 아직 당도가 올라오지 않았다며 조금 기다리라는 대답을 받았다. 곧 딱딱한 복숭아는 차가운 얼음 위로 올라가 빙수가 되고, 물렁물렁한 복숭아는 끓여서 잼이 될 운명이다. 생각만 해도 입가에 군침이 돈다. 조만간 이웃상촌을 방문하면 복숭아 빙수를 맛볼 수도 있으리라. 무더운 여름, 달달한 복숭아가 올라간 시원한 빙수를 위해 이웃상촌에 방문하는 것은 결코 손해가 아니다. 빙수 말고도 이웃상촌에는 특별한 점이 있다. 달콤한 과자인 수제 오란다, 수제 강정과 함께 다양한 꽃차는 카페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일반 카페에서 보기 힘든 이름마저 생소한 목련차, 박하차, 생강 꽃차가 있으며, 음료 외에도 취나물, 산뽕잎, 건표고, 다래 순 등 다양한 버섯과 나물을 판매하고 있었다. 모두 이 지역에서 난 로컬푸드이다. “100g씩 작게 포장해서 선물 세트로 만들고 싶어요. 그게 스마트스토어에서 판매가 되고 저희가 사회적 기업이 되었을 때 저희의 상품이 되는 거죠.” 앞으로 이웃상촌은 영동 임산물을 홍보하는 큰 손이 될 것이다.영동의 여러 가지 임산물이 판매용으로 전시되고 있다.■ 마을과 공존하는 이웃상촌 로컬푸드를 알리고자 하는 김희정 대표의 날갯짓은 마을 주민의 원동력이 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스마트스토어를 활용해 상촌의 임산물을 판매하고 싶어도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인터넷이라는 장벽을 깨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때 구세주처럼 천홍(미니사과) 판매자 박말금 씨가 나타났다. 천홍은 스마트스토어를 통해 영동의 특산품이 되었다. 스마트스토어에 익숙한 박말금 씨는 지역 주민들의 선생님이 되기로 했다. 천홍을 널리 알리고 싶은 그의 바람도 이뤄지는 것이다.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지역 주민들이 만나 어떤 시너지가 발생할지 기대된다. 스터디는 매주 화요일마다 열린다. 앞으로 영동 상촌의 로컬푸드가 전국적으로 뻗어나갈 일만 남았다. 이웃상촌은 카페라는 공간에 한정되지 않고 지역민을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다. 김희정 대표의 열정은 이 더운 날씨에도 꺾이지 않는다. 그녀는 땡볕에 비닐하우스를 한 채 지었다. 이곳에 목화를 심고 아이들에게 옷의 원리를 알려줄 생각에 열정이 불타오른다. 아이들은 목화를 직접 채집하여 실을 뽑는 위빙 과정을 놀이처럼 배울 것이다. “도시 아이들이 여기 와서 머무는 산촌 유학을 하고 싶어요. 근데 지금은 그 형편이 안 돼요. 우선 숙소와 교사가 있어야 하고 학교가 협조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지역사회의 장기적인 목표에요.” 김희정 대표의 열정만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지역사회의 관심과 협조가 절실한 부분이다. 허브를 이용하여 다양한 제품을 만드는 활동도 펼칠 예정이다. 키운 허브를 추출하여 화장품, 연고, 오일, 차 등을 만들어 즐길 수 있다. 무궁무진한 허브의 모습은 곧 이웃상촌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이렇게 지역 주민을 위해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김희정 대표는 꿈꾸는 사람만의 특유한 밝음을 보여줬다.■ 지속 가능한 상촌이 되기 위해 이웃상촌의 대표 김희정 씨는 갈마루 지역아동센터에서 10년 넘게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상촌의 대표 선생님인 셈이다. 아이들은 커서 청년이 되었고, 상촌을 떠나기 시작했다. 김희정 대표는 아기 때부터 동고동락하던 아이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게 안타까웠다. “아이들이 살던 지역에서 살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고 친구들도 없으니 마을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김희정 대표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아이들은 상촌에서 살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이들을 붙잡을 일자리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희정 대표는 발로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삼성장학재단을 하면서 비슷한 고민을 하는 양평의 상상공작소 사회적협동조합을 알게 되었다. 상상공작소는 초기에 어린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다가 지금은 청년의 일자리를 위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양평도 상촌처럼 인구소멸의 문제를 피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김희정 대표는 청년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앞서 계획한 여러 프로젝트에 청년을 채용하여 지속 가능한 상촌을 만드는 목표를 갖고 있다. ■ 상촌의 거점이 되고픈 이웃상촌 원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김희정 대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지금 김희정 대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든든한 지원군이다. “같이 아이디어를 내고 같은 방향으로 목소리를 내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해요.” 김희정 대표는 힘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다. 같은 생각을 하는 많은 사람, 힘 있는 목소리, 큰 영향력이 그녀의 목표를 달성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마을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지역 주민들, 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김희정 대표와 같은 의지 넘치는 마을 활동가가 모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웃상촌의 궁극적인 목표는 상촌의 거점이 되는 것이다. “청년들이 재미있게 뭘 할 수 있어야 여기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일을 할 청년이 필요하고 우리가 청년을 채용하지 해야 하고 그런 거죠. 그러면서 이웃상촌이라는 공간이 주민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상촌의 거점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김희정 대표가 그리는 상촌의 미래이다.주소: 영동군 상촌면 민주지산로 3019-2 카페 이웃상촌전화번호: 0507-1407-0825운영시간: 오전 9시 ~ 오후 8시
인물일반 | 임채림 기자 | 2023-08-08 09:03
완벽에 도달하려고 스스로를 다그쳐야 했다. 대학 입시, 실기 시험, 연주 수업, 각종 경연대회가 남긴 상흔이었다. 빈틈없이 완벽을 추구하려는 예술가의 강박. 어쩌면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할 관문인지 모른다. 클라리넷을 전공한 김연주(39, 읍 가화리)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악기 부는 게 좋아서, 합주하는 게 좋아서 시작한 음악인데 어느 순간 치열함만 남아 있던 게 아닌가. 멈춰 서서 주변을 돌아봤다.옥천에 오기 전 ‘헬로 셈(Hello SEM)’이라는 단체에서 장애아동·청소년 오케스트라 강사를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단원 중에 한 친구가 피아노를 치는데 연주 실력도 수준급에 그 친구 얼굴에 미소가 보이더라. 가만, 음악 할 때 웃으면서 해본 적이 언제더라. 지금까지 살면서 돌아보니 없었다. 항상 긴장의 연속이었을 뿐, 이 친구처럼 연주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충격을 받았다. 음악을 하는 사람, 음악을 알리는 사람으로서 달라지고 싶었다.높이 오르기보다 넓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옥천에 음악학원을 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이 정도 수준이면 못 올라가’ 했다면 지금은 ‘그래 가봐, 틀리든지 맞든지 무대에 자신 있게 올라가봐’로 교육관이 바뀌었다. 특히 성인들을 대상으로 연주 단원을 모시고 이분들을 가까이 만나면서 알았다. 설령 틀리더라도 음악 하는 그 순간이 즐거우면 그걸로 된 거라고. ‘그래, 음악은 저렇게 해야지.’ 가르치면서 함께 성장한다는 말이 가슴으로 와닿았다.음 하나를 치기 위해, 노래 한 곡을 완주하기 위해, 그 긴 시간을 연습하고 합주하고 공연했을 시간이 떠올랐다. 클라리넷이라는 악기를 처음 만졌던 학창시절의 나를 마주했다. 이제야 보였다. 다짐했다. 함부로 음악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거나 재단하지 말아야겠다고 말이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를 뿐이다. 2015년 옥천에 정착하고 나이가 들면서 달라졌다. 내가 갖고 있는 악기를 내 몸의 일부처럼 소중히 여기는 마음도 그만큼 커졌다.지난 4월6일 장야초등학교 인근에 김연주 씨가 운영하는 클라리넷 레슨실에서 음악 동호회 '앙상블, 엘' 정기 모임이 열렸다.음악 동호회 '앙상블, 엘' 지휘를 맡은 김연주 씨가 색소폰, 플룻, 클라리넷, 피아노를 연주하는 단원들의 음정과 박자, 리듬을 점검하고 있다.■ 클라리넷 개인 지도와 연주를 같이“지금 요거가 익숙해져야 해요. 처음 하시는 곡이라 이 정도 속도와 박자만 맞춰도 될 거 같은데요. 16마디 한 번 가볼까요? 셋 넷!”지난 4월6일 오후 6시30분 장야초등학교 인근 클라리넷 레슨실 <엘의 음악생활공간>에서 지미 데이비스의 노래 ‘당신은 나의 태양(You are my sunshine)’ 연주가 들려왔다. 색소폰, 플룻, 클라리넷, 피아노를 연주하는 단원 7명이 모여 검은색 정장을 맞춰 입고 하모니를 이뤘다. 이들은 지난해 7월 창단한 ‘앙상블, 엘’ 단원으로 매주 정기 모임을 가지고 있다. 앙상블 엘은 올해 이원묘목축제, 군민도서관 주간행사, 유채꽃축제에서 클래식 음악과 대중가요를 선보였다.음악동호회 ‘앙상블, 엘’ 지휘를 맡은 김연주 씨는 2017~2020년까지 음악학원으로 운영했던 자리를 클라리넷 레슨실, 합주 연주실로 쓰고 있다.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석사과정(클라리넷 전공)을 수료한 그는 개인 레슨을 다니면서 앙상블 엘 단원들을 가르치고, 클라리넷 연주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또한 스틸텅드럼과 아살라토 악기를 활용해 아이들 방과후수업 또는 어르신 취미활동 수업도 병행한다.'앙상블, 엘' 단원이 지미 데이비스의 노래 '당신은 나의 태양(You are my sunshine)' 악보를 보고 있다.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클라리넷을 전공한 김연주 씨가 관악기 중 하나인 색소폰을 연주하고 있다.김연주 씨는 클라리넷 개인 지도와 함께 스틸텅드럼, 아살라토 악기를 활용한 수업도 병행하고 있다. 맨 위에서 왼쪽이 아살라토, 바로 오른쪽이 스틸텅드럼이다. “2020년 8월 중순일 거예요. 그때가 아이를 갖게 된 시기인데 처음에는 몰랐거든요. 입덧을 본 어머님들이 ‘선생님, 임신 하신 거 아니에요?’ 그래서 며칠 뒤에 병원에 갔더니 맞다고 하더라고요. 그해에 학원을 그만뒀죠. 아이는 이제 두 돌 지났는데요. 아기만 낳으면 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아이가 아프면 하루살이 하는 느낌도 들고요. 제가 또 석사 수료라 석사 논문도 준비해야 해서 예전처럼 학원수업은 못 하고 개인레슨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어요.”■ 받은 만큼 음악으로 베푸는 삶 꿈꿔중학교 1학년 때 클라리넷을 접한 김연주 씨. 교회에서 피아노를 쳤던 친구가 관악부에 들어가자고 제안한 게 계기였다. 플룻, 클라리넷 두 악기 중 희소성이 있고 음색이 아름다운 클라리넷이 끌렸다. 클라리넷과 인연을 맺은 지 어느덧 반평생이 넘었다. 음악을 전공하려면 레슨비가 만만치 않지만 부모님이 흔쾌히 허락해 예고에 진학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항상 하신 말씀. ‘하고 싶은 거 해. 아빠가 뒷바라지 해줄게. 단, 시집갈 땐 너희가 알아서 가.’중학교 때 친구와 함께 관악부에 들어가 클라리넷을 접한 김연주 씨. 학창시절 음악의 꿈을 키워나가는 데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도움이 컸다고 그는 돌아봤다.그 말씀을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랐다. 다 커서 지난날을 돌아보니 경제적으로 여유로워 음악을 한 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본인 일을 하면서 딸 레슨비를 대려고 주유소 아르바이트도 했고, 가정주부인 어머니도 뒷바라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입시 철이 되면 부담은 커졌다. 무대에 혼자 오르는 게 아니라 피아노 반주자도 있어야 한다. 시험 당일이 되면 반주비는 더 올라간다. 반주를 한 번 맞추고 무대에 설 순 없는 일. 몇 번에 맞춰 무대에 오르려면 몇 백이 든다.다행히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 도움을 받았다. 이 세계에서는 ‘2악장 들어갔으니 얼마’ 달라는 분들이 많다. 부르는 게 값인 곳도 즐비하다. 그런 가운데 좋은 분들을 만나 사랑 받고 음악을 배운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만큼 미안함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했다. 살면서 받은 만큼 부모님이나 지인들에게 못 해 드렸다는 점에 아쉬움이 남았다. 옥천에서 만난 분들에게 음악으로 베풀고 싶었다.“이 공간에서 성인 분들을 많이 뵀는데요. 바이엘을 치면서 스트레스 풀고 힐링하고 가는 모습이 되게 좋아 보였어요. 어떤 분은 그러세요. ‘여기 와서 잠깐 피아노를 치고 가면 기분이 풀린다’고요. 저도 악기 연주를 하면 잡생각이 없어지고 좋더라고요. 가끔 개인 레슨을 하면 ‘내가 왜 이렇게 어려운 악기를 전공해서 선생님들을 힘들게 할까’ 생각해요. 삑사리 나고, 호흡하는 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만 그만큼 성취감도 크게 다가올 거예요.”김연주 씨가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모습. (사진제공: 김연주)음악 동호회 '앙상블, 엘' 활동 모습. (사진제공: 김연주)■ ‘음악으로 가치 있는 삶’을 바라며올해 창단 연주가 목표인 앙상블 엘은 현재 피아노 단원 한 명, 플룻 세 명, 클라리넷 세 명, 색소폰 두 명 그리고 김연주 씨까지 10명이 활동하고 있다. 앙상블 엘의 엘(el)은 독일어로 ‘가치 있는’이라는 뜻의 에델(edel)에서 E, ‘삶’이라는 뜻의 레벤(leben)에서 L의 합성어다. ‘음악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어진 이름이라고. 단원 중에는 대전서 오는 사람도 있고, 옥천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된 사람, 옥천에 오래 산 사람, 고향 사람까지 다양하다.경기도 용인에 살다 8년 전 옥천에 정착한 그는 말한다. 음악학원을 통해 만난 학부모님들 덕분에 옥천 생활에 적응한 만큼 타지서 온 분들을 음악 활동으로 만나 정착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김연주 씨가 활동하는 앙상블 엘은 현재 단원 모집은 하지 않고, 다른 팀을 더 창단할 계획이란다. 이름도 이미 지었다고. ‘시행착오’. 시니어, 행복한 오늘을 원하는가, 착실히 살아온 그대, 오늘이 기회다. 음악과 함께하는 그의 삶은 점점 넓어지고 있다.“저는 가르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연주자이기도 하거든요. 무대가 그립고, 연주하고 싶은 마음도 커요. 기회가 되면 옥천에서 독주회를 하고 싶어요. 한 번 하면 사람들이 올까 싶지만 옥천에서 잘하고 싶거든요. 지난해 12월에 옥천문화예술회관에서 메조소프라노 채진영 선생님이 독창회 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더 나이가 들기 전에요. 무대에서 더 자주 뵈었으면 좋겠고요. 성장하는 과정에서 도와주신 분들도 있고, 또 옥천 학부모님들이 여러모로 도움을 주신 만큼 음악으로 더 베풀고 싶어요.”장야리에 있는 클라리넷 레슨실 내부 모습. (사진제공: 김연주)클라리넷 레슨실 한쪽에 김연주 씨가 클라리넷을 들고 찍은 프로필 사진이 있다.문의 : 010-5350-4548 (클라리넷 레슨실)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3-06-21 08: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