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자서전 - 인생은 아름다워(27)] '봉사와 사랑, 내가 물려주고 싶은 것'
[은빛자서전 - 인생은 아름다워(27)] '봉사와 사랑, 내가 물려주고 싶은 것'
  • 정지환 객원기자
  • 승인 2019.02.28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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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 번째 주인공 김재식(84, 군서면 상지리)씨

이번에 만난 사람은 군서면 상지리에 사는 김재식 씨(84)입니다. 물레방아 정미소집 둘째아들로 태어난 그는 군복무 기간을 제외하곤 평생 동안 고향을 떠나지 않고 지켰던 토박이입니다. 오랫동안 마을 이장을 맡았던 아버지는 주민들로부터 보리나 쌀로 받아야 하는 보수를 단 한 번도 받지 않았습니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여겨지던 전쟁 와중에도 이념보다 인륜을 소중히 여긴 덕분에 빨치산에게 끌려갔지만 오히려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김재식 씨는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며 당당하게 사셨던 아버지를 롤모델로 삼아 마을과 지역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군 복무 중인 장손이 할아버지에게 감사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김재식씨 집 안방 한쪽 벽면은 온통 가족 사진으로 가득하다. 김재식씨와 아내 김정석씨가 그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 물레방아 정미소집 둘째 아들로 태어나

1936년 옥천군 군서면 상지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김복성)는 보은군 회남면에서 시집온 어머니(송연희)와의 사이에 6남3녀의 자식을 두었는데, 나는 9남매 중 넷째이자 차남이었다. 내 앞에 두 분의 누님과 한 분의 형님이 있었다. 외지에 나가서 주물공장을 운영한 할아버지와 고향에서 정미소를 운영한 아버지 덕분에 비교적 유복한 분위기에서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아홉 살에 군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2학년이 되던 해에 해방을 맞았고, 졸업한 이듬해에 6.25 전쟁이 터졌다. 내가 공부할 마음만 먹었다면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이상하게도 공부하기가 싫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정미소에서 일하며 틈나는 대로 산으로, 강으로 새와 물고기를 잡으러 다녔다.

그렇게 청소년 시절을 보내다가 스물한 살이 되던 해인 1957년 군대에 입대했다. 경기도 가평에 있는 부대에서 3년 6개월을 복무하고 육군 병장으로 제대했다. 팔십 평생을 옥천군 군서면 토박이로 살아온 내가 유일하게 고향을 떠나 있던 시기였다.

■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아버지 송덕비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곧바로 '아버지'라고 답할 것이다.

아버지는 해방 이후 마을 앞에 흐르던 개천(서화천)에 수차(물레방아) 정미소를 만들어 운영했다. 농사만 짓던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기에 자전거, 경운기 등이 등장할 때마다 동네에서 가장 먼저 구입했다.

특히 군서면에서 가장 먼저 구입한 경운기는 마을 사람들의 곡식이나 물건을 대전까지 실어 나르던 아주 유용한 교통수단이었다. 지금이야 사용하는 사람들이 줄었지만 마차로 나르던 이전과 비교하면 혁명적인 것이었고, 실제로 경운기로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나중에 아버지 유산을 정리할 때 우선권을 가진 형님이 선택한 것도 정미소가 아니라 경운기였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해 해방 이후까지 10여 년 동안 마을 이장으로 봉사하기도 했다. 해마다 이장에게 가구별로 보리 한 말이나 쌀 나락 한 말을 수고비로 주는 것을 '수곡'이라 했는데, 아버지는 이장을 맡는 동안 단 한 번도 이것을 받지 않았다. 나중에 마을 주민들이 마을 입구에 아버지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불망비(不忘碑)를 세웠다.

擔我里事(담아이사)
至公且廉(지공차렴)
十有餘載(십유여재)
視如自家(시여자가)
凡有報酬(범유보수)
一一牢却(일일뇌각)
立此片石(입차편석)
永世記念(영세기념)

비석에 새겨진 이 한자의 의미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동네 일을 맡아 처리함에 있어 지극히 공정하고 깨끗이 하셨다. 10여 년에 걸쳐 마치 자기 집을 돌보듯 하셨다. 모든 일에는 보수가 있는 법인데 하나하나 다 물리치셨다. 여기 작은 돌을 세워 오래도록 그 덕을 기리고자 한다."

■ 심야에 빨치산에게 끌려간 아버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제목을 붙여도 무방할, 아버지와 관련된 또 하나의 기억이 있다.

6.25 전쟁이 터졌을 때의 일이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온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형님을 데리고 마산까지 피난을 갔다. 이장인데다 돈이 많은 부자이므로 위험하다고 판단해서였다.

어머니를 비롯한 나머지 식구들은 서대산 아래에 있는 산골마을로 피신했다. 며칠을 거기에서 보내다가 바깥소식이 궁금해 나 혼자 군서면 상지리까지 걸어왔다. 이미 우리 집은 서울을 비롯해 북쪽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완전히 점령한 상태였다.

당시 우리 지역에 보도연맹 출신인 최시경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피난을 떠나고 열흘 정도 지났을 무렵 인민군 1개 중대를 이끌고 군서면에 들어왔다. 당시 몇 명의 우익인사가 그들에 의해 희생되었다. 얼마 후에 국군이 밀고 올라오자 최시경은 인민군 패잔병들과 함께 서대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북상하는 국군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어느 날 심야에 서대산에서 몰래 내려온 최시경 일당에 의해 저수지로 끌려갔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가 죽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건강한 모습 그대로 살아서 돌아오셨다.

나중에 들어 보니 최시경은 아버지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려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마을까지 내려왔던 것이라고 했다. 내가 어린 시절 어른들에게 들었던, 아버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전쟁이 터졌을 때 보도연맹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끌고 가서 죽였지만 최시경은 운 좋게도 살아남았다. 마을 이장이라는 신분 때문에 보도연맹 예비검속 정보를 사전에 알게 된 아버지는 아무리 좌익이라도 같은 마을 사람이 죽게 놔둘 수는 없다며 최시경에게 이를 넌지시 알려주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재빨리 피신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최시경은 생명의 은인이 된 아버지를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감사 인사를 전하고 고향을 떠났던 것이다.



■ "마을과 나라 위해 봉사하다 왔어요"

나도 봉사와 나눔을 실천한 아버지처럼 살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며 살아왔다.

나는 약 30년 넘게 마을 상수도 관리와 수리를 하면서 '옥천'과 '충청'이라는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을 위한 각종 봉사활동에도 즐겁게 참여하고 있다. 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 수질관리협의회 옥천영동지회장 겸 충북도지부 부회장을 맡게 되었다.

이밖에도 대청호보전운동본부 옥천하천감시단과 대청호주민연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자연환경보전협회 명예지도위원도 맡고 있다.

자원봉사는 자기 돈과 시간을 들여서 해야 한다. 특히 하천감시단 활동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해야 하는데, 연료가 평소보다 두 배나 더 들어간다. 무슨 대가를 바라고 하는 일이었다면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정말 하고 싶어서 하다 보니 힘든 줄 모르고 해올 수 있었던 것 같다.

현장에서 만난 지역 주민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것도 봉사활동에서 얻을 수 있는 선물이자 보람이었다. 나중에 저 세상에서 아버지를 만나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아버지, 저도 대를 이어 마을과 나라에 봉사하다 왔어요."

■ 봄이면 벚꽃이 화사한 언덕 위 우리집

나는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금산군 추부면 성당리에서 시집 온, 두 살 어린 김정석과 결혼했다. 마을 언덕에 위치한 신혼 토담집 주변에 감나무, 살구나무, 모과나무, 호두나무, 은행나무 등 각종 유실수를 심었다. 사이사이에 벚나무와 목련나무도 심었다. 그래서 지금은 봄이 오면 집 주변에 벚꽃과 목련꽃 등 봄꽃이 화사하게 피어난다.

우리 부부는 슬하에 장녀 금순, 차녀 금자, 장남 응호 등 3남매를 두었다. 다시 3남매는 7남매의 손주를 낳아주었다. 3남매는 비록 큰 성공과 출세는 하지 못했지만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고 있다. 무엇보다 남매끼리, 가족끼리 우애 있게 지내줘서 감사하다.

내 칠순잔치 때 외손녀가 재미있는 이벤트를 준비했다. 미리 준비한 단체 티셔츠에 개인별로 재미있는 문구를 집어넣었다. 외할아버지인 나는 '다 내 작품들', 외할머니는 '애미야 국이 짜다', 큰이모부는 '낚시왕 정태공', 큰이모는 '알아주는 주당', 아빠는 '아내 말을 잘 듣자', 엄마는 '주는 대로 먹어라', 외숙모는 '꼬시지마 아줌마임'이었다.

손녀 자신과 사촌들의 티셔츠에도 '아들 역할 내가 할게', '요즘엔 딸이 대세다', '크게 될 놈', '내가 바로 서열 1위' 등 재치 있는 문구를 집어넣었다. 덕분에 하루 종일 웃음꽃이 피었다.

봉사와 사랑, 봄꽃과 웃음꽃. 내가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최고의 유산이다.

글 정지환 객원기자·사진 박누리 기자

 

할아버지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장손이 보내는 감사편지


할아버지는 저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셨습니다.

제가 다섯 살이 되던 무렵 경상남도 밀양으로 이사를 갈 때까지 오로지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자라난 저에겐 할머니가 곧 '엄마'였고, 할아버지가 곧 '아빠'였습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10분 거리에 위치한 동네 슈퍼에 가서 먹을 것을 사 주셨던 기억과 도랑가에 나가서 함께 도실비(다슬기)를 잡으며 물놀이를 하던 순간들이 아직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제가 먹을 것을 보면 사 달라고 징징거릴 때마다 흔쾌히 사 주셨고, 제가 하고 싶은 것은 다 해 주고 싶었던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와 고모들에겐 엄격하셨지만 저에겐 항상 팔불출이셨습니다. 이런 할아버지의 정성과 노력 덕분에 제 유년시절이 아름답게 가꾸어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수능을 망치고 재수를 결정할 무렵의 일들도 떠오릅니다. 명절에 방문한 친척들이 저에게 수능 점수를 물어보며 눈치를 주자 화를 내며 안 그래도 속상한데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하셨죠. 그리고 저에게는 인생은 길다며 위로해주셨습니다. 그 때 설움과 감사의 눈물이 나오는 걸 참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우리 집안의 큰 기둥이십니다.

드라마 'SKY 캐슬'에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자기의 성공이 100이라면 자식의 성공은 200이다." 성공의 기준이 행복이라면, 할아버지는 벌써 300을 다 가지신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 덕분에 우리 집안은 항상 웃음이 끊이지 않는 가족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화목한 가풍을 만들 수 있었던 데에는 할아버지의 공이 가장 컸다고 생각합니다.

할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항상 '가족'이라는 행복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힘 써주셨습니다. 조상의 제사, 가족의 생일 등을 챙기는 걸 중요시하셨고, 그랬기에 밀양에 사는 우리 가족, 서울에 사는 큰고모댁 , 당진에 사는 작은고모댁 모두가 옥천으로 모일 수 있었습니다. 항상 가족 모두의 행복에 힘쓰신 할아버지의 정신을 본받아서 저 또한 행복한 가정 만들기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가장이 되겠습니다.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전역해서 더욱 늠름한 남자가 되어서 찾아뵙겠습니다. 할아버지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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