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특별한 얘기도 없는데...” 전화기 너머로 말끝을 흐리셨지만 1층까지 마중 나오신 어머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어머니의 반달 같은 눈웃음에 덩달아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마스크가 원(怨)이로다.“나 작년까지는 펄펄 날라 다녔는데...” 하루하루 지나는 시간이 너무 귀하다고 우회적으로 마음을 드러내셨다. 노인 일자리활동과 포크 댄스로 건강을 지키시고 실버기자단이라 시간도 유익하게 쓰고 계셨다. 去頭截尾(거두절미), 멋진 어머니... ■ 결핍투성이던 유년, 어린 눈에 그 넓던 신작로는 그저 좁은 골목길이더라충북 오송이 고향인 나는 지금을 ‘꿈같은 세상’이라고 줄곧 말한다. 고향마을은 산도 멀어서 나무하거나 나물 뜯으러 가려면 20리를 걸어야했다. 남정네들은 큰 숨을 몰아서 산에 올라 지게에 나뭇짐 얹어서 어깻죽지가 떨어져 나갈 고통을 감수하면서 산비탈을 내려왔다. 여인네들도 두 말하면 뭐할까, 헌신은 당연한 것이며 모든 것으로부터 기회가 단절되어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다들 악! 소리 한 번 못 내보고 그렇게 살아왔다. 오송 강외 초등학교를 나와서 청주여중을 다녔다. 공부하고 싶은 열망은 많았지만 형편이 안 되니 중학교에 다닌 것만도 친정어머니 덕분이었다. 친정어머니는 학교 근처에도 안가셨지만 총명하셔서 글도 읽고 편지도 쓰셨다. 어머니 덕분에 교복이라도 입어보았다. 나를 공부시켜준 우리 어머니는 내 평생 은인이다. 아버지는 뭐가 그리 급하셨나? 내 나이 아홉 살에 돌아가셨다. 없는 살림에 남편의 부재로 어머니가 짊어져야 할 짐은 굳이 말로 드러내기도 가슴이 시리다. 당시만 해도 돌림병이나 홍역이 많아서 동네를 한번 휩쓸고 가면 온 식구가 줄줄이 꽃상여를 타고 선산에 묻히기도 했다. 동네에 곡소리가 멈추지 않았고 시골 산자락에 유난히 애기 무덤이 많았던 슬픈 기억이 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후에 그 길을 지나려면 뒷목이 쭈뼛거려 오금이 저렸다. 울음소리가 들릴 것 같아 두려움으로 꽉 찼다.어렸을 때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면 할머니께서는 추운 겨울날에도 팬티만 입혀서 부엌 아궁 앞에 세우셨다. 바가지에 굵은 소금을 담아 한줌씩 온 몸에다 뿌려 주시고는 부엌 빗자루로 쓱쓱 쓸어내려 주셨다. 아이고, 쓰리고 아파라.“철모르는 아무개 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고생합니다. 삼신님께서 깨끗이 낫게 해주십시요”주문처럼 말씀하시면 2~3일 후에 언제 낫는 지도 모르게 깨끗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미신 같지만 그 시절엔 믿고 살았다. 눈으로 보았으니까. 학질이나 돌림병에 걸려서 열이 높아 사경을 헤매도 용한 할머니를 모셔 갔다. 마을에 돌림병이 생기면 할머니도 바쁘셨다. 이집 저집 불려 다니시며 돌팔이 의사 역할을 하셨다.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 할머니는 그렇게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기도 하셨다. 돌잔치, 백일잔치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돌림병에서 목숨 건졌다고 잔치를 벌였다. 나도 학질이 걸려서 학교도 두 살 더 먹어서 들어갔다. 결핍투성이었던 유년의 기억은 우리 동년배들은 니나 내나 다들 마찬가지다.■ 몸은 고단했지만 야무진 큰 애기, 순자중학교 졸업하고 엄마랑 동생하고 신탄진 외갓집으로 가게 되었다. 외할아버지의 막내 동생이 철도국에 다녔는데 신탄읍내서 잘 살았다. 나는 초등학교 다니는 친척동생들 가정교사를 하면서 공부도 가르쳐주고 살림도 도왔다. 상 할머니가 무서웠지만 어린 마음에도 잘 보이고 싶어 눈치도 빠르고 뭐든 잘했다. 할머니가 예뻐하셔서 외갓집에서의 생활은 마음은 그리 고달프지 않았다.신탄진역은 노리까에(환승)역이라 기차가 한 시간정도 멈췄다가 갔다. 손님들이 내려서 시장보고 끼니도 채우고 다시 기차에 올랐다.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겨울이면 많은 빨래를 하느라 방망이로 얼음을 탕탕 깨고 양잿물로 미리 애빨래를 한다. 양잿물은 짚풀을 떼서 만들었는데 비누 노릇을 톡톡히 했다. 얼음물을 깨고 빨래를 하려니 손은 마디마디 아렸고 냉기가 핏줄을 타고 온몸을 휘감았다. 애꿎은 빨래 방망이만 연신 두들겨 댔다.■ 원기소 만들던 서울제약의 또순이 외갓집에 기거하다가 서울로 올라가서 방직회사에 다녔다가 제약회사 채용 공고를 보았다. 서울 올라 갈 때는 촌티를 안내려고 핑크색 유똥 치마에 저고리 해 입고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우선 서울살이는 남의 집 일을 해주면서 시작되었다. 잘 사는 집도 석탄을 떼서 난방을 하느라 얼굴만 뽀얗고 다들 새카맸다. 방직공장에 다니면서 자취하고 마침 제약회사 공고가 났다. 당시는 유한양행, 서울제약 (서울 약품 공업사), 삼일제약등 제약회사가 세 곳 이었다. 나는 서울제약(서울 약품 공업사)에 입사를 했다. 서울제약은 그 유명한 원기소, 비오비타, 러미라를 만드는 회사였다. 나는 포장 라인에서 근무했다. 다들 형광들 불빛아래서 밤이면 내려앉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해서 손등이며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졸음을 참아냈다. 가족을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든 어머니, 아내, 딸, 언니, 누나들이었다. 그녀들의 헌신이 우리나라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이견을 달지 못할 것이다. 나는 공부에 대한 열망이 식지 않아서 돈을 벌면서 야간에 고등학교에 다녔다. 편물이 유행할 때라 편물도 짜면서 공부를 했다. 20대 나의 관심은 온통 돈이었다. 돈을 벌어서 집안도 일으키고 엄마도 돕고 싶었다.1967년에 남편을 만나 아들 셋을 낳고 1973년도에 옥천으로 내려왔다. 가난 속에서 철이 들어서 나는 더 야무지게 인생을 개척해 나갔다. 우리 영감님의 할머니께서 남편 어릴 때 팔베개를 해주시면서, “평득아 너는 크면 마누라 덕에 잘 살거다” 라고 줄곧 남편 귀에 대고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말대로 됐는지 우리는 인생의 폭풍우와 거친 파도를 무사히 넘기고 자녀들도 다들 화목하게 잘 살고 있다.큰집은 꼭 챙기라고 할머니가 끼고 가르쳐서 남편이 사촌 시동생한테 쌀 한가마니씩을 나눠줬는데 나중에 시동생 말이 우리 남편이 그 집 마당에 탕! 소리를 내며 무거운 쌀가마니를 내려놓을 때 그렇게 고마웠단다. 사촌 동서는 그 이후로 농사짓고 수확하자마자 쌀, 된장, 고추장, 참깨 볶아서 참기름, 들기름 짜서 바리바리 택배를 보낸다.보은을 한다고 나를 형님이라고 깍듯이 대우를 하는 동서에게 나는 고마워서 돈이라도 보내려면 “형님, 돈 주시려면 우리 인연 끊어요.”라며 단박에 거절한다. 나는 동서의 그 진심에 울컥한다. 요즘이 각박한 세상이라고 한탄하지만 우리 동서를 보면 마음이 그냥 따뜻해진다. 작은 것에 서로 감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남편은 결혼할 때 나에게 “당신 밥은 안 굶길게” 라더니 그 약속을 지켰다. 아무것도 없어 빈털터리였던 남편은 고철을 취급했다. 서울 신길동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는데 전세금 5만원이 없어서 셋방살이를 시작했다. 다들 어렵게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림이 늘어나는 기쁨을 맛보면서 견고한 세월이 쌓였다. 그 사이 우리 세 아들은 쑥쑥 자랐고 우리 부부의 연륜도 깊어졌다.■ 우리 부부의 용기와 도전이 낳은 희망의 결실들 고철 취급할 때 인천 대한제철에 납품을 했다. 당시는 현찰이 아니라 주로 어음을 발행했다. 보통 6개월에서 1년 내에 돈이 들어오기도 했는데 결국 부도가 나는 불상사가 생겼다. 꼬물꼬물 크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눈앞이 캄캄했다. 살길이 막막해서 시골에서 다시 도전해보려는 의지로 막내 손만 잡고 중화실업 동네 신대로 와서 은성산업 제사 공장에 다녔다. 그나마 그것도 친척 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은성산업과 중화실업에는 아가씨들이 많았는데 야간근무하고 퇴근하는 아가씨들에게 근방의 청년들이 못된 짓을 하는 경우들이 빈번했다. 남편이 시골을 재건해보려는 마음으로 그 아가씨들과 청년들을 모아 4H를 조직했다. 토끼를 사육해서 팔게 하고 포프라 나무를 울창하게 심어서 산림청장님이 상금을 주고 가는 일도 있었다.다들 협력해서 시골 마을을 살려보자는 의지들이 생겨서 나는 동네 주민들의 아이들을 따로 챙겼다. 농번기 때는 동네 아이들을 은행나무 밑에 앉혀놓고 옷도 똑같이 입혀 율동도 가르쳤다. 주민들이 아이들 걱정 없이 농사에 전념할 수 있어서 탁아소의 전신처럼 시작되었다.그 당시의 청년들은 남편을 지도자님! 이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같이 나이 들어 간간이 머리 희끗희끗한 분들이 남편에게 지도자님! 하면서 반가워하면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회억에 젖기도 한다. 우리도 형편이 넉넉해서 했던 일이 아니라서 부족했지만 더 잘살게 될 거라는 믿음하나로 버티면서 다들 함께 했다. 여든이 넘은 우리에게 그런 불같은 청춘이 있었다니!나의 배움에 대한 열망은 나이 들어도 사그라들지 않아서 8비트 컴퓨터 시절부터 컴퓨터를 배웠다. 1980년대인가 수십 년 전이다. 정우산업에서 컴퓨터를 가르쳤는데 무료라 친구들과 가서 배우고 복지관에서 또 배웠다. 유난스러운 할미가 아니라 나이 들어도 더 배워서 유익하게 잘 쓰고 싶은 갈망이 여전했다. 인터넷도 배우고 이메일 주소도 만들면서 뭐든 열심히 배웠다. 처음에는 다 어설펐지만 시간이 쌓이고 연륜이 생기면서 일구어 나갔다. 나이든 우리들이 세월 속에서 쌓은 경륜은 무시할 수 없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 한 분이 돌아가시면 도서관 한 채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들의 연륜과 지혜는 살아 있는 인문학 책이다.■ 당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신식 할머니 아파트 부녀회장 할 때는 교장선생님들과 학생들 모아놓고 아이들에게 촌수를 가르쳐주었다. 아이들은 촌수가 뭔지 모른다. 자신의 뿌리를 모르는 이는 가엽다. 우리 아이들에게 자부심을 키워주는 교육이었다. 나는 복지관에서 동년배 상담을 한다. 독거노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도 묻고 집으로 배달된 반찬에 대한 의견도 듣는다.당근마켓 어플을 깔아서 중고 물품들도 올려서 판매를 한다. 어느 날 장야리에서 젊은 새댁이 밤에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물건을 가져갔다. 뒷모습을 보면서 ‘저 새댁도 나처럼 아끼고 열심히 사는구나’ 싶어서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녀를 마음 속으로 응원했다. ■ 등 따시고 배부른 지금, 환경의 역습을 걱정하는 ‘어른’나는 3형제를 두었는데 손주가 다섯 명이다. 다들 자기 몫을 하고 잘 살고 있어서 내 노년의 기쁨이며 위안이다. 걱정이라면 환경문제다. 갈수록 쌓이는 환경쓰레기에 이제는 마스크까지 매일 천만장이 넘게 버려지는데 시간이 지난다고 썩을 것도 아니며 보통 걱정이 아닐 수 없다.코로나도 걱정이지만 마스크가 쌓여가는 환경도 더 걱정이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걱정이 없을 줄 알았더니 이제는 보이지 않는 자연과 환경들이 우리 삶을 역습하고 있다. 우리 인생은 끝까지 숙제를 안고 간다. 지혜롭게 해결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방법을 찾아 더불어 잘살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 먼저 살아본 우리의 역할이다. 그런 일이라면 앞장설 준비가 됐고 마다할 이유가 없다.궁핍한 시골에서 태어나 고단했지만 내 의지로 삶을 예쁘게 그려왔다. 얼기설기 얽힌 실타래 위의 무명천에 목단 꽃이 곱게 피어났다. 어여쁜 목단 꽃으로 내 인생의 자수를 마감중인 손끝이 오늘따라 더 야무지고 곱다.
인물일반 | 김경희 시민기자 | 2022-12-28 14:13
한때 자동차 소유가 꿈인 시절이 있었다. 일명 ‘마이 카(My car)’ 바람이 불어온 건 불과 몇 십년이 채 되지 않는다. 88 올림픽을 기점으로 자동차 대중 소비는 급증했고, 오늘날 인구 2명 당 1명 꼴로 자가용을 보유한 모습에서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을 보게 된다.시내 도로를 활보하는 자동차 풍경이 익숙하다. 그런데 옛날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40년 전 우리고장에 자동차가 딱 아홉 대가 있던 시절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도 아니고 자동차가 아홉 대라니!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자동차는 소위 있는 집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삼성화재 새옥천총괄대리점 조동천(74) 대표는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보험업계에서만 40년 넘게 일한 그는 우리고장에서 산전 수전 공중전 다 겪은 최고참에 속하는 옥천사람이다. 운전자 상해보험, 화재보험, 대상책임 등 자동차 보험에 있어 베테랑 중 베테랑이다.삼성화재 새옥천총괄대리점 조동천 대표가 2004년 옥천신문에 실린 자신의 기사스크랩을 펼쳐 보이고 있다.조 대표는 우리나라 최초로 자동차보험을 했던 ‘한국자동차보험’에서 일을 시작했다. 독점 형태로 국가에서 운영하던 한국자동차보험은 1978년 지금의 동부(DB)그룹에 팔리면서 다원화가 이뤄졌다. 당시 조 대표는 삼성화재 전신인 안국화재로 이직해 지금까지 현역으로 뛰고 있다.■ ‘사고 없는 하루 되게 해주세요’경주에서 일하다 안국화재 옥천대리점 개인사업체를 내고 고향에 온 게 1982년이다. 그때가 서른 중반 접어들 때다. 고향에서 일하고 싶어 돌아왔지만 사무실을 구하는 것부터 큰 숙제였다. 읍내 중앙주유소 옆 오토바이센터에서 대리점을 낸 걸 시작으로 현재 있는 사무실까지 다다랐다.읍내 옥천농협 맞은편 건물 2층에 있는 삼성화재 새옥천총괄대리점은 파란만장한 40년 역사를 거쳐 많은 이들에게 보험 혜택을 제공했다. 고향에 돌아온 해 우리나라는 9월1일부터 의무적으로 자동차, 오토바이 책임보험을 등록하게 유도했다. 그때 2년치 보험료는 9천120원. 수중에 떨어지는 수수료는 한 대당 1천원 꼴이었다. 그게 모이고 모여 한 달 월급이 초창기에 1만1천원이었다.지금도 만나는 고객들은 최소 20년이 넘었다. 그 정도로 고객과 신뢰가 두텁다고 자부한다. 옥천교회 장로로서 출근하고 퇴근할 적에 항상 기도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건강하게 일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모든 고객이 오늘 기쁘고 든든한 하루 보내게 해주시고 사고 없는 하루가 되게 해주십시오, 보험 한 건도 없더라도 건강을 지켜주십시오.’옥천에서 자동차보험업계에 일하는 사람이 현재 100여명이 넘는다. 처음 대리점을 열 때만 해도 옥천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사고가 나더라도 보상을 못 받던 일이 허다했다. 갖고 있는 지식을 최대한 활용해 억울한 피해가 없도록 돕고 싶었다. 뺑소니 차로 불의의 사고를 겪은 가족에게 연락이 오면 보상할 방법을 찾았다. 서류 준비부터 통장에 입금되는 날까지 일일이 확인했다.조동천 대표가 사무실에서 보험 관련 전화를 받고 있다. 40년이 넘는 경력 때문인지 고객 목소리만 듣고도 무엇을 원하는지 대번에 안다고 그는 말한다.고객 한 명 유치하려고 온몸으로 성의를 보였다. 옥천에 현대자동차만 있고, 영동에 기아자동차가 있던 시절이 있었다. 기아자동차 한 대가 판매되면 영동에서 출고증을 갖고 경기도 시흥, 울산을 거쳐 청주까지 차를 끌고 가 보험 등록 절차를 밟았다. 종합보험 하나 가입시키기 위한 험난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몇 다리 건너면 아는 사람들, 공과 사 지켜삼양초 17회, 옥천중 14회, 옥천실고 17회 졸업한 옥천 토박이다. 보험 일을 하면서 고향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받으며 커다란 보람을 얻었다. 어떨 때는 가을이 되면 쌀 한 말 갖고 사무실에 놓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분은 강가에서 잉어 큰 거 하나 잡았다고 두고 가기도 했다. 시골은 그런 인심이 살아있다.조 대표는 1987년 12월1일 주민의 억울하고 어려운 고정을 상담 해결했다는 공을 인정 받아 충북도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사무실 안에 그가 받은 각종 감사패와 공로패가 진열돼 있다.읍내 혜성식당 뒤편에 있는 주차장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거기서 6년 동안 삼양초등학교에 다녔다. 중학교 입학할 무렵 아버지 고향이자 할아버지 집이 있는 안내면 장계리로 이사했다. 장계리에서 자전거 타고 새벽 5~6시에 출발해 중학교, 고등학교에 등교했다. 수업 시작 1분 전 또는 10~20분 조금 늦게 도착했어도 학창시절 6년을 꼬박 개근했다.지금은 수몰된 안내면 장계리 주막말에서 나고자랐다. 그때만 해도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닌 사람이 마을마다 1~2명 뿐이었다. 못한 예로 주막마을에서 부잣집 손자였다. 할아버지 집이 기와집이라 기와집 손자라고 불렸다.집안에서는 보험업계에 일하는 걸 반대했다. 이 업계에 있으면서 사이 좋던 친구들 몇몇은 관계가 소원해져 금세 실감했다. 어디 동창회나 모임에 가면 쌍소리를 듣곤 했다. ‘내가 너한테 보험을 들어줬는데 말이야.’ 그래서 항시 공과 사를 지키려 노력했다. 다니는 교회에서도 보험 한다는 소리 일절 하지 않았다.조동천 대표는 보험업계에 종사하면서 어렵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믿고 맡겨준 고객 덕분에 지금까지 현역으로 뛸 수 있다는 점에 감사함을 느꼈다.■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돌아온 보답은 컸다보험을 오래 하다 보니 이런 일도 생겼다. 자기 아들이 보험을 하는데도 아버지 되는 사람은 ‘너한테 보험 안 넣고 여기다 넣는다’며 우리 사무실에 찾아온 적도 있었다. 아들보다 더 믿는다고 하니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미안해 어쩔 줄을 몰랐다.보통 자동차보험을 가입하고 이달 말 만기가 되면 보름 전 연락을 준다.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안부 차 연락을 드리면 간혹 안 받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연락이 닿으면 안타까운 소식을 들을 때가 있다 어디 요양원에 가 계시거나, 아니면 돌아가시거나. 세월이 벌써 흘렀다는 허탈감을 느낀다.옥천은 여전히 인정이 살아있다. 가을에 농사지어서 어떤 사람은 누런 호박을 가져오고, 어떤 사람은 쌀을 찧어서 갖고 오고, 배추도 갖고 오고, 복숭아 한 박스를 가져온다. 그럴 때 깨닫는다. 아, 재산이라는 게 돈이나 물질이 다가 아니구나. 어느 지역에 가더라도 편하게 점심도 먹고 대화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 청산 가면 생선국수 같이 먹자고 할 사람이 있다는 것. 사람을 사귀는 게 진정한 재산이구나.지나고 보면 정말이지 생고생을 다 했다. 보험 가입한다는 보장도 없는데 고객 한 명, 딱 한 명 보려고 무작정 청산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갔다. 청산에 자동차 한 대가 있다는 정보만 보고 달려갔다. 가서 보험 가입하라는 소리도 안 했다. 이러이러한 혜택이 있다는 설명만 하고 돌아왔다.2004년 옥천신문에 실릴 당시에도 그는 옥천에서 삼성화재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었다.조 대표가 옥천서 보험 대리점을 운영했던 초기에 몰고 다녔던 자동차 '브리샤'.국궁을 내려놓은 지 6~7년이 지났지만 도민체전 옥천 대표로 나갔을 만큼 국궁에 몰두했다. 그는 군서면 월전리 국궁장 창설요원이기도 했다. 사진은 2001년 3월10일 국궁장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 ■ 고생한 세월, 그럼에도 감사할 따름항상 일주일 계획을 짰다. 월요일 오전에는 청산, 오후에는 청성, 화요일은 안내·안남, 그 다음 날은 이원·동이, 그리고 군서·군북에 다녀왔다. 한겨울 가풍리에 가는데 하도 추워 얼굴이 얼얼했다. 난로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추위를 녹였던 세월을 버티고 버텨 여까지 왔다. 생각해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고생한 일도 많았다.지금까지 현역으로 뛴다는 점에 감사할 따름이다. 지인들과 편하게 커피 한잔하며 대화도 나누고, 어디 가서 굽신굽신 할 필요 없이 떳떳하게 일할 수 있는 내 직장이 있어 자랑스럽다. 앞으로 힘닿는 데까지 사업장을 이끌고 싶다.“옥천신문에서 이렇게 10년 주기마다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옥천군민 한 사람으로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보험혜택 못 받은 사람에게, 제가 갖고 있는 지식으로 혜택을 줬다는 점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제가 특별히 한 일도 없고, 군민으로서 할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여나 어려운 상황이 생길 때 저와 상의하면 좋은 방향으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고 싶습니다.”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2-12-22 19:32
안내면 1937년 이관종인포리 관골, 생경한 지명이 새겨진 돌이정표를 끼고 마을에 들어섰다. 굳이 네비게이션의 도움 없이도 좁은 골목 끄트머리 집이 어르신 댁이라고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관종 정순애 큰 며느리 서기관 승진’이라고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산비탈 길에 지어진 작은 집에 걸린 현수막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흐뭇하셨을 어르신들, 부모의 뒷모습을 보면서 열심히 살았을 자녀분을 생각하니 맥락 없이 뭉클해졌다. 순둥이 같은 누렁이가 어슬렁거리는 한적한 시골집, 누렁이는 낯선 사람을 봐도 짖지도 않은 것을 보니 밥값은 제대로 못하지만 노부부의 성정을 닮은 것 같다. 사랑받고 자란 녀석이라 사람에 대한 경계가 없나보다. 한낮의 햇살이 보약처럼 온몸에 내리 쬐었다. 인기척을 듣고 문이 열리더니 강골인 어르신이 우리를 반긴다.주름이 그려낸 미소, 왕년의 유명했던 영화배우 율 브리너를 연상시키는 어르신. 소사, 히로시마, 수몰지구, 등사기, 먹지. 어르신이 살아온 이야기 틈틈이 꺼내시는 단어들만으로도 어르신은 이미 살아 움직이는 역사 교과서셨다.88세 아직도 짱짱하신 우리 이관종 아버님의 인생 이야기도 한 편의 드라마였다.땅속 깊은 곳에서 파낸 우엉, 속이 꽉 찬 노란 배추를 챙겨주시던 어르신. 튼실한 수확물을 내는 농부였지만 뒷모습은 성자 같았다. ■ 버섯구름폭탄이 피어오른 히로시마에서 온 미아무라깡내 고향은 히로시마 구미정이다. 1937년생으로 히로시마에 버섯구름폭탄이 터지던 날 나는 바닷가 마을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채 옥천 안내면으로 살아서 왔다. 때는 초등학교 4학년 1948년. 당시 내 이름은 미아무라깡. 순식간에 일본에서 온 촌놈이 되었다.아버님은 그 당시 청주농고를 나오신 인텔리였고 어머니와 결혼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가셨었는데 해방 후에 다시 돌아오게 되셨다.아버님은 일본 철공장에 서무계로 들어가서 일을 하셨고 어머니는 일본사람들 하숙도 치면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히로시마 바닷가 끄트머리에 살고 있어서 원자폭탄의 희생양이 되지 않고 살아서 아버님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천운이라고 해야 하나. 아내 염색은 내 몫이다.원자폭탄 터지고 일본이 항복하면서 조선땅에 묻혀야 된다고 서둘러 나왔다. 군북면 항곡리에 우리 윗대들이 살고 있었다. 일본에서 들어온 아버지는 살림을 꾸려갈 마땅한 여건이 안되서 처가살이를 시작하게 되셨다. 우리는 그때부터 가난과 맞서 싸우면서 생활하게 되었다. 어린 나는 시대의 풍랑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성장통을 앓았다. 그것도 바닥부터 시작하는 부모의 인생에 덩달아 얹혀서 초근목피 생활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왔으니 갓 열 살 무렵 고생길에 접어들었다. 가혹했다. ■ 1인 8역은 너끈히 하던 학교 소사로 30여년청년시절에 대전 문화동 병기창, 현 충남대병원 맞은편에서 군속으로 원료창고에서 근무했다. 몇 년 근무하다가 부조리가 너무 심한 현장을 목도하면서 이러다 징역가겠다 싶어 할아버지께서 권유하던 안내중학교에서 소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소사는 사회적인 입지도 약할뿐더러 학교의 모든 허드렛일을 맡아야 하는 직업이라 꺼리는 직종의 하나였다. 나는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 학교에서 근무를 하게 됐다. 지금이야 컴퓨터가 있으니 일거리가 적지만 예전의 소사는 정말 학교의 모든 잡무를 다 하는 기능직이었다. 40년 전 안내는 지금처럼 고요한 마을이 아닌 사람들로 북적이던 활기 찬 동네였다. 당연히 안내중학교도 학생이 1천500명이 넘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 때는 시험도 왜 그렇게 많이 보던지 중간고사, 월말고사 시험 때 마다 눈코 뜰 새가 없었다.시험 때 등사기 롤러 밀어대느라 어깨가 빠질 것 같았다. 겨울에는 난로 떼는 일부터 은행 업무등 모든 일이 손품 발품을 팔아야 되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입금 시키고 돈 빼오려면 자전거타고 비포장 도로 털털거리면서 하루 두 세 번씩 올라 댕기고 고생은 말도 못했지만 뒤돌아서면 한 뼘씩 자라는 아이들 보면 하루도 허투루 살 수 없던 때였다.아침이면 4시30분에 일어나 농사짓는 밭도 돌보고 출근을 했다. 학교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쉬는 시간 틈틈이 공부해서 한문을 많이 익혔다. 국어 선생님이 한 날은 나에게 봉투를 내밀며“아저씨 00좀 써 주실래요?”선생님이 실력이 모자라 나한테 물은 것이 아님을 안다.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들이 있다. 소사일 보면서도 틈틈이 한문 공부 하는 걸 엿보았는지 나에게 부탁해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었지. 국어 선생이 한문 써 달라고 했으니 내가 배운 건 없어도 얼마나 노력하면서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연습한 만큼 써주고 그런 하루하루가 모여서 구순이 되어가도 당당한 나로 설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배우는 건 즐거웠고 손을 쉬게 하는 것이 죄짓는 것 같던 시절이었다. 내가 악착같이 일하니 우리 집사람도 똑같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고단했다. 애들 공부시킬때 열무 한 보따리씩 짚으로 묶어서 장에 내가 팔았다. 꼬기작꼬기작 전대에 채워진 돈으로 애들 차비를 만들어줬다.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도망도 안가도 지금까지 곁을 지키는 걸 보니 신랑이 예뻤던 모양이여.■ 부부가 아닌 전우(戰友)였던 나 그리고 아내 사는 게 전쟁 같던 시기, 우리 부부는 서로 전우(戰友)였다. 시할머니까지 돌보고 열 식구 불 떼서 먹이고 샘에 가서 물질해오느라 골병들은 우리 마누라…. 겨울이면 동네는 온통 하얀눈으로 덮여 길은 보이지 않고 그 길에서 샘까지 다녀오는 아내 나의 전우였다. 나도 지독하다는 말 듣고 살았고 우리 마누라도 지독하다는 소리 매번 들었다.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그렇게 살았더니 철마다 수확하고 나눠먹고 돈 꾸러 다닐 일 없고 주고 싶은 거 있으면 품에 가득 담아서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예전에 너무 어려울 땐 아이들 키우느라 이웃집에 신세도 졌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없이 사니 뭘 믿고 빌려주겠나. 피고름 짜는 날들이 모였으니 우리 부부 뿐만 아니라 우리 자손들도 다들 어려운 시기를 잘 겪어냈다. 아내가 시집올 때 우리 집은 관골에서 제일 못살던 집이다. 밭 한 뙈기 없던 집인데 이제 4천 평 땅에 부러울 게 없는 노인이 되었다. 다 아내덕분이다. 허리띠 꽉 졸라매고 열무심어서 머리에 이고 장에 들고 나가서 팔고 소사 월급 2만원이던 시절에 한 푼 두 푼 저축해서 돈 모으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가끔씩 내가 원자폭탄 떨어진 데서도 살아왔는데 뭐가 걱정이냐고 큰소리를 친다.그 폭탄 아래서도 살아났는데 못 할 게 무언가 사나이가 말이야!그런 나를 믿고 따라와 준 아내, 천생연분이라는 말로도 모자란 은인이다.우리 자손들도 부모 속을 썩이지 않아서 우리가 살림 불리는 데만 신경 쓰면서 살 수 있었다. 배불리 먹이고 좋은 옷 입히지 못했지만 지들 알아서 공부하고 자기자리 찾아가 준 기특한 자손들이다.■ 인생 말미의 훈장, 내리쬐는 건 따뜻한 햇살이요 근심이 없네남아선호사상 때 딸만 셋 낳으니까 우리 마누라 쫓겨 날 판인데 규화가 태어나면서 우리 집사람을 구했다. 그래도 없는 살림에 고생만 하는데도 도망안가도 지금까지 곁을 지켜주는 우리 집사람 정순애 여사, 고맙소!1979년 안내중학교가 수몰되고 지금 자리로 옮기는 과정에서 벽돌 한 장 한 장 전부 내 손으로 쌓았다. 나중에 교장이 훈장을 줘야 된다고 추천해서 정말 국무총리 훈장을 받았다.규순 규만이 규화 규동 규상이 키울 때 아침 먹으면 점심이고 뒤돌아서면 돈 들어갈 투성이였지만 농사도 저축도 옹골차게 했다. 이제 땅도 농토도 사놓고 쌀 방아 찧어서 40가마니를 자손들과 나눴다. 차 트렁크에 이것저것 실어보낼 때 내 인생에도 이런 해뜰날이 왔구나 싶어 멀리 사라져가는 아이들 차 뒤꽁무니를 한참이나 바라본다. 너무 좋아서.시골마을에 이제 사람이 없다. 우리가 떠나면 이 동네는 적막강산이겠지.애기 울음소리 들어본 게 언제인지. 우리 아이들 한창 클 때 동네 골목 앞에서 아이들 친구들이 모여서 가방 둘러매고 학교 가던 그때가 고생스러웠어도 지금 생각하니 추억거리다.세월은 무심해서 하루하루는 고단하기 짝이 없었는데 88년의 세월은 어느새 이리 성큼 다가왔는지 알 수가 없다.유난히 햇살이 잘 부서지는 우리 집. 어느 날 집사람이 끓여준 된장찌개에 막걸리 한 잔 마시고 창가로 모여드는 햇살에 졸음이 찾아오면 지그시 눈을 감고 아득히 멀리 와 버린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그 꿈속에서 그리운 어머니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면 그 또한 최고의 훈장이다. 수확을 끝내고 가벼워진 손, 며느리들이 잔뜩 준비해놓은 술안주로 막걸리 한잔씩 들이키는 이 맛을 어디에 비할까. 이 또한 내가 받는 훈장이다. 열심히 살아왔더니 막걸리 한 잔 만큼 인생이 짜릿하다. 캬! 오늘따라 술 맛이 기가 막히다. 지난 추억이 안주가 되니 이 아니 기쁠 소냐!아들편지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부모님 생각하니 겨울밤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구들장 같습니다.정말 고생 많으셨던 부모님.부모님 고생하시는 거 보면서 더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던 거 같습니다.생각해보니 저도 어릴 때 쌀밥도 배불리 못 먹었습니다.효도 한 번 제대로 못했는데 부모님 가까이에서 생활하면서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어릴 때는 학교 소사하시는 아버님이 자랑스럽지 못한 철없던 때가 있었습니다.지금은 이 세상 누구 보다 아버지 어머니를 존경합니다.두 분의 사랑과 고단한 시간들 덕분에 저희들이 존재합니다.고맙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직도 막걸리 들이키시면서 건강하게 텃밭 일구시는 아버지 보면 감사하고무릎아파하시는 어머니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아버지 어머니 아프신데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바로바로 말씀해주세요저희가 바로 고쳐드릴게요.두 분이 계셔서 저희들이 있습니다.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규화 올림
인물일반 | 김경희 시민기자 | 2022-12-09 12:19
음악은 친구처럼 일상에서 마주한다. 어디 카페나 식당, 옷 가게에 가면 귓가에 음악이 들려온다. TV를 켜면 재밌는 음악 프로가 얼마나 많은가. 트로트부터 합창, 케이팝, 록, 클래식 등 장르도 무궁무진하다. 음악이란 무엇일까? 워낙 친숙해서 설명하는 것조차 어색하다. 사람들은 음악을 듣고 정서적인 안정을 찾거나 메마른 일상에 한 줄기 생기를 얻곤 한다.실은 음악 전공자가 아니면 음악을 ‘보고’ ‘듣는’ 것에 더 익숙하다. 방송에서는 각종 오디션 음악 프로를 열어 관심을 끈다. 참가자들의 순위를 매기고 승자와 패자를 나눈다. 언제부턴가 경쟁의 치열함만 남고 음악을 ‘하는’ 즐거움은 잊혀졌다. 오랜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음악 하기’는 문화와 종족이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언어로 활용됐다. 아주 먼 과거를 떠올리지 않아도 우리고장에서 노래교실, 직장인 밴드, 합창단에서 즐겁게 활동하는 분들을 보면 음악을 한다는 건 서로 안에 감정을 나누고 싶은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살면서 다룰 줄 아는 악기가 하나라도 있으면 어떨까? 목적의식에 얽매이지 않고 음악을 즐기는 시간이 하루에 10분이라도 있다면 일상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여러 악기가 있지만 오케스트라의 꽃이자 최고 음역을 자랑하는 목관악기 ‘플룻’을 접할 기회가 흔치 않다. 서론이 길었다. 플룻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면 이분에게 문의하면 좋을 듯하다. 옥천, 대전, 대구에서 개인 레슨을 하는 플루티스트 장유진(23, 대전 중구)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무대 압박 견디며 내공 쌓은 플루티스트“플룻 수업을 21살 때부터 했어요. 처음에 충남 홍성이랑 태안에 가서 교회 단체 레슨을 했어요. 그때 계기로 개인 레슨도 시작했죠. 개인 레슨생이 지금 여섯 분 있는데요. 옥천에도 만나는 중학생이 한 명 있어서 매주 오고 있어요. 플룻을 처음부터 배우는 분들은 기초 운지법부터 알려드리고요. 악보를 못 읽으셔도 박자 감각이나 기본적인 음악 이론도 다 알려드려요. 옥천에 계신 다른 분들도 플룻을 통해 만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인터뷰에 응했어요.”대전이 고향인 장유진 씨는 대전예술고를 졸업하고 목원대학교를 수석 입학해 관현악을 전공했다. 대학교 3학년이 되던 올해 대구에 있는 계명대학교에 편입한 그는 제15회 서울 오케스트라 콩쿨 2위, 제38회 가톨릭 콩쿨 관악부분 금상, 제28회 한국음악협회 대전광역시지부 전국 학생 음악 경연대회 3위, 제22회 전북대학교 전국 음악경연대회 전체 1위 등 여러 수상 이력이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플룻을 접한 유진 씨는 이제 경력으로 10년이 넘었다.옥천에 플룻을 가르치고 있는 학생을 계기로 옥천을 더 알아가고 있는 플루티스트 장유진 씨를 만났다. 2년 전부터 플룻 개인 지도를 하고 있는 그는 대전예술고를 졸업하고 목원대학교에 수석 입학한 뒤 현재 계명대학교에 편입해 관현악을 전공하고 있다.음악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은 건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전부터 취미로 피아노와 플룻을 접했지만 음악을 업으로 삼는 것에 집안의 반대가 있었다. 처음에 미술을 하고 싶었던 유진 씨도 음악은 반신반의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당에서 기도하던 유진 씨 어머니가 무의식 중에 딸이 플룻을 부는 모습을 보고 권유한 게 계기가 됐다. 기타, 바이올린과 같은 현악기와 달리 플룻은 유진 씨에게 잘 맞는 악기였다.“제 나이대에 비해 경력을 많이 쌓은 편이에요. 어떤 오케스트라나 앙상블을 가더라도 퍼스트(first, 첫 번째)가 누구인지 따지거든요. 목원대에서 장학금을 타려고 했던 것도 이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그래야 제 자리가 있으니까요. 특히나 고등학교 땐 압박이 심했어요. 콩쿨 준비할 때 매사에 긴장감이 있어도 티를 내면 안 됐어요. 그날 컨디션이나 온도, 홀의 울림 등등 모든 걸 생각해야 해서 예민해질 때가 많았죠.”■ 취미로 즐기는 플룻 추천합니다유진 씨에게 플룻은 애증의 관계이자 몸과 같은 존재다. 예술고에 진학한 뒤 부모님의 지원으로 음악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학창시절 내내 콩쿨 시즌과 연주, 실기 시험이 기다렸다. 어디 놀러갈 틈도 없었다. 연습실에 밤늦게까지 있거나, 학교에서 자더라도 새벽 일찍 등교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연주 하나만 바라보고 살던 삶, 정말 간절함 하나로 성장한 시기였다. 음악을 흐르듯 느꼈던 유진 씨도 플룻이 지겨웠던 적은 없었을까?“플룻을 가르치면서 지겨웠던 적은 없어요. 다만 제가 느꼈던 매너리즘은 있죠. 무대에서 그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잖아요. 음악은 혼자 모든 걸 견뎌야 하는 게 심해요. 플룻을 연주하는 것도 나고, 그 상황을 만든 것도 나잖아요. 외롭죠. 그렇지만 저처럼 전공이 아닌 취미로 악기를 접하는 건 정말 좋아요. 플룻은 양손을 다 활용해서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되고요. 잘 부르면 어르신분들도 좋아하세요. 저도 실력이 느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죠.”시험과 무대 연주의 압박에서 벗어나 플룻을 가르친다는 보람이 컸다. 매주 옥천과 대전, 대구를 오가는 힘든 일정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다. 학생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그분들에게 배우는 점이 많았다. 새로운 영감을 얻기도 했다. 연주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는 데 그치지 않고 듀엣곡도 같이 한다. 그래야 박자감각이 는다. 수강생이 원하는 곡이 있으면 악보를 찾아드린다. 어떤 분은 남자친구를 위한 곡을 불러주고 싶다는 요청에 악보를 하나 읽어드리고 왔다.■ 옥천에 온 건 정말 행운이에요개인 레슨으로 처음 만났던 분이 이제 2년이 지나 중급 단계까지 올라갔다. 처음에 악기 구하는 것부터 해서 악보 읽는 법을 알려드렸다. 만날 때마다 새로웠다. 그분은 피아노학원에 다닐 때 악보를 못 읽어 손가락으로 외웠다고 한다. 그런데 플룻은 외울 수가 없다. 기초부터 박자, 운지법을 차근차근 알려드렸다. 플룻은 연주 자세나 호흡법 등 1년간 기본을 익혀야 오래할 수 있다. 입문자들은 신품 45만원, 중고 20~25만원 선에서 플룻 악기를 구할 수 있다.“플룻은 음색이 정말 아름다워요. 오케스트라에서 목관악기에 솔로를 줄 때 플룻이 긴 파트를 갖고요. 음색이 제일 높아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요. 이 아름다운 음색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같이 해보셨으면 좋겠어요. 레슨은 보통 집으로 찾아가고요. 여의치 않으면 근처 연습실을 찾아요. 일주일에 한 번 1시간 수업이니까 평소 연습을 하셔야 해요. 그래서 취미로 하는 분들은 하루에 10분만 불어도 실력이 는다고 말씀드려요. 그만큼 지속성이 중요하죠.”인생의 절반 이상을 플룻과 가까이 한 유진 씨, 나만의 음악을 펼치고 싶고 음악적 한계는 어디인지 알고 싶은 청년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여러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는 그가 앞으로 어떤 진로를 정할지 궁금해진다. 마지막으로 개인 레슨을 통해 옥천에 온 소감을 물었다.“학생을 만나 옥천에 온 게 정말 행운인 것 같아요. 옥천 정말 좋은 거 같아요. 자주 오고 싶어요. 개인 레슨은 연령대나 난이도에 관계없이 맞춰드리고요. 플룻이라는 악기를 해본 적이 있거나, 아니면 해보고 싶거나, 배우고 싶은 분들은 편하게 연락해주세요. 비용적인 면은 제가 조율해드릴 테니까 열심히 가르쳐 드릴게요. 혹여나 옥천에 플룻 연주가 필요한 무대가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주세요.”문의: 010-2472-7840 (장유진)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2-12-09 12:02
햇살 한 줌, 바람 한 모금, 지저귀는 새 소리. 오랫동안 꿈꿔왔던 산촌. 조급함이 밀려왔던 도시 생활을 뒤로하고 시골 옥천에 머문 지 어느덧 12년. 자연이 주는 생동감에 처음부터 반했다. 공방 옆 이지당이 보물처럼 다가왔다. 내 발로 느리게 걷기, 나를 묵묵히 바라보는 시간. 들숨과 날숨은 점점 깊어져 간다. 내 안의 진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흙을 만지고, 그림을 그리고, 색을 바르며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마음이 가는 대로 선과 면을 이어 입체의 세계에 침잠했다.내 마음속 깊은 곳, 무엇이 있는지 모르며 지냈다. 아니, 애써 외면했던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가려졌던 그 속내를 옥천에 와서야 마주했다. 옥천은 바로 그런 곳. 처음에는 바깥 구경만 하다 한나절이 훌쩍 지나가기도 했다. 작업하고 바람 쐬기를 반복, 이제야 자리를 잡았다. 내면에 일어난 열정을 꽉 붙잡고 모든 걸 쏟아냈다. 하루가 참으로 짧구나. 온몸과 심혼을 담아 하나의 작품이 힘겹게 나온다. 고되지만 평온하다. 사람 손으로 빚은 작품은 같은 게 하나도 없다.너도나도 행복을 바라며 산다. 사람들은 “나는 네가 행복하길 바래”라고 이야기한다. 행복이 어디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할까? 끊임없는 언어의 유희가 아닌 진심의 행복은 과연 무엇일까? 답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다. 예술은 자기표현을 하는 것. 어쩌면 행복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지 않을까, 우리만 모를 뿐. 그리하여 나도 당신에게 이 말을 건네고 싶었다. “이곳에서 당신이 행복하길 바래요”라고, 옥천에서 행복을 찾았듯이. 나의 옥천은 행복하다.'옥천유희2'를 주제로 열 번째 개인전을 연 김미경 도예가를 옥천전통문화체험관 전시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지난해 서울 갤러리세인에서도 같은 주제로 개인전을 했다.■ 실재와 상상이 넘나드는 이지당 풍경지난 11월17일부터 27일까지 옥천전통문화체험관 전시실에서 김미경(57, 군북면 이백리) 도예가의 열 번째 개인전 <옥천유희II>가 열렸다. 전시 소제목은 ‘옥천에서 행복하길 바래’. 작품들은 산과 물의 풍경을 추상화한 백자 평면, 기물에 민화 형식의 꽃과 무더기를 그린 분청 입체 두 가지로 나뉘었다. 군북면 이백리에서 이지도예공방을 운영하는 김미경 씨는 옥천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어 설레는 마음으로 관람객들을 맞이했다. 오랜 작업을 거쳐 사람들을 만나는 이 시간이 휴식이나 다름없다.“시아버님 고향이 군서면 사양리예요. 선산이 군서에 있어서 결혼하자마자 옥천에 왔죠. 남편 직장이 있던 서울에서도 지내고 대전에서 도예 공방도 했는데요. 다 정리하고 왔어요. 제 고향은 경북 포항인데요. 그전에는 바쁘게 살아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옥천에 지내면서 어느 순간 저 자신을 발견했어요. 멈춰 서서 바라볼 수 있었죠. 나를 더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마음이 생겨났어요. 시기적으로도 그렇고 환경, 공간이 저를 달라지게 한 요인이 아닌가 싶어요.”이지당의 여름 1, 2 (백조형토)왼쪽부터 '산과 들, 꽃과 풀 2', '이지당' (백자)푸른목단 1, 2 (백조형토)이번에 전시된 작품 중에 이지당을 배경으로 한 그림들이 많았다. 김미경 씨는 이지당 주변을 걸어 다니며 계절이 바뀔 때마다 변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봤다. 이지당 앞 강가에 노니는 물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옥천의 또 다른 모습을 떠오르곤 했다. 한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갈 정도로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관찰하는 시간이 자연스레 길어졌다. 물고기, 어사화, 부귀영화의 의미가 담긴 모란까지 실재와 상상을 넘나드는 이지당 풍경 이모저모를 작품으로 승화했다.■ 도예에 집중하며 신앙심은 더 깊어졌다대학교에서 도자기기술학과를 전공하는 등 20년 이상 도예에 몰두한 그 역시도 중간중간 깨지고, 갈라지는 시행착오가 늘 따라왔다. 어느 작품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어떤 유약을 쓸지, 이번에 녹색으로 할지, 따스한 발색을 가져갈지 정하는 일은 매번 어려웠다. 결이나 두께도 제각각. 유약과 불의 세기에 따라 우연의 효과를 기대야 할 때도 생겼다. 알면 알수록 변화무쌍한 도예 세계다. 이번 전시를 관람한 옥천미술협회 회장이자 압화 작가 이미자 씨가 전한 소감이다.“여러 그림을 봤지만 정말 예쁘고,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싶은 작품도 보여요. 흙으로 직접 만들었다고 생각하니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요. 저도 도예를 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예요. (김미경 선생님이) 협회 회원이에요. 이번 개인전으로 우리 회원들을 모시는 장이 돼서 보람 있고 뿌듯하고 감회가 새롭네요.”옥천유희 (흑조형토)옥천유희 (흑조형토)이지당의 풍경 1 (백조형토)푸른항아리 (분청토)장군병 (분청토)김미경 씨는 옥천성당을 다니고 있는 천주교 신자다. 세례명은 마크리나(MACRINA). 성당에 다닌 지 30년이 지났다. 이번에 전시한 십자가의 길(14처) 작품은 온전히 신앙심의 발로였다고 볼 수 있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으면서 돌아가시는 모습’을 14가지 장면으로 표현한 것. 이 작품은 순천 예수회 주문을 받아 12월6일 축성식을 앞두고 순천으로 보냈다. 장장 8개월이 걸렸다. 도예를 하면 체력 소진도 되고 중간중간 고비도 찾아오지만 그때마다 신앙의 힘이 버팀목이 됐다.“제가 옥천성당에 처음 왔을 때 김인국 신부님이 계셨는데요. 도움을 많이 주셨죠. 그분께서 옥천에 잘 적응할 수 있게끔 많이 도와주셨어요. 신부님이 건강하게 옥천에 정착했다고 표현해주시더라고요. 외지에서 온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저는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고 왔지만 신부님은 많은 분을 만나봤을 거잖아요. 되게 편안하게 잘 정착했다고 하시더라고요.”'MACRINA-십자가의 길(14처)' (백조형토)십자가의 길(14처) 중 한 작품.옥천성당 부설 소화어린이집 김지은 원장은 7세 원생들을 데리고 같은 성당에 다니는 김미경 씨 개인전을 보러 왔다. 그는 이지도예공방에 찾아가 아이들과 흙을 만지고 그릇을 만들어 간 경험이 있어 작품들이 친숙하다고 말했다. 김지은 원장은 “이지당을 중심으로 옥천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며 “김미경 선생님 개인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자연 친화적인 모습을 아이들과 나누게 되어 기쁘다”며 소감을 전했다.■ ‘옥천에 사는 모든 분이 행복하길 바래’김미경 씨는 공방에만 머물지 않고 옥천에서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치매안심센터에서 인지재활강사로 4년 그리고 복지관에서 도예강사로 2년째 활동 중이다. 매주 하루 2시간씩 어르신들과 도자기를 만드는 수업은 내년에도 이어갈 예정이다. 도예 수업을 통해 어르신들의 마음을 풀어주고 동심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라고 그는 말한다. 처음엔 도예를 어렵게 느껴 부담을 느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수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뿌듯함을 얻는다고.“흙장난처럼 자유롭게 느낄 때 부담이 없으세요. 이지당을 주제로 만들어보기도 했는데 얼마나 재미난지 몰라요. 꼭 굽지 않아도 돼요. 그 상태에서 머물 수도 있거든요. 소꿉놀이처럼 해보자고 말씀드리면 금세 마음이 풀어지고 편안해져요.”남천나무를 좋아해 호를 ‘남천’이라 지었다. 그에게 도예는 일상이자 삶이다. 화려하거나 특별하진 않아도 평범함 속 비범함이 있다. 어릴 때부터 흙을 좋아라 했다. 냇가에 삐뚤고 깨어진 사금파리를 발견하면 귀하게 여겼다. 위에 음식을 올려놓곤 했다. 그때부터 마음이 트였다. 유년시절 유난히 행복하고 따스했던 추억이 하나씩 있다. 그는 엄마가 옛날에 자주 사줬던 니트를 지금도 즐겨 사 입는다. 까슬하고 싫지만 니트를 자주 입게 된다. 내 안에 깃든 향수를 간직하며 산다. 옛날 친구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현재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감사함을 느낀다.“옥천은 따스하면서도 밝고 희망적인 곳이라는 느낌을 받아요. 살면서 주변 풍광이나 모든 게 다 좋잖아요. 마음도 순화되고요. 이번 전시 소제목처럼 ‘행복하길 바래’라고 말하고 싶어요. 옥천에 사는 동안 다들 행복하게 지내셨으면 해요. 저는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 많은 사람을 위해 기도는 못 하지만 항상 그런 마음을 자주 가져요. 모든 분이 잘 되길 바라고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에요.”김미경 도예가가 작품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2-12-01 15:27
30년간 참 많이도 변했다. 나도, 내 고향 옥천도. 장날만 되면 발 디딜 곳 없이 북적이던 시장은 상가들이 차지했고, 진흙밭이던 금구천엔 주차장이 들어섰다. 치열한 열정을 가졌던 91년 젊은 나도, 옥천을 따라 많이 변했다.옥천에서 나고 자라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이른 나이에 결혼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인생의 초점을 생업에 맞추니 자연스레 사진은 흐려졌다. 딸아이들을 모두 대학에 보낼 때가 되니 그제야 다시 사진이 보이더라. 거창한 카메라도 필요 없었다. 핸드폰으로 옥천을 담고, 소박한 목표를 세웠다. 내 세월을 담은 사진집을 내보자고. 그러다가 좋은 기회가 왔다. 작년에 충북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개인전 ‘환생시리즈’와 ‘옥천愛 머물다’를 열었다. 그리고 10월19일, 옥천전통문화체험관서 옥천의 향수를 담은 사진전 ‘시간의 풍경’을 열고 본인의 첫 사진집을 냈다. 세월이 옥천이니 옥천을 전시했다. 1991년 당시 사진영상학과 학생이던 서상숙(52, 옥천읍) 씨가 대학 과제로 받은 주제 ‘고향’의 사진을 제일 먼저 전시관 입구 옆에 걸었다. 젊은 날의 열정이 담겨있던 흑백의 사진과, 다시금 타오른 지금의 열정이 만나니 관람객들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91년의 옥천과 지금의 옥천을 같은 자리에서 찍어보고, 그 향수를 사진에 담았다. 그게 이번 전시회의 제목 ‘시간의 풍경’의 부제가 ‘향수(鄕愁)’인 이유다. 길가에 있는 주인 없는 의자, 한 그루 나무도 전부 옥천의 세월을 담고 있었다. 그 30년의 세월을 모아 꿈이던 본인의 사진집을 내고, 심사숙고한 60여점의 사진을 전시하며 개인전 ’시간의 풍경’을 연 서상숙 작가를 만났다. “존재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말이 참 좋더라고요. 예를 들어 아름다운 꽃이라도 버려지면 그건 가치가 없는 거예요. 그 모습을 필름에 담고, 그 가치를 기록하고 보여주는 게 바로 사진을 찍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 모든 것엔 저마다의 존재가치가 있다. ‘시간의 풍경’ 사진전엔 91년의 옥천과 30년이 흐른 지금의 옥천 사진들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 바로 왼편에는 사진집의 표지인 ‘91년 옥천역 하행선’ 사진이 걸려있고, 그 옆으로 서상숙 작가가 대학시절 과제로 찍은 고향 옥천의 사진들이 흑백 필름으로 기록돼있다. 그 맞은편엔 서 작가의 일상 속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옥천의 일상 사진들이 걸려있다. 집 앞에 놓여있는 화분부터 나무와 시장 사람들까지 그에겐 모두 소중한 가치를 지닌 피사체다. “이번 사진전의 큰 주제는 일상적인 것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거예요. 30년 전 옥천의 모습들과 현재의 옥천 사진을 연결해서 볼 수 있는 사진을 골라서 전시했죠”서 작가의 말대로 전시된 사진들을 보다 보면 관람객들은 같은 곳에서 찍은 사진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예전엔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진 것들을 담고 싶었다고. “예전에는 공판장이라고 해서 시장도 사람이 붐볐죠. 금강 휴게소에 있던 작은 다리도 없어졌고요. 제가 어릴 적에 시장 동네에서 컸는데, 지금은 동네가 다 없어지고 주차장이 됐어요. 제가 기억하는 흔한 일상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변했는지 전시하고 싶었어요”■ 사진은 감정을 찍는 것, 그리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사진은 내가 느꼈던 그때의 감정을 기록하는 일이다. 카메라든 핸드폰이든 상관없다. 그 상황을 인식하고, 느낄 수 있는 눈과 마음만 있다면 뭐든 찍을 수 있고,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저는 존재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말이 참 좋더라고요. 예를 들어 아름다운 꽃이라도 버려지면 그건 가치가 없는 거예요. 그 모습을 필름에 담고, 그 가치를 기록하고 보여주는 게 바로 사진을 찍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이번 사진전에도 서 작가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옥천을 주제로 한 만큼, 옥천을 향한 서 작가의 애정과 향수를 가득 느낄 수 있다. “전시회에 오셨던 분들 중에 모녀가 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엄마때는 옥천이 이랬어’ 하면서요. 엄마의 시간과 딸의 시간이 제 전시회에서 공유되고 있다는 걸 느꼈는데, 제 의도대로 전해지는 것 같아 뿌듯하더라고요”지난 19일부터 23일까지 옥천전통문화체험관 전시실에서 서상숙 작가의 개인전 ‘시간의 풍경’이 열렸다.지난 19일부터 23일까지 옥천전통문화체험관 전시실에서 서상숙 작가의 개인전 ‘시간의 풍경’이 열렸다.■ 3대째 이어져온 사진의 DNA, 딸과는 30년 선후배 사이로피는 못 속이는지, 이번에 서 작가의 막내딸도 같은 대학 패션사진학과에 진학해 30년 선후배 사이가 됐다. 윗대의 할아버지도 사진을 했으니 3대째 사진 작가를 배출한 사진 집안이다. “이번에 막내딸이 제 후배가 됐어요. 제가 91학번이고 딸이 22학번이니 30년 차이 선후배네요. 제 윗대 할아버지도 사진을 하셨으니까 정말로 저희 집에 사진의 유전자가 있나 봐요”서 작가는 91년도 학교 과제를 위해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을 때의 모습을 딸에게서 보고 있다. 그것도 어쩌면 서 작가의 ‘시간의 풍경’이 아닐까. “무거운 카메라를 매일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대견해요. 제가 디지털 세대가 아니라서 가끔 딸이 모르는 걸 알려주기도 하고요. 딸이 요새 사진 트렌드도 잘 알고 있어서 제가 많이 배우고 있어요. 기회가 되면 엄마와 딸의 사진 전시회도 해보고 싶어요”서상숙 작가는 항상 사진 생각뿐이다. 벌써 내년 예정인 사진전의 주제도 생각하며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사진전을 준비하는 그 시기가 휴식이라는 서 작가의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어떤 ‘풍경’을 만들지 기대해본다. 지난 19일부터 23일까지 옥천전통문화체험관 전시실에서 서상숙 작가의 개인전 ‘시간의 풍경’이 열렸다.지난 19일부터 23일까지 옥천전통문화체험관 전시실에서 서상숙 작가의 개인전 ‘시간의 풍경’이 열렸다.
인물일반 | 주찬식 인턴기자 | 2022-10-27 23:27
편집자주_ 삶의 무게를 내려놓자 눈앞에 하늘이 나타났다. 가슴을 활짝 열며 하늘을 바라봤다.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그림을 그려보겠노라. 하늘은 나의 캔버스. 푸른 하늘, 노을, 태양, 밤하늘, 나무 잎새, 구름을 있는 그대로 담았다. 너무 화려할 필요 있을까. 그저 순탄하게. 자연적인 것이 감사하고 좋다는 걸 느낀다. 인생도 그렇다. 자연적으로 살아야 어떤 과한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열심히 살았던 만큼 자주 우울해지고, 누군가를 믿었던 만큼 불안해하며 사는 우리네 인생. 그래도 그림 그릴 때만큼은 자유로웠다. 하고 싶은 걸 하니까. 자연과 닮아가는 내 모습을 보며 나를 다독였다.지난 9월21일부터 26일까지 옥천전통문화체험관 관성관에서 특별한 전시가 열렸다. 정가매(67, 읍 수북리) 작가의 첫 개인전으로 주제는 <Dream-Story of sky>, 바로 ‘꿈-하늘 이야기’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 41점은 대청호, 삼청리 저수지, 석탄리, 지양리, 매화리, 동이면 금강 주위, 추소리 등 그가 일상에서 본 옥천 자연환경과 타지에 가서 찍었던 풍경 사진들을 배경으로 했다.정가매 작가는 1997년 홍익대학 화우회전(서울시립미술관)을 시작으로 최근에는 현대미술여류작가전(대전 고트빈갤러리, 2022), 제55회 한국미술협회전(서울 예술의전당, 2021), 제20회 부산국제아트페어(부산엑스코, 2021), 옥천미술협회 정기전(2012~2021) 등 여러 단체전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번에 생애 첫 개인전을 옥천에서 열었다. 직장과 가정 모두를 챙겨야 했던 그는 전업작가처럼 그림에 전념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품었던 화가가 되고 싶은 꿈마저 내려놓지 않았다.“전시회는 나를 발가벗고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일이잖아요. 되게 부끄럽고, 불안하고, 가슴 떨리는 일인데요. 첫 전시회를 열어서 감동이 일어났지만 ‘잘 돼야 하는데’ ‘잘 그렸나’ 자문자답이 생기네요. 좋기도 하면서 불안한 떨림이 있어요. 마치 심판을 받는 기분이죠.”정가매 작가 ■ ‘언니, 저 옥천에 잘살고 있어요’정 작가가 옥천에 정착한 지도 어느덧 32년이 지났다. 경상남도 진주에서 나고 자란 그는 중·고등학교 때 미술부 활동을 했다. 그러나 진주여고를 졸업하고 미술대학이 아닌 서울여대 농촌과학과에 진학하며 그림과 잠시 이별하는 듯했다. 당시 ‘농촌을 과학화하자’는 시대 흐름에 따라갔는데 결과적으로 전공을 살리지 못 했다. 그는 서울서 개인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시부모님이 사는 옥천에 터를 옮겼다. 그렇다, 도시에서 농촌으로. 잠깐 머물다 갈 생각이었던 옥천에 지금까지 살 줄 그때만 해도 몰랐다.“저도 이 나이가 되기 전에 욕심이 있었죠. 꿈이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그림 그리는 것, 하나는 사회봉사. 돈 많은 자산가가 돼서 사회에 베푸는 봉사를 하고 싶은 꿈이 있었죠. 결혼하면 다 해결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안 되더라고요. 돌아보니 내게 물질은 주어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림 그리는 재능이 있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끈을 놓지 않았네요. 이 세월을 사는 동안 역경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죠. 그래도 정말 붓을 놓지 않았어요. 매일 그리진 않아도 머릿속에 그림을 항상 갖고 있었어요. 사람은 꿈을 놓지 말아야 해요. 인생은 자기가 만들고 개척하는 거예요.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거 하나만큼은 지켜야 하고, 끝까지 끌고 가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정가매 작가 개인전이 옥천전통문화체험관 전시실에서 열렸다.도시 서울에 살다 시골 옥천에 왔을 때 고민과 역경이 찾아왔다. 가족들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막내로 태어나 농사짓는 걸 안 보고 컸기에 시골에 어떻게 사느냐는 우려였다. 이번 개인전을 보러 옥천에 온 큰언니에게 말했다. 이렇게 잘살고 있으니 괜찮다고. 언니가 작품들을 보며 많이 놀란 눈치다. 이렇게 많은 작품을 내보인 적은 없었으니. 옛날에 언니와 나눴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가슴에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눈물을 잠시 글썽였다.옥천에 살았던 세월은 내 안에 있던 욕심을 내려놓는 과정이었다. 옥천의 산천초목을 보며 마음의 치유를 얻었다. 인위적인 추상화나 비구상보다 눈앞에 보이는 자연 풍경이 그림 소재로 다가왔다. 파격적인 그림보다 자연 그대로를 옮겨놓는 회화성을 살리는 데 초점을 뒀다. 자연과 대화하면서 자연적인 정서를 살리니 어느새 그림이 됐다. 정가매(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작가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잠을 줄여가며 그림을 그린 세월새벽 3~4시에 잠에서 깨는 일상이 이어졌다. 아침 7시20분 금강휴게소에 출근하기 전까지 그림 그리고 집안 살림까지 병행했다. 그렇게 올해 첫 개인전을 열었다. 배움의 열정은 누구보다 많았다. 나이 마흔이 됐을 때, 서울에 있는 홍익대 사회교육원에 가서 4년 동안 서양화 공부를 했다. 당시 옥천에서 식당 일을 하면서 말이다. 매주 금요일 새벽 5시15분 첫 기차를 타고 상경했다. 기차만 타면 잠이 스르르 찾아왔다. 8시20분 서울역에 도착하면 화장실에서 화장하고 택시 타고 홍대에 갔다.“잠을 줄여야 했어요. 직장일 해야지, 집안 살림해야지, 그러다 보니 남편이 가사 일을 많이 도와줬죠. 바쁠 때 챙겨주고, 하지 말라고 말린 적이 없었어요. 자꾸 하라고 격려해주니 즐길 수 있었죠. 작년에 부산 벡스코에서 전시하고 나서 내가 그랬어요. ‘여보, 이거 돈 들여서 했는데 집 안에 다 들고 와가지고... 그림을 계속 그려야 해?’ 남편이 그래요. ‘그래도 해야지.’ 그래서 했어요.”서예, 서각을 하는 남편의 이해와 응원이 힘이 됐다. ‘여자가 무슨 그림을 그리냐’ 하면 아마 못 그렸을 것이다. 진정한 외조 덕에 붓을 놓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같은 작가로서 ‘붓을 놓지 마라’ ‘꿈을 놓지 마라’ 잔소리 같은 격려를 많이 했다. 덕분에 1등 몇 개로 좌우되는 자본주의 시대에 마음의 힘, 정신적인 풍요로움이 내면에 깃들었다. 심심하거나 외롭거나 고독하지 않았다.“3년 뒤에는 이제 70살인데 그때 개인전을 한 번 더 할 생각이에요. 저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겸허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더 성숙해서 그림을 그리겠다는 다짐이 생겨요. 저는 그래요. 실버 세대라고 해서 두 손 두 발 놓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시작하면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늦지 않았거든요. 90세까지만 살아도 20년은 할 수 있어요. 그런 거 생각하면 뭐가 늦었나 싶어요. 등산을 하든, 시를 쓰든,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스스로 삶을 만들어야 해요. 남 탓하며 세월 보내는 사람이 많아요. ‘나는 할 수 있는데 어떻게 해서 못 해’ 그러면 ‘왜 못 하냐’고 하죠. 모든 걸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나는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해요.” ■ 누구의 어머니가 아닌 이름 세 글자로지난달 21일 오후 2시 전통문화체험관 전시실에는 정가매 작가 개인전을 축하하고자 관객 50여명이 찾아왔다. 이날 찾아온 진주여고 동기 동창 최숙희(67, 세종) 씨는 학창시절 정 작가가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은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평상시 하늘을 보면 친구 생각이 난다는 최 씨는 정 작가에게 응원의 말을 전했다. 최 씨는 “친구 집에 가서 작품들도 보고, 지난해 부산 벡스코 전시에도 찾아갔는데 그림을 야무지게 잘 그린다”며 “팍팍 밀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또 다른 진주여고 동기 동창도 이날 찾아왔다. 대학교에서 강의하다 은퇴한 김인선(67, 대전) 씨는 정 작가와 마찬가지로 그림 그리는 걸 취미로 하며 단체전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 김 씨는 “다양한 구름을 소재로 그림을 그려 자연 경치의 아름다움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어 좋았다”며 “친구가 제2의 인생을 정말 멋있게 사는 모습을 보며 기뻤고, 실버세대의 좋은 표본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정 작가의 딸도 이날 자리를 빛내주고 있었다. 옥천로컬푸드직매장 생산지원팀에서 일하는 김한지(29, 읍 수북리) 씨는 어머니가 집에서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일을 병행하면서 새벽에 일어나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며 자식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김 씨는 “(그래도) 꿈을 잃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려줘서 감사하다”며 “누구의 어머니가 아닌 자기 이름 세 글자로 있어줘서 고맙다”며 축하의 말을 남겼다.정가매 작가는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를 빗대어 첫 개인전을 연 소감을 전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밤마다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 정도로 이번 전시를 기다리기까지 얼마나 가슴 두근거렸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는 지난달 21일 개인전을 보러 온 관객들 앞에 서서 인사말을 건넸다.‘아시다시피 제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전업작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렸을 때 꿈이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림을 그리는 여자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살면서 정말 어려운 시간도 많았지만 작은 꿈을 놓지 않고 나름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제 남편이 기를 죽이지 않고 긴 세월을 함께 해줬습니다. ‘해봐, 해봐. 어렵더라도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 것이야.’ 그리고 오늘 제가 감히 여러분들 앞에 전시회를 열고 이 자리에 서게 됐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제가 살아온 곳은 경상남도 진주, 성장기는 서울에서 지냈지만 옥천에 산 지 30년이 넘어버렸습니다. 옥천이 제 고향이라 해도 누가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살았습니다. 저도 아스팔트 빌딩만 보다가 옥천에 살면서 이 자연 공간이 너무너무 아름다웠어요. 정말 길에 지나가다 풀 한 포기, 흔들리는 잎 하나만 보더라도 가슴이 떨리고 ‘언젠가는 저것을 그림으로 옮겨야지’ 하는 마음을 갖고 저는 이 옥천을 바라보며 그렸어요.저는 자연 친화적인 그림을 그리거든요. 제 눈에 펼쳐진 자연 자체가 그림이었고, 내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이 아름다운 옥천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어 옥천에 사는 것에 감사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제 작은 소망을 꿈꾸면서 그 꿈을 실현할 것이며, 아름다운 옥천에 많은 분의 성원에 힘입어 더 열심히 그리겠습니다. 제 작은 전시지만 보시면서 간접적인 자연으로 위로 받아 좋은 시간을 보내시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2-10-07 13:46
군 보건소 멘토 이수현 정신보건팀장이 간호행정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보건소는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기본적으로 보건행정과와 건강관리과가 있어요. 보건행정과는 주로 보건과 관련된 행정·회계 업무를, 건강관리과는 건강 증진 사업을 담당하고 있어요. 우리 지역은 군 보건소 외에도 8개 면에 보건지소가 하나씩 있고, 16개의 보건진료소가 있어요. 보건진료소는 간호사 혼자 근무하는데, 농어촌특별법에 의해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지역의 보건진료소가 간호사이면서 유일하게 진료권을 가지고 있어요. 보건행정과는 보건 계획, 지출 등 사무를 담당하는 보건행정팀, 만성감염병을 담당하는 감염병관리팀, 급성감염병과 코로나19를 담당하는 감염병대응팀, 의료기관, 의약품 판매업소 지도 점검을 담당하는 의약관리팀, 자살 예방 사업, 정신건강 등기 시설 관리 업무를 담당하는 정신보건팀으로 구성돼있어요.건강관리과는 운동, 흡연, 금주, 금연 관련 사업을 담당하는 건강증진팀, 환자 방문 건강 관리 사업을 담당하는 방문보건팀, 모자 건강 및 출산 장려 지원 사업, 영양 관리 사업, 암이나 희귀 질환 의료비 지원을 담당하는 모자건강팀, 치매 조기 검진, 치매 예방 관리 및 치매 환자 및 가족 지원 사업을 담당하는 치매관리팀으로 구성돼있어요.■ 간호행정가는 어떤 직업인가요쉽게 말해서 간호직 공무원이라 보면 돼요. 모든 간호사는 병원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잖아요. 간호행정가는 지역사회 간호사라는 이름 하에 지역사회에 있으면서 간호 행정을 하는 거예요. 임상간호사로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를 돌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보건소에 근무하는 지역사회 간호사는 필요하면 조례도 만드는 입법가이기도 하고 내가 일하는 지역 주민을 위해서 활동하기 때문에 지역사회 활동가로 볼 수도 있어요. 본인이 지역사회 간호사로서 소임을 다한다면 임상 간호사보다 일할 수 있는 영역이 많다고 생각해요.■ 간호행정가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임상에 5개월 정도 짧게 있었어요. 그러다 우연찮게 친구가 공무원 시험을 보자고 해서 시험을 봤는데 저는 합격을 하고 그 친구는 떨어졌죠. 제가 공직 생활에 있을 때는 요양병원이 없을 때에요. 그래서 지역사회 간호사가 감당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당시 노인 인구는 늘어나는데 인프라는 부족했기 때문에 방문간호가 최대 이슈였는데, 저 같은 경우 임상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제 스스로 한계를 느꼈어요. 그래서 연세대학교 간호대학에서 가정 간호 공부를 했어요. 또 시간이 지나서 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작되고 관리하던 어르신들이 요양병원으로 가시다 보니 가정간호에 대한 지역사회 요구가 적어지는 거예요.그래서 충남대학교 간호대학교에서 정신 간호를 공부했어요. 그래서 지금 제가 정신보건 팀장을 하고 있어요. 정신보건은 사회 환경이 급격히 변화하면서 정신건강관리에 대한 요구가 많이 커지고 있어요. 임상에도 정신과에 환자가 막 늘어나고 있지만 또 우리 지역사회에서도 할 일들이 되게 많아요. 그래서 저는 이 부분에 대해 다양한 사업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사실 제가 지역사회 간호사로서 꿈은 없었지만 막상 와보니까 직업을 잘 선택했구나 생각을 해요. 임상에서는 환자가 계속 바뀌잖아요. 여기는 내가 관리하는 대상자가 정해져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서 지표 변화를 할 수 있어요. 지역사회진단을 내려서 우선순위를 정하고 목표를 잡고 거기에 대한 사업을 추진하면 신기하게 지표가 바뀌어요.그런 부분에 있어서 얼마든지 지역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고 지역사회 주민의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어요. 필요하면 조례를 개정하고 그에 따른 활동 계획서를 만들어서 스스로 예산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주도적으로 가지고 실천할 수 있죠. 임상에서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간호행위를 하기 때문에 간호사가 독립적으로 뭔가를 수행하는 데 한계가 있거든요.■ 간호행정가가 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나요일단 간호사 면허가 있어야 해요. 그리고 간호직 공무원 시험을 따로 봐야 하니까요. 가장 중요한 건 내 주민에 대한 애정, 그리고 지역사회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해요. 여러 상황에 직면했을 때 긍정적이고 주도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 지역사회 간호사로 일을 한다면 보다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간호행정가라는 직업의 장점과 단점이 있다면장점은 간호 업무이기 때문에 베푸는 사업이에요. 베풀고 지원해주고 주민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거든요. 그런 부분들이 너무 좋은 거죠. 그리고 여러 가지 할 수 있는 영역이 많아요. 단점이라 하면 아무래도 일이 힘든 거겠죠. ■ 팀장님은 간호행정가로 얼마나 일하셨나요제가 1991년 8월에 공직으로 들어왔어요. 딱 31년이네요. 처음에는 단양에 있었고 1995년 7월25일 자로 옥천에 와서 지금까지 근무를 하고 있어요. 처음 발령을 받고 보건소에 보건행정 계장님이 저를 데리고 면사무소에 데려다주는 거예요.‘면사무소에서 간호사가 무슨일을 하지?’ 이해가 안 갔는데 갔더니 모자보건업무와 가족계획업무를 하더라구요. 예방접종도 하구요. 그때 ‘면사무소에도 간호사가 필요하구나’ 느꼈답니다.■ 일하는 동안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가정 간호 업무를 8년 하고 정신 간호 업무를 5년 했어요. 가정 간호 업무는 제가 매일 가정에 방문하면서 독거노인, 와상노인, 중증 재가장애인, 말기 암 환자분들을 돌봤어요. 예전에는 보건소에서 암환자의 통증 관리, 수액 관리까지 다 했었거든요. 정신 간호 업무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우리 지역 우울감 경험률을 낮추기 위한 대책을 세웠어요. 당시 세월호 사건이 있었던 안산시 다음으로 옥천군이 높았었거든요.독거노인 대상 정신건강상태 평가를 위한 전수조사부터 시작해서 숨어있는 우울증 환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따로 옥천군 특화를 위한 예산을 세워서 우울증 치료비 지원 사업도 진행했어요.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었지만 신기한 건 지표가 눈에 보이게 떨어지는 거예요. 우울감 경험률이 2014년 12.6%, 2015년 9.2%, 2016년 4.1%, 2017년 3.5%로 노력하는 만큼 수치로 보여주더군요. 흔히들 ‘자기 죽겠다는 사람을 어떻게 말려’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죽겠다는 사람은 없어요.누구나 살고 싶은데 방법이 없으니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지, 누군가 옆에서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이야기하며 그 순간 손을 내민다면 한 사람의 소중한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순간에 우린 보람을 느낍니다.■ 끝으로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임상 간호사도 좋지만 지역사회 간호사도 참 할 만한 것 같아요. 간호대학교 다닐 때는 잘 몰라요. 저도 그랬었거든요. 간호사로서 할 수 있는 영역들이 정말 다양하고 내가 지역사회 주민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다, 치료영역보다는 예방 및 재활 영역에서 활동을 하고자 하는 꿈을 갖고 있는 친구라면 기꺼이 지역사회 간호사라는 직업을 선택해서 보건소에 왔으면 좋겠어요.옥천군 보건소 전경. 이수현 정신보건팀장이 간호행정가 멘토로 참여했다.
인물일반 | 천수민 인턴기자 | 2022-09-23 13:37
땡볕이 극성일 때 어머니를 뵈었다. 능소화가 하나 둘 떨어져 내 발걸음에 밟힐까 사뿐히 내딛던 날에...그날은 염천임에도 절정의 가을날에 농익은 주황빛 과실을 맺어줄 감나무 잎도 반들반들 윤기가 흘렀다. 능소화와 감 열매, 둘이 짝꿍이라는 건 주황빛깔의 따뜻함으로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예쁜 집 2층에서 어머니가 나에게 손을 흔들고 계셨다. “여기에요”어머니의 80년 인생, 듣지 않고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2층에 오르자마자 인사보다 탄성이 먼저 나왔다. 눈앞에 펼쳐진 전망. 살아서 움직이는 나뭇잎들을 감싸 안은 짙은 녹음, 빈 운동장이지만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귓가에서 쟁쟁했다. 혼자 들떠서 “어머니 그림 같은 전망이에요” 라며 탄성을 내질렀다.맞바람 치는 바람결에 더운지도 모른 채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80년의 인생이 필름처럼 순식간에 휙 지나고 마음속으로 어머니 인생 이야기를 한 권의 책에 담아버렸다. 이 귀한 희로애락의 씨줄과 날줄이 엮인 인생사를 짧은 이야기로 만드는 건 나에게 고문이다.행복한 고민이지만 인생 선배님이 들려주시는 주옥같은 이야기 몇 편만 담아본다. 아, 아쉬워라!■ 수구초심, 고향으로 돌아온 9년차 옥천바라기나는 삼양초등학교 10회 졸업생이다. 유년시절은 신기리에서 보냈다. 서울에서 내내 살다가 9년 전 건강에 적신호가 오면서 인생의 말미라고 혼자 단정 짓고 옥천으로 내려왔다. 여러 가지 증상을 미루어 짐작하고 나만의 진단으로 암이라고 확정지었다.그 생각에서 멈추자 아이들에게 짐이 되느니 고향으로 내려와 여생을 보내다가 먼저 천국 여행 티켓을 끊은 남편 곁으로 떠나겠다고 옥천으로 주소를 옮겼다. 그 후로 9년, 나의 진단은 오판이었으며 나는 고향으로 돌아와 글도 쓰고 책도 내며 친구들과 즐거운 여생을 보내고 있다. 잘못된 판단이 불러온 유쾌한 결과물이다.■ 유년 시절 기억의 터, 습쟁이 사목제 보겡 솔고개해방 전에는 서대리 습쟁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어머니께서 딸 여덟은 낳았는데 언니 위로 둘, 밑으로 둘이 죽었다. 예쁜 짓을 할 때면 잃은 것 같다. 그리고 나를 낳았고 남동생도 보았다. 금지옥엽같은 삼대독자 외아들을 낳았는데 몸이 허약했다. 지금 일봉장 앞이 읍사무소였고 건너편에 주중철 의원이 있었다.병원 옆 일봉장 자리에 집이 나와서 타작하다말고 이사를 왔다. 집을 옮기며 좋은 일들이 있을까 했는데 동생은 세상을 떠났고. 그 후에도 시련은 많았다. 집집마다 사연 없는 집이 없듯이 우리 집도 어려운 고비를 하나씩 넘기는 중에 국수틀을 사서 공장을 했다. 손님도 많고 장사도 잘 되는데 6.25가 났다. 일곱 여덟 살 때쯤이었으니 갑자기 당한일이라 나는 그게 난리인지도 몰랐다. 피난길을 나서며 이사 가는 줄 알고 좋아라하며 떠났던 어린 여자아이였다.사목제 넘어 보겡이라는 곳으로 피난을 가려는데 사목제를 넘지 못하고 산 밑에서 하룻밤을 잤다. 여름이라서 이불을 안 가져 왔다고 엄마와 고모가 솔고개를 갔는데 군인들이 와서 모두 부산으로 가라고 산을 못 넘게 했다. 나는 겁이 나서 울고불고 보챘더니 산 넘어가면 개울이 있으니 건너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그 산 넘어 개울에는 피난민들이 이미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누가 누구인지 찾지도 못할 현장을 보니 무서워서 울며 헤매다 바위 위에 앉아 울고 있는데 친척 아주머니(이모할머니 며느리)께서 나를 알아보시고 왜 혼자 있냐고 해서 이야기를 하고 아주머니를 따라가 3일 만에 가족을 다 만났다. 그때 아주머니를 못 만났다면 아마 고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어른이 되고 그 분이 장에만 오시면 생명에 은인이라고 술 받아드리고 점심도 꼭 드렸다. 아주머니는 미리 피난을 가서 집을 얻어놓고 마중 나오신 것이다. 포화 속에 만난 은인이었다.1.4후퇴 때 또 피난을 갔다. 6.25 때는 한여름 땡볕, 1.4후퇴는 살을 에는 겨울 추위에 피난길은 더더욱 고행길이었다. 매서운 추위로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데 미끄러질까 바르르 떨면서 겨우 건너고 다 왔다 싶은 곳에서 얼음이 녹아 있으면 그만 발이 빠져버려서 꽁꽁 얼기도 했다. 유년 시절에 겪었던 피난길이라 두렵고 너무 힘든 길이었다. 피난 갔다가 겨우 집으로 돌아왔더니 우리 집은 피난민들이 차지하고 우리는 문간방에 기거하는 신세가 되었다.보국대에 끌려가셨던 아버지가 돌아오셔서 그들을 내보내고 우리는 다시 안방 차지를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엄마는 국수를 했다. 손님도 많고 돈도 많이 벌었다.내가 중학교 2학년 봄 가정 실습 때 선배언니가 국수를 하러 와서 내가 언니를 도와주다가 내 손이 국수 빼는 로라에 끼어 손가락이 갈리고 말았다. 순간 내 비명소리를 시작으로 어머니는 고모한테 나를 병원 데리고 가라는 말씀만 겨우 하시고 기절하셨다. 나는 왼쪽 손가락 세 개가 부서지는 큰 사고를 당했다.어머니는 내 손가락을 보시면서 이 손으로 나중에 시집을 어떻게 갈까 큰 걱정을 하셨다. 국수틀은 내가 다치고 나서 팔아버렸다. 부모님은 국수틀만 봐도 오금이 저렸을 거다. 그 대신 기름틀을 들여와 기름을 짜기 시작했다. 그때는 손으로 힘을 들여 기름을 짜던 때라 우리 집은 기름 짜는 손님으로 늘 북적거렸다. 부모님 사진과 내 결혼사진, 우리 두 아들과 함께■ 할머니의 고통, 슬픔과 연민을 배우다새벽 4시 통행금지 해제가 되면 기름 짜는 손님들이 오기 시작해서 12시가 되어야 끝이 났다. 어머니는 하루 3시간 밖에 못자고 계속 일을 해야했다. 어머니께서 힘은 들었지만 돈을 갈고리로 긁어모으던 때였다. 논도 사고 일본사람이 포도 농사를 짓던 땅을 사서 포도 농사를 했다. 어머니께서 기름집에 매달려 계셔서 살림은 전적으로 할머니가 하셨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가을이었다. 할머니가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한 채로 김장거리를 다듬으셨다. 편찮으신데 워낙 바쁘니까 말씀을 못하시고 이모할머니께 말을 했다. 그때서야 병원에 가보니 자궁암 말기라 했다. 그때는 암이라는 것도 몰랐을 때다. 의사는 별다른 치료 없이 잡숫고 싶은 것 잡수시게 하라고 했다. 할머니는 의사의 진짜 의도를 모르실 수밖에 없어서 “소화제라도 주며 보내지 가서 먹고 싶은 것 먹고 가라”고 했다며 서운해 하셨다.엄마는 할아버지 제삿날 준비를 하면서 나에게 “희숙아, 너를 공부 못 가르치면 네 동생들로 그 아쉬움을 풀 수 있지만 할머니를 잘못 모시면 엄마가 평생 한이 되겠다. 미안하지만 포도밭집에 가서 조용히 할머니를 모시고 살아라” 라고 말씀하셨다.나는 어머니의 그 말씀에 감동되어 그날로 할머니를 모시고 포도밭으로 이사를 했다. 자궁암은 냄새가 진동을 했다. 몸속에서 고름이 섞여 나오는데 생선 썩은 냄새보다 더 심했다. 고모님도 오시면 할머니 방에 들어가는 건 엄두도 못 내고 문밖 마루 끝에서 할머니 얼굴만 보고 갔다.청춘! 아름다워라나도 처음에 할머니를 모시기 시작할 때는 냄새를 참아내기가 너무 힘들었지만 내 코에, 내 몸에 할머니 냄새가 배어서 역겨운 냄새보다 가여운 여인, 불쌍한 할머니 생각만 났다. 어느 새 기력도 쇠하시고 곡기도 끊으셔서 아랫집으로 모시고 갔다. 택시도 없고 자가용도 없어 리어카에 요를 깔고 누워 가시는데 그 가여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앓이를 해서 그만 나도 병이 나고 말았다. 어른들은 할머니보다 내가 먼저 죽을까봐 걱정을 했을 정도였다 .할머니는 7월7석 날 저녁에 돌아가셨다. 나도 할머니 모시느라 몸에 진이 빠져서 문상 왔던 외사촌 오빠가 병원에 데려가 606호 주사를 한 병 맞혀 주었다. 그 즈음 항생제가 처음 나왔다. 할머니 돌아가신 후 빈소에서 삼년을 모셨다. 할머니 돌아가시는 시간과 함께 하면서 나는 스무 살도 되기 전에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소녀에서 어른으로 성장했다. 마음이 자라고 야무진 청년시절을 보냈다. 구멍가게도 열었는데 어린동생들이 줄줄이 사탕이라 과자 장사가 될 리가 없었다. 언제나 적자였다. 도둑도 많아 훔쳐가기도 했다.지금처럼 cctv가 있기를 하나, 들어와서 슬쩍 가져가면 도무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동생들도 나이 들어 “그 때 과자 우리가 먹어치워서 남는 거 없었을 거야” 라고 웃으면서 그 시절을 회고하기도 했다. 구멍가게를 접고 신신 미장원을 했다. 나도 싹싹하고 미용사도 솜씨가 좋아서 손님은 많은데 자격증이 없어서 신고가 들어와서 애석하게 가게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두 손 들고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어서 또 사업장을 열었다. 파리양장점을 열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웨스트원형 뜨는 것을 배운 것이 고작이었지만 손재주가 있었나보다. 눈으로 보면서 따라하면 됐는데 양장점도 제법 재미있을 만큼 되었다. 겁이 없이 단체복도 했다. 남이 안 하는 것을 하는 배짱도 있고 수완도 좋았다. 부모님의 영민함과 부지런한 성품을 물려받았던 모양이다.학창시절 ■운명의 갈림길, 결혼가게가 제법 잘되고 있는데 서울 사는 친척 동생이 장교로 임관되어 대전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아버지한테 인사를 왔다. 아버지께서 “너 있는 부대에 남자가 많겠구나. 네 누나 백만 원 하는데 오십 만원만 받을 테니 총각 하나 데려와라”고 하셨다. 다음 주에 그 동생이 정말 ROTC 3기 중위를 데리고 왔다. 그런데 동생은 가교 역할만 하고 빠지고 형부가 동서감 선을 본다고 들어서게 되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남편과 운명적인 만남, 결혼을 하게 되었다.남편은 대위 진급되어 예편을 해야 되는데 월남전이 장기화되면서 장교가 부족해서 예편이 미뤄졌다. 월남 패망 후 장교들이 속속 들어오는데 사고자, 무능자, 예편신청한자 순으로 예편을 시키니 남편은 때를 놓쳐 늦어졌고 직장 갖기가 어려웠다. 예비군 중대장으로 있다가 정년퇴직하게 되었다. 남편은 59세에 남보다 조금 일찍 세상을 떠나며 나는 아들 둘의 손을 잡고 인생길을 뚜벅뚜벅 걷게 되었다. ■ 고향, 새로운 안식처나는 지금 혼자다. 남편도 먼저 떠났고 아이들은 모두 서울에 살고 있다. 이웃의 할매들이 우리 집에 모여 밥상에 둘러앉아 정담을 나누고 서로 든든한 벗이 되었다. 혹여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자식보다 옆집 친구가 먼저 찾을 것이다. 아침부터 전화벨 소리가 울리며 나를 찾는 이들이 있어 하루가 즐겁다. 혼자 있어서 얻은 덤 같은 일상들이 또 숨어 있었다. 그래서 인생은 옳다 그르다 규정할 일이 아니다.그저 오늘 나는 나답게 살다가 잠들면 되고 다음날 눈을 뜨면 그저 감사하면 된다. 내 생명이 내 소관이 아닌 것을 부여잡고 안간힘을 쓴다고 달라지는 게 없다. 다 놓아주고 나는 그저 나이기로 한다. 혼자서는 자유로워서 기쁘고, 둘이면 둘대로 즐겁고, 셋이면 셋대로 흐뭇한 그런 날들이 여러 날 모이면 어느 날 마지막이 올테지. 그러면 그날은 또 가볍게 이별을 하면 된다.친구의 권유로 문학회도 들어서 글을 쓰고 그 글들을 모아 ‘붉은 노을에 쓰다’라는 제목의 책도 내게 됐다. 옥천신문의 실버기자단으로도 활동하면서 나의 이야기와 사색을 쓰고 있다. 언니도 가까이에 살고 있어 노년에 다시 찾은 내 고향 옥천은 나에게 새로운 안식처로 다가왔다. 잡초도 키우면 꽃이듯이 작은 하루하루도 어여삐 보면 아름다운 날들이다. 나는 시간의 소중함을 절실히 배운 사람이다. 매일 주어지는 24시간이 너무 귀하다. 그래서 아껴서 잘 쓰고 싶다. 오늘은 소금을 볶아서 예쁜 병에 담아둬야겠다. 우리 아이들이 오면 한 병씩 나누어 줘야지. 어디선가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새벽녘에는 한기가 들어 이불을 끌어와 배위에 얹어야 한다. 아, 가을이 깊어 가는구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인물일반 | 김경희 시민기자 | 2022-09-16 14:56
8월15일부터 8월19일까지 5일간 옥천FM공동체라디오에 교육 연수하였다. 취재와 라디오 중 선택하여 실습받을 수 있었는데 동대신문사는 취재와 기사 작성, DKBS는 라디오 실습을 하였다. 라디오 실습은 기획서와 큐시트, 대본을 모두 직접 작성하여 라디오 녹음까지 마치는 일정으로 진행되었다.8월15일 첫째 날 이른 아침, 옥천신문에 도착하자마자 마주친 것은 굳게 닫힌 문이었다. 매우 당황스러웠지만, 신문사 번호로 연락을 드리니 대표님께서 친절하게 잘 알려주셔서 금방 해결되었다.1일 차 교육 내용은 옥천신문과 옥천FM공동체라디오에 대해 간단한 소개와 구경, 5일간 진행될 교육 연수에 대한 설명 그리고 라디오 기획이었다. 옥천에 온 5명의 DKBS 국원들 다 같이 하나의 프로그램을 기획하였는데, 주제는 바로 ‘옥천 학생들의 고민 상담’을 해주는 것이었다. 옥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취지였다. 하지만 5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청소년들의 사연을 받아 라디오를 완성해야 하는 점과 옥천에 있는 학교가 개학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현 가능성이 작다는 조언을 받았다.5명의 국원과 하나의 프로그램을 기획했지만, 2일 차에 형식을 바꿔 각자 본인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되었다. 옥천FM공동체라디오 박진희 PD님이 DKBS가 1인 PD 체제로 굴러가는 만큼, 이곳에서도 본인만의 색깔을 담은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해주셨다. 처음에는 자신의 관심사를 주제로 잡아, 이야기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어렵지 않았다.평소 좋아하던 영화를 주제로 하여 기획서를 작성하였고, 그러던 중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국원이 있어 함께 하게 되었다. 주제를 합치면서 기획서를 다시 작성한 후, 큐시트를 완성하였다. 큐시트에 대략 어떤 소재에 대해 다루는지 간단히 명시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PD님에게 피드백 받고 나니 앞선 생각이 잘못되었으며 대본이 없을 때, 큐시트만 보고 진행할 수 있을 만큼 다루고자 하는 내용을 꼼꼼하게 명시해두어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옥천에 온 지 3일이 지났다. 2일 차에 기획하였던 프로그램 큐시트와 대본을 작성하였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의 관심사를 주제로 잡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는데, 막상 대본을 작성하자니 쉽게 써 내려가지지 않았다. 주제도 사회적인 문제로 잡아, 더욱 그랬던 것 같았다.사회적인 문제는 친구와 대화할 때도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인데 모든 사람이 보고 들을 수 있는 곳에서 이야기하려니 더욱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본을 작성하며 헷갈리거나 잘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인터넷에 검색해 찾아보며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지 않도록 하였으며, 불쾌한 부분이 없도록 여러 번 검토하였다. 예민한 주제를 다룬 만큼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나의 한마디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4일 차, 3일간 기획해온 라디오를 녹음하는 날이다. 녹음 전에는 마지막으로 대본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 시간을 가졌다. PD님에게 피드백을 받으면서, 대본을 작성할 때 애매하다고 느꼈던 부분들을 짚어주시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예시까지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하였다. 이 시간을 거치면서 더 나은 대사를 내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대본 수정 후 여러 차례 연습하다 보니 녹음 시간이 다가왔다.녹음하기 위해 스튜디오에 들어서니 긴장이 많이 되어 실수를 여러 번 하였다. 두 명이 하였는데도, 엔지니어링과 진행을 함께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리고 긴장해 말하는 속도가 빨라진 탓에 준비했던 대본이 동이 났다. 55분이라는 시간을 채우기 위해 횡설수설하여 아쉬운 점이 많았던 녹음이었다. 마냥 쉬워 보이던 것들이 어려워 보이고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이는 순간이기도 하였다.고3 시절, 단순히 팬심으로 매일 라디오를 챙겨 들으며 라디오 PD를 꿈꾸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번 기회를 통해 기획뿐만 아니라 진행까지 맡으며 어렵기도 하였지만, 경험을 쌓아 또 도전해보고 싶기도 하였다. 더불어 라디오에서 주는, 타인의 목소리로부터 받을 수 있는 위로와 선한 영향력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인물일반 |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 교육방송국 DKBS 이나연 | 2022-09-16 14:08
누군가 말했다. “그 조그마한 동네에 뭔 이야기가 있긴 있어?” 우리고장 이야기를 담는 잡지 ‘월간 옥이네’ 박누리(36, 읍 문정리) 편집국장이 지역 잡지를 만들며 가장 많이 듣는 말이라고 한다.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사람들은 서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서울로 향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누리 편집국장은 지역을 궁금하게 하는 ‘월간 옥이네’를 만들며 답한다. “서울에 10개의 이야기가 있다면, 지역에도 10개의 이야기가 있다”고. 농촌과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월간 옥이네’는 사회적기업 ‘지역문화활력소고래실’이 발행하는 잡지다. 농촌 지역의 옥천의 계절과 들녘 이야기, 잊혀져 가는 역사와 문화의 가치를 담아내며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는 없음’을 기억하고 있다.숨어있던 우리 지역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기록하고 있는 ‘월간 옥이네’ 박누리 편집국장은 청소년마을일터체험 프로젝트의 멘토로서 참여했다. 지역 잡지 만들기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를 문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고래실과 월간 옥이네를 소개 부탁드립니다고래실은 2017년 3월에 창립한 사회적 기업이에요. 바닥이 깊고 물길이 좋아 기름진 논을 뜻하는 순한글 ‘고래실’에서 이름을 따왔어요. 농촌지역의 문화를 한 번 비옥하게 만들어 보겠다는 포부가 담긴 이름이라 할 수 있죠.고래실은 옥천의 다채로운 문화콘텐츠를 발굴·활용해 농촌잡지발행, 복합문화공간운영, 출판, 지역마을여행, 디자인사업 등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옥천이라는 작은 지역 안에서 이 지역의 삶을 재미있게 가꾸어 갈 문화 자원들을 발굴하고 만드는 일도 하고 있어요. 이런 다양한 활동을 통해 농촌지역의 활기를 넣고, 지역경제, 공동체를 활성해 나가고자 합니다.월간 옥이네는 앞서 말한 고래실에서 발행하는 잡지예요. 옥천의 비옥할 옥(沃)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옥천에 사는 사람들, 또 다른 농촌 지역에 사는 사람들, 도시에서 흙을 찾는 사람들이 만든 잡지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우리가 사는 이야기, 그리워했던 이야기 같은 사소한 이야기를 소중하게 기록해 담고 있습니다. 유명 배우나 정치인보다 가까운 삶의 터전, 자연, 우리네 사는 모습을 담아 잡지로 집안 한쪽 책장을 가득 메우려 하고 있어요. 2020년부터 우수콘텐츠 잡지로 3년 연속 선정되고 있기도 합니다.■ 편집국장은 어떤 일은 하나요월간 옥이네는 월간지인데요. 이 잡지에 들어갈 내용들을 총괄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편집국장이기도 하지만, 기자로서 같이 취재도 나가고 기사 쓰는 일도 함께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번 호는 어떤 걸로 할지, 취재를 어떤 방향으로 할지 고민하기도 하고, 기사의 문장·구성 다듬기, 교열·교정도 하고 있어요. 편집 디자인도 어떻게 하면 더 좋을지 고민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잡지를 총괄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편집국장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월간 옥이네는 2017년에 창간했는데, 저는 당시 옥천 신문사에서 일했어요. 신문사에 일하면서 월간 옥이네 창간 준비위원 모임이 만들어졌는데, 창간 준비위원으로서 준비를 도왔어요. 창간 2년이 되던 2019년에 월간 옥이네로 와서 편집국장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문사 기자로 일하던 게 인연이 된 거죠.기자로 일할 때 지역사회에서 실질적으로 어떤 문제를 직접 해결해 나가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는데요. 고래실이 지역 문화를 알리기 위해 여러 가지 문화 콘텐츠를 만들고 기획을 하는 공간이잖아요. 그래서 이 일을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잡지 만드는 일을 하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기자가 되느냐, 편집을 하느냐에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요. 지역 이야기를 담는 지역 콘텐츠잖아요. 지역이 아니라 다른 콘텐츠를 발행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요. 지면에 담기는 사람이나 지역사회, 지역 공동체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과 호기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호기심이라는 것도 무작정 대상화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이 공동체는 어떤 역사를 품고 있을까? 이렇게 긍정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해요.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편집국장의 단점과 장점이 있다면편집국장의 장점과 단점으로 나누기 보다는 일을 하는 장점과 단점으로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책이나 교과서로는 배우기 어려운 것들을 지역에서 잡지를 만들면서 굉장히 많이 배운 것 같아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스스로 매 순간 배우는 게 많다고 느꼈어요.5년 전보다 지금의 내가 더 많이 성장해 있고, 더 좋은 사람으로 한 발자국 나아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단점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기는 한데, 일하는 동안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집에 있어도 일 생각을 하게 된다는 점? 집에 있어도 이렇게 기사를 쓰고, 사진을 찍으면 좋겠다. 라든가. 좋은 카페를 가게 되거나 하면 이곳을 우리 콘텐츠에 반영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하지만 일을 하면서 이런 게 자연스럽게 연결돼야 해요. 이런 걸 어려워하면 단점이 될 수 있겠죠. 이 일은 정말로 자신이 좋아해야 계속해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낀 순간은? 사실은 거의 매 순간 보람 있는 것 같아요.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서도, 취재할 때도 말이죠. 제 취재를 응원해주셨던 ‘내 얘기를 들어줘서 고맙다’ 이런 얘기해 주시면 너무 저도 감사하고 보람이 들어요. 또 돌아와서 기사 한 편을 다 완성했을 때? 어쨌든 그게 내 마음에 100 퍼센트 들지는 않더라도 한 편의 이야기를 완성했다는 거잖아요.그럴 때도 느끼고, 잡지가 나왔을 때 느껴요. 그리고 저희가 만든 콘텐츠를 보신 분들이 ‘기사 잘 봤다, 그 기사 어떤 게 되게 좋았다’ 이런 얘기할 때도 당연히 느끼고요. 사실 무엇보다 독자들 중에서는 월간 옥이네 기사를 보면서 본인이 전에는 알지 못했던 사람 사는 이야기를 알게 되어서 되게 좋았다는 얘기를 해주시는 독자분들도 계셨거든요. 월간 옥이네를 보면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알게 되었고, ‘내가 이해하게 되고 더 배려하게 되더라’ 이런 이야기를 해 주시는 독자분이 계셨을 때 더 큰 보람을 느끼죠.■ 이 직업에 적합할 것 같은 사람은?사람에게 애정이 있는 사람이요. 누구와도 잘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이 좋을 것 같아요. 근데 일하다 보면 성향이 바뀔 수도 있거든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활동을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을, 이 공동체를 더 재미있고 즐거운 곳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 같고요. 다음으로는 글을 쓰는 일이기 때문에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면 잘 맞을 것 같습니다.■ 지역 잡지 만들기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본인이 좋아하는 것과 내 주변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잘 살펴보고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무슨 일이든지 간에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도 제일 중요한 태도이기도 하고요.주변 사람들을 무조건 배척하거나 '저 사람은 나랑 좀 다른 것 같아' 이런 식으로 벽을 쌓는 것보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을까?,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이런 좋은 마음, 긍정적으로 궁금해하고 바라보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이 일이 지역에서 무언가 콘텐츠를 만들고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것이 하다 보니까 보람찬 일이기도 하거든요. 내가 사는 지역이 대도시가 아니더라도 그동안 자라왔고 나를 길러줬던 이곳에서 뭔가 재미있고 보람찬 일을 해보고 싶은 친구들이 있다면 다들 힘을 내시고, 언제든지 고래실의 문을 두드려 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물일반 | 권채윤 인턴기자 | 2022-09-08 1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