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1,961건)

화창한 날씨를 자랑하던 3일 오전 11시. 서대1리 한 농가에 복숭아 예비적과 작업이 한창이다. 이날은 모처럼 하늘이 돕는 날씨였다. 약 4천500평 규모에 복숭아나무들이 줄지어 있던 농장에 들어서자 청국장마냥 구수한 뽕짝 메들리가 들려온다. 시기상 잘 익은 복숭아를 만날 순 없었으나 손톱 크기만큼 자란 초록색 아기 복숭아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이제 바쁜 시기가 찾아왔다는 표식이다. 곧 있으면 사람들 불러 솎기 작업이 진행된다.몽실몽실복숭아농장. 서대리를 지나가다 보면 큼지막한 나무 입간판에 특이한 농장 이름을 만날 수 있다. 몽실몽실, 한 번 들으면 까먹기 어려운 이름이다. 주변에서 이름 예쁘다는 말 꽤 들었단다. 몇 년 전 농기센터에서 열린 강소농 마케팅 교육 때 농장 이름을 짓는 시간이 있었다. 그전에는 ‘누구네 농장’이라 불렸을 뿐 이름도 뭣도 없었다. 이름 지으려고 인터넷에 키워드를 검색하는데 향수니 옥천이니 다른 농장이 다 써서 없었다. 뭐로 지을까.어느 날 창가에서 하늘을 바라보는데 구름이 몽실몽실 떠 있더란다. 이거 괜찮겠다. 실은 몽실몽실 하면 사람들이 개를 먼저 떠오른다. 과일은 연관성이 그리 크지 않았다. 마케팅 교육에서 만난 한 교수는 ‘이건 안 된다’ 하고, 어떤 분은 ‘괜찮다’ ‘이거로 하라’는 반응이다. 그냥 바로 인터넷 등록을 해버렸다. 그때가 2013년. 인터넷에 몽실몽실복숭아농장 검색하면 딱 나온다. 20여년 넘게 서대리에서 복숭아 농사를 하는 김흥식(62) 천도순(62) 부부 이야기다.읍 서대1리에서 20여년 넘게 복숭아 농사를 짓고 있는 (왼쪽부터) 김흥식, 천도순 부부. ■ ‘꽃이 일찍 핀 것들은 다 날라갔어요’이들 부부는 조생종부터 중생종, 만생종까지 다양한 품종의 복숭아를 매해 출하하는 가운데 올해도 복숭아 농사에 매진하고 있다. 읍 서대1리 이장인 김흥식 씨는 ‘옥천 복숭아’를 매개로 주변 농가들의 상황을 파악하고 소통한다. 지난해 2월 복숭아공선출하회 회장을 맡아 내년 초까지 임기를 지낼 예정인 김 씨는 옥천복숭아사랑연구회 또한 소속돼 있다. 이원, 안내, 안남, 청산 등 옥천에 복숭아 농사를 하는 농가들과 자주 연락하며 어려운 점을 서로 나눈다고.“오늘처럼 날씨가 좋아야 하는데, 올해는 일기가 너무 잘못 했어요.”최근 들어 복숭아 농가들과 소통하는 네이버 밴드에서 ‘난리가 났다’고 한다. 실은 5월이 되면 솎기 작업을 바로 들어가야 하지만, 이들 부부가 그 시기를 조금 늦춘 것도 올해 복숭아 농가들이 겪는 고충과 맞닿은 지점이었다. 20여년 넘게 복숭아 농사를 해도 어느 해도 쉽게 넘어간 적이 없다지만 올해는 유독 심했다고. 이들 부부는 복숭아 수확량이 예년보다 약 20%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바로 ‘냉해’ 때문이다.읍 서대1리 이장이자 옥천군 복숭아공선출하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흥식 씨가 예비적과 작업에 한창이다.읍내는 그나마 나은 상황이란다. 공기가 더 차가운 안내나 이원 같은 면 단위는 냉해 피해가 더 심한 상황이라는 후문이다. 평년 기온과 달리 4월 며칠은 나흘 가까이 기온이 확 내려간 적이 있었다. 그때 꽃이 일찍 핀 복숭아나무는 냉해를 입어 얼어버린 것. 내일모레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어도 이들 부부는 걱정부터 앞선다. 낮과 밤의 온도 차가 크면 과일은 쉽게 성장할 수 없기 때문. 올해와 같은 상황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3년 그때와 비슷하다.“그래도 옥천은 판로가 잘 돼 있어서 좋아요. 어떤 지역은요. 판로까지 가려면 차 끌고 멀리 가야 해서 너무 불편하대요. 옥천은 얼마나 좋아요. 우리가 농사만 잘 지으면 돼요.”■ ‘농민 모두 행복하게 농사짓는 그날을 꿈꾸며’현재 옥천군 복숭아연합회에 가입된 회원은 약 900세대, 옥천군 복숭아공선회에 가입된 회원은 107명이다. 이들 부부는 오는 6월 말부터 9월 초까지 수확한 복숭아를 농산물산지유통센터(APC)에 출하할 예정이다. 농장에서 선별만 잘 이뤄지면 공선회에서 포장해주고, 도매시장도 가까우니 판매 걱정은 없다고. 다만, 올해 냉해로 전체적인 물량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들 부부는 옥천 복숭아 브랜드화, 농가 조직화에 힘쓰며 복숭아 수확량의 70~80%를 APC에 보내고 나머지는 택배 대행판매를 한다.“일요일은 비가 오면 안 되는데. 우리 아들내미 피로연 하거든요, 천안 아가씨랑. 그날은 안 돼! 날씨가 좋아야 혀.”농기센터에서 진행하는 복숭아대학 21기 교육과정을 듣고 있는 천도순 씨. 날씨가 좋아 농사가 잘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천도순 씨는 매주 수요일 오후 2시 농기센터에서 진행하는 복숭아대학 21기 교육과정을 들으러 간다. 매해 진행되는 복숭아 교육이지만 기상 상황이나 복숭아 트렌드가 해마다 다르기 때문에 귀 기울여 듣는다고. 예전에는 백도 같은 조금 무른 복숭아를 찾았다면 지금은 단단하면서 당도 높은 복숭아를 찾는 추세란다. 또한, 한 번 씻고 껍질을 깎지 않은 채 바로 먹을 수 있는 일명 ‘뺀질이 복숭아’를 젊은 사람들이 선호한다고. 20여년 넘게 시골에서 복숭아 농사를 하는 이들 부부는 블로그에 일상 글을 올리며 시대 흐름에 발맞춰 따라가고 있었다.복숭아대학 5기를 수료한 김흥식 씨는 다음 날 청산노인복지관에 간다고 한다. 농사로 바쁜 와중이지만 ‘옥천 달봉이 품바교실’에 참여해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거라고. 그는 달봉이 품바와 같이 이웃 간 소통을 바탕으로 다양한 지역 활동을 이어간다.지난 3일 김흥식, 천도순 부부가 운영하는 농장에 초록색 아기 복숭아가 열려 있다. 이달부터는 10~20년 경력의 이원 어머니들을 데리고 솎기작업에 들어간다는 김흥식 천도순 부부. 올해는 나무를 새로 심어 품종 갱신을 목표로 잡았다.“9일부터는 이원 아주머니들을 데리고 작업 일정을 배치했어요. 봉다리도 잘 싸주고. 아주 잘하셔요. 기술자들이에요. 이제 5월에 솎기가 싹 끝나면 복숭아 농사의 큰일은 거의 끝나는 거죠. 갈수록 농사하는 여건이나 환경은 어려운 거 같아요. 그래도 올해도 이겨내야지 않겠어요. 저희뿐만 아니라 우리 농민들 모두가 행복하게 농사지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서대리를 지나가는 도로가에 '몽실몽실복숭아농장' 입간판이 있다.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3-05-10 13:51

구순이 가까운 어머님은 기품 있고 아름다우셨다.‘’나 할 얘기도 없는데“ 유년의 기억부터 조근조근 되짚어 주시는 어머니는 철학자셨다. 기억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추억 하나하나에 그리움을 담아내셨다. 인정 많던 친정 오라버니의 죽음을 말씀 하실 때 끝내 울음을 터뜨리셨다. 가련한 사람들이 너무 많던 세대라 간간이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 때문에 지난 시절 이야기를 꺼내기가 두렵다고 하셨지만 이제 그리움이 되어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고 자조하셨다. 우리 삶의 무게는 평생을 통틀어 본다면 비등비등하지 않을까라고 단언하시며 그래도 인생은 살만하다고 후배들을 격려하시는 어머니.그리 억울해하지도 말며 너무 크게 기뻐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머니께 또 한수를 배웠다.오늘 기쁨이 나를 찾아왔다고 내일도 그러하다는 법이 없으며 오늘 슬픔이 나를 옥죈다 한들 내일도 내 목을 조르라는 법이 없으니 일희일비 하지 말며 나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자가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라고 일침을 놓아주셨다.  나의 영원한 사랑, 어머니■ 가족의 죽음은 비극이 아닌 견뎌내기 힘든 마음의 폐허부잣집은 아니었지만 두 끼는 너끈히 먹고 입성은 초라하지 않았다.나는 소정리에서 7남매 막내딸로 태어났지만 내가 죽향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우리는 4남매로 성장했다. 산에 냉이 뜯으러 갔다가 산불에 치마가 홀랑 타버린 언니는 치마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그 불이 붙은 치맛자락을 붙들고 집으로 달려오다가 화상을 입고 어린 나이에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떠났다. 나는 그날의 언니를 기억한다. 희미하게...선명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가슴을 쓸어내린다. 언니의 모습이 내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았다면 나는 아마 평생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겨우겨우 살아내야 했을 것이다.언니는 그날 치마만 벗어던졌어도 목숨을 구했을 텐데 그 무명치마가 뭐라고 어머니한테 혼날까봐 그 치맛자락을 붙잡고 울면서 집으로 달려와 온몸에 불이 붙어 명을 달리했다.나의 가장 오래된 어린기억의 끝에서 본 비극적인 장면이다.다섯 살 쯤 되었나 보다.옥천여중을 다니고 공부를 제법 잘했던 나는 사범학교를 나와서 대전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고등학교 교사인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만학도가 되어 박사를 마치고 대학에 교수가 되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남들 6년 만에 하는 박사과정을 2년 반 만에 마치고 귀국했다. 남편 말로 세 시간씩 자고 페이퍼를 많이 써서 학위를 일찍 받았다고 한다. 남편은 장학생으로 대학을 다녔다. 내가 일본을 가볼 수가 있나, 남편이 여비가 풍족해 나올 수가 있나, 우리는 대전 천동에 집을 얻어 나는 교사생활을 하면서 우리 5남매를 키웠다.교사월급으로 5남매를 키울 수 없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오빠 사업을 도왔다. 여장부 기질이 있어서 교직에 대한 미련 없이 사업가로 변신했다. 한창 석재 산업이 호황을 누릴 때 나도 산업현장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여성 사업가였다. 온 가족을 통곡하게 하며 돌아가신 오빠■풍파 없는 인생이 있던가. 때로는 휩쓸리고 때로는 넘어서며 걸어가는 길 교사시절 우리 별난 아들 막내 홍식이는 열 살 쯤 인가. 저녁 무렵이면 같은 시간에 돌아와야 하는 엄마가 안 온다고 가로등 불빛하나 없는 마을길을 쏜살같이 달려오다 논두렁 배수로로 떨어져 죽다 살아났다. 그날은 학교에서 회식이 있어 조금 늦었는데 그 새를 못 참고 나와서 그 칠흑 같은 밤에 3미터 아래로 떨어져 죽을 위기를 겨우 모면했다. 엄마 젖에 손을 얹지 않으면 4학년 때 까지 잠을 안자던 막내 녀석이다.마을 어귀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길, 아무리 깜깜해도 내 새끼는 알아보는 게 엄마다.어린 아이가 기절한 채 쓰러져있는데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세상에나 우리 홍식이가 아닌가. 얼른 들쳐 업고 집으로 달렸다. 그 밤에 병원에 갈 수도 없어서 한동네 살던 오빠가 군에서 위생병으로 복무했던 돌팔이 경험으로 우리 아들을 수술했다. 수술이란 말이 가당키나 하나. 그저 터진 살을 꿰매서 철철 흐르는 피를 잠시 멈추어 놓은 것이다. 아들은 정신을 잃고 기절한 상태라 천만다행이었다. 불에 칼을 소독하고 꿰매서 피는 간신히 멈췄다.한참 지나서 병원에 데리고 갔다. 첫 손길이 엉망이었던 터라 다시 병원에서 손을 써도 이마의 흉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네는 각자 자기 삶의 훈장이 있다. 우리 홍식이는 예순이 넘었는데 아직도 이마를 슬쩍 가리고 다니는데 그때 외삼촌이 돌팔이 의사 흉내 내면서 꿰맨 자국이 흉터로 남았다. 엄마 사랑이 유별났던 홍식이의 훈장이다. 볼 때마다 50년 전의 우리 막내가 떠올라 작년에 할아버지가 됐지만 지금도 막내아들 같다. 환갑이 넘은 아들이지만 팔십 중반의 나에게는 여전히 살가운 막내아들이다. 홍식이를 살려준 오빠는 산에 벌초하러 갔다가 피곤한길에 잠시 산소 옆에서 누웠는데 그날 밤 집에 와서 오한에 시달리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사경을 헤맸다.겨우 진정시켜서 다음날 병원에 갔지만 오빠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들쥐가 옮긴 유행성 출혈로 오빠는 먼저 이승을 떠났다.오빠 상여가 나가던 날은 마음의 지옥을 고스란히 맛본 날이었다.요령잡이의 구슬픈 소리, 어머니의 통곡소리, 아버지의 울음은 소리조차 삼켜버려 신음소리만 가슴을 후벼 팠다. 아버지의 울부짖음을 보면서 나또한 절규했다.아버지는 상여 나가던 날, 아들을 보낸 슬픔을 이길 수 없는 나머지 통곡하시며 주먹으로 흙 담벼락을 치면서 애간장 끊어지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하셨지만 도리가 없었다. 담벼락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고 아버지의 피투성이가 된 주먹을 보면서 그 슬픔이 조금은 와 닿았지만 아버지의 깊은 속내까지 헤아릴 수 없었다. 아버지는 오빠 돌아가시고 시름시름 앓다가 1년 후에 선산의 아들 옆에 나란히 자리했다. 죽은 자식에 대한 그 애통한 마음을 달래지 못하시고 생을 마감하셨다. 우리 가족 모두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애처로운 죽음이 너무 많던 시절이다. 홍식이는 인정 많은 아이라 자신을 살려준 삼촌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었다. 가족의 죽음은 슬픔이라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비극이다.이 모든 일들이 남편이 일본에서 유학중에 벌어진 일이라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몫이 너무 컸다. 편지로 슬픈 사연들을 보내면서 눈물로 편지지를 흠뻑 적시고 또 적셨다.■무탈한 일상은 당연한 것이 아닌 크나큰 감사남편이 돌아와 대학교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우리는 풍족하지 않지만 아이들 육성회비는 밀리지 않고 공부시키면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왔다. 겉보기에는 교수집이라고 그럴듯해 보여도 사람 사는 이치가 다들 속앓이 하나씩 하면서 사는 거라 나도 풍족하지 않은 삶에 불만은 없었다. 아껴 쓰고 다툼거리 적은 것으로 감사하면서 살아왔던 인생이다.나는 오빠의 사업을 돕고 있어서 오빠 사후에 일선에서 물러나 큰 아들한테 사업을 맡겼다.오빠가 하던 사업은 석재사업이라 내가 맡아서 하기엔 약간 거친 일이었지만 난 오빠 사업을 잘 꾸려나갔다. 지금 우리 장남 준식이가 석재일을 잘 해내고 있다.지금은 하향사업이지만 오랫동안 해온 일이라 조경까지 더불어 내실 있는 사업가로 잘 해내고 있다.남편은 청년시절 일본유학까지 다녀와서 교수로 정년퇴직했지만 이제 거동도 제대로 못하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지팡이 없이는 혼자 걷지도 못하는 힘없는 노인의 모습을 보노라면 세월이 무심하고 무상하니 참으로 야속하다.나도 거울을 들여다보면 얼굴은 골 깊은 주름으로 가득 찼고 손은 수분이 말라 핸드크림을 발라도 쩍쩍 갈라진다.오빠 석재일을 맡아서 한다고 나도 여장부처럼 일하느라 손등 거칠어지는 걸 보지도 못했다. 나이 드는 것을 마땅히 받아들이지만 청춘은 참으로 짧다. 곱던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갈 수 없어 나는 옛날 흑백 사진을 곧잘 들여다본다.우리 아이들과 찍은 나의 사진, 오래된 흑백 사진이지만 내 마음에 큰 위안이 된다.고무신 신고 소풍 길에 오른 우리 아이들과 찍은 50년 전의 그 사진이 그리움이 되고 추억으로 남았다. 삶은 계란, 칠성사이다, 엉성한 김밥. 모든 것이 어설프고 부족했지만 지금의 황홀한 문명보다 그 때의 흑백 필름이 더 사람다웠다. 아날로그라는 유식한 말을 쓰지 않아도 그때가 그립고 오히려 삶의 진중함도 더 깊었다. 지금은 넓지만 얕은 세상에 살고 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논할 수 없지만 그 옛날의 향수에 젖어들면 더 행복해지는 이유만으로도 추억은 그리움이 된다. 다 갖춰졌을 때의 풍족함은 앙꼬 없는 찐빵처럼 왠지 허전하다. 모자란 듯 어설픈 듯, 하지만 깊이가 있던 그 시절이 간간이 그립다. 대문 밖만 나가면 꽃이 절정이지만 내년도 내가 이 꽃 아래서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소망이라면 거동이 불편한 남편, 그리고 기억이 희미해지는 내가 우리 아이들 마음에 상처주지 않고 말년을 보내다 손잡고 아이들과 웃으면서 굿바이를 할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 내가 가장 예뻐하는 쌍겹벚꽃1967년 우리 아이들 소풍 때 함께한 가지 소원을 말하라 한다면 쌍겹벚꽃이 절정인 날 그 꽃을 눈에 가슴에 가득 담고 아이들과 작별하면서 한 마디 하고 떠나고 싶다.“너희들 덕분에 소풍은 즐거웠어” 라고 햇살이 잘 드는 나무그늘에 수목장을 해주라 미리 언지를 넣어두었다. 한 여름 날 잠시 오수(午睡)를 즐긴 듯 인생이 이리도 성큼 지나올 줄 짐작이나 했을까.먼 길, 돌아돌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와서 보니 한걸음에 온 듯하다.가슴 아픈 일들, 내 속이 새까맣게 타던 일들이야 있었지만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온 날들이라 마음이 한결 가볍다. 비록 큰 발자취를 남긴 삶은 아니었지만 내 삶의 단상에 그리움을 채집해 올릴 수 있으니 자존심을 지켰다. 여기서 하나를 더 바란다면 그때부터 헛된 욕심이다. 이만하면 족하고 또 족하다.  50년 전 친구들과  

인물일반 | 김경희 시민기자 | 2023-04-14 10:23

선수 출신이 아니지만 수영을 깊게 들어갔다. 물살을 가로지르는 짜릿함이 여느 운동과 달랐다. 옥천을 대표해 도민체전 수영 선수로 참가했고, 옥천수영장 강사로도 일했다. 취미로 수영을 접했는데 관련 자격증까지 취득해 전문성을 길렀다. 삼양초, 옥천중, 옥천고를 졸업한 조지훈(33, 읍 장야리), 조성훈(32, 읍 장야리) 형제 이야기다. 이들은 학창 시절 충북소년체전 태권도 대회에 참가하는 등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다.조지훈 씨는 수영 경력 15년차다. 지난해까지 옥천수영장 강사로 일했던 그는 올해 개인 사정으로 그만뒀다. 지훈 씨가 수영을 처음 접한 건 고3 수능 시험이 끝날 무렵이다. 2009년 당시 대전 용운동에 수영장이 생겼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옥천 수영 동호회 ‘샤크스’가 만들어졌고, 그때 지인 소개로 동호회에 들어갔다. 2012년 옥천수영장이 생긴 뒤 동호회 이름이 ‘수룡’으로 바뀌었고, 지훈 씨는 지금까지 동호회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예전에는 옥천 분들이 수영하러 대전에 나갔거든요. 이안경원 사장님이 ‘샤크스’를 추천해서 들어갔고요. 처음 제의를 받은 건 대회에 나가보라는 거였어요. 그때 영동에서 레인보우 수영대회가 첫 회 열렸거든요. 영동대학교(현 유원대) 안에 부설 수영장이 있었는데 젊은 네가 나가보라고 해서 합류했죠. 마침 집에 보일러가 고장 나서 따뜻한 물이 안 나왔던 시기라 샤워도 할 겸 운동하자는 생각으로 수영을 배웠어요.”■ 수영이라는 관심사로 하나 된 형제지난달 16일 옥천에 있는 한 카페에서 수영을 좋아하는 청년 조성훈(왼쪽), 조지훈(오른쪽) 형제를 만났다. 두 사람은 생활체육으로 수영을 접해 충북도민체전 수영 선수로 활약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했다.충남대 수학과, 스포츠과학과를 전공한 지훈 씨는 다방면으로 활동했다. 대덕테크노밸리에서 인공지능 프로그램 개발자로 일했고 학원 강사, 학교밖 청소년들을 만나는 방과후강사 활동도 했다. 또한, 생활스포츠지도사 자격증, 전문스포츠지도사 자격증, 생존수영강사 자격증 등 수영과 연관된 국가 자격증 6~7개를 취득해 전문성을 인정받아 대전시수영연맹 심판, 청주시수영연맹 이사로 일했다. 그는 동생 성훈 씨와 함께 충남경찰서 해경 수상구조사 소속으로 있다.“대학을 제가 12년 가까이 다녔는데요. 일을 하나만 한 적이 없었거든요. 지금은 인공지능 프로그래밍 관련 일을 하는데 언젠가 수영 쪽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겠죠. 수영강사가 전국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제의도 몇 번 왔고요. 수영은 준비물이 목욕바구니랑 수건, 수영복이 다예요. 운동하고 나서 깔끔하게 씻을 수 있고, 날씨와 관계없이 실내에서 즐길 수 있거든요. 혹시나 모를 안전 문제에도 대처할 수 있는 게 수영이 가진 장점이죠.”수영 경력 8년차인 조성훈 씨는 2019년 세종에서 수영강사를 시작으로 2021년부터 옥천수영장 강사로 활동 중이다. 성훈 씨가 수영을 배운 계기는 형 지훈 씨의 권유 덕이었다. 당시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뒤라 안전 문제에 사회적 공감대가 생기면서 수영을 배우기로 결심한 것. 당시 대학을 휴학하고 대전서 일했던 성훈 씨는 새벽 출근길에 옥천수영장, 퇴근길에 대전 용운동 수영장에 들러 수영을 배웠다.수영장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조성훈(왼쪽), 조지훈(오른쪽) 씨. (사진제공: 조지훈)“형한테 배우면서 수영장에 다녔죠. 새벽에 수영하고, 대전서 퇴근하면 저녁 9시까지 수영하고 집에 왔어요. 한 6개월을 했을 거예요. 제가 수영강사까지 한 건 취미가 도를 지나친 거죠. 수영강사 자격증도 형이 따러 가자고 해서 얼떨결에 딴 거고요.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많이 했어요. 운동을 하나 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거든요.”전북대 독어독문학과, 경제학과를 전공한 성훈 씨는 원래 금융권 취업을 염두에 뒀다. 운동을 업으로 삼는 건 생각도 못 했다. 취업준비생 때 국민은행 서포터즈 활동도 하고, 서울보증보험 계약직으로 6개월 일했던 그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다고 판단했고, 마침 세종에 수영강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접한 뒤로 지금까지 수영강사로 일하고 있다. 성훈 씨는 현재 옥천수영장에서 오후 조를 맡아 12시 전에 출근해 밤 9시에 퇴근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직장이랑 집이 가까운 걸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세종에 다닐 때도 옥천에서 차를 타고 갔는데 거리가 너무 머니까 직장을 옮겼던 거죠. 옥천도 그렇고 다른 지역도 수영 강사가 부족해요. 그래서 옥천에 왔을 때 세종에서 일했던 선생님들 몇 분을 모셔 왔거든요. 제가 소개한 분이 오시고, 그분이 여기 좋다고 해서 연결 연결로 오신 분도 있어요.”조성훈 씨가 수영대회에 참가한 모습. (사진제공: 조성훈)■ 생존수영 이론수업, 수영시설 보강 필요해해마다 도민체전이 열리면 옥천을 대표해 선수로 참가했던 두 사람은 각자 위치에서 아쉬운 점을 전했다. 지훈 씨는 본업이 따로 있는 선수들이 대회를 준비할 여건이 부족하다는 점을 말했고, 성훈 씨는 옥천수영장에 다니는 강습생들을 생각한다면 선수들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했다.“청주나 다른 지역에서는 선수 출신들을 데려오거든요. 옥천은 수영을 취미로 하는 직장인들이 나오시니까 경쟁이 안 되죠. 그런데도 열심히 준비해서 나오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지원이 조금 아쉽죠. 수영장 레인을 선수들이 훈련할 수 있게끔 빌려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눈치가 보여요. 선수들도 자기 시간을 내서 옥천군을 위해 뛰는데 수영장 이용하는 분들의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상황이죠.” (조지훈 씨)지난해 8월 옥천에서 열린 제61회 충북도민체육대회에 옥천을 대표한 수영 선수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조지훈)“저는 강사 입장이라 회원들 생각도 중요해요. 레인을 빼주면 선수들 입장에서는 좋죠. 그런데 안 그래도 사람이 많은 이 좁은 수영장이 더 좁아지거든요. 레인은 6개인데 사람마다 수영 실력의 편차가 있잖아요. 잘하는 사람, 중간 사람, 못하는 사람이 뒤섞이면 수영장 정체현상이 생겨서 그룹별로 나누는 게 좋거든요. 여기에 도민체전 선수들에게 레인을 따로 빼주면 그만큼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조성훈 씨)옥천뿐만 아니라 타지에서 수영계 일에 관여했던 지훈 씨는 옥천에 수영 시설이나 수업 면에서 보강이 필요하다고 봤다. 실전으로 익히는 수영도 중요하지만 생존수영을 이론으로 가르치는 수업이 뒷받침해야 한다고 봤다. 또한, 기록 스포츠인 수영 종목에서 스타트가 중요한데 스타트대를 설치하기 어려운 옥천수영장의 한계점 또한 짚었다.“스타트를 하려면 스타트대가 있어야 하거든요. 스타트대에서 뛰려면 깊이가 있어야 해요. 근데 너무 낮아요. 위험해서 설치를 못 해요. 시설을 한 번 하면 바꾸기 쉽지 않을 거예요. 만약 새로운 시설이 생기면 깊이가 깊어졌으면 좋겠어요. 선수들도 여기서 경기를 뛰면 깜짝깜짝 놀라요. 너무 낮으니까요. 그래서 수영장 깊이가 깊어졌으면 좋겠어요. 어떤 운동이든 스타트가 중요하잖아요.” (조지훈 씨)2019년 9월에 열린 제4회 옥천군연맹회장기 수영대회 모습. (사진제공: 조성훈)■ 어려운 여건 속 옥천 수영계의 버팀목성훈 씨는 달리고 뛰고 기부하는 ‘달땜크루’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달땜크루는 매월 셋째 주 토요일에 회원들이 모여 달리기를 하면 각자 뛴 거리만큼 기부금을 모아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하는 전국 모임이다. 가령 1km에 200원씩 기부금을 모으면 장애인거주시설, 미혼모시설, 보육원에 물품을 전달하거나 연말에 연탄봉사를 할 때 쓴다. 성훈 씨는 지난해 6월부터 한 달에 한 번 우리고장에 있는 영실애육원에 찾아가 화장지 등 생필품들을 기부하며 선행을 베풀고 있다.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수영강사 다음 일을 차차 계획한다는 성훈 씨. 이유가 있었다. 체온보다 차가운 물속에 오래 머무르는 수영강사 직업 특성상 체력적인 한계로 일의 수명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이란다. 나중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운동은 계속 할 거라는 성훈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조성훈 씨는 지난해 6월부터 정기적으로 영실애육원에 찾아가 기부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조성훈)“회원들은 수영을 더 배우고 싶고, 강사들은 더 잘 가르치고 싶을 거예요. 그런데 레인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 때문에 오해가 생길 수 있고, 강사 한 명이 여러 명을 가르치면서 생기는 서운함이 있을 거예요. 다 같이 잘하게끔 지도하고 있으니 너무 서운해하지 않으면서 수영을 즐겨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조성훈 씨)정든 옥천을 떠나 해외로 나갈 계획이 있는 지훈 씨는 향후 인공지능을 이용한 스마트팩토리 사업을 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그는 흙을 제조하는 아버지 일을 살려 사회적기업으로 나아가 지역 내 장애인, 청년들을 채용하는 제조업을 이끌고 싶은 꿈이 있었다. 지훈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도민체전에 나갈 선수를 구하는 게 항상 어려웠거든요. 직장을 다니며 운동하는 게 어렵잖아요. 그럼에도 도민체전에 참여하는 선수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하고요. 저희 옥천군수영연맹 류복현 회장님이 선수단 감독을 겸하거든요. 수영복도 사주시고, 수영장과 협의해 레인도 빌려주시고, 어려운 여건에서 사비를 털어 물심양면으로 챙겨주셨거든요. 옥천 수영발전을 위해 일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조지훈 씨)조지훈, 조성훈 씨가 도민체전에 출전한 옥천군 소속 선수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조성훈)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3-04-13 09:25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똑같은 일상은 없다. 사물도 그렇다. 일상에서 흔히 마주하는 사물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자태를 드러낸다. 관심을 두지 않아 모를 뿐이다. 보는 시선에 따라 달리 보인다. 정지된 시간의 기록을 남기고 들여다보길 반복한다. 사물의 본질과 존재를 묻고 가치를 찾는다. 새로운 영감을 주기도, 때론 향수를 자극하기도 한다. 어떤 순간이 그대로 멈춘 사진 속에 생명의 기운이 꿈틀거린다.이 광활한 우주에서 지구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한 줌 먼지와도 같다. 싱싱한 야채든, 시든 야채든 존재의 가치를 주고 싶었다. 익을 대로 익어 나무에 걸려있던 석류. 잠깐 보거나 먹고 끝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속이 알알이 나온 석류를 보며 여성, 태아 그리고 자궁을 떠올렸다. 모과, 레몬, 피망, 토마토···. 가만 놔두면 점점 익어간다. 꺼뭇꺼뭇 곰팡이가 끼거나 말라비틀어지기도 한다. 그 모습이 예뻐 보였다. 너무 헛되게 바라보지 않았으면. 시선과 인식은 그렇게 확장한다.옥천사람 서상숙(53) 작가가 지난 2월 한 달간 옥천에서 세 번째 사진전을 구읍 교동갤러리카페에서 열었다. 옥천교육도서관 맞은편에 ‘사진카페 2월’을 운영하는 서 작가는 일상에서 흔히 보는 과일, 꽃, 유리병 등을 독특한 시선으로 담아내 사진 작품 50여점을 내걸었다. 전시 주제는 ‘오브제(Objet)’. 오브제는 물건이나 사물을 뜻하지만, 사진으로 남겼을 때 예술품이 될 수 있다는 회화적 언어이기도 하다.■ ‘허투루 말고 자세히 바라보세요’“사진은 눈으로 보고 마음이 움직여 머리로 찍는 행위예요. 머리는 프레임(Frame, 대상을 바라보는 틀)으로 어디를 넣고 뺄 건가를 판단하는 거고요. 눈에 들어왔을 때 찍을까 말까 결정하는 건 내 마음이 울려야 하는 일이죠. 저는 멋진 풍경이 아니어도 휴대폰으로 매일 찍어요. 아침에 집에서 도립대를 지나 사진카페 2월에 오잖아요. 이 골목에 들어오는 시간이 10시10분, 10시5분, 10시15분 조금씩 다르거든요. 시간에 따라, 날씨에 따라 그림자 위치나 풍경이 달라지는 모습을 마주하게 되죠.”서상숙 작가는 지난 2월 한달간 구읍 교동갤러리카페에서 사진전을 열었다. 전시 주제는 '오브제(objet)'. 서 작가가 운영하는 사진카페 2월에서 그를 만나 전시 이야기와 어렸을 적 카메라를 접한 과정을 들었다. 서상숙 작가는 사진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인 포토아카데미 ‘동그라미’에서 수강료 없이 사진 수업을 하고 있다. 사진을 이야기하고 공부하는 ‘동그라미’ 회원 중에는 철학을 전공하거나 공업 디자인에 일하는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있다. 서 작가는 모임 때마다 기술적인 면보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히는 차원에서 과제를 내주고 있다. ‘허투루 보지 마세요, 자세히 바라보세요.’ 그가 회원들에게 강조하는 메시지다.처음 사진을 접한 계기는 우연이었다. 어렸을 때 집에 있던 농 위에 필름 카메라를 발견하면서부터다. 그때 농 위를 왜 뒤졌을까. 그 카메라를 못 봤다면 사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 이게 뭐야?’ 물어보니 부산 이모가 줬다고 한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아버지도, 그 이전에 할아버지도 젊었을 때 카메라를 만졌다는 걸 고모에게 전해 들었다. 대학 전공으로 사진 한다고 했을 때 할머니 말씀하시길. ‘저 상숙이 저거 차~암 피는 못 속이네.’필름현상 같은 개념도 몰랐다. 그땐 설렘 하나였다. 옥천여중 인근에 있던 사진관에 들락날락하며 사진을 현상하고 인화했다. 중학교 때부터 사진을 취미로 삼았다. 무용하는 친구 데리고 학교 강당에서 찍어도 보고, 이론 책도 찾아봤다. 고3이 되자 유아교육, 사진 중 후자로 마음이 기울었다. 무작정 들이댔다. 지망하는 대학교 사진학과 사무실에 편지를 보냈다. 고3 여름방학 때 대학교 조교를 만나 재학생 언니를 소개받고 입시 준비하는 꿀팁을 들었다. 결국, 재수를 선택했지만.집 근처 나무에서 열린 석류를 보며 서 작가는 여성, 태아, 자궁을 떠올렸다.싹이 난 감자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사람 얼굴이 보인다는데..곰팡이가 피고, 말라 비틀어졌다 할지라도..■ 세 딸을 키우면서 놓지 않았던 꿈재수할 때가 되어서야 대전에 사진학원이 있다는 걸 알았다. 주머니 사정은 넉넉지 않았지만 그땐 간절했다. 옥천과 대전을 오가며 한 달 15만원 사진 강의를 들었다. 딱 한 달 수강료만 내고 학원 조교로 있으면서 잔심부름하며 입시반 수업을 들었다. 취미 사진과 입시를 목표로 한 사진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대학 때보다 재수할 때 더 많이 찍었을 정도였다. 현상과 인화의 과정이 늘 기다려졌다. 그만큼 절실했다. 경일대 사진학과에 합격했다.광고기획사에 가고 싶었지만 인연이 닿진 않았다. 대학 졸업하고 재수할 때 다녔던 사진학원에서 강사로 일했다. 그리고 서울에 한 홍보대행사에 다녔는데 그때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고향 옥천에 돌아왔다. 큰애가 7살, 둘째가 6살 때 막내가 태어났다. 셋째를 가졌을 때 여자의 삶이 이대로 끝나나 싶었다. 아이들도 잘 키우고 싶고, 유아교육도 해보고 싶었다. 보육교사 1년 공부한 게 자산이 됐다. 당시 문정아파트 1층 두 개 방을 얻어 살림집을 오가며 어린이집을 8년 했다.몇 년간 사진의 공백이 생겼다. 다시 카메라를 잡은 건 어린이집 그만두고 카페 ‘카푸치노’를 할 무렵이었다. 옥천군영상미디어센터에서 사진 강사로 3~4년 일하고, 문화예술교육사 공부를 병행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원 없이 했다. 그만큼 갈등이 따라왔다. 그동안 잘 챙겨주지 못 한 남편이 눈에 밟혔다. 미안한 마음이 불어났다. 끼니도 챙길 겸 남편 사무실 옆에 ‘샘쓰키친’ 가게를 차려 도시락을 팔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다시 갈증이 생겼다. 사진 작업실을 해보고 싶었다.유리병 표면에 묻은 물기까지 담아냈다.유리병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인다.사진 수업만으로는 타산이 안 맞으니 카페를 같이 생각했다. 마침 시내 한자리에 임대가 붙어 있었다. 오랜 시간 비어 있던 공간인데 그날따라 달리 보였다. 그날 저녁 전화해서 다음 날 공간을 둘러봤다. 여기는 암실, 저기는 이야기 나눌 공간, 여기는 교육하는 공간. 그림이 딱딱 그려졌다. 계약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2020년 2월 ‘사진카페 2월’이 열렸고,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사진 전공하는 막내딸과 함께사진카페 2월도 언제 그만둘지 모른다. 흑백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는 작업을 하려고 들어왔건만 첫해만 잠깐 했다. 갈증이 생기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걸 이제는 안다. 현상한 작품을 얼마나 흔드느냐, 약품을 어떤 배율로 하느냐에 따라 사진의 농도, 깊이가 달라진다. 그 손맛을 느껴본 사람들은 안다. 흑백 작업을 향한 갈망은 남아있지만 지금도 좋다.“손님들이 계속 오는 게 고맙죠. 학생들이 가끔 ‘사장님, 여기 오래오래 했으면 좋겠어요’ 하니까 감사하고요. 근데 우리 딸들이 그래요. 오는 학생들한테 제발 말 좀 걸지 말래요(웃음). 애들이 부담스러워한다고요. 근데 학생들이 너무 대견하고 예쁜 거예요. 쉬는 날에 공부하러 오면 계란 삶은 거나 빵 하나라도 주거든요. 저라면 공부 안 하고 누워서 TV 보고 있을 텐데 말이죠. 학생들이 건네는 말 한마디가 저한테는 보약이 되더라고요.”큰딸, 둘째 딸, 막내딸, 원투쓰리는 다 개성이 뚜렷하다. 그중 막내(옥유경 씨)가 성격 면에서 빼닮았다. 돌아보면 나도 남편도 맞벌이 하는 상황에서 막내딸을 잘 보살피진 못 했다. 물질적인 건 부족함 없이 챙기고 싶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사진에 관심을 둔 막내에게 카메라를 주고 마음껏 찍게 했다. 중학교 올라가서는 자기가 필름 카메라에 컬러필름 끼우고 사진 스캔도 알아서 척척 했다. 내심 내가 못다 한 꿈을 이뤄주길 바랐다. 막내도 같은 대학 사진영상학과에 다니고 있다. 지난해 11월 옥천에 열린 시니어모델 패션쇼 ‘농촌 속 오래된 미래’에 막내와 사진 촬영을 같이했다.“이날 샌드위치랑 샐러드 단체 예약이 있었는데 그걸 다 취소하고 딸이랑 같이 갔죠. 언젠가 딸이랑 같이 작업해보고 싶은 게 꿈이었거든요. 주문한 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날 몇 십만원 어치 매출을 포기했죠. 근데 사진을 고를 때 딸이랑 관점이 많이 다르더라고요. 같이 사진을 해도 서로 다르게 보는 거죠. 포토샵으로 보정하는데 ‘엄마, 반반 하자?’ 이러더라고요(웃음). 그래도 딸이랑 사진 작업을 같이 했다는 데 의미가 있는 거 같아요.”존재와 시간을 사진에 담아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서상숙 작가. 그는 일상의 흔한 대상, 하찮은 사물에도 관심을 두고 사물의 본질과 존재에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지난 2월에 열린 사진전은 이미 끝났지만, 서 작가는 오는 10월 포항에서 사진전을 계획 중이다. 또한, ‘동그라미’ 회원들과 함께 조만간 옥천전통문화체험관에서 사진전을 열 계획이다. 옥천에 정 붙이며 사는 그의 사진을 향한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이번 전시 포스터는 경산에 있는 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하는 서상숙 작가의 막내딸이 제작했다.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3-03-31 15:19

봉사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봉사하는 날이 기다려졌다. 지인들과 어디 놀러가는 일정도 뒤로 미뤘다. 내 시간을 투자하는 일이지만 기꺼이 썼다. 언제부턴가 봉사가 삶의 큰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사람 만나는 일이 즐거웠다. 정성껏 만든 빵을 드렸을 때 행복한 미소를 짓는 분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덩달아 좋았다.시설에서 만난 한 어르신이 대뜸 빵이라고 불렀다. ‘선생님, 왜 빵이라 부르세요?’ 물어보면 ‘선생님, 빵 만들어줬잖아. 그래서 빵이라 하는 거야’ 그러신다. 그분 얼굴을 기억도 못 하는데 그분은 날 기억하고 있었다.원생들은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에 만났던 사람을 기억한다고 한다. 가장 행복한 시간을 같이 있어준 사람으로 남는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봉사를 하면 행복하다.지난 9일 동이면에 있는 한 카페에서 옥천다드림봉사단 이경자 회장을 만났다. 이 회장은 우리고장에서 전통발효식품 강사, 어르신 생활관리사로 활동하고 있다. 대전다드림봉사단 팀장으로 활동했던 이경자(54, 동이면 적하리) 회장이 지난 2월부터 ‘옥천다드림’이라는 이름의 봉사단체를 만들어 힘찬 도약을 했다. 봉사단에서 8년간 활동한 이 회장은 옥천과 대전에 있는 장애인 시설, 요양원 등 어려운 이웃에게 찾아가 빵 만들기 봉사에 참여했다.■ ‘봉사하는 즐거움을 나누고 싶었어요’“옥천다드림봉사단을 만든 이유는 옥천 분들에게 빵을 더 드리고 싶어서예요. 2년 전 옥천에 수해가 났을 때 저희 봉사단이 빵을 3천개 만들어서 수해지역 이웃들에게 무료로 드렸어요. 정말 좋아하셨거든요. 그런데 저희는 옥천 봉사단이 아니기 때문에 회원이 더 안 들어오더라고요. 좋은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이번에 옥천군자원봉사센터에 가입해서 옥천다드림이라는 분점을 낸 거죠.”이경자 회장은 3개월에 한 번씩 영실애육원, 청산원, 영생원, 부활원, 요양원 등에 찾아가 빵을 전달했다. 대전에 세 번 봉사하면 옥천에 한 번 봉사를 나갔다. 그만큼 봉사단에 옥천 회원 수가 상대적으로 적어 옥천에 자주 올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를 아쉬워한 이 회장이 이번에 옥천다드림을 만든 것이다. 매달 회비 1만원을 걷어 운영하는 다드림봉사단은 옥천 회원이 기존 4명에서 현재 20명으로 늘었다.“회원이 더 늘면 옥천에서 더 많은 봉사를 할 수 있겠죠. 처음엔 지인 소개로 참여해서 요양원에 갔었거든요. 너무 좋더라고요. 나도 빵을 만들고 봉사를 해야겠다 싶었어요. 옥천 분들은 같이 가자고 해도 대전이 멀어서 안 가시더라고요. 보통 둘째, 넷째 주 토요일마다 장애인 시설에 빵을 드렸거든요. 예전에 제가 장애인분들 데리고 여행 가는 봉사도 했는데요. 예전에 봉사했던 그 시설에 빵을 만들러 간 적이 있었어요. 그때 기억이 좋아서 계속 다녔죠.”다드림봉사단 활동에 참여한 이경자 회장이 회원들과 함께 빵을 만들고 있다.■ 복지와 음식의 관심이 배움의 열정으로보은군 장안면이 고향인 이경자 회장은 속리초등학교, 보덕중학교를 졸업한 뒤 의정부에서 산업체부설학교를 나왔다. 친오빠를 고등학교 보내겠다는 집안 결정 때문이었다. 그가 옥천에 정착한 지는 30년. 의정부에 살던 중 아버님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홀로 사시는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이 고향에 돌아가 어머님을 모시겠다고 하면서 옥천에 오게 됐다.당시 옥천은 길 포장도 안 돼 있어 흙길을 다녀야 했다. 시내로 나가는 버스도 아침, 점심, 저녁 때 뿐이었다. 택시비 아낀다고 버스 시간이 될 때까지 몇 시간 기다리는 경우가 예삿일이었다. 아들 유치원 다닐 때 집이 물에 잠겼던 일을 떠오르면 지금 옥천은 도시나 다름없다. “옥천에 살면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죠. 지금도 만나는 아기 엄마들이 학교에서 뵀던 분들이에요. 지금 동이에서 탁구동호회로 만나는 분들 보면 다 귀농하고 귀촌하신 분들이거든요. 예전부터 살던 사람은 저밖에 없더라고요.”지난달 11일 다드림봉사단이 우리고장 내 장애인·요양 시설에 빵을 전달한 뒤 기념촬영을 했다.보건소에서 독거노인생활관리사로 일하며 어르신들을 돌보고 있는 이경자 회장. 2018년 충북도립대에 입학해 사회복지학, 식품학을 전공하며 배움을 찾았다. 그때 같이 다녔던 동문들과 함께 노래봉사, 빵 만들기 봉사에 참여하곤 했다. 이 회장은 전통발효식품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발효식품을 배운 지는 2년 됐어요. 된장, 고추장, 수제청, 막걸리, 김치 등 발효식품 관련된 건 다 해요. 어른들이 만든 된장을 먹어보면 너무 짠 거예요. 조금 덜 짜게 만드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대학교 들어가서 배우면 낫지 않을까 싶어서 시작했죠. 학교 졸업하고 대전에 있는 전통발효식품 학원에 다니면서 관련 자격증도 다 땄어요.”■ 봉사는 돈보다 사람으로 채우는 일이 회장은 지난해 죽향유치원 원생들에게 메주를 보여주며 전통발효식품의 가치를 알렸다. 메주 냄새를 맡아본 아이들은 똥 아니냐고 천진하게 물어봤다. ‘아니야, 이게 맛있는 된장이 되는 건데 냄새는 똥 같아도 나중 되면 맛있는 음식이 되니까 다 만들고 냄새 맡아보자.’ 처음에는 믿지 않는 반응이었다. 시간이 지나 아이들이 신기해하면서 맛있다, 맛없다며 표현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고.발효식품에 관심이 있는 이경자 회장이 직접 담은 된장을 보여줬다. 그는 향후 청성면에 전통발효식품 교육장을 세울 계획이다. 청성초등학교 4~6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된장, 고추장 만드는 수업도 했었다. 아이들이 참 똑똑했다. 호기심이 많은지 깊숙한 걸 물어봤다. 수업 때 모든 과정을 하긴 어려워 50일이 지나 장을 담을 때쯤 다시 문자를 줬다. 메주하고 숯을 택배로 보내 만드는 법을 하나하나 알려줬다. 이 회장은 향후 청성면에 전통발효식품 교육장을 세울 계획이다.“전통식품은 살아있는 음식이라 곰팡이가 나요.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저어야 하거든요. 하얀 곰팡이가 났을 땐 먹어도 돼요. 그런데 새카만 곰팡이가 나면 버려야 해요. 새카만 곰팡이가 난다는 건 그 사람이 게으르다는 거예요. 얘를 안 쳐다봤다는 거예요. 옛날 어른들이 항아리를 닦아주잖아요. 그냥 닦아주는 게 아니라 얘가 잘 있나 바라보는 거죠. 시중에 있는 된장, 고추장은 상하지 않거든요. 앞으로는 살아있는 걸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이경자(오른쪽) 회장이 회원들과 함께 만든 빵들을 어떻게 배분할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봉사단 활동부터 어르신 말벗을 해드리는 생활관리사 그리고 전통발효식품 강사까지 다방면으로 지역을 누비고 있는 이경자 회장. 아이들부터 어르신까지 두루 사람들을 만나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파하는 그의 활동이 기대된다.“봉사는요. 돈만 있어도 되지 않고요. 사람이 있어야 해요.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되더라고요. 회원이 없어서, 사람이 없어서 봉사를 해준다고 해도 빵을 못 만든 날이 있었거든요. 그땐 정말 아쉬웠어요. 이렇게 좋고 맛있는 빵을 옥천 분들에게 많이 주고 싶다는 생각이 커서 옥천다드림을 만든 거고요. 제 직업이 어르신들 돌보는 일이잖아요. 제가 더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커요. 옥천에 많은 분이 옥천다드림에 오셔서 같이 활동했으면 좋겠어요.”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3-03-23 21:16

지난 3월10일 오전 10시 안남면 종미리에 있는 농장에 한 청년이 땀 흘려 일하고 있다. 그는 약 650평 규모 농장에 심은 꽃들이 잘 폈나, 병해충은 없나 살펴본 뒤 오전에 수확을 마칠 계획이다. 지난해 8월 온실 세 통을 설치하고 10~11월에 심은 꽃들을 약 5개월이 지나 출하 작업에 한창이다. 이 꽃들은 경매장에 가거나 온라인 판매가 이뤄진다. 옥천, 대전 꽃집에도 나간다. 최근 로컬푸드 교육을 마쳐 로컬푸드 꽃 납품도 성사했다.안남에서 ‘청춘꽃팜’이라는 이름으로 화훼농장을 운영하는 김지훈(29, 읍 마암리) 씨는 지난해 9월 옥천에 정착했다. 그에게 옥천은 친숙한 지역이다. 아버지 고향은 군서면, 어머니는 안남면 화학리로 어릴 때부터 부모님 따라 옥천에 자주 왔다. 귀농 준비를 위해 여러 지역을 알아보던 중 부모님 고향이면서 정감이 가는 옥천, 그것도 안남면에 꽃 농사를 하기로 결심했다.“화훼는 두 가지가 있어요. 분(盆)에 심어 놓는 ‘분화’ 그리고 제가 하는 것처럼 잘라 쓰는 ‘절화’인데요. 힘이 조금 들긴 하지만 저는 자르지 않고 뽑는 방식이에요. 실은 여러 사정이 맞물려 출하가 조금 늦어졌어요. 스토크, 프리지아를 키우고요. 스토크는 7만주가 심겨 있죠. 여름작기로는 겹해바라기, 유색해바라기, 냉이초를 키울 건데요.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스토크, 프리지아 두 가지는 계속 갈 거 같아요. 저는 향이 있는 꽃을 좋아하거든요.”안남면 종미리에 있는 화훼농장에서 일하는 청년농부 김지훈 씨를 만났다. 지난해 9월 부모님 고향인 옥천에 정착한 지훈 씨는 스토크, 프리지아를 재배하고 있다. ■ 스토크·프리지아 산지 ‘해남’에 가기까지대전에서 태어나고 경기도 안양에서 나고 자란 지훈 씨는 화초를 키우던 어머니 모습을 보고 자라 일상에서 식물을 만났다. 그렇지만 부모님 모두 농사일을 하진 않아 농사에 있어 자수성가형에 가깝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특성화고에 다니며 화훼장식을 배웠던 지훈 씨는 꽃과 조경에 관심이 커져 전북 전주에 있는 한국농수산대학교 화훼학과에 진학했다. 꽃을 보면서 문득 근본이 무엇인지, 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고 싶었다고.“청년 농부들은 보통 부모님이 닦아놓은 기반을 그대로 이어가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시행착오가 많았죠. 그렇지만 농고, 농대를 졸업해서 어떻게 보면 성골이에요(웃음). 처음엔 화훼가 아니라 조경을 하고 싶었어요. 농원이나 개인 주택 설계하는 일이 좋았거든요. 자격증도 땄는데 활동적인 제 성향과 안 맞았어요. 진로를 바꾸면서 찾은 게 화훼죠. 저는 조경이나 플로리스트(florist, 화훼장식가) 일이 멋있어 보였어요. 직업을 고를 때 첫 시작은 다들 그렇잖아요.”대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그는 1년간 현장 실습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훈 씨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호주에서 호접란을 분화로 키우는 법을 익혔다. 한국에 돌아와 6개월을 더 배우며 호접란 창업을 꿈꿨다. 현실의 벽을 느꼈던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설비는 현재 농장의 3~4배 더 들었다. 졸업 학기에 호접란 논문을 쓸 때 ‘도저히 타산이 안 맞겠다’고 판단했다. 지근거리에서 봤던 농장들은 굉장한 시간과 돈을 쏟았다는 사실을 알았다.김지훈 씨가 온실에 심은 꽃들의 상태를 확인하며 출하 작업에 한창이다.첫 직장으로 식물 스타트업, 마지막 직장이 화훼유통이었다. 1년 정도 서울 양재동 유통센터에서 경매 낙찰 받고, 온라인 판매하는 일을 했다. 그곳에서 꽃다발 잡는 요령, 꽃을 키우는 법, 유통까지 두루 습득했다. 이제 내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안남에 화훼농장을 짓는 시간 동안 1년 가까이 지인이 있는 전남 해남에 왕래했다. 현재 키우고 있는 스토크, 프리지아 산지가 주로 경기도 이천과 해남에 있어 재배하는 것부터 단계별로 배웠다.■ 옥천에서 만난 화훼농가 선배귀농인“제 인생에서 화훼를 하지 않았던 시간이 딱 한 번 있어요. 제가 옷을 좋아해서 서울 청담동에서 수트 맞춰주는 일을 했거든요. 길게는 안 하고 1년 안 되게 했는데 ‘내 길이 아니구나’ 싶어 식물로 돌아왔죠. 그때 경험이 좋았던 거 같아요. 농업은 생산물을 갖다 파는 일이지만 이 브랜드를 얼마나 가치 있게 만드냐도 중요하잖아요. 수트, 의류 쪽은 그런 게 잘 돼 있어요. 소비자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판매 쪽에 특화된 일을 했던 게 도움이 됐어요.”옥천에 지훈 씨처럼 절화 농사를 하는 농가가 한 곳 있다. 동이면 남곡리에 태양농원을 운영하는 조승범 대표다. 지훈 씨는 이번에 처음 프리지아를 재배하는 과정에서 오랜 경험이 있는 조 대표에게 조언을 구했다. 수확한 꽃들을 꽃차에 싣고 양재동 공판장으로 가는 과정에서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만나는 사이라고. 타지에서 꽃 농사를 하는 대학교 동창과도 자주 연락하지만 지역에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훈 씨는 큰 힘을 얻는다.연분홍 스토크.연보라 스토크.흰색 스토크.그는 지난해 상반기 청년후계농에 선정돼 소기의 꿈을 이뤘다. 매달 나오는 영농정착지원금을 기반으로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청년을 농촌에 데려오기 위한 정책으로 유의미한 일이지만 지원기간 3년은 짧은 것 같아 아쉬움을 느낀다. 시설 설치하고 꽃 재배하는 과정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고, 앞으로 시설적인 면에서 충원해야 할 일도 많다.한창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꽃 수입이 막혀 내수가 활발해진 시기가 있었다. 지훈 씨는 당시 꽃 가격이 올라간 게 농민 입장에서 그저 웃을 일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졸업식, 어버이날 같은 특별한 날이 다가오면 가격이 2~3배 뜨지만 그 시기를 지나면 가격이 곤두박질치며 다시 내려가기 때문이다.■ “어머니 고향 안남은 달랐어요”“제 생각은 그래요. 호주에 살 때 느꼈지만 꽃을 사는 문화가 일상화했으면 좋겠어요. 호주는 일반 슈퍼마켓에도 꽃을 팔아요. 길거리 좌판에도 팔고요. 아무렇지 않게 사가거든요. 가격도 적당한 가격에 자주 파니까 시민들은 꾸준히 살 수 있어 좋고요. 일정한 가격으로 유지하는 게 소비자나 농가 입장에서 좋지 않을까 싶어요.”프리지아.지훈 씨는 안남에서 화훼농장을 운영하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농산물을 1차 생산해서 판매한다는 자부심이었다. 인구수나 면적으로 볼 때 옥천의 작은 면 단위에 속하는 안남면을 귀촌 지역으로 선택한 것도 자긍심으로 남는다. 배바우작은도서관도 있고, 등주봉도 있고, 아기자기한 것들이 있는 안남은 다른 지역과 다르다는 것. 일반적인 농촌 지역보다 분위기가 젊고,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있어 좋았다고.일과가 끝나면 옥천에서 배드민턴 동호회 활동도 하고 수영이나 낚시, 캠핑을 즐기며 에너지를 채운다는 지훈 씨. 옥천에 화훼 농업이 더 활성화해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체험 농가로도 활용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저는 이제 시작이니까요. 계획적으로 움직이려고요. 현재 온실이 세 통이잖아요. 임차를 하든 토지를 구매해서 1천평 정도 늘릴 예정이고요. 온라인 사업을 더 확대할 거예요. 고객들은 ‘구성을 다채롭게 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많이 하시거든요. 보통 중도매들이 여러 농가에 있는 꽃을 사서 파는 형태인데 저는 중도매 느낌을 농장 자체에서 내는 게 꿈이에요. 화훼 시설을 더 지어서 여러 품종을 키우며 늘려가고 싶어요.”새벽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지훈 씨는 오전에 수확을 끝내면 주문 받은 꽃들을 오후에 차례대로 보낸다. 보통 6시에 일과가 끝나는데 날이 더워지면 8~9시까지 야간작업을 할 예정이다. 출근 시간 또한 앞당겨진다.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3-03-23 21:16

초심을 잃고 싶지 않았다. 술을 빚는 즐거움도 일상처럼 반복되면 타성에 젖곤 한다. 전통주는 자기만족으로 밀고 올라가는 뚝심이 있어야 지속한다. 처음 술을 빚었던 그때 설레었던 감정을 되살리고 싶었다. 동기 부여는 누가 대신해주기 어렵다. 만족스러운 시골 생활, 그럼에도 안주하지 않는 도전자의 자세가 때론 필요하다.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 하나 던져본다. 떨어진 자리에 생긴 작은 물결이 파동을 만들고, 그 파동은 단조로운 삶을 바꾸는 활력소가 되어 돌아온다.우리고장에서 향수을전통주교육원을 운영하는 김기엽(59, 군북면 국원리) 소장에게 지난 2022년은 특별한 한 해였다. 이웃동네 영동에 있는 유원대학교 와인사이언스학과에 진학해 젊은 학생들과 동고동락하며 1학년을 지냈다. 내년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는 느지막하게 학교에 다니는 만학도로서 하나라도 배워오자는 의지로 학구열을 높였다. 발효주인 와인 특성상 효모를 통해 술이 만들어지는 원리가 우리 전통주와 일맥상통해 참고할 점이 많았다고.김 소장에게는 또 하나 특별한 소식이 있었다. 농림축산식품부 지정 교육기관인 한국가양주연구소가 주관하는 궁중술빚기대회에 출전해 지난해 11월26일 은상을 수상한 것. 우리나라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회에 총 54개팀이 참여한 가운데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의미 있는 결실을 보며 일의 자부심도 찾고 옥천이라는 지역을 전통주 관계자들에게 알렸다. 대회 주제는 누룩을 사용한 ‘곡주’로 맑은 술 2리터(l)와 곡주 제조 시 사용한 누룩 100g 이상을 제출하는 방식이었다.지난해 11월26일 한국가양주연구소가 주관한 궁중술빚기대회에서 향수을전통주교육원 김기엽(가운데) 소장이 은상을 수상했다. 왼쪽은 한국가양주연구소 류인수 소장, 오른쪽은 김기엽 소장의 아내 김양희 씨.김기엽 소장이 지난해 궁중술빚기대회 때 받은 상을 들어보이고 있다.■ “대상 탈 때까지 하겠습니다”“지난 4월부터 만들기 시작해서 숙성 과정을 거쳐 4~5개월 정도 걸렸죠. 지정하는 술이 해마다 달라요. 올해는 곡주, 지난해는 연잎으로 만드는 연엽주, 그전에는 과하주를 했어요. 올해는 누룩으로 만드는 술을 심사했는데요. 부드러울 연, 삼킬 탄의 연탄주(軟呑酒)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서 부드러운 석탄주를 제출했어요. 보통 석탄주라 하면 14~16도 정도 나오지만 제가 만든 술은 10~12 정도로 누룩 향을 최소화해 목 넘김이 굉장히 부드럽게 만들었죠. 호응이 나름 괜찮았어요.”같은 대회에서 재작년에는 최우수상, 지난해는 입상, 올해는 은상까지 성취감을 얻어낸 그였다. 김 소장은 지금 하고 있는 전통주 일에 관한 교류의 장을 넓히면서 전통주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이번 대회에 쏟아냈다. 수상하던 날 “선생님, 3년째 수상하셨네요”라고 격려하던 한국가양주연구소장에게 “대상 탈 때까지 하겠습니다”라고 의지를 내보였던 그다. 이번에 출품한 연탄주는 같은 레시피로 술을 빚어 오는 설 즈음에 판매할 예정이라고 한다.군북면 국원리에 있는 향수을전통주교육원 앞에 대회 수상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5년 전 군북면 국원리에 터를 잡은 김 소장은 고향이 대전이다. 강릉에 있는 공군제18전투비행단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있는 아들, 충남대 약학과에 재학 중인 아들을 둔 김 소장은 자녀들이 독립할 즈음 서울 생활을 접고 옥천에 왔다. 여행사에서 2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고 그 뒤로 보험 업계에서도 일한 그는 아내 김양희 씨와 상의 끝에 옥천에 오게 됐다. 그는 옥천에 오기 전인 2013년부터 전통주를 본격적으로 다뤘다. 원래 발효나 효소 쪽에 관심이 있어 김치, 된장도 다루다가 전통주에 점점 빠져들었다.■ 전통주 일거수일투족이 담긴 기록물“다 일맥상통해요. 발효라는 게 효모라는 생명체가 움직여주면서 생기는 화학 작용이기 때문에 거의 똑같거든요. 요즘에는 많이 안 하지만 식사할 때도 반주를 해요. 그 정도로 술을 사랑합니다. 시골생활이라는 게 주말이 되면 더 바빠져요. 도시 사람들은 ‘주말 되면 뭐하지?’ 이러잖아요. 우리는 워낙 일이 많다 보니 주말에 집안일도 하고, 가게 일도 하고, 술도 만들고, 더 바쁘죠. 저는 길 막히고 사람 많은 도시생활에 염증이 있었어요. 어느 날 공황이 갑자기 오더라고요. 이제는 알겠데요. 시골과 서울에 차이를요. 좋은 거 먹으면 나쁜 음식, 좋은 음식 알듯이 숨 쉬는 것에서부터 느껴져요. 옥천 생활이 참 좋습니다.”김기엽 소장이 전통주 빚는 과정을 정리한 공책들을 보여주고 있다.그가 운영하는 전통주교육원 안에는 술이 익어가고 있었다. 발효실에는 누룩 향 가득한 특색 있는 술들이 저온 숙성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김 소장은 술이 커가는 모습을 아이들 벽에 키 재듯 기록을 남겨놓는다. 시간, 온도, 냄새, 변하는 모습 등등. 그가 애지중지하는 전통주 기록 노트에는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숙성 발효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과정이 남다른 재미가 있다고. 술이 담긴 이 많은 항아리는 새벽 4~5시에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인 결과물이었다.김 소장이 빚은 전통주를 마시면 사람들 반응이 대개 ‘우와’ 하는 반응이란다. 그만큼 외지에서 전통주교육원을 찾으러 오는 단골들이 생겨났다고 그는 자부한다. 전통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외부 강의도 다녔다. 몇 달 전에는 청주시 오창읍에 있는 농업기술원에서 괴산, 옥천, 보은 등 도민들을 대상으로 자그마치 6시간 특강을 뛰고 왔다. 그때 수강생들에게 보여줬던 발표 자료에 학교서 배운 내용을 요긴하게 써먹었다.좋은 선생 밑에 좋은 제자가 있다던가. 3년 전 옥천군농업기술센터에서도 막걸리, 전통주 교육을 3일간 진행했다. 그때 학교 퇴직한 부부가 동반해 강의를 듣고 갔다. 그분들이 충남 아산에서 진행된 전통주 대회에 나가 동상을 타고 상금 100만원을 받았다. 그 부부가 우리 가게에 찾아왔다며 김 소장은 멋쩍게 이야기한다. 감사 인사를 한다고 떡을 해서 찾아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전통주의 맛과 가치를 알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민들레 홀씨처럼 뻗어나가는 모습에 그는 보람을 느꼈다.향수을전통주교육원 내 발효실에서 삼백주, 과하주 등이 담긴 항아리들이 저장돼 있다. 항아리 뚜껑을 열자 저온숙성으로 발효가 진행되고 있는 전통주가 보인다. ■ 22학번 새내기 만학도, 배움의 길 잇다지난해 수시로 유원대학교에 들어갔다. 시간도 그렇고, 돈도 그렇고, 늦깎이로 학교에 들어간다는 게 쉽지만은 않은 결정이었다. 실은 전통주를 배울 수 있는 전문 학교가 많지 않은 가운데 옥천과 가까운 학교에서 술을 이론적으로 배울 수 있다는 점에 마음이 이끌렸다고. 배움의 열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항상 전통주를 빚을 때 어딘가 한계점을 느꼈던 그였다. 깊이에 더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아쉬움이 늘 있었다.학교에 다니면서 수업을 들으니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현장 실무 경험이 있는 교수님 수업을 통해 도움을 얻었다. 오길 정말 잘했구나. 책이나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전문적인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실험실 데이터 만드는 방법, 효모 개체수 등 학원에서 배울 수 없는 영역이었다. 하나라도 더 배우자. 노트로 빨간 글씨로 메모하고 머릿속에 바로바로 입력했다. 감사하게도 전통주 특강을 하자고 학교에서 제안도 왔지만 지금은 마음만 받는 게 도리라고 봤다.김 소장은 전통주마다 밑술과 덧술, 원주거르기 과정이 언제 이뤄졌는지 종이에 적어 구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술을 배우는 학교가 이 대학이 유일할 거예요.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요. 막내아들이 97년생이거든요. 그런데 지금 들어오는 학생들이 2003년생인가 그럴 거예요. 아들보다도 더 어린 친구들이잖아요. 복학생 한 명이 ‘선생님, 형님이라 해도 되나요?’ 그래요. 아유 무슨 형님이야, 그냥 아저씨라 부르던가 원장님이라 불러라 했죠. 학교 교수님은 원장님 이렇게 부르고, 선생님 이렇게 부르는 학생들도 있고, 호칭이 그렇게 돼 버렸죠. 부담이 없지 않아요. 모범이 되어야 하고, 자식뻘 되는 학생들이잖아요. 적어도 꼰대 소리는 듣지 말자는 조심성이 생겨요. 세대간 제가 잘 모르는 영역은 아들하고 상의하고 그런답니다.”김기엽 소장에게 전통주는 활력소, 설렘 같은 존재였다. 술을 담아놓고 3개월, 5개월, 길게는 1년 2년 정도 되는 과정에서 자식처럼 키우는 느낌, 첫 술을 먹었을 때 그 기대감. ‘맛은 어떨까?’ 그런 성취가 크게 다가온다. 그에게 전통주는 죽을 때까지 끌고 가고 싶은 무언가였다. 오죽하면 큰아들에게 퇴직하고 나면 같이하자고 제안도 했을까. 그만큼 애착이 크다. 뒤를 이어 할 사람이 없다는 게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지만 김 소장은 지금 옥천에서 좋아하는 전통주를 계속한다는 점에 만족하고 있었다.“이번 대회가 사실은 벼르고 벼른 사람만 내는 대회였어요. 그만큼 내공 있는 사람들이 출품하는 대회인데 한 해 마감을 정말 잘했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한편으로는 다행이고요. 저는 전통주 시장이 블루오션이라 생각하거든요. 전통주 문화가 우리 옥천에도 많이 활성화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전통주교육원 옆 카페 '정원'에서 판매되고 있는 전통주.군북면 국원리에 있는 향수을전통주교육원에서는 전통주 관련 체험 프로그램 및 전통주 판매를 진행하고 있다. 찹쌀막걸리는 1리터(l) 9천원. 과하주, 석탄주, 삼백주는 375미리리터(ml) 기준 각 3만원, 2만8천원, 3만5천원이다.문의 : 010-9276-5707 (향수을전통주교육원)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3-01-04 09:13

‘물꼬 보러 갈 사람?’ 여름만 되면 아버지가 이른 새벽 4시에 마당에서 부른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었다. 6남매 중 막내딸이 자동으로 튀어 나간다. 지금은 수로가 다 돼 있지만 옛날에는 윗논에서 아랫논으로 물을 받았다. 저수지에서 내려온 물이 윗논에 차면 아랫논에 물길을 텄다. 논에 물이 너무 많거나 적을 때를 대비해 주변을 살피러 다녔다.아버지와 손 붙잡고 논둑길을 걷던 옛 시절, 어느 순간 그리움이 됐다. 모가 사람 키만큼 자랄 때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풍경. 그 상쾌함은 아침에 걸어본 사람만이 안다. 고향이 그리웠을까. 정말 오고 싶었다. 고향 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야 돌아왔다. 기나긴 시간이 걸린 만큼 기쁨도 컸다.지난 12월13일부터 18일까지 옥천전통문화체험관에서 짚풀공예가로 활동하는 이준희(59, 동이면 평산리) 씨 개인전이 열렸다. 주제는 <짚과 풀로 여미다>. 짚풀과 왕골, 사초 등을 이용해 우리 조상들이 일상생활에 쓰던 생활용품을 전통과 창작 사이를 오가며 구현해냈다.지난달 13~18일 옥천전통문화체험관에서 '짚과 풀을 여미다'는 주제로 짚풀공예 전시가 열렸다. 이번 전시는 짚풀공예가 이준희 씨가 만든 작품들을 선보였다. 짚풀로 만든 바구니, 짚신, 의상 등 다양한 공예품들이 놓여 있다.짚풀로 만든 돗자리, 소입마개, 빗자루, 소품걸이 등이 진열돼 있다.짚풀로 만든 의복부터 짚신, 항아리, 소입마개, 빗자루, 쌀단지, 장구, 소품걸이 등 어르신들에게는 추억거리, 젊은 세대에게는 우리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이준희 씨는 지난해 3월23일부터 5월8일까지 우리고장에서 짚풀공예를 하는 양해용 씨와 함께 전통문화체험관에서 전시한 바 있다.■ 짚풀공예, 손에 놓을 수 없는 것“옛날 생활용품으로 쓰던 물품들이잖아요. 똬리는 집에서 못 만드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여미다’는 말은 정돈했다는 의미예요. 짚과 풀이 막 흩어져 있잖아요. 손으로 직접 새끼를 꼬고 작품을 만들어서 여미다는 단어가 어울리겠다 싶었죠.”이준희 씨는 동이면 평산리가 고향이다. 동이초 36회, 동이중 6회, 옥천여고를 졸업한 그는 타지 생활을 하다 고향에 오고 싶은 마음에 2013년부터 옥천에 올 준비를 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2021년 9월 고조, 증조, 할아버지, 아버지가 대대로 살던 평산리 집에 돌아왔다. “정말 운이 좋았던 사람”이라고 웃으며 말하는 그의 얼굴에 동심을 간직한 어른의 모습이 보였다.“옥천에 오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구나, 가볼 곳이 참 많구나 싶어요. 어릴 때는 교통이 좋지 않아서 어디를 가볼 수 없잖아요. 이제야 구석구석 가보니까 옥천에 많은 문화재가 있고, 가볼 곳이 많다는 걸 알았죠. 제가 옥천 홍보대사예요. 만나는 분마다 옥천을 많이 알리거든요. 가식적인 게 아니라 우러나온 마음이에요. 요즘 들어 옥천에 태어나서 자랐다는 게 굉장히 좋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하네요.”짚풀공예가 이준희 씨가 3개월 간 공들여 제작한 짚풀 재질 의상 옆에 서서 기념촬영을 했다. 그는 평산리 인근에서 벼농사를 지어 나온 짚풀을 이용해 작품을 만들었다.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에게 옥천만큼이나 짚풀을 향한 진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짚풀은 절대 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라는 말을 은연중에 자주 꺼냈다. 그는 지인을 통해 짚풀로 계란꾸러미를 만들었던 체험을 계기로 짚풀공예 매력에 빠졌다. 그때가 2016년, 짚풀공예와 연을 이은 지 어느덧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충남 아산에 있는 이충경 씨를 비롯해 서정희 허윤도 김주원 씨 등 여러 선생님에게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배웠다.■ 갓 지은 밥 향이 추억을 자극하다이번 짚풀공예 전시가 더 특별하게 다가온 것은 그가 평산리에서 직접 농사지어 나온 짚풀을 재료로 썼기 때문. 남편과 함께 벼농사한 지 3~4년차. 짚풀공예하는 사람 중 본인이 직접 농사지은 짚풀을 쓰는 사람이 0.1%도 안 될 거라고 그는 말한다. “한 번 가까이서 냄새를 맡아보세요.” 코를 가까이 대자 공예품에서 밭 냄새, 갓 지은 밥 향이 난다.“제 좌우명이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예요. 저는 재미없는 일은 바로 그만두거든요. 이게 재밌다고 하면 빠져요. 얼마 전 옥천FM공동체라디오에서 아자학교 고갑준 선생님과 인터뷰할 때도 그 얘기 했거든요.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정말 좋아서도 미치고요. 그 일에 저처럼 빠져서 사는 사람이 있을까, 그 생각이 들 정도로요.”이준희 씨가 관람객에게 짚풀로 엮어서 만든 작품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다.전시 도록을 보면 그의 이름 옆에 ‘명인’이라는 칭호가 붙어 있었다. 알고 보니 2021년 한국문화예술명인회에서 짚풀공예 명인 4호로 선정된 것. 명인 1호는 그가 선생님이라 부르며 존경하는 짚풀공예가 이충경 씨다.때론 느슨하게, 때론 힘 있게. 바른 자세로 허리를 펴고 앉아 완급을 조절하며 새끼를 꼬는 게 중요하다는 이준희 씨. 명인이라는 호칭 때문이 아니라 어느 한 분야에 깊게 빠진 한 예술가의 집념과 열정이 하나하나 작품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닭 지키라 했더니 친구 집 놀러간 막내딸공예품 하나하나에 짚풀에 담긴 조상들의 삶과 숨결이 느껴진다. 지구온난화, 플라스틱 남용 등 환경 문제가 거론되는 현시대에 짚풀공예가 갖는 가치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전통문화를 좋아해 처음엔 인성·예절 강사를 했다. 여기에 즐거움을 가미할 방법을 찾다 전래놀이를 배우면서 대전놀자학교를 차렸다. 그는 교장으로 있으면서 전래놀이 수업을 했는데 짚풀공예로 관심 분야를 옮겨와 대전 선화동에서 우리전통문화체험원이라는 이름의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현재 옥천작가회의, 옥천향토사연구회 회원으로도 활동하는 이준희 씨. 옥천을 이야기할 때 돌아가신 부모님과 살았던 옛 시절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별 이불을 덮고 잔 소중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아버지 옆에 있으면 유쾌했어요. 저는 막내딸이니까 엄청 예뻐했거든요. 우리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오면 꼭 엄마까지 다 들어오라고 해요. 그러면 ‘팥죽할머니와 호랑이’ 얘기를 해주는 거예요. 그 옛날이야기를요.”아버지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어제까지만 해도 정답고 농담도 잘 하는 아버지였는데 혼낼 땐 눈물 쏙 빠지게 혼냈다. 교육적으로 혼내야 할 때, 칭찬해야 할 때를 잘 구분하던 아버지, 우리 6남매 모두가 아버지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입을 모은다.“아버지가 점쟁인 줄 알았어요. 막내다 보니 아버지, 어머니, 저 이렇게 잠을 자잖아요. 저녁 되면 아버지가 맥을 짚어요. 짚으면서 네가 하루 동안 뭐 했는지 다 보인데요. 진짜 그런 줄 알았죠. 오늘은 뭐 했고, 뭐 했고, 줄줄 읊으세요. 진짜인가 싶어서 ‘내가 뭐 잘못했나’ 반성도 했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가 고자질한 거예요.”아버지가 부드러운 심성의 사람이라면, 엄마는 반대로 강인한 사람이었다. 초등학교까지 졸업한 엄마는 늘 신문을 보고 계셨다. 그 어렵던 한자, 한글을 엄마에게 다 배웠다. 공부를 하셨다면 엄청 잘하시지 않았을까. 늘 밭에서 일하던 우리 엄마. “너희 집은 딸 부자, 일 부자여.” 동네 아주머니가 한 이야기다. 이 밭 매고, 저 밭 매고, 다시 오면 풀이 또 자라 있고···. 우리 6남매는 모두 일꾼이었다. 조금만 거들면 엄마가 덜 힘들다는 생각에 악착같이 일했다. 옛 집터 모습을 재현해 모형으로 만들었다. 크기도 색깔도 제각각인 쌀 단지. 이준희 씨는 쌀 단지를 보며 '우리 6남매의 젖줄'이었다고 말했다.“엄마는 꼭 나락(벼)을 널어놓고 닭을 지키라 했어요. 근데 저는 한 번도 끝까지 지켜본 적이 없어요. 나가서 놀아야 했어요. 저녁에 오면 엄마가 부지깽이 들고 저를 보자마자 막 때리려고 쫓아와요. 닭이 다 밖으로 흩어졌으니까요. 그러나 제가 안 잡히죠. 삼십육계 줄행랑. 어디로 가냐 하면 동네에 TV 있는 집이 몇 집 없었어요. TV 있는 친구 집에 가서 한참 보다가 집으로 들어왔죠.”■ 짚풀을 편안히 만지는 공간 있었으면옥천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연 것만으로 감사하다는 이준희 씨. 일상에서 잠시 잊고 지낸 짚풀을 보고 만지면서 편안하게 즐겼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전했다. 짚풀공예를 전수할 사람이,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도 내심 드러냈다.“옥천은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지역이 형성됐잖아요. 그런데 짚풀공예 활성화는 잘 안 돼 있어서 아쉬워요. 논산이나 다른 지역은 훨씬 많거든요. 짚풀공예 강사를 찾느라 애쓰더라고요. 옥천에는 양해용 선생님도 있고, 저도 있고, 두 사람이 있잖아요. 짚풀을 편안히 만질 수 있는 곳이 사실 옥천이면 더 좋죠.”충남 아산에서 열린 짚풀런웨이 때 이준희 씨가 입었던 의상과 모자.짚풀로 만든 조끼와 청자켓이 한데 어우러졌다.그는 충남 아산에서 열린 ‘짚풀런웨이’ 사례를 들어 옥천만의 특색 있는 행사를 열면 어떻겠냐는 제안도 했다. 짚풀런웨이는 짚풀을 소재로 의상과 소품을 직접 만들어 입고 우리 전통의 모습을 승화한 의상쇼를 말한다.“1960~1970년대 지나면서 도시화, 산업화가 일어나고 짚풀공예 자리에 플라스틱이 대체됐잖아요. 몇십 년이 지난 뒤에 보니 플라스틱이 너무 많은 폐해가 있다는 걸 알았죠. 친환경, 탄소중립 이런 이야기가 다 우리 자연을 돌아봐야 한다는 추세에 있는 거잖아요. 동이면 평산리에 옛날 분들이 많으세요. 그분들이 새끼 다 꼬실 줄 알고 다 만들어 쓰던 생활용품이거든요. 아직 실행에 옮기진 못 했지만 저는 그런 생각도 했어요. 동네분들을 모시고 짚풀공예를 다 같이 만들고 판매까지 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옥천을 특색 있게 만들어가는 것도 옥천사람이 할 일이잖아요.”이준희 씨가 짚풀로 만든 장구를 들고 기념촬영을 했다. 장구를 쳐도 소리는 안 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하다. 

인물일반 | 윤종훈 기자 | 2023-01-04 09:10

‘집간장‘ 어머니는 얇은 매직펜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셨다. 플라스틱 콜라병에 직접 담근 간장을 붓고 ’집간장‘이라고 써서 색깔 없는 테이프로 붙이셨다. 자녀분들에게 준다시며 애미가 줄 선물은 건강한 당신과 정성스레 담근 된장, 고추장, 간장이라시며 옅은 미소를 보이셨다. 당신 스스로 60년을 담갔으니 요새 애들 말로 나도 쉐프라고 하시며 한 마디 더 건네신다. “한 숟가락 또르르 따라 넣어도 국 맛이 달라” 소고기 미역국에 한 숟가락 주르룩 넣으면 그 맛이 또 별미라고 그저 60년을 담았더니 진한 맛이 우러난다고 무심히 말씀하신다. 어머니의 손맛은 바로 사랑이며 자녀들에게는 더없는 추억이다. ■ 돗자리 깔아도 충분한 나이100세 시대라고 말들은 많지만 어디 100세까지 사는 게 쉽나. 나도 곧 89세. 100세 시대의 9할 가까이 살아냈다. 그 수많은 시간 속에서 곡절이 없을 리 만무하니 돗자리 깔아도 될 만큼 인생이 보인다. 내일 모레 아흔인 내가 교복을 입어봤을 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가끔씩 “우리 어머니 교수님 같은 말씀하시네.” 라는 얘기를 곧잘 듣는다. 피 토하는 절규를 하고 인생의 말미에 알게 된 그 만고의 진리는 글 속에 있는 양보다 우리 손끝 발끝에 매달린 양이 더 많다.살면서 부아가 치밀면 이렇게 했더니 진정되고 저렇게 생각을 바꿨더니 숙제가 해결되더라. 그리 알뿐이다. 한때는 수줍은 미소를 머금을 줄 알았고 이제 벼락이 치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 문 밖에서 요란한 천둥소리가 나도 두렵지 않다. 살 만큼 살았다는 얘기도 될 터이지만 지난 시간 속에서 고단했던 일들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를 위협하는 것들은 티끌 같다. 그래서 당당하다.■‘회룡포’ 부르는 김다현이 보다 한두 살 더 먹었던 새색시 하루하루는 고단하고 질기더니 88년은 어느새 빨리도 따라왔다. 어느 날 티브이에서 김다현이라는 예쁘장한 꼬마가 나와서 노래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회령포’를 절절하게 불러댄다. 고것이 인생을 알기나 하나 불러대는 폼이 기가 막힌다.워매! 생각해보니 내 저 아이 만할 때 우리 영감님한테 시집왔으니 참말로 어린 각시는 맞다. 춘향이도 열여섯 살에 이몽룡을 만났단다. 1936년 1월생, 우리나이로 88살이다. 백세시대라고 하지만 내가 이 나이까지 살 줄은 미처 몰랐다. 수많은 곡절들이 있지만 푸념보다는 방도를 먼저 찾으면서 살아왔기에 파란만장하다는 말은 굳이 안하고 싶다. 영감에게도 내 속을 다 드러낼 수 없었고 더더군다나 내 새끼들은 내 속을 절반이나 알까. ■ 가혹한 일제 강점기, 정신대로 끌려가던 언니들의 뒷모습해방 전에 동네 언니들이 일본군에 끌려가는 뒷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끔찍한 일도 겪었다. 같이 새참 나르던 언니들이 어느 날 없어지고 “누가 일본 어디로 갔대” 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아찔한데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던 우리네 언니 또래의 그 할매들을 생각하면 피붙이가 아니어도 내 억장이 무너진다. 그 속을 어찌 달래며 살았을까. 열다섯 여섯에 일본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집에서 다들 서둘러 시집들을 보냈었다. 우리 손주들이 역사책에서나 보았을 일들을 한 동네에서 보고 들으면서 살아온 할매다. 피눈물 삼키는 일들은 부지기수였다.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있으니 녀석들이 우리네 속앓이를 어찌 알 수 있을까. 굳이 버선 속을 보여줄 필요도 없지만 우리 자손들이 정직하고 근면하게 잘 살기를 바랄뿐이다.■결혼, 새로운 인생이 파도처럼 밀려오다내 나이 16살, 6,25 전쟁 후유증으로 힘든 시기에 결혼을 했으니 신혼이라는 말도 붙일 수가 없었다. 남편은 나보다 8살 위인 한참 오라버니뻘이어서 내가 16살, 남편은 24살 이었다. 내가 열여섯 살에 시집을 왔으니 남자를 알기를 하나 결혼이 뭔지를 아나 그저 시집가라니 색시가 되었다. 영감님은 나한테 자상했다. 양반이었다. 우리 6남매 낳을 때 마다 한약 한재씩 꼭 들고 와서 산고(産苦)를 잊게 한 남편이었다. 우리 새댁시절 남편들은 다들 무뚝뚝하기도 하지만 마음이 있어도 마누라한테 그런 정성을 보이기는 쉽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절 남정네들은 세상사 뜻대로 안 된다고 술 먹고 밥상 둘러업고 주사부리기가 일쑤였는데 우리 영감님은 그런 꼴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영감님한테 더 고마웠다. ■과수원집 마나님, 일꾼처럼 근면하게 일하다 이원은 포도로 유명한 곳이라 포도 과수원이 그림처럼 펼쳐졌던 곳이다. 그림 그리는 이들이 보면 화폭처럼 보이지만 우리네한테는 먹고 살 거리였으며 새끼들 키우는 알토란같은 돈벌이였다. 외양간의 소 한 마리도 애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보내던 보물단지지만 과수원의 포도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으면 부자 된 것 같았다. 잘 영글어 우리 새끼들 공부시키고 우리 먹고 살 거리가 되니 고단 했던 농사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수출도 하고 구판장에 나가서 팔기도 했다. 제법 큰 농사꾼이었다. 억척스럽기보다 열심히 살았던 때다.과수원집 마나님이었지만 일꾼처럼 일했다. 포도가 늘 수확이 좋은 것도 아니어서 과실 값이 폭락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잘 꾸려나가면서 여기까지 왔다. 몸이 힘든 삶의 무게보다 마음으로 조심스러운 큰일은 바로 시아주버님을 모시는 일이었다.■마음은 애틋하지만 조심스러웠던 시아주버니 모시기 처음 시집와서 작은 오두막살이부터 시작했다. 시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시집살이는 안했지만 생각지도 않은 시집살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시아주버님을 모시게 됐다. 사실 남편 형님이라 어쩌면 시부모님보다 더 어려운 관계였다. 부모님들은 어른들이라 내가 자식처럼 돌보면 되지만 시아주버님은 잘해도 상 받을 일 없고 못해도 흉이 되는 어려운 관계였다. 처음에 결혼할 때는 시아주버님이 안 계신 걸로 알았는데 물론 남편도 나에게 거짓을 말 한 것이 아니었다. 시아주버님이 젊을 때 돈벌어보겠다고 나가셔서 연락이 안 된 상태로 너무 오래 뜸한 틈에 다들 돌아가셨거나 연락이 더 이상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없는 형제로 가슴에 묻고 살고 있던 때였다.그런데 우연히 시아주버님이 강원도에 살아 계신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이 여러 번 다녀오고 속을 끓이고 있을 때 나는 남편에게 “모시고 오세요. 몸도 불편한데 모시고 같이 삽시다” 라고 했다. 내가 어려서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그저 몸도 불편한 이가 혼자서 강원도에 살고 있다니 당연한 도리로 모셔 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숙을 모시고 오니 동네 사람들이 누군가 궁금해하고 말들도 무성했다. 그래서 시숙 모시는 건 달리 어려운 게 아니라 잘해도 말거리가 되고, 못해도 흉이 되는 거라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 큰 아들이 10년 넘게 큰아버지랑 같이 지내느라 불편했을 텐데도 착한 아들이 큰아버지 봉양하면서 잘 지내주었다.한 20년 모시면서 시아버님 모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내심은 시아버님보다 더 어려운 분이었다. 돌아가시전에는 풍이 와서 목욕까지 다 시켜드리고 나도 큰 아들도 힘들었지만 우리한테 신세진다고 생각했을 시숙도 마음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남한테 그것도 아랫사람한테 신세지는 걸 무심하게 넘길 이가 몇이나 될까. 다들 버거운 마음들을 추스르면서 살아내던 시절이다.난들 아무리 시숙이 환자라고 하더라도 시숙인데 목욕 시키는 일이 수월한 일은 아니다. 남자 목욕을 시키는 일인데 처음에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몸을 어떻게 씻겨야 할지 난감했지만 큰 아들이 옆에서 손길을 보태주니 그렇게 또 안쓰러운 분을 챙길 수 있었다. 우리 큰 아들이 지금도 남들 배려하고 잘 챙기는 건 아마도 태생에 마음밭이 착하지만 큰 아버지 모시면서 남을 이해하는 마음이 몸에 배었을 것 이다. 그래서 세상사는 공짜가 없다고 지금 힘들다고 나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나에게 또 배움이 되기도 한다.■상견례, 신문지에 싸들고 간 300만원큰 아들은 40년 전 당시에 흔치 않던 연초학과에 가느라 충북대학교에 갔다. 그때 전매공사의 본사가 청주에 있었고 연초제조창에 바로 취업이 되는 학과라 청주로 학교에 가게 되었다. 학교에서 임용대기중인 아가씨를 만나 임자 나온 길에 결혼을 시키고 싶어서 상견례를 하자고 청주 모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집에서 키우던 소를 팔아서 돈을 마련해서 준비를 했다.300만원. 읍내 집이 450만원이었으니 적은 돈이 아니다. 배짱은 그때도 두둑해서 나는 신문지에 돈을 싸서 갖고 갔다. 아이들을 주고 결혼하는데 보태라고 했다. 우리 아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한 걸 보면서 나도 애미 할 도리를 할 수 있어서 내심은 뿌듯했다. 시골할매가 신문지에 싸들고 간 돈이 우스워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 맛에 살았다. 열심히 농사짓고 소도 키우고 아이들 결혼할 때는 돈다발 들고 가서 안기고 땅도 팔아서 나눠주고. 그게 사는 맛이다.■영감 몰래 뒤주 속 쌀 팔아 먹느라 진땀 빼던 날 나는 남편이 외출하면 남편이 저 멀리 가는 발걸음 끝까지 지켜보고 잰걸음으로 뒤주로 갔다. 손에 바가지를 들고 부르면 큰 아들도 눈치 빠르게 리어카를 마당에 갖다 놓고 쌀 포대자루를 들고 왔다. 뭔일인가 싶지만 바로 남편 몰래 쌀 팔아먹는 날이다. 내가 쌀을 퍼서 포대자루에 담고 아들은 그 포대자루를 리어카에 옮겼다. 우리는 대문을 나서며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냅다 달렸다. 영감님한테 들킬세라. 영감님이 애들 용돈 짜게 주니 딸내미가 부족하다고 징징대고 애미가 어쩌겠나. 영감 몰래 쌀이라도 파는 수밖에.아들이 리어카를 5리를 끌고 시장 방앗간에 갔다. 쌀이라서 주면 바로 현금이니 돈으로 바꿔서 다시 또 5리를 리어카를 끌고 온다. 군말안하고 읍내 시장까지 다녀오는 우리 아들.딸 용돈 준다고 영감 몰래 쌀 팔아서 오는 마누라. 다들 시골살이 하면서 웃음 밖에 안 나오는 일이지만 쌀 팔아서 용돈 줬던 딸, 리어카 몰고 시장에 다녀온 던 그 아들도 환갑이 넘었으니 세월은 참으로 무심하다.■이제 동네 사랑방 주인으로 고난 속에서 배움이 없어도 해결해왔고 자식들은 다들 아쉬운 소리 안하면서 잘 살고 있다.시골 할매, 대문 밖만 나가면 길 건너 10호 안팎의 이웃동네 초록 들판밖에 보이지 않으나 두려울 게 무언가! 영감 곁으로 가면 그리운 사람 만나서 좋고, 이승에 있으면 울 새끼들 볼 수 있으니 좋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딱 좋은 나이다. 유행가 가사가 사랑하기 딱 좋다더니 살기도, 먼 여행 떠나기도 딱 좋은 나이다. 밖이 시끌시끌 한 거보니 동네 동생들이 오는 모양이다. 열무김치에 국수나 말아서 먹어야겠다. 아, 들기름 넣어서 비빔국수를 할까 아니 이제는 다들 나이 들어 침이 말라 물국수를 다들 찾으니 그래 물국수로 하자. 멸치가 어디있더라 다싯물을 내야지.이렇게 또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구나. 어여오시게 동생들! 

인물일반 | 김경희 시민작가 | 2022-12-30 1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