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9 이태원 참사 100일] 가장 필요했던 참사 당일에는 없었던 국가, 참사 후 시작된 국가 통제
[10.29 이태원 참사 100일] 가장 필요했던 참사 당일에는 없었던 국가, 참사 후 시작된 국가 통제
  • 이현경 기자 lhk@okinews.com
  • 승인 2023.02.10 13:59
  • 호수 1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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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녹사평역 일원에 유가족협의회가 마련했던 분향소 모습. 일부 유가족이 희생자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했다.
서울 녹사평역 일원에 유가족협의회가 마련했던 분향소 모습. 일부 유가족이 희생자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했다.

10.29 이태원 참사 이후 연고지가 옥천인 피해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주민들로부터 들었습니다. 지역 사회가 좁아 수소문하면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그 행위 자체가 유가족에게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참사 100일 후 유가족과 인연이 닿았습니다. 발언대에 올라 “고향이 옥천”이라는 고(故) 진세은씨의 고모 진아무씨의 이야기를 마침 현장에 있었던 옥천주민 유해정 인권기록활동가(인권기록센터 ‘사이’)가 유심히 들었고 <옥천신문>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기자 개인의 고백은 기사 작성에 있어 사족입니다. 개인의 경험이지만 공유가 필요한 경험이라는 생각에 사족임을 알면서도 덧붙입니다. 4.16 세월호 참사 후 <옥천신문> 기자들은 팽목항 분향소를 찾았고 그곳에서 저도 300개가 넘는 영정사진을 마주했습니다. 희생자가 304명이 된다는 것을 ‘문자’로 이해한 것과 ‘영정사진’으로 느끼는 것은 참사를 받아들임에 있어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0.29 이태원 참사 취재를 앞두고 녹사평역 분향소를 찾았습니다. 피해자와 유가족을 향한 혐오의 말로 가득 찬 현수막 한가운데 자리한 분향소를 어렵게 발견해야 했습니다. 그 안에는 159명의 피해자 영정이 ‘없었습니다’. 영정사진 일부가 있었고, 영정을 대신한 국화꽃이 함께했습니다. 혐오가 체감되는 상황에서 내 가족의 얼굴을 내놓고, 이름을 내걸 수 있는 선택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짐작할 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다짐했던 유가족 진세빈씨는 꿈에서 동생을 만났습니다. 서럽게 우는 동생을 괜찮다며 달랬다고 합니다. “억울하다”는 동생의 말이 진세빈씨를 움직였습니다. 진세빈씨는 그렇게 발언대에 올랐습니다. 인터뷰 내내 진세빈씨는 본인과 동생을 분리해서 바라봐 달라고 강조했습니다. 자신의 발언이 이제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동생의 명예를 훼손할까 조심 또 조심한 것입니다. 

<옥천신문>은 유가족 진세빈씨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옥천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동생 고(故) 진세은씨를 고향 주민이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도 함께 전합니다. 인터뷰는 10.29 이태원 참사 102일이 되던 날 옥천에서 진행했습니다. 유가족 진세빈씨 옆은 고모 진아무씨가 지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