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병과 함께 걷는 여울길(2)>오대리 보내 사람들의 지름길, 대통수여울, 쥐여울, 살뚝여울
<정수병과 함께 걷는 여울길(2)>오대리 보내 사람들의 지름길, 대통수여울, 쥐여울, 살뚝여울
참외서리 하러 건넜던 여울은 대청호에 잠겨 흔적조차 없고
"그때가 좋았어. 없이 살아도 그땐 정이 많아서"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11.04.22 09:23
  • 호수 107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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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울 약도
정지용생가 - 며느리재 - 대통수여울 - 옥천읍 오대리 보내마을 ②

여울에서 가만히 귀를 귀울이면 쌀쌀거리며 물살 흐르는 소리가 음악입니다.

대청호가 생기면서 대청댐 구역 안에 있던 옛 여울은 대부분 흔적이 사라졌지만 그 추억은 여전합니다. 여울길에 대한 뒤늦은 추억찾기로 인해 많은 분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제대로 증언을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편치 않은 상황이긴 합니다만 이제라도 여울을 찾아 옛 고향을 더듬어봅니다.

옥천읍에서 보은을 가는 국도가 지났던 주막말에는 주막이 있었고, 장계리 가경주 앞에서 금강을 건너 안내로 향했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보내마을(1990년 이전까지 안남면) 사람들이 건넜던 대통수여울(집앞여울), 쥐여울, 살뚝여울(박매기여울) 주변 얘기를 정리합니다.

여울지기로 나선 향토사학자 정수병(동이면 용죽리)씨를 비롯, 군북면 국원리 황영묵(76)씨, 옥천읍 오대리 보내마을에 살며 보내마을 소개와 함께 여울길 탐방에 나선 일행들을 배로 건네준 한장현(74)씨, 안내면 장계리 조동석(62)씨 등이 함께 나서 일행들에게 옛 추억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

▲ 보내마을의 봄은 한장현씨 집앞에 있는 산수유 나무가 전해주었다. 일행들은 한씨 부부가 타준 차를 마시고, 당귀 씨앗 한 움큼씩 선물로 받아서 나왔다.

■ 배 위에서 바라보면 오대리 보내마을로 향하는 콘크리트 길이 길쭉하게 나있다.

저 마을에는 무엇이 있을까?

선착장에 내린 일행들을 맞이한 건 보내마을 봄길.

일행들을 배에 태워 안내해준 한장현(74)씨 부부가 사는 마을이다. 보내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또 있다. 한경환씨 부부. 오늘은 한장현씨 부부가 일행을 맞아 마을에 대한 설명을 한다.

당장 배를 움직여야 집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어쨌든 불편하다. 배가 아니고서는 마을로 들어갈 길이 없다보니 '육지 속의 섬'이라는 말이 와닿는다. 한장현씨는 물론 한경환씨도 각각 자신의 배를 움직여 외부와 소통한다.

▲ 여울 얘기를 전해준 조동석(왼쪽), 황영목시는 팔촌 처남 매부지간으로 오랜만에 만났다.


■ 육지 속의 섬 '오대리 보내마을'을 가다

지금은 단 두 가구가 남아 있는 보내마을.

"어떤 사람들은 돈을 들여 집을 짓고, 어떤 사람들은 돈을 들여 집을 부수고."

대청호수가 들어선 후 한장현씨는 수몰된 터에서 집을 뜯어다 새로 집을 지었다. 자신이 살던 집들이 수몰되면서 목재를 뜯어다 새로 지어야 했으니 그 어려움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대청호 수질보전을 위해 수자원공사가 댐 주변 땅과 집을 사들인다. 똑같이 돈을 들이는데 옛날에는 돈을 들여 집을 지었고, 지금은 돈을 들여 집을 부수고 있는 것이다.

대청댐 건설로 인해 30~40가구에 달하던 보내마을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마을 주민들의 대부분은 청주한씨였다. 청주한씨 집성촌이었던 만큼 한씨를 제외한 타성바지는 박씨와 유씨 등 3~4가구에 불과했다.

▲ 마을 어귀에 있는 청주 한씨 세거비
한장현씨 집 위에 있는 청주한씨 제실에는 해마다 시제를 지내는 한씨 문중 사람들이 찾는다. 한씨 집을 오르는 길 어귀에는 작게 세워진 '청주한씨 세거지' 비석이 있다. 이제는 한씨 문중 사람들이 떠난 마을을 작은 세거비가 지키고 있는 셈이다. 세거비는 세월이 흐를수록 이끼가 덮이고 눈비를 맞아 더께를 더할 것이다.

지금은 물에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마을을 만날 수 있으나 옛날에는 바로 금강 가에 마을이 있었다. 금강을 따라 길게 형성됐던 집에 살았던 주민들은 강변에 기름진 밭을 많이 갖고 있었다. 그 밭에서는 땅콩과 단무지 무가 잘 자랐다. 참외와 수박도 재배했다. 강 건너편 안내면 장계리 주막말에는 농사지을 땅이 마땅치 않았다.

마을 앞에 세 개의 여울이 있었다.

주로 보내 사람들이 건넜던 여울이다.

대통수여울(집앞여울), 쥐여울, 살뚝여울(박매기여울). 마을이 강을 따라 길게 형성돼 있다 보니 세 개의 여울은 각기 구실이 달랐다. 여울 이름에 괄호가 생긴 것은 보내에서 불렀던 명칭, 주막말에서 불렀던 명칭이 각기 달랐던 까닭이다.

보내마을 앞 금강에서는 한때 사금을 캐느라 사람이 북적였다. 오대리 오류티에서 장계리까지 강에서 모래를 퍼서 물에 흔들다보면 금덩어리가 나왔다. 한장현씨의 큰아버지뻘 되는 한치봉씨가 금점허가를 받아 돈을 많이 벌었다 했다.

대통수여울로는 마을 사람들이 소에 방아찧을 거리를 싣고 주로 건너다녔다. 마을 앞 가장 큰 여울이었고, 강건너 주막말 쪽에서 물놀이를 하거나 다슬기를 잡다가 여울을 건너 참외나 수박 서리를 했던 기억은 많았다.

■ 꽃고기, 모래마주, 금강참게 많았던 여울

쥐여울에는 맑은 물에 사는 것으로 알려진 모래마주가 많았다. 작살로 모래마주를 잡았다. 여울에 살을 매고 수수쌀을 매달아 놓으면 금강 참게가 많이 잡혔다. 저녁에 5번 정도 거두었는데, 한 번에 많을 때는 20~30마리씩 달려 나오기도 했다. 대청댐을 막기 전까지는 참게가 많이 잡혔다. 여울에서 잡은 참게는 게장을 담가 먹기도 하고, 장에 나가 보리쌀 등 식량으로 바꿔 먹기도 했다.

장계리에서는 박매기여울이라고 했던 살뚝여울은 물이 얕았다. 특히 꽃고기가 많아 천렵을 하고 다슬기도 많이 잡았던 곳. 살을 매서 고기를 잡았기 때문에 살뚝여울이라고 했다. 보내 사람들이 밭에서 참외를 따면 바로 싸들고 이 여울을 건너 옥천 장으로 가던 길이기도 했다.

행정구역이 옥천읍으로 변경된 1990년 이전까지 오대리는 안남면이었다. 그러니 오대리 사람들은 행정적인 일을 보려면 안남면사무소를 가야 했다.

행정 일을 보려면 안남면, 장을 보려면 옥천장에 나갔던 보내 사람들은 안남면을 가려면 살뚝여울 옆을 걸어 문골이라는 골짜기로 올라 산등성이를 넘어서 안남으로 갔다. 해발이 110m 정도인 문골은 동이면 석탄리 피실 앞에서 금강 물줄기가 급히 휘도는 시작점에 있어서, 일제강점기, 문골로 수로를 파서 피실에서 장계리로 직접 물이 흐르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는 말이 전한다. 문골로 새로운 물길을 낸 후 피실 아래쪽은 농토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이었다는데 자료 등이 없어 확인할 도리는 없으나 흥미로운 얘기다.

"댐이 건설된 후 좋은 것은 없어. 오히려 망한 거여. 100명 중 10명을 빼놓고는 잘된 사람들이 없다는 겨. 없이 살았어도 그때가 좋았지. 없이 살았어도 인심은 좋았잖어."

여울은 사람이 만나는 곳. 국원리에서 며느리재를 소개해주려 함께 온 황영묵씨와 장계리에 사는 조동석씨는 아주 오랜만에 본 팔촌 처남매부지간이다. 반가운 얼굴을 여울에서 만나 한평생 동반이 되었던 것처럼. 모처럼의 여울길이 탐방 일행들에게는 소풍길이었다.

한장현씨 부부의 보내살이
▲ 한장현씨 부부
"용댕이 건너서부터 보내마을까지 전부 다 백사장이었어요. 풍경이 기가 막혔지."

우리 일행을 배로 안내해준 한장현(74)씨의 목소리가 한껏 들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잠자고 있는 보내마을을 떠올리는 일은 그의 얼굴에 자연스레 웃음꽃이 피어나게 만든다.

"주로 땅콩이나 단무지용 무 농사를 많이 지었지. 그리고 집집마다 누에를 안 기르는 집이 없었어요. 한 달 정도 쳐서 나오는 누에 한 장에 3만원 정도였는데 그게 꽤 큰돈이었죠."

당시 3만원은 지금으로 치면 포도농사 수익과 맞먹는 돈이었다. 마을 앞으로 넓게 펼쳐진 백사장에는 사금이 있어 한씨의 큰아버지뻘 되는 한치봉씨가 금점 허가를 얻어 큰돈을 벌기도 했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구읍에 여중 건물을 희사하기도 했다는 게 한씨의 말이다.

"그땐 청주 한씨들만 이 마을에 3,40 가구가 살았어요. 박씨, 유씨도 있긴 했는데 서너 집 밖에 안됐고. 그러다 대청댐이 들어서면서 마을 주민들이 다 떠나고 딱 두 가구만 남았죠."

그 두 가구 중 하나가 한씨의 집이다. 고교 때까지 보내마을에서 살다 외지로 나갔던 한씨는 다니던 회사를 퇴직한 후 다시 마을로 들어왔다. 지금은 보내마을과 대전을 오가며 생활 중이다.

"마을이 수몰될 때 당시 있던 집을 그대로 뜯어 지금 자리로 옮겨놓았죠. 지금의 집터는 원래 밭이었어요."

집은 옮겼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은 고스란히 저 푸른 물속에 잠겼다. 그래도 선친들의 묘와 토지가 그대로 남아 있어 실향민이라는 생각은 안 든다는 한씨. 오늘도 금슬 좋아보이는 한씨는 추억이 잠든 그 물 위를 배를 타고 지난다. /박누리nuri@okinews.com
 

두번째 여울 탐방, 참가자를 모집합니다

금강을 끼고 누대를 살아온 옥천 사람들에게 여울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올들어 두 번째 걷는 여울길 참가자를 모집합니다.

4월30일 걷게 될 여울길은 안내면 장계리 개경주에서 안내면 인포리로 건넜던 옛 국도에 설치된 장계교 인근 다리께여울을 시작으로 안내면 장계리 진모래 현재 장계교 인근에 있었던 소탄바우여울에 들러 여울의 흔적을 되새겨봅니다.

여울지기 정수병씨의 안내로 안내면 장계리 정구철씨 등의 증언을 들어 이 두 여울에 얽힌 애환을 듣는 한편, 안내면 인포리 37호 국도에서 시작하는 임도를 따라 동이면 석탄리 피실이 맞바라보이는 산등성이까지 걷고 안남면 연주리 면소재지로 돌아나올 계획입니다. 옛날 안남면(현재의 옥천읍) 오대리 보내 사람들이 행정 일을 보기 위해 걷던 산길 일부를 되짚어 걸어보는 체험이 될 것입니다. 뜻있는 독자, 주민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탐방구간: 안내면 장계리 다리께여울~소탄바우여울~안내면 인포리 임도~안남면 소재지

■ 일시: 4월30일 오전 9시30분

■ 모일 장소: 옥천읍사무소 주차장

■ 준비물: 도시락, 물, 비옷 등 개인 준비물

■ 문의: 대청호주민연대 · 옥천신문사(733-7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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