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 도올 김용옥 강연
현장 … 도올 김용옥 강연
대안을 만드는 옥천에 감동
  • 옥천신문 취재팀 webmaster@okinews.com
  • 승인 2006.08.17 13:20
  • 호수 8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올선생’의 강연을 직접 듣겠다는 주민의 열기는 뜨거웠다. 관성회관 대강당의 좌석 800석은 강연시작 전부터 이미 빈 곳을 찾기 어려웠고 강연이 시작되자 계단과 통로도 ‘도올선생’을 만나기 위해 언론문화제를 찾은 청중으로 빈틈없이 채워졌다. 자신의 호 ‘도올'이 `돌대가리’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철학자 김용옥은 그를 찾은 옥천사람들에게 무엇을 준비했을까? 차 돌멩이처럼 빈틈이 없다는 그의 강연은 폭염을 뚫고 온 이들에게 어떻게 전해졌을까?

약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된 그의 강의는 ‘광복(光復)’이라는 단어로 정리된다. 도올은 광복이 본래 ‘빛을 다시 찾았다’는 말보다 “모습(=光의 다른 의미)”을 되찾는다는 말로 더 깊이 있게 이해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 고장 옥천의 본래 모습에 대한 강연을 시작했다. 도올이 본 옥천의 본래 모습은 다르지만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안내에서 왜란을 떨쳐 일어난 중봉 조헌, 청산에서 새 시대를 열었던 해월 최시형, 청산에서 태어나 제국주의와 싸웠던 독립운동가 조동호, 구읍에서 난 시인 정지용과 군북이 낳은 언론인 송건호까지 도올의 눈에 비친 옥천의 본래 모습들이다.

도올은 중봉 조헌에서 출발한 옥천의 정맥(整脈)이 오늘이 순간까지 풀뿌리언론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확인했으며 이러한 옥천의 ‘불씨’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과 또 다가올 미래에도 조선의 넓은 들판을 다 태울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가 본 ‘옥천’에 청중은 대강당이 떠날 듯한 박수로 화답했음은 물론이다. 오늘도 옥천 사람들은 조선일보 대신 자신들이 만든 작지만 강한 풀뿌리 신문을 손에 쥐고 묵묵히 우리 고장의 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으려는, ‘광복’의 불씨를 지키고 있었으니까.

▲ 언론문화제 도올 김용옥 강연 모습. 사진:김태정 기자

◆첫 번째 모습 . 중봉 조헌
=옥천에 사는 사람들은 조헌이라는 사람을 꼭 알아야 한다. 율곡의 뒤를 잇는다 해서 그 호를 후율이라 한 이가 조헌이다. 조선 사상사로 볼 때 퇴계보다는 역시 율곡이 더 종합적이고 큰 사상을 가졌다. 율곡의 사상이 기 중심의 현실감각이 있기 때문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온다는 것도 미리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율곡은 임진왜란 일어나기 10년 전에부터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지만 오직 조헌만이 10만 양병설의 중요성을 깨닫고 계속 울부짖었던 것이다. 그가 옥천으로 내려와서도 안내면 후율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군사훈련 역시 함께 가르친 것이다. 그러다가 실제로 임진왜란이 나게 되고 옥천의 제자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셨고 금산에서 혁혁하게 싸우다 전사하신 분이다.

◆두 번째 모습 . 해월 최시영
=19세기 말 나라가 한심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민중들을 지도할 리더가 없었다. 그때 역사에 등장한 것이 바로 동학이다. 우리 민중은 벌써 18세기 말부터 서학이라고 하는 천주학이라고 하는 것에 희망을 걸었지만 동학의 창시자 최수운은 천주학 역시 사람 위에 신을 올려놨다는 점에 주목했다. 조선이 왕을 민중위에 올려놓고 망했는데 다시 옥황상제와 같은 천주를 하늘에다 올려놓고 그거 섬길 것이 아니라 뭔가 새로운 우리 민족의 사상이 필요하다고 한 것이다.

▲ 김용옥 선생 강연 모습(사진:김태정 기자)
하늘님이 구름 위에 떠있는 것이 아니고 내 몸이 천주다. 내가 곧 하늘님이다 라는 인간평등을 외치기 시작했다. 우리 민중은 벌써 세계 조류를 감지하고 20세기를 맞이하는 인간평등의 사상, 즉 모든 인간이 곧 하늘님이요. 존엄한 존재라고 하는 위대한 사상을 만들어서 20세기를 준비한 것이다.

청산면 문바윗골에 가 보면 옥천사람들이 일본과 싸움을 준비할 때 바위에 새겨놓은 일곱 사람의 이름이 있다. 옥천이라는 곳은 이렇게 위대한 곳이다. 일본이 기관단총을 가지고 우리 조선 민중을 죽이러 들어오는데 여기서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 호랑이가 들어오는데 몽둥이라도 가지고 가서 때려잡아야지 하면서 기포명령을 내리는 곳이 바로 옥천 청산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최수운 선생이 1864년에 죽은 후 30년이 지나서 어떻게 갑오민중혁명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해월 최시영이라는 사람이 삼십 년 동안 포접제도를 만들어서 전국을 조직시켰기에 가능했고 바로 그러한 전국 조직을 지휘하던 센터가 바로 옥천의 청산과 보은이었다.

▲ 도올 김용옥 강연 모습(사진/여의도 통신 한승호)
▲ 도올 김용옥 강연 모습(사진/여의도 통신 한승호)
◆조동호 선생과 ‘풀뿌리 언론운동’
=조동호는 천재적인 분으로 스무 살 전후에 여운형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가 공부를 한다. 근세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가를 꼽으라면 몽양 여운형을 안 꼽을 수가 없다. 몽양 여운형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여운형을 있게 만든 사람이 바로 옥천사람 조동호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돼 2월8일 동경에서 독립선언을 하고, 3월1일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을 한 역사적 사건을 뒤에서 전체적으로 핸들링(조정자)한 사람이 바로 몽양 여운형과 조동호다. 1945년 건준위원회 이름에도 조동호 선생 이름이 들어가 있다.

오늘 언론문화제를 시작했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만든 사람이 바로 옥천사람 조동호다. 조동호 같은 인물의 맥을 이음으로 송건호 같은 사람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정치라는 것은 완전히 언론의 정치, 언론이 장악하고 있다. 더욱이 오늘 언론은 냉전질서 속에서 형성된 논리가 오늘날까지 조중동의 논리로 내려 오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전쟁에서 형성된 냉전적 사고가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는 거고 빨갱이니 좌우니 보수니 이런 개똥 같은 얘기로 우리 민중을 억압하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나는 옥천사람들이 뭔가 그렇게 흉악한 언론들을 거부하고 우리 민중의 진정한 미래를 스스로 창출해가고 있다는데 감동을 하면서 오늘 여기까지 내려온 것이다. 옥천은 조선일보를 능가하는 새로운 언론을 만들 수 있다. 새로운 철학, 새로운 역사의 비전으로 우리의 들을 새롭게 교육시켜야 한다.

▲ 도올 김용옥 강연 모습(사진/객원기자 김태정)

글/백정현 jh100@okinews.com
사진/객원기자 김태정 tjkim@okinews.com  
사진/여의도 통신 한승호 hanphoto@ytongsin.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