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장의 문학관 기행>조각 구름 같은 인생, 조각 구름 같은 시와 그림과
<김성장의 문학관 기행>조각 구름 같은 인생, 조각 구름 같은 시와 그림과
(9)조병화 문학관 기행(상)
  • 김성장 시인(옥천읍 양수리) nuri@okinews.com
  • 승인 2016.03.25 15:32
  • 호수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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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사귀지 마세
작별이 잦은 우리들의 생애

가벼운 정도로
사귀세

악수가 서로 짐이 되면
작별을 하세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세
- 「공존의 이유·12」에서

이 시를 쓴 시인 조병화. '깊이'를 강요하지 않는 문장, '가벼운' 분위기, '짐'이 되지 않겠다는 태도, '어렵지' 않은 시어, 조병화의 시는 그렇게 나의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를 연구한 석사 논문과 박사 논문이 각각 한 편씩 있다. 서정주 개인을 연구한 것과 다른 연구들에 포함되어 있는 박사 논문이 50편이 넘는다. 조병화(1921-2003)와 같은 세대인 조지훈(30편) 박목월(17편) 박두진(11편) 등에 비해서는 물론이고 박사 학위 논문이 무려 59편에 이르는 동갑내기 김수영에 비해 보면 문득 연구자들의 조병화에 대한 무관심이 의아할 정도이다. 연구 논문의 편수가 작가의 문학적 위상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논문 연구가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것은 작가에 대한 후학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한 지표가 될 수 있다. 그는 후학들에게 주요 연구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문제적 작가'는 아니라는 얘기다. 박사 논문의 경우 어떤 작가를 연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과제다. 조병화 연구를 권하는 교수도 별로 없는 모양이다. 석사 학위조차 한 편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서정주나 김수영 신동엽 등에 대한 석사 논문은 그들의 박사 학위 논문보다 훨씬 많다. 서정주 관련 석사논문이 200편이 넘고 신동엽도 100여 편에 가까운 석사 논문이 있다. 조병화 문학의 문학사적 의미나 작품 자체의 의미에 대해 더 파헤쳐보고 싶은 '깊은 유혹'이 그의 시에는 결핍되어 있는 것 같다. 나에게도 그의 시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다. 내 사유의 어느 모퉁이를 건드리거나 감성의 안쪽을 아프게 자극하지 않는다. 열열한 서정을 불러오지도 않는다. 멋들어지는 가락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다만 편하게 읽힌다. 그는 독자들에게 무얼 애걸하거나 하소연하지도 않고 독백인 듯 한 시를 썼다.

조병화 문학관을 나오면서 두 가지 생각이 엇갈렸다. 어떤 의문은 해결된 것 같았고 어떤 의문은 더 길어졌다. 조병화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생전에 문학관을 지었다(1993년 완공). 터를 본인이 제공하고 문학관 건축비를 국가가 지원했다(신동엽 문학관도 유족 측에서 터를 제공했는데 신동엽 시인이 타계하고 40년이 지난 2013년에 개관했다). 문학관으로 오는 동안 이 지역의 평평한 땅이 눈에 들어왔다. 지리적으로 안성평야 지대다. 평택역에서 내려 박두진 문학관을 들러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도로는 거의 높낮이가 없었다. 버스에서 만나는 산들은 대개 멀리 떨어져 있거나 가까운 산들도 겨우 코 끝에 걸리는 정도의 높이였다. 조병화 시인의 생가이자 말년을 보낸 집터는 그 평평한 길가의 작은 산 아래 마을에 있었다. 산이라기보다 언덕이라는 게 맞겠다. 마을 이름이 우아하게도 난실(蘭室)이었다. 문학관의 전시 내용과 자료를 작가 스스로 정리했다고 한다. 특이한 경우다. 글을 쓰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바람으로 보자면 자신의 문학관을 짓고 거기 자신의 삶의 과정과 업적과 유품이 전시되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렇게 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물론 조병화 스스로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사후에 후배 시인과 애독자들이 또는 고향 사람들이 그를 기리는 어떤 형태의 일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충분히 든다. 그는 그럴만한 문학적 역량을 보여주었고 교과서에 시가 실리기도 했다. 교수를 하고 학장을 하는 것이야 흔한 일이지만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한국시인협회 명예 계관시인, 인하대학교 명예교수를 지내고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비롯하여 국민훈장 동백장, 모란장, 서울시 문화상, 3·1 문화상, 예술원상, 금관 문화훈장 등을 받는 일은 그리 흔한 게 아니다. 게다가 문학성에 대한 평가를 접고 본다하더라도 100여권(시집 53권)에 이르는 책을 낸다는 것도 한국 문학사에 드문 일이다.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호를 딴 문학상(편운문학상)을 제정(1991년)하여 시행하고 있다. 작년 수상자가 곽효환 시인과 정과리 평론가였다. 그는 그림 전시회도 자주 했다. 문학관에 전시된 시화 작품들은 본인의 시를 자신의 글씨와 그림으로 직접 작업한 것들이다. 그의 글씨는 조잘대며 흘러가는 물결 같은 분위기다. 흐물거리는 듯 올망졸망한 글씨다. 그림의 경우 몇 개의 선으로 그리는 소묘와 유화를 즐겨 그렸는데 그림은 대부분 프랑스 인상파의 그림을 더 문질러 놓은 듯 산 나무 바다 그리고 추상적 형상들을 파스텔 톤으로 처리했다. 시도 글씨도 그림도 강렬한 그 무엇이 없다. 자신이 낭송한 음성 시집도 있다. 참 부지런한 시인이다. 대개의 작가들이 죽은 후에 뒷사람들이 하는 일을 조병화 시인은 모두 직접 하고 죽었다. 남김없이 모든 것을 하였고 남김없이 '자기'를 살다 갔다.

풀린 듯한 첫 번째 의문은 그것이었다. 왜 그의 시가 그렇게 밋밋하고 싱거웠을까. 그의 시에서는 단독자로서 인간이 지닌 숙명적 고독과 쓸쓸함은 보이지만 사회와 인간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은 잘 보이지 않는다. 내면의 고독도 집요하거나 심오한 듯한 분위기로 폼을 잡지 않았다. 사랑도 죽음도 허무도 고독도 쉬운 언어로 썼다. 쉽다는 것이 깊이 없음을 뜻하는 것은 아닐진데 쉽게 읽히면 그냥 쉬운 시로 여기는 속성이 나에게도 있는 것 같다. 그가 어린 시절과 말년을 보낸 집을 보자 어린 시절 그가 누린 안온이 느껴진다. 성장 이후의 사회적 성취와 행적을 더듬어가면서 그의 시가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삶에는 부족과 결핍과 갈등의 상황들이 보이지 않는다. 설령 환경적 결핍이 있다하더라도 그걸 결핍으로 느끼지 않는 타고난 기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집안은 일제강점기 경성사범학교에 갈 수 있는 유한계층이었다. 서울에서 어머니의 뒷바라지로 공부를 하면서 '어려운' 사정이었다고 했지만 종의 딸과 함께 이사 했다는 걸 보면 그가 말했던 '어려움'은 경제적 궁핍으로 인한 어려움은 아닌 것 같다. 어머니를 '나의 종교'라고까지 표현했다. 어머니의 사랑을 무한으로 받은 경험이야 흔한 것이겠지만 그것을 '종교'라고까지 표현하는 건 좀 특별나다. 그의 무덤 옆에는 어머니(진종)의 무덤과 아내(김진)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 편운(片雲:조각 구름을 뜻하는 조병화 시인의 아호) 시인 8살 때 부친이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그가 시집 제목을 아예 『어머니』(1973년 간행)로 하고 실어 놓은 시들의 경우, 그 간곡한 마음을 긍정한다고 하더라도 신파의 냄새를 지우기 어렵다. 아버지가 없는 빈 공간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어머니는 '막내 병화'를 사랑해주었나 보다. '이름하여 片雲齋(편운재)/당신 곁, 솔나무 밭, 낮은 언덕/당신을 수시로 뵐 수 있는 자리 골라서/당신의 묘막/깎아서 세웠습니다.(「이름하여 편운재」 앞부분)'라고 노래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어머니를 곡진하게 흠모했다. 이 시대에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묘막을 짓다니! 묘막이란 조선시대 유자(儒者)들이 부모상을 당하였을 때 시묘살이를 위해 묘 옆에 짓던 집이 아니던가.

일제 강점하에 태어나 6.25, 4.19, 5.16, 5.18 등을 지나쳤지만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 어디에도 그는 수난에 연루되지 않았다. 해방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 다섯이었다. 그는 교사였고 교수였다. 6.25 때는 피난지 부산에서 살다가 귀향한다. 본인이 일부러 피해서든 우연히 그렇게 무연한 삶의 과정에 놓여 있어서였든 민족사의 커다란 굴절 밖에 있었다.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는지 초월했는지 회피했는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살았다. 시대와 불화를 소재로 시를 쓰지 않았다. 그는 다만 사랑과 죽음, 자신의 고독과 허무와만 불화했고 그 불화를 넘으려고 방황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시대와 어떻게 관계 맺었는지를 전혀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해방 공간의 사회 상황에 대해 그는 '1945년 8월 15일은 확실히 당신과 나의 나라, 우리들의 나라, 우리의 나라, 우리의 조국의 기쁜 날이었다. 모든 것이 탁 터져 넘치던 날이었다. 삼천만의 눌린 진달래, 독립이 시작되던 날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한 때 흥분 속에 떠오르던 하얀 물거품, 도도한 두 물결은 혼탁 되어 흰 물결, 붉은 물결, 검은 물결, 무어가 무언지 모르는 카오스의 물바다가 되어 버렸'다고 그는 말한다. 이어서 '나는 어느 편도 아니었다. 나는 어느 편에도 끼지 못했다. 실은 어느 편에도 낄 수가 없었다. 이것도 이것이 아니고, 저것도 저것이 아니고, 그것도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만 있는 것은 「나」.' 또는 '끝끝내 나는 나였기 때문에 지녀야했던 이 혼자, 이 혼자의 외로움'이라거나 '나는 나를 살았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자기를 끌어안고 산 것이다. 거기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갈등과 사회가 만들어내는 고통이 비집고 들어갈 여유 공간이 없었다.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 자기 '홀로'와 지낸 것이다. 어디에 자극이 있겠는가. 조병화 시의 편안함은 그의 삶의 조건이나 삶의 이력과 나란히 가고 있었다. 그는 전쟁의 상흔도 이렇게 기록한다.

일그러진 땅을 다시 디디곤
목련화가 핀다.

목련화를 가꾸다
따발총에 쫓겨간 소녀는 소식도 없이
보얀 군화 끝에 나비가 앉는다
-「목련화」 앞부분

그의 시적 카메라 렌즈는 군화 끝의 나비에 다가간다. 아직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2년 간행된 『패각의 침실』에 수록된 작품이다. '무자극 시'의 근원이 무엇인가 그 실마리는 보이는 듯 했는데 다른 의문은 더 어지러워졌다. 허무를 노래한 시인이 생전에 문학관을 짓고 자신의 그림과 시집과 담배 파이프와 자신이 가지고 놀던 럭비공과 훈장과 해외 여행 비행기표를 하나하나 정리하여 전시해 놓았다. 섬세하고 꼼꼼하게. 유치환의 남성적 외로움과는 결이 다른 조병화식 고독과 허무, 그런데 묘한 것은 두 시인 모두 현실 속에서의 지위와 명예를 거의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허무를 노래하면서 섬세하고 꼼꼼하게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것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 고독하고 외로워서 그 방황의 시간은 무언가를 '정리'하고, 현실적 지위와 주어지는 명예에 순응하는 것인가.

산다는 건 고독하다는 걸
신념으로, 종교로 살아 오는데
오늘따라 내가 왜 이렇게도
약하고, 외로운가

실로 외로운 맥주를 혼자 마시고 있는
코르푸 힐튼 호텔 108호실의 이 고독
나는 지금 본연의 나와 만나고 있는 거다

캄캄한 이 고독, 이것이 나였을 걸.
- 「나」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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