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봉우리에 있는 시인의 시세계와 연결시켜준 것 감사'
'높은 봉우리에 있는 시인의 시세계와 연결시켜준 것 감사'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2.05.11 00:00
  • 호수 6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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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문학상 수상자 김지하 시인은 수상소감 발표에 꽤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정지용 시인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명제를 분석해 내기도 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기도 했다. 단순하고 형식적인 수상소감이 아니라는 판단에서 요약, 정리한다. -편집자 주
 
'지용상' 결정을 얘기 들었을 때 우선 제가 놀라웠습니다. 나 같은 대중시인에게 지용선생 같은 아주 까마득한 높은 봉우리에 계신 감성이 어떻게 나한테 연속될 수 있겠는가? 또는 이성이 또는 영성이. 그래서 놀랬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더 크게 놀란 것은 상금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상금도 없는 상을 십 몇 회까지 끌고 나왔나. 솔직한 말씀입니다. 돈을 조금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도 들고.(웃음)

세 번째로는 말을 안 하고 가만히 눈을 감았는데 떠오르는 생각에 저어기 놀랐습니다. 제가 `싸움닭'으로 알려졌는데 얼마 전부터 좀더 깊은 곳을 보고 넓게 보고, 좀 쉽게 보자 그런 생각들을 많이 했습니다만. 그 때 제가 잡은 미학적 테마랄까, 시학적 명제가 `흰 그늘' 이올시다. 흰 빛과 그늘은 서로 상호 모순됩니다.

서로 모순된 명제가 만나는 것이 가능할까. 이러면서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많이 읽고 존경해 왔던 지용선생의 백록담이 흰 그늘을 관통하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시집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그 같은 높은 봉우리에 저의 시학적 명제가 연속된다는 것, 저에게 큰 두려움이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맙다'고 그랬습니다.
 
'그늘'이란 우리나라 판소리를 중심으로 해서 시나위나 정악이나 무용에까지 통용되는 미학적 원리입니다. 아무리 판소리를 잘해도 귀명창들이 전라도 귀명창들이 저 사람 소리에 `그늘이 없어' 그러면 그 소리꾼 그걸로 끝납니다. 그늘이란 두 가지. 즉 삶의 윤리적 측면에서는 신상고초를 무한히 받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려고 애를 쓴 성실한 인생의 흔적입니다.

미학적 예술적으로는 목에서 피가 몇 사발씩 터져 나오는 지독한 독공수련의 결과입니다. 그랬을 때 사람의 목청에는 검실검실한 그리고 걸걸한 수리성이 배는 것입니다. 수리성을 완성하지 못하고는 최고로 인생의 복잡성을 표현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판소리의 특징입니다. 또 우리 문학과 예술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특징올시다. 즉 윤리적 삶과 미학적 삶이 일치하는 것을 우리 선조들은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 분(정지용 시인)의 시세계는 세가지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카톨릭시즘, 하나는 모더니즘, 하나는 민족주의 혹은 향토적 서정, 대학에 들어와서 읽어봐도 역시 그 혼란은 계속 제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그 혼란이 계속 부딪혀서 갈등하지 않고 어떻게 이렇게 편안하게 공존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 큰 의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가면서 그것이 온전한, 특히 훌륭한 시인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할 세가지 측면, 즉 감성과 이성과 영성이 표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용선생은 백록담에서 작위적 노력 없이 뛰어난 시적 이미지를 전개하는 과정에 셋을 이미 아울러서 승화시켜 버립니다. 이것에 대한 연구가 젊은 이론가들에 의해 많이 진행되길 바랍니다. 그러나 이 세가지 분열과 혼란 된 영역, 감성과 이성과 영성, 카톨릭시즘과 모더니즘과 민족주의가 어떻게 서로 갈등 하거나 작위적 노력 없이 한 차원 승화될 수 있느냐. 이건 아무도 못 따라갑니다. 제가 열 번을 죽었다 살아나도 지용선생의 백록담에 그 청정하고도 빛나는 세계는 못 따라 갈 것입니다.
 
제가 이 상을 받게 된 것을 감사하는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제가 아무 선배도 없고, 그저 대중적 시인이고 싸우자고 악쓰고 가서는 슬프다고 울고, 이런 대중 시인에게 이런 기가 막히게 높은 봉우리에 있는 시인의 시 세계와 연결시켜 준 것, 감사합니다. 아마 제가 죽었다 깨어나도 구성동 같은 시는 못쓸 것입니다.  부디  많은 시인들이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서 구성동을 남긴 지용시인의 흰 그늘, 흰빛과 컴컴한 고통의 세계가 결합된 미묘한 삼자 결합의 세계를 연구하게 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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