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 '옥천장' 지킨 구정남 할머니
37년 '옥천장' 지킨 구정남 할머니
함께사는 세상 [55]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1.11.24 00:00
  • 호수 59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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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 5일장의 한 부분을 채운 지 35년이 훌쩍 넘어버린 구정남 할머니. 장사가 안되는 걸 알면서도 장에 나오지 않으면 안절부절 못하는 장병에 걸려 꼭 장에 나와야 마음이 편하단다.
힘든 농사일 잠시 제쳐 두고 장 구경나선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오랜 단골로 익숙해진 장 사람들과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주고받는다.

대형 할인 판매점들의 경쾌한 음악소리 대신에 자리잡은 장 사람들의 고함과 화려한 진열대 대신 차가운 바닥에 놓여 있는 상품들. 상품에 붙어 있는 바코드에 스캐너를 가져다 대는 대신 이런 저런 흥정이 오고가고 뭉텅 집어 주는 덤이 있어 5일장은 항상 정겹다.

▶안 나오면 심란해서 안돼...
"할머니 이 근처에서 혹시 장사 오래 하신 옥천 분 알고 계셔요?"
"왜? 뭐할라구. 나도 집이 군서여."

5일장이 선 20일, 장사를 하고 계신 분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장에 나서 난감했는데 의외로 빨리 만났다. 반가운 마음으로 할머니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금구천변이라 그런지 바람이 제법 매섭다.

"요즘에 장사 잘 되세요?" "잘 되긴... 하나도 안 돼. 전두환 때는 그래도 조금 됐는데... 그 뒤로는 장사 제대로 안돼. 전두환이 광주사태 때 사람은 많이 죽였어도 우리네 장사는 잘됐지..."

"할머니, 광주민주화운동 아세요?" 되물어 보니 할머니는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잠시 광주를 다니러 갔던 조카와 조카며느리를 잃었다고 한다.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할머니의 기억 속에는 `징그러운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아이구 뭘 그렇게 적었싸, 나 잡아갈라구 그려..."
이 것, 저 것 묻는 기자에게 웃음 가득 띤 얼굴로 툭 내뱉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질곡의 역사를 살아온 `서민'들의 주름 깊숙히 박혀 있는 `강압과 권위'에 대한 피해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구정남(72)할머니는 35살부터 장에 나오기 시작했다니 이제 옥천 5일장의 한 부분을 채운 지 35년이 훌쩍 넘어섰다.

"내가 14살에 결혼했어. 일정 때 일본 놈들이 가만 놔두질 않으니 어떡허겄어, 처녀들은 어디로 끌고 가고 그 지랄들이었는디 빨리 결혼해야지. 아직도 그 때 생각하면 이가 박박 갈려... 그렇게 시집 와서 애들 낳고 사는데 농사 조금 짓는 것 가지고는 먹고 살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이거 시작헌거여."

할머니는 요즘이야 장사가 제대로 안 돼 싸 가지고 나온 물건들을 저녁에 다시 가져갈 생각에 맘이 무겁지만 장사가 잘 될 때는 그렇게 신이 날 수 없다고 말한다.

"옛날에는 아주 재밌었어. 많이 팔 때는 5만원, 7만원까지도 팔렸으니까. 그 것 가지고 애덜 학교 보내고, 옷 사 입히고 허는 것이 얼마나 재밌었는데. 육성회비 제 때 못 내서 조르던 애들한테 육성회비 쥐어주면 좋아서 팔짝 팔짝 뛰면서 학교에 갔지..."

지금 생각해도 기분이 좋아지는지 할머니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그나마 육성회비 한 번 제 때 줘 본 적도 없는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장에서 직접 번 돈을 쓰는 재미가 있었단다.

"이제 자식들도 다 키웠고, 장사도 안 되는데 힘들게 뭐 하러 나오세요?"
"이게 `장병'이여 `장병'. 장사 안 되는 것 뻔해도, 할아버지가 나가지 말라구 그래도 이상하게 장만 돌아오면 또 나가. `장병'이 이게 아주 몹쓸 병이여..."

할머니는 자신은 `장병'에 걸렸다고 말한다. 조금씩 벌어들이는 `쌈짓돈'은 그렇다치고 장이 서는 날 장에 나오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한다. 꼭 그렇게 장에 나가길 망설이는 날은 장사도 잘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서 5일마다 장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물건들을 싣고 첫 버스에 올라 저녁 반찬거리 준비하러 장에 나오는 사람들까지 챙기면 어두컴컴해서야 집으로 향한다.

▶에누리, 덤 없으면 5일장인가?
할머니가 차지하고 있는 터는 한 사람이 앉아 팔 한 번 휘저으면 닿을 만큼 작은 공간이었지만 파는 물건은 족히 10여 가지는 돼 보인다. 누룩나무(?)껍질부터 냉이, 고춧잎 말린 것. 무 말린 것, 고구마 줄거리, 찹쌀, 사랭이... 등등. 모두 할머니가 직접 밭에서 혹은 산으로 들로 다니며 캐 온 것들이다.

"할아버지도 좀 도와주세요?" 가끔이지만 할아버지한테 고사리 좀 꺾어다 달라고 부탁하면 "어∼ 고사리가 폈을라나 모르겄다"며 먼 산보고 한마디 한 뒤 말없이 자전거를 타고 금천리로 향한다고 한다. 무·고춧잎도 직접 말리고 냉이도 직접 캔 것들이다.

"난 남한테 물건 받아서는 팔기 싫어... 그 사람들한테 돈을 주고 사면 내 맘대로 팔 수가 없잖아. 주고 싶을 때 듬뿍 듬뿍 주는 게 좋은데 그걸 못 허잖어. 그러면 단골 다 없어져. 나도 덤 못 주면 마음이 안 좋고. 중국산이 싸서 팔면 많이 남는다는데 그 것도 가져다 팔기 싫어."

5일장의 가장 큰 매력은 당연히 `에누리'고 `덤'이다. 그 것은 받는 사람도 신나지만 주는 사람도 좋은가보다. 남의 물건을 가져다 팔면 원가 계산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정' 붙는 에누리며 덤도 줄 수가 없어 할머니는 직접 기르거나 캔 것이 아니면 팔지 않는다고 한다.

찬바람을 맞으며 하루종일 앉아 있으면 뼈가 `오독오독'해 힘들다고 말한다. 그래서 5일에 한 번씩 하천 변 손바닥만한 땅 위에서 전을 펼치는 할머니는 깊어 가는 겨울이 걱정이다.

할머니의 걱정을 들으며 냉이 한 소쿠리 달라했다. 검은 비닐 봉지를 꺼내 한 소쿠리를 담은 할머니는 `젊은 사람이 사니 더 줘야 한다'며 덤을 잔뜩 담는다. 할머니의 정성이 가득 담긴 냉이를 들고 오며 마음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종종 5일장 구경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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