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식인 방한석씨
신지식인 방한석씨
함께사는 세상 [54]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1.11.17 00:00
  • 호수 59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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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채 걱정 안하며 이웃끼리 아웅다웅 웃으며 사람 사는 것처럼 농촌에서 살고 싶다는 방한석씨.
방한석(52)씨가 아내 박금순(49)씨의 고향인 군북면 석호리로 내려온 것은 지난 96년 그의 나이 47살 때였다.

대전에서 태어나 직장생활과 자기사업을 하던 그가 어릴 때부터 간직해 왔던 `농촌에서 살고 싶다'던 꿈을 실현하게 된 것이다. 그의 농촌에서의 삶에 대한 집착이 아내의 반대를 가르며 결단을 내릴 수 있게 했다.

각박하고 복잡한 도시의 삶에 지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전원 속에서의 삶을 꿈꿀지 모르겠지만 방씨의 생각은 `도시인의 치기'정도로 생각할 만큼 감상적이지 않았다.

"돈 많이 벌고 싶은 생각 없어요. 그냥 농촌 사람들이 빚 없이 이웃들하고 같이 아웅다웅 재미있게 살 수 있을 정도면 되죠"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환하게 웃으면 던진 그의 말에서 그가 생각하는 농촌에서의 삶은 `함께 사는 삶'이라는 것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참게' 알 것 같다
그가 50에 가까워진 결코 이르지 않은 나이에 선택한 농촌에는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이 있고 그 속에서 정신적으로는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질 수도 있었지만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소득만큼은 생각한 것처럼 그리 쉽지 않았다.

99년, 군이 시범사업으로 `참게 양식'을 제안했고 다른 8농가와 함께 참게 양식에 뛰어들었다. 희망과 꿈을 가지고 덤벼들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양식을 시작한지 1년이 끝나갈 때쯤 살아서 돌아다니는 참게는 1만 마리 중 5% 정도인 200마리 밖에는 되지 않았다. 경제적 고통으로 다시 도시에 나가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도 했지만 그냥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돈 70만원을 들고 무작정 참게 양식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중국으로 건너갔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는 중국 땅에서 어렵게 참게 양식장을 찾긴 찾았지만 이미 돈이 모두 떨어진 뒤였다. 제대로 기술을 배워보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귀국해야 하는데 차비가 없더라구요. 별 고생을 다하다가 중국에서 사업에 실패했다는 사람을 만나 간신히 차비를 마련해 귀국했죠.(웃음)"

비행기보다 쌀 것이라는 생각에 대련으로 배를 타러갔는데 오히려 더 비싸서 낭패를 본 이야기를 꺼내며 그 때 생각이 나는지 웃어버린다. 중국행은 그 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후로도 어려운 형편에 경비를 마련해 작업복 입고 고추장 단지를 챙겨들고 중국에 다섯 번을 더 들어가 판진, 꼬방즈, 상해 등지를 돌아 다녔다.

수첩에 적지도 못하게 하는 중국인들 틈에서 참게가 월동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과 논 한구석에 도랑을 만들어 급격한 수온 차의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방법 등을 익혔다. 야행성인 참게들의 행동을 파악하기 위해 밤에 손전등을 들고 논 주변을 서성이는 것도 다반사였다. 하루에 2시간도 채 자지 못하는 힘든 나날들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참게 양식의 자신감을 얻었다. `참게'가 어떤 녀석들인지 이제 좀 알 것 같다고 한다.

■도약 위한 지원 아쉬움
"아직 경제적으로는 힘들지만 자신은 있어요. 지금 상황에서 누군가 엉덩이를 걷어차며 한 번만 더 힘을 실어주면 잘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참게 양식 3년 만에 이제 참게의 생태를 조금 알 것 같은데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그의 앞에는 많이 놓여 있다. 수도 없이 항아리를 깨뜨리며 터득한 참게장 담는 기술(끊임없이 찾아오는 손님들로 차 한 잔 내주고 보이지 않던 박금순씨는 방한석씨와의 대화가 끝난 후 참게장 담는 기술자는 자신이라며 뿌듯하게 웃어 보였다)도 특허를 출원해야 하고, 상표도 등록을 해야한다. 당연히 적극적인 판매를 위해 전문적인 마케팅도 펼쳐야 한다.

무엇보다 새끼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배양장도 근처에 마련해야 한다. 지금은 임시방편으로 경기도 한 해안가 마을에 임대한 배양장에서 참게 새끼를 배양하고 있어 양쪽을 오가며 일을 하는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이 산들을 혼자 넘기에는 너무 벅차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는 참게를 논에서 기른다. 그래서 논게라고도 부른다. 물과 흙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참게여서 당연히 농약이며 비료를 섣불리 줄 수가 없다. 참게를 양식하기 위해서는 논흙을 소독해야 하는 정성이 필요할 정도다.

참게가 기어다니며 흙을 헤집어 놓는 것도 토질강화에 많은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따라서 참게 양식을 하는 논에서는 무 농약 쌀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600여 평의 논에서 참게를 양식하는 방한석씨의 경우 주변에서 쌀 주문이 제법 들어오지만 재배 면적이 적어 판매까지는 못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지역에 금산 하면 인삼이 떠오르듯 옥천 만의 것으로 특별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잖아요. 참게가 금산의 인삼과 같은 지역 특산품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주변에 전문음식점들도 좀 생겨나구요."

99년 당시, 시범사업으로 함께 시작했던 9 농가 중 자신만이 남아 참게 양식에 온 힘을 쏟고 있고 이제 조금 참게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웃의 농가와 함께 하고 싶지만 이미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군이 처음 시범 사업을 했을 때와 같은 마음으로 다시 한번 지원책을 강구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참게 양식과 무농약 쌀 생산이 단지화 되고 공동브랜드를 개발하는 등 지역 특산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농가의 힘만으로는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도 한 자치단체의 군수가 농정관련 공무원들을 데리고 그의 농장을 찾았다고 한다. 그 역시 `참게 양식과 무 농약 친환경 쌀 생산'이라는 부분 때문인 것 같다고 그는 해석하고 있다.

"구체적인 농가 소득원이 있으면 젊은 사람들도 돌아올 것이고 부채 걱정 안하며 이웃끼리 아웅다웅 웃으며, 사람 사는 것처럼 농촌에서 살고 싶습니다."

방한석씨는 참게 양식에 있어 지역의 중요한 인적 인프라였다. 이런 점을 인정했는지 군에서도 올해 신지식인으로 그를 선정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명예뿐만이 아닌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행정의 뒷받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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