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장 배달원 정민우씨
행복장 배달원 정민우씨
함께사는 세상 [53]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1.11.10 00:00
  • 호수 59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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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정민우씨는 자장면 통을 들고 다니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행복한 사람 정민우」
대화를 끝내고 연락처를 묻자 지갑에서 꺼낸 그의 명함에 적혀있는 문구였다.

항상 밝은 미소와 친절한 인사, 거침없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던 배달원 정민우(26·중국음식점 행복장 배달원)씨는 자신의 명함에 적힌 대로 정말 행복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이 풍족한 조건에서 자연스럽게 혹은 큰 노력없이 가질 수 있는 그런 행복은 아니라는 것을 그와의 대화속에서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일반적인 눈으로 볼 때 어떻게 저 많은 불행 속에서 저리도 밝은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제 2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그에게는 아픈 시련들이 많았다. 그 시련들을 하나씩 딛고 일어서 목표를 향해 무겁지만 힘차게 한 걸을 한 걸음 나가는 그의 삶에 대한 태도가 아름다웠다.

▶병마에 이어 화마까지...
그에게 배달과 인연을 맺은 것이 언제부터인지 물었다. 중국음식 배달 경력을 물었던 것인데 그의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로 저만큼 거슬러 올라가 있었다. 그리곤 아픈 기억들을 하나 둘 쏟아냈다.

"제가 조금 돈맛을 일찍 알았는가 봐요(웃음). 초등학교 시절 경향신문 지국이 있을 때 신문을 돌렸거든요. 한동안은 새벽에 신문돌리고 낮에는 중국음식 배달하는 생활도 했어요."

그는 `돈맛을 일찍 알았던 아이'정도로 자신을 낮췄지만 기자가 보기엔 가정형편이 그리 넉넉치 못했던 상황에서 용돈과 학용품 값 정도는 자신이 벌어서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철이 일찍 든 아이였다.

가뜩이나 어려웠던 가정형편에 중학교 시절 어머니가 크게 앓아 수술을 받자 아버지는 들로 산으로 몸에 좋다는 약초를 쫓아다니면서 가정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결국 베트남 전쟁 참전으로 자신도 몸이 좋지 않았던 아버지는 정민우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큰 수술을 받았다. 가족의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민우씨 본인도 군대를 가야 할 나이에 `결핵성늑막염'이라는 병명으로 대수술을 받게 되고 2년여 동안 몸을 추스르느라 별다른 일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97년경부터 평소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던 행복장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배달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힘든 순간들이 잊혀질 때쯤이었던 99년도 한 겨울, 그가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던 옥천읍 동안리 집에 화재가 발생해 집마저 잃게 된다.

"살아오면서 가장 절망적이고 힘든 순간이었어요. 가족과 제가 아팠을 때보다 더 힘들더라구요. 그 때는 철이 좀 들었었나봐요. 아직도 그때 아버지가 하셨던 말이 잊혀지질 않아요."

"그냥 불에 타 죽게 내버려두지. 왜 데리구 나왔냐?"는 아버지의 말에서 그는 `아버지도 이제 나이를 드셨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가정에 들이닥친 `병마'가 어느 정도 수그러들 때 달려 든 `화마'로 일주일간 멍해 있던 그는 나서서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재료를 모두 구해 아버지와 동생, 친구들과 함께 직접 새 집을 지었다.

"어떻게 보면 힘든 일이 참 많았죠. 사실 운 적도 많구요. 하지만 장남으로 부모님이나 가족들을 생각하면 그냥 그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정말 큰 힘이 되었어요."

정말 힘들었을 것 같은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는 그의 얼굴에서는 언뜻 언뜻 그늘이 스쳤지만 밝은 표정을 절대로 놓지 않았다. 고집스럽게...

▶목표를 위한 훌륭한 과정
아침 9시에 출근해 그날 사용할 양파·오이·콩 등 재료를 준비하고, 10시30분이면 동료들과 함께 아침식사, 11시30분부터 본격적으로 배달을 시작해 3시까지는 정신 없이 보내고 4시 정도면 점심을 먹는다.

잠시 쉬었다가 5시부터 시작되는 저녁 배달은 오후 9시나 되어서야 끝이 난다. 일도 힘들고 아직까지 배달 일을 아르바이트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 속에서 5년 동안 중국집 배달 일을 해오고 있는 26살의 젊은 청년이 갖고 있는 생각이 궁금했다.

"제 자신이 초라하다거나 지금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아요. 목표가 음식점을 갖는 것인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제게는 하나의 과정이니까요."

그리고 나이가 어려 잘 모르겠지만 예전보다 각박해진 세상에 `행복장 가족'(그는 대화 내내 `가족'이라는 낱말을 사용했다)들에게 느끼는 따뜻한 마음이 너무 좋다고 말한다.

"일이 힘든 것은 참으며 할 수 있지만 사람이 힘들면 정말 못하는 거잖아요.(웃음)"

역시 편견에 휩싸인 질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짓궂은 손님들을 만나거나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을 만날 때 직업을 바꾸고 싶은 생각이 들 때는 없느냐고 다시 물었다.

"지금 제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요. 제가 자장면 통을 들고 다니건, 다른 사람들에게서 `짱개'라는 말을 듣는건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 못 배워서 또 돈이 없어서 꿀릴 필요는 없거든요. 그런 사람들과는 사는 방식이 조금 다를 뿐이지 하루 세끼 밥 먹고사는 건 마찬가진데 초라해질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가끔 배달 현장에 마주친 그에게서 느껴졌던 당당함과 환한 미소, 자신의 직업에 대한 애착 등이 모두 이런 생각에서 나온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요즘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얼마전 장애인 동거 부부 합동결혼식에서 어머니가 면사포를 쓰고 기뻐하는 모습도 보았고 더 이상 고난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다.

마지막으로 그는 기자에게 "우리 행복장은 배달통을 하루에 네 다섯 번씩은 꼭 닦는다는 것과 군부대, 학교, 보오리, 추소리 등에도 배달을 간다는 사실은 반드시 적어야 한다"며 크게 웃는다. 역시 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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