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건너에 살고 있는 화가와 시인 부부
강 건너에 살고 있는 화가와 시인 부부
함께사는 세상 [47]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1.08.11 00:00
  • 호수 58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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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명자(화가), 홍성규(시인) 부부
화선지 위에 피어오른 부들, 고개를 외로 틀고 깃을 고르는 물오리.문인화가인 박명자(55)씨가 그린 `부들춤'이다. 혹시라도 동이면 용죽리 올목에 가서 물오리 노는 모습을 본 경험이 있다면 그림이 한 층 더 익숙할 지도 모르겠다.

그 그림 한 켠에는 아래와 같은 시와 함께 작가의 이름이 적혀 있다.

『여름내불단얼굴장대높이달아메고어디만큼오시려나키대보기시샘으로이슬길꿈길내달아아침여는부들춤 홍성규님시정축년봄야청박명자』

]시를 읽고 그림을 보면 더 재밌다. 붙단 얼굴로 키대기를 하는 부들이 한 층 더 정겨워진다. 화제를 쓴 시인 홍성규(61)씨는 그림을 그린 박명자씨의 남편이다. 그렇게 박명자씨는 문인화를 그리고 남편 홍성규씨는 벽에 붙여 놓은 아내의 그림을 며칠씩 들여다보며 머릿속에 자라는 시어들로 시를 지어 아내의 그림에 얹는다.

▲올목 풍경이 작품의 소재
박명자씨와 홍성규씨가 올목 강변, 철봉산 아래에 자리를 잡은 것은 지난 97년 봄이다. 대전에서 은행을 다녔던 홍씨가 명예퇴직을 하면서 옥천과 인연을 맺게됐다. 문인화를 그리는 박씨의 작업실을 겸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 공주, 금산 등을 돌아다니며 적당한 곳을 찾다가 올목에 반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 곳에 온 뒤로 그림이 많이 좋아졌어요. 예전에는 남이 그려 놓은 것을 보고 그리다보니 실제로는 한번도 보지 못한 소재를 그리곤 했거든요. 그러면 사물을 표현하는데 작가만의 개성을 살리기가 힘들죠." 홍씨의 얘기다. 15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선 박씨의 곁에 있어서인지 박씨의 그림을 평가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여하튼 박씨 자신도 부들이며 올목강변에서 노는 물오리며 버드나무, 원추리, 조롱박 등을 직접 보고 작업을 하면서 표현의 범위가 넓어지고 깊어졌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긴 홍씨가 그런 점 때문에 몇 개월씩 다리품을 팔며 찾아낸 곳이니 오죽하랴만.

"문인화는 반추상에 가깝거든요. 밑그림이 없어서 한 획에 그 사물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정확히 잡아서 그려야 해요. 그러려면 그 사물에 대한 작가의 깊은 인식이 필요하죠." 박씨의 설명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작품 중에 인정을 받는 작품의 소재도 올목강변 에서 볼 수 있는 소재들이다.

"집요한 관찰을 통해 그 형태는 물론이려니와 생태까지도 속속들이 이해함으로써 단순한 화보에서 익힌 바와는 다른 이미지 및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오리를 소재로 한 작품 몇 점은 평가할 만한 가치가 있다"-신항섭(미술평론가)-

동아미술대전 초대작가이기도 한 그녀가 동아미술대전에서 특선을 수상한 작품도 남편 홍씨의 고향인 전북 익산에서 꺾어와 거실에 꽂아 놓았던 부들을 소재로 그린 작품이었다는 것도 결국은 같은 맥락일 것이다.

▲서로의 작품에 대한 애정이 `뚝뚝'
작년 5월 홍성규씨는 그 동안 써 놓았던 시 90여편을 모아 `아무것도 나몰라라 불그레 타는 입술'이라는 시집을 발간했다. "어느 날부턴가 심사를 하다보면 남편의 시를 화제로 쓴 작품들이 보이는 거예요. 누가 쓴 것인지도 밝히지 않구요. 이대로 두면 안되겠구나 싶었죠."

첫 번째 시집을 서둘러 출판한 이유다. 자칫 시집 출판을 미루다보면 오히려 `시'를 빼앗겨 버려 자신이 시집에 남의 시를 도용한 것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어린 시절부터 시를 좋아하고 습작도 했지만 결국 은행원으로 근무했던 홍씨가 본격적으로 시를 쓸 수 있도록 독려했던 것도 어찌 보면 박씨의 그림이다.

홍씨가 30대 후반에 접어들어 전업작가의 길을 걸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는 아내의 등을 떠밀며 힘을 실어주었던 것처럼. "코메디언들이 웃음으로서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웃음을 주잖아요. 예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점점 힘들어지고 격해지는 세상에 윤활유 같은 구실을 하는 거겠죠.

사람들이 좋은 그림을 보고나 좋은 시를 읽으면서 `아 좋다. 예쁘다'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만큼은 모두가 선하잖아요. 그런 작품을 못 만들어 내는 것이 부담이죠!(웃음)" 홍성규씨는 점점 더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서 예술가들이 담당해 주어야 할 몫을 얘기한다. 두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는 예술가이기도 하지만 농부이기도 하다.

용죽으로 이사를 오면서 대부분의 음식을 자급, 자족하게 된 홍씨 부부는 넓직한 마당 곳곳에 가지, 머위, 호박, 고추 등을 심은 것도 모자라 한 쪽에는 닭, 오리를 비롯해 벌도 키우고 있다. 올목 강 건너에는 문인화를 그리는 아내와 시를 쓰는 남편이 밭도 메고, 닭도 치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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