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장날 만나는 보리차 아줌마 최가선씨
옥천장날 만나는 보리차 아줌마 최가선씨
함께사는 세상 [46]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1.08.04 00:00
  • 호수 58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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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차를 자전거에 싣고 장바닥을 누빈지 12년. 대가를 바라지 않고 봉사하는 최가선씨의 미소는 마음씨만큼이나 고왔다.
날씨가 참 이상타. 해가 쨍쨍 하다가도 장대같은 비가 주룩주룩 쏟아진다. 옥천 장날이었던 7월30일에도 그랬다.

장이 서는 날이면 어김없이 시원한 보리차를 자전거에 싣고 장바닥을 누빈다는 최가선(63)씨를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시간에 비가 내린다.

"비 오는데 나오실 수 있겠어요?"
"아이구 나가야지. 장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안나가면)안돼."

조바심에 전화를 끊고 조금 기다리자 모자에 천을 둘러 옹종맞게 비를 가리고 최씨가 나타난다. 환한 미소와 함께... 최가선씨가 더운 여름 시장을 돌며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보리차를 나눠주기 시작한 것도 8월1일로 딱 12년을 채우고 13년째 들어선다고 한다.

최씨의 뒤를 따라 졸졸거리며 시장에 들어서자 "아이구 아주머니 또 나오셨네...", "복 받을 거예요."라는 말들을 쏟아 놓으며 전을 벌인 사람들이 물 한잔 시원하게 받아 마신다. 12년이라는 시간 때문일까, 물을 주는 이도 그리고 그 것을 받는 이도 너무 익숙한 모습으로 활기 넘치는 5일장 풍경에 그대로 녹아 있다.

▶벌써 물나른지 12년
최가선씨의 장남이 학사장교로 군에 입대했던 것이 12년 전 이맘때다.

"아들 군에 보내 놓고 날이 뜨거워 밖을 내다보면 고생할 아들 생각에 그렇게 눈물이 나는 거야... 그러다가 이러면 안되겠구나 생각했지. 그래서 이 일을 시작했어."

어려운 살림에도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것에 익숙했던 최씨는 더위에 고생하는 아들에게 시원한 물 한잔 준다는 마음으로 장날이면 시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나도 산을 좋아하는데. 한참 목이 마를 때 시원한 물 한 잔 들이키면 얼마나 시원하고 좋은데. 그래서 목마른 사람들의 마음을 알지."

처음 물을 자전거에 싣고 장에 나갔을 때는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두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참을 망설이다가 "아주머니 그 물 한 잔에 얼마요?"라고 묻는 사람부터 "아줌마 누가 선거 나가요?"라고 묻는 사람까지...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최씨의 작은(?) 호의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날이 더워지면 5일장 사람들이 먼저 최씨를 찾는다.

장을 보기위해 장에 나가면 "아주머니 오늘은 물 안 주세요?"라며 물어온다는 것. 예전에는 조금 더워졌다 싶으면 바로 장에 나섰는데 이제는 나이를 먹어서인지 한 말이나 되는 물통을 자전거에 싣고 돌아다니는 것이 힘에 부쳐 쉽지 않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초복부터 말복까지만 물 배달 서비스(?)를 하고 있다.

"세월도 참 빠르지만 한 살 한 살 나이 먹는 것도 무시 못하겠어. 예전에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지금은 조금씩 힘들어져서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래도 약속만큼은 어김없다. 서울에 있는 아들네 집에 놀러 갔다가도 장이 서는 날이면 어김없이 고향으로 돌아온다. 장에서 시원한 물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한 번쯤 빼먹는다는 생각은 절대로 못한다.

▶몸이 힘들어 내가 못하더라도 누가 계속 해줬으면 좋겠어...
"돈이 많으면 돈으로 봉사를 하겠는데... 돈이 많지 않은데도 이렇게 봉사할 수 있다는 게 좋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도 좋구."

최씨가 벌이고 있는 일들은 정말 하고싶지 않고서는 못하는 일들이다. 5일에 한 번씩 물을 가져다 주기 위해 매일 물을 끓이고 얼려 맛있는 보리차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수고와 정성은 어떤 가치로도 환산할 수 없는 것이고 환갑잔치 하라며 자식들이 쥐어준 돈으로 옷가지와 쌀을 사다가 주위에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달하는 것들도 모두 최씨의 천성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간혹 물을 건네주고 돌아서는 최씨의 옷 끝을 붙잡고 팔던 물건을 집어 주는 이들도 심심찮게 만난다. 혼자만 복 짓지 말라며 꼭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 받으려고 했으면 날 뜨거운데 물을 뭐 하러 갖다 줘... 그 사람들 마음만 받으면 됐지."

그냥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서 흐뭇함과 보람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최씨는 큰 보상이라고 말한다. 언제이던가 삼계탕 재료를 사러 갔다가 손에 쥐어주는 황기를 어쩔 수 받아 온 것이 12년 동안 전부다. 지금 최씨가 바라는 것은 자신이 힘에 부쳐 일을 못하게 될 경우 뒤를 이어서 누가 이 일을 계속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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