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생활체육옥천군협의회 김양곤 사무국장
국민생활체육옥천군협의회 김양곤 사무국장
함께사는 세상 [43]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1.07.14 00:00
  • 호수 57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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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곤 사무장
▶엘리트 체육을 넘어 생활체육으로
해가 거듭될수록 생활체육이 주민들 곁으로 바짝 다가서고 있다. 국가 체육정책도 점점 생활체육으로 그 무게 중심이 이동하고 있고 지난 6월15일부터는 제주도에서 첫 '2001생활체육전한마당축전'이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우리 군도 어느덧 축구, 게이트볼, 볼링, 국궁, 배드민턴 등 11개 생활체육종목에서 1천800여명의 동호인들이 참여해 승부를 넘어선 체육활동을 즐기고 있다.

이런 결과는 여가생활과 건강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이 높아진 것도 이유겠지만 96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국민생활체육옥천군협의회(회장 정영기, 이하 생체협)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다.

▶생체협과 함께 한 5년
공설운동장 스탠드 아래의 작은 사무실. 화려한 조명이나 산뜻한 향기보다는 어두 침침하고 습한 냄새가 지하실도 아닌 그 곳에서 지하실 분위기를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그 곳에 들어서면 새카만 얼굴 때문에 더욱 도드라진 하얀 이를 들어내며 웃는 김양곤씨가 있다.

생체협 사무국장 김양곤(36). 96년 서른 즈음에 당시만 해도 흔하지 않았던 `사회체육지도자' 자격증을 갖고 있었던 것 때문에 생체협과 인연을 맺게 됐다. 처음 사무국장 일을 시작했을 때는 군에 생활체육이 막 태동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변변한 사무실도 하나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중앙과 도 협의회에서는 각종 프로그램들을 내려보냈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일단 아내 가은순(34)씨가 운영하는 천하체육사에 사무실을 차려 놓고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사무실 이곳 저곳에서 서류를 만들고 생활체육이 잘 진행된다는 다른 시·군을 쫓아다니며 축적된 노하우를 배웠다.

결국 96년 절반밖에 소화하지 못했던 프로그램을 97년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소화하기 시작했다. 각종 여성교실과 공설운동장, 삼양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리고 있는 아침강좌을 비롯해 청소년 축구교실 등이 모두 생체협 프로그램들이다.

특히 축구부가 없는 옥천에서 생체협의 `어린이 축구교실'을 통해 자신의 적성을 발견 하고 진로를 `축구'로 정한 어린이들이 하나 둘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그는 강조한다. 지금까지 학교 체육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 체육환경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구체적인 모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주민들이 점점 늘어나고, 교실을 통해 자신의 적성과 소질을 발견하는 어린이들을 보면서 그는 생활체육의 가능성을 엿본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가능성이 중도에 몇 번이고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 어려움을 겪었던 그를 지금의 일에 붙들어 놓고 있는 이유가 되고 있다.

이렇듯 사무국장 일을 하면서 보람도 느끼고 처음 생체협 사무국장을 맡았을 때 보다 상황이 좋아졌음은 틀림없지만 앞으로 해결해야 할 일들도 산적해 있다. 무엇보다 그를 안타깝게 하는 것은 생체협에 가입되어 있는 각 종목별 연합회원들의 피부에 닿을 수 있는 사업들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체협의 조직력 강화는 결국 각 종목별 연합회의 결합과 집중력인데 생체협에서 운영하는 각종 교실 등의 사업비 이외에는 별도의 예산이 확보되지 못한 상황이어서 많은 어려움이 있는 상황이다. 그나마 점점 생체협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많은 생활체육인들이 도와주고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되고 있다.

또 하나는 주민들이 어디서나 생활체육을 즐길 수 있도록 소규모 체육시설이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는 곧 복지와도 연결되는 부분이지만 아직까지는 미흡한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최근 군에서 건립 추진중인 문화체육센터에 대한 기대가 그 누구보다 크다.

▶킥복싱을 옥천에 들여오다
영동이 고향인 김 사무국장이 옥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89년. 그가 군대를 제대하던 해다. 고등학교 시절 내성적인 성격을 바꿔보겠다는 생각에 우연히 시작한 킥복싱에 흠뻑 빠진 것이 옥천과 인연을 맺게 했다.

80년대 중반 킥복싱 한국참피온 타이틀을 거머쥘 만큼 킥복싱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하다. 무엇보다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과 스스로 맞아가면서 상대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이 킥복싱의 매력이라고 설명한다.

한 때는 직장생활도 하고 대학입시 준비도 했지만 두 가지 모두 잘 되지 않았다. 결국 고등학교 때부터 생각했던 킥복싱체육관을 열겠다는 그의 뜻을 조금 빨리 펼치게 되었다. 그리고 89년 옥천에 `천하체육관'을 열게 됐다.

한번 결정하면 앞만 보는 그의 성격 때문인지 제대하기 전 마지막 휴가를 나왔을 때 체육관 차릴 곳을 알아보고 계약을 해 버렸다. 그는 체육관을 농사와 비교한다. 열심히 한 만큼 관원들이 늘어난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체육관을 시작하고 킥복싱 인구가 한 때 100명이 넘을 정도로 많은 관원들이 찾아왔지만 공업고가 없어지는 등 몇 가지 이유로 인해 지금은 침체기를 겪고 있다.

현재는 모든 운영권을 제자에게 넘겨주었지만 아직도 킥복싱 체육관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체육관에 들러 운동을 하려고 노력하고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것이 그의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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