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순례 39
유적지 순례 39
석탄리 김상기 효자비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0.07.28 11:04
  • 호수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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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읍 수북리에서 물이 빠졌을 때는 옛 기억을 더듬으며 다리를 건너 들어가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물이 차올라 있을 때는 배를 타고 줄을 당겨 동이면 석탄리에 닿는다.

막상 석탄리에 닿으면 아늑하니 뒷산을 배경으로 우리나라 전형적인 마을 입지인 배산임수 지형임을 대뜸 알아볼 수 있다. 당연하게도 뒤에는 산이 앞에는 대청호가 차올라 있기 때문이다. 옛부터 선사시대의 고적이 있어 그중 안터 1호 선돌과 고인돌은 충북유형문화재로 지정 되어 있다시피 문화적 가치가 많은 부락이기도 해서 이곳에 세워져 있는 효자비는 특별히 눈길을 끈다.

나룻터에 내리자마자 어디에서든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작은 언덕 위에 위치한 김상기 효자비.

이 비는 고종 43년(1904년) 김효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정려하여 세운 한 평의 다포식 목조 기와집 정문(旌門)이다.

김상기 효자는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어머니가 두부를 잘못 먹고 체해 돌아가셨기 때문에 평생 동안 두부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아홉 살 때라면 부모 앞에서 마냥 재롱을 떨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두부를 안먹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얼마 후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들였고 새어머니는 성질이 괴팍하여 집안이 불안하게 되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내보내려고 했는데 이를 본 김효자는 새어머니에게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탓이라 얘기하며, 앞으로는 친어머니같이 대할 것이라고 아버지를 설득하고 만류하여 서모와 함께 살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한다.

이를 본 새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넓은 아량에 감동하여 아들에게 사랑을 쏟게 되었으며 이로써 가정의 행복을 되찾았고 김효자 또한 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어느 때는 아버지가 병으로 누워 신음하게 되었는데 매일 강을 나가 잉어를 잡아 고아 드려, 정성이 지극했음인지 병도 쉽게 나았고 몸도 건강해져 천수를 다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인정이 많아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어 집안사람이나 마을의 간난한 사람을 도와주게 되니 그의 착한 품성과 효성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것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정려하게 된 것이다.

현재 김해김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1년에 한 번 시사를 지내고 있는데 편액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孝子嘉善大夫同之中樞府事龍讓衛副護軍金相基之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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