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적 지 순 례 32
유 적 지 순 례 32
이원면 지탄리 포동효자 : 박 인충신 : 박동룡두개의 편액 나란히효자와 충신의 뜻 기려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0.06.09 11:04
  • 호수 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원면 지탄리 포동 마을의 뒷편, 경부선 철로변 1백미터 지점에 비교적 가지런히 위치하고 있는 한채의 정려문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몇몇 깨어진 기와의 틈 사이로 잡초들이 자라고 있었고, 정려문 정면 논에서는 모내기가 한창 건행중이었다. 담벼락 위에로 탱자나무가 고개를 치켜든 이곳 정려문 아래로는 두개의 편액이 나란히 걸려있어 색다른 모습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우측으로 위치하고 있는 비교적 오래된 편액은 이원면 지탄리에서 태어난 효자 박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老孝子朴***」라는 글이 기록되어 있었고 좌측으로는 박인의 효자요 인조때의 충신인 박동룡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忠*撞主薄朴東龍之門」이라고 기록된 충신문이 있는데 두개의 편액은 나란히 걸려 있었다.

이원면 지탄리에서 태어난 박인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말에 순종하고 효도하여 칭찬이 자자하였고 후에 종사품인 만호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비록 관직에 올라있으나 항상 부모공양을 염려하던 박인은 끝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 모시기에 정성을 다하였다.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기기를 다하겠다는 마음으로 온 정성을 다하여도 어버이가 병환으로 고생하시면,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금강으로 나아가 얼음을 깨어 잉어를 잡아와 고아 드렸다고 한다.

효행을 다하던중 임진왜란으로 이 마을에 들이닥친 왜병들이 그 아버지를 해치려 하자 아버지를 대신하여 칼에 맞아 죽게 되었고 그때 그의 나이 59세였다.

그의 효행은 꼬리를 물고 이웃으로 번져 조정에서 알게된 선조임금은 1579년 그를 효자로 정려, 정려문이 서게 된 것이다. 한편 좌측에 걸려있는 충신문 편액의 주인공인 박동룡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는 스스로 지원하여 인조와 소현세자가 피난하여 있는 남한산성으로 종군,그곳에서 청태종의 군사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후 반세기가 흐르고 선조 32년 박동룡의 애국충정을 기리고자 이곳에 충신문을 건립 하였으니, 이에 박인의 효자문과 함께 두개의 편액은 나란히 서게 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