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해외참전전우회 김경희 옥천지부장
대한해외참전전우회 김경희 옥천지부장
함께사는 세상 [41]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1.06.30 00:00
  • 호수 57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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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의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참혹한 길을 걸어야 했던 그에게 의무를 지었던 절대권력 국가는 그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전쟁은 파멸이지....
1966년 11월 어느 날, 겨울이어서 어둠이 일찍 내려 밤 9시40분에는 이미 주위가 암흑이었다.

그 시간에 이름이 호명돼 불려나가니 짐을 챙겨 집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그대로 차에 올라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한 달간 훈련을 받고 해가 바뀐 67년 1월 통일호를 타고 훈련장을 떠났다.

군번 1166594번 김경희 일병.
김 일병은 그렇게 베트남으로 향했다.

"그 때는 이 대로 죽는다고 생각했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옥천역을 통과할 때가 밤 12시40분이었어. 그 한밤중에도 철로 변에는 사람들이 나와서 태극기를 흔들었고 옥천이 고향인 사람들은 모두 창 밖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어. 그렇게 가화리 굴다리를 지나는데 온 몸에서 힘이 쫙 빠지더라구. 아 이제 끝났구나...."

벌써 30년이 훨씬 지나버린 일인데도 김경희(61·대한해외참전전우회 옥천지부장)씨는 그 때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 표정이 굳어진다. 결국 도착한 곳이 부산 제3부두. 이미 소식을 듣고 달려온 가족들로 그 곳은 난장판이었고 교체병력으로 베트남전에 투입되는 맹호부대원들은 배에 옮겨 탔다.

"4층 높이는 됐을 꺼야. 그렇게 큰 배는 처음이었으니까. 밑을 내려다보니 뒹굴고 몸부림치는 아주머니들이 보이더라구. 아들이 죽으러간다는데 그 마음이야 오죽했겠어"

그리고 `통제'. 당시는 전투가 치열할 때라 가면 모두 죽을 것이라는 생각밖에는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병력이탈을 막기 위한 통제가 철저했다고 한다. 그렇게 배에 실려 5박6일의 긴 항해 끝에 도착한 곳이 사단사령부가 있던 `키논' 이었다.

"1년을 그 곳에서 보내고 귀국했어. 후회?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그 곳에 가지 않았으면 내 몸이 지금 같지는 않았을텐데'하는 생각은 들지"

▶양민학살' 그 참을 수 없는 `당혹감'
한국전쟁 기념식이 열렸던 6월25일 관성회관을 찾았을 때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사진자료는 한국전쟁보다는 오히려 베트남 전쟁 관련 자료였다. 그 자료들은 작년 국군의 `양민학살' 문제가 대두되면서 일어난 참전군인들의 격렬한 시위장면이 오버랩 되면서 깊은 인상으로 다가왔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기념식이 열린 다음 날 약속장소인 재향군인회관 사무실에는 김경희씨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입을 연 김 지부장의 입에서는 `명예회복'이라는 말이 제일 먼저 나왔다.

"대통령들이 우리들을 `용병'이라고 표현하는 나라가 이 나라야. 이게 말이 되냐구? 우리가 왜 베트남엘 갔는데... 이 나라가 이 만큼이라도 살게되고 경부고속도로가 뚫린 것이 누구 때문인데."

김 지부장은 다른 것보다 명예회복이 먼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작년부터 논란이 일기 시작한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양민학살' 문제가 이슈화 된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 기자가 전쟁을 아는지 모르겠어? 더군다나 군복을 갖춰 입은 적군과 대치하는 상황도 아니고 누구 양민이고 누가 베트공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치러야 하는 전쟁이었으니까. 지금까지 벌어진 전쟁 중에서 양민이 죽지 않은 전쟁이 어디 있나? 그 상황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설명해도 절대로 모르지."

하지만 그런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전혀 불필요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양민학살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그 것은 아니다'는 짧은 답변을 한다. 또 그런 주장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자체 진상조사를 위해 작년 충북지회에서 6박7일의 일정으로 베트남의 전적지를 둘러보았다고 한다.

통역을 대동하고 찾은 베트남 그 어디에서도 양민학살에 대한 진술은 확인할 수 없었다고 강변하는 김 지부장. 양민학살 문제로 출발한 `명예회복'에 대한 얘기를서둘러 접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거대한 역사적 기류에 휩싸여 `전쟁의 광기' 라는 최악의 상황을 경험한 개인으로서의 그를 자칫 `가해자'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한국군의 양민학살 문제가 제기되면서 그들이 느꼈을 `당혹감'이 어느 정도였을지 김 지부장을 통해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당혹감은 전쟁터에서나 느낄 수 있는 극도의 공포감과 비슷한 수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명예회복'
오히려 20대에 참혹한 전쟁을 경험하고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의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내가 옥각리에 살고 있는데 유난히 헬기가 많이 날아다니지, 겨울에는 별로 모르는데 지금처럼 주변이 녹색으로 물들면 기분이 이상해지면서 월남의 기억이 떠오르고 기분이 묘해지는 거야.."

김 지부장이 겪고 있는 고엽제 후유증과 함께 전쟁스트레스로 나타나는 후유증이다. 이런 정신적, 신체적 후유증은 사회적인 소외와 겹쳐지면서 `명예회복'에 대한 요구를 더욱 강하게 하고 있다. 대화 내내 김 지부장의 입에서 가장 강력한 어조로 나온 얘기도 바로 `명예회복'이다.

더군다나 최근 광주민주화운동을 비롯한 각종 민주화운동 유공자에 대한 명예회복 방안들이 제시되면서 이런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고엽제에 대한 진단과 인정이나 쉽게 받을 수 있으면..... 내가 여기 4층까지(재향군인회관 4층에 사무실이 있다) 올라오는데도 한 계단 오르면 쉬고, 한 계단 오르면 쉬고 그래야 돼. 하지만 보훈병원에 가면 왜 그런지 모른다는 거야. 그러니 이러다가 그냥 바짝 말라서 죽는 거지 뭐..."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면 보험가입도 쉽지 않다. 또 딸이 결혼하는데 피해를 볼 까봐 자신이 고엽제 피해로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회원들도 있다. 고엽제 피해를 입을 경우 기타의 병이 자녀에게 유전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전쟁에 참전했던 몇몇 회원들의 고통을 전하는 김 지부장의 어조는 점점 높아졌고 연신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의 모습에서는 초조함마저 느껴진다. 베트남에서의 경험은 1년 남짓이었지만 그 1년은 지금까지의 그의 인생 전부를 구속하고 쉴새없이 갉아먹고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고통을 시원하게 책임진 곳은 아무 곳도 없다. 오히려 경제성장이라는 지상 최대의 과제(?)속에서 의도적으로 망각의 강 저편으로 밀어 놓았던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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