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암' 묘희 스님과 원각 스님
'덕수암' 묘희 스님과 원각 스님
함께사는 세상 [39]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1.06.16 00:00
  • 호수 57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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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이면 우산1리 승주골에는 작은 태고종 사찰 덕수암이 있다. 그곳에서 만난 묘희(좌) 스님과 원각(우) 스님.
▶원각 스님의 세상을 품은 미소가 머무는 곳 '덕수암'
동이면 우산 1리로 들어서는 작은 터널을 지나면 눈에 들어오는 정겨운 들판과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나타난다.

그곳 승주골에 작은 태고종 사찰인 `덕수암'이 있다. 마을에 들어가 큰 정자나무 아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주민들에게 덕수암의 위치를 묻자 상세히 설명해 주곤 조심스럽게 살핀다.

"그런데 거기는 무슨 일로 가세요?" 외진 동네에 찾아오는 이방인이 여전히 주민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인가보다.

대략 이유를 설명하고 일러 준 길을 따라가다 보니 산비탈 그림자가 내려앉은 마을이 끝나고 콘크리트 포장이 되어 있는 길이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고 있다. 그 길을 조금 오르니 작은 공터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지은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요사채가 앉아 있다.

차에서 내려 요사채로 올라서니 큰개 두 마리가 `컹컹'거리지도 않고 얌전히 손님을 맞는다. 합장을 하며 반갑게 맞아 주는 묘희 스님의 안내를 받고 요사채 마루에 걸터앉으니 맞은 편으로 시원한 산세가 펼쳐져 있다.

지난 5일 농협군지부에서 주관한 기우제에 참석해 바라춤을 추며 한 줄기 빗방울을 기원했던 `묘희 스님'과 스님의 어머니이자 덕수암의 조실 스님인 `원각 스님'이 주변 산세와 어우러져 그 곳에 있었다.

▶바라춤 통해 무상의 환희심 느껴
하얀 고깔에 손을 오르내리며 천천히 휘도는 모습이 바라를 양손에 들고 조금은 급하게 움직이는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불교의식으로서의 작법은 무용가들이 무대에 올라 추는 춤과는 분명 다른 것이 있다. 무용가들의 춤이 관객들의 시선에 놓이며 주객(主客)이 함께 존재한다면 승려들의 몸짓은 자신과 분리돼 결코 객(客)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의식인 범패와 작법, 작법은 범패와 대별해서 범무라 불리기도 한다. 범패가 불전에 올리는 소리의 공양이라면 작법은 몸동작으로의 공양이다. 작법은 크게 나비춤과 바라춤, 법고춤으로 나뉘고 나비춤(착복무)은 다시 춤이 쓰이는 용도에 따라서는 도량게작법 등 모두 15가지로 나뉜다.

바라춤은 천수바라, 요잡바라 등 6가지가 있다. 이 모든 범무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보름 낮, 밤을 해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묘희 스님은 설명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승려들의 범패와 작법이 모두 금지되면서 그 전수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고 쇠퇴하면서 승려가 아닌 일반 사회 무용가들에 의해서 작법이 재연되기도 한다. 하지만 승려들이 추는 전통 작법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묘희 스님은 말한다.

"저는 아직 멀었죠. 이제 배우는 중인데요. 하지만 춤을 추면서 느끼는 무상(無想)의 환희심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죠. 마음이 아주 편해요"

충주에 있는 해동불교대에서 바라춤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묘희 스님은 이번 기우제 말고도 매년 중봉충렬제 기간에 열리는 영규대사 추모제서도 바라춤과 나비춤을 영규대사의 영전에 올린다. "앞으로도 계속 춤은 추어야지요. 제가 가야할 길이라는 생각도 들구요."

▶인연이 욕심을 앞서...
묘희 스님이 불당에 들어가 예불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다. 찾아오는 신도들도 많지 않아 절 살림이 곤궁했던 그 때, 원각 스님은 예불에 있어서 만큼은 묘희 스님에게 호랑이 큰스님이었다.

"조실 스님은 항상 곤궁했어요. 어쩌다 찾아오는 신도들이 쌀 한 됫박을 놓고 가면 가는 길에 차비 하라며 꼭 반을 퍼서 도루 건네 주시곤 했죠" 나이가 들어 절을 나가야 하는가,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잠깐 했지만 결정을 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예불을 올렸던 법당이 어쩌면 묘희 스님에게는 세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각 스님이 조실 스님으로 물러나면서 교임(주지)으로 덕수암을 꾸려나가야 하는 묘희 스님은 좀더 적극적이다. 묘희 스님은 이제 찾아오는 신도들을 법당에 앉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속으로 들어가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는 미장원에도 가요. 일반인들이 할 수 있는 경험은 모두 하죠.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신도들의 삶을 함께 체험하지 못하면서 그들의 번뇌와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일까. 대웅전을 세워야 한다는 큰 불사를 계획하면서 `욕심'을 부리지는 않는다. 그러며 던지는 것이 `인연'이다.

인연이 되면 절을 찾게 되고 인연이 되면 큰 불사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원각 스님보다는 적극적으로 보였던 묘희 스님이었지만 이 대목에서는 자신이 30여년 동안 지켜온 `덕수암'에서의 생활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는 원각 스님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돌아가는 대로 오는 대로 치성껏 정성을 다하는 것이죠. 그냥 그거예요"

▶사람도 가물고 땅도 가물어 큰 일이야...
"지금 참 형편없어요. 사람도 가물고 땅도 가물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안에만 계시면 바깥소식은 어떻게 듣느냐는 물음에 원각 스님은 현대 문명의 이기인 텔레비전을 손으로 가리키며 걱정 어린 한마디를 던졌다. 덕수암에서의 짧은 시간동안 원각 스님의 세상을 다 품은 듯한 미소와 향기로운 솔잎차의 향기를 얻어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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