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24] 안남면 연주1리-배바우, 점말
신마을탐방[24] 안남면 연주1리-배바우, 점말
  • 류영우 기자 ywryu@okinews.com
  • 승인 2001.05.19 00:00
  • 호수 57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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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기관과 금융기관이 집중되어 있는 안남면에서 가장 큰 마을인 연주1리. 산기슭에 위치해 중앙으로는 들녘이 펼쳐져 있고 풍속과 순박한 인심은 이 마을의 자랑이다.
면사무소와 파출소, 안남초등학교를 비롯해 우체국, 새마을금고, 농협 등 행정기관과 금융기관이 집중되어 있는 안남면의 가장 큰 마을 연주1리.

달이 둥실 떠오르는 모습을 한 둥실봉 아래 배바우와 점말 등 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 졌으며 안남면에서도 가장 많은 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배바우에는 약 107여 호, 점말에는 3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중앙으로는 들녘이 펼쳐지고 산기슭에 위치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을 갖추고 있으며 풍속과 인심이 순박한 살기 좋은 고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마을이다.

1914년 행정구역 조정
연주리는 주암리(舟岩里)와 연지동(蓮枝同), 고성리(古城里)가 합해져 이루어진 마을이다. 향지에 나타난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1739년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주암리에 63호, 고성리에 10호 등 두마을에 73호가 거주한 것으로 나와있으며 1890년 신유장적(辛卯帳籍)에는 주암리에 73호, 연지동에 5호, 고성리에 6호 등 3개마을에 84호가 모여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후 1914년 연지동의 연(蓮)자와 주암리의 주(舟)자를 합쳐 연주리라는 지명으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87년 홍수 피해 후 현재 위치로 이전된 `배바우'
연주1리 전체 가구 수 110호 중 점말에 거주하는 가구는 단 3가구. 따라서 연주1리 2개의 자연마을 중 배바우는 연주1리의 중심마을이면서 안남면 전체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지난 87년 배바우 주민들은 대청호의 물이 면소재지로 역류하며 홍수피해의 무서움을 경험한 바 있어 지금도 많은 비가 내리면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 당시 홍수로 인해 현재 면사무소 앞 잔디밭에 위치해 있던 28가구는 수자원공사로부터 보상을 받아 위쪽으로 이동, 새로운 소재지를 구성하게 되었다.

대부분이 광산김씨 문중 땅
배바우에서 가장 오래된 문중을 찾는다면 광산김씨, 경주김씨, 초계주씨 등을 들 수 있다. 연주리를 지나기 위해선 광산김씨 문중의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을 만큼 대부분의 대지를 소유하고 있다. 현재도 연주1리에는 약 1/3 정도가 광산김씨 문중 소유의 땅이다. 많은 토지를 보유하고 있는 만큼 마을의 발전을 위한 관심도 높다.

초등학교를 비롯해 면사무소, 파출소 건립을 위해 땅을 희사했으며 마을에 전기를 공급하는 등 마을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문중이기도 하다. 특히 4대에 걸쳐 효자비와 공덕비가 세워져 있어 마을에 기여한 정도를 가늠해볼 수 있다.

5개의 공적비 문중의 자랑, 학교·파출소-면사무소 땅 희사
광산김씨에서 공적비나 효행비가 세워져 있는 인물은 김용선, 김시중, 김선철, 김선덕, 김삼순 등 5명이다. 현 안남우체국장인 김동백(41)씨의 4대조 할아버지인 김용선 선생은 어머니가 온몸에 고름이 생기는 병에 걸리자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 병을 치유, 마을 입구에 효행비가 세워져 있다.

또 그 아들인 김시중 선생은 현재 안남초등학교 땅을 기증해 지역 교육발전에 기여했으며 현 우체국장의 할아버지인 김선철 선생은 안남면 민선 초대 면장을 지내며 면사무소 땅을 희사했고 안남면에 처음으로 우체국을 개설, 마을 발전에 기여했고 부모님에 대한 효행도 모범이 돼 효행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김삼순 선생은 파출소 땅을 기증하는 한편 초대 우체국장을 지내며 주민에게 정보통신의 문화혜택을 보급하는데 크게 기여하자 지난 98년 12월 마을주민들은 주민들의 정성을 모아 공덕비를 세웠다. 이밖에 김선철 선생의 동생인 김선덕 선생은 안남면에 전기를 끌어오는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김선덕 선생은 면이나 학교, 지서를 오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등 선행을 베풀어 칠순 잔치때에는 식사를 대접하지 못할 정도로 축하객이 몰려 주먹밥을 돌렸다는 얘기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문중에서 가장 먼저 효행비가 세워진 김용선 선생은 옥천이 수해로 큰 피해를 입자 곡식을 풀어 주민을 구제, 도움을 받은 주민들은 하계리에 세워진 마을 자랑비에 그의 선행을 기록하고 있다.

이와 함께 김동백씨도 지난 99년 12월 준공된 안남 파출소에 자비로 80여 평의 땅을 매입해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땅과 함께 기증하는 등 선행을 베푸는 문중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이처럼 마을을 위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는 광산김씨 문중은 모두 고향을 떠나고 지금은 5가구만이 거주하고 있을 뿐이지만 문중에서 행한 선행은 주민들의 가슴속에 기억되고 있다.

하우스단지 형성, 소득작목 전환
면소재지를 구성하고 있는 마을의 특성상 상가를 운영하는 주민의 수가 많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거의 모든 주민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배바우 마을 주민 중 상점을 운영하는 주민은 모두 6가구. 하지만 6가구 모두 상점을 운영하며 조금씩 농사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벼농사 이외에는 별다른 소득작목 재배가 없었던 지난날과는 달리 최근에는 다양한 방법이 논의되고 있는 것도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모습을 보여준다.

9천평에 9농가가 참여해 하우스단지를 형성, 방울토마토나 오이, 고추 등을 재배하며 새로운 작목전환을 시도하는 것이 좋은 예다. 또 안남농협에서는 지난 92년 5월26일 서울 마포구 아현1동과 자매결연을 맺고 매달 직거래 장터를 운영, 쌀이나 고추, 마늘 등을 판매하며 주민들의 소득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마을 단합을 위한 환경 조성
마을의 발전을 위한 여러 단체의 활동도 눈길을 끈다. 주민 45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위친계(계장 정용근)나 부녀회(회장 정백순), 자치발전회(회장 최광근)는 마을 발전을 선도하고 있고 정주권 개발사업은 쾌적한 마을 환경 조성에 기여했다.

99년 건설된 마을회관은 주민들의 쉼터를 제공해 주었고 지난해 건설된 찜질방은 효율적인 운영으로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데 기여하고 있다. 또한 정주권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마을 앞길 포장은 어느 마을보다도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0년 전에 건립된 게이트볼장도 주민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있는 장소다. 연주1리 노인들은 물론 안남면에 거주하는 노인들이라면 누구나 참가해 여가를 즐기는데 좋은 장소로 항상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현재 배바우에 거주하고 있는 조봉월(96)씨는 안남면 전체에서 가장 고령으로 아직도 건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고 천재택씨도 90년을 마을의 발전과 함께 해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고려때부터 옹기 만들었던 점말, 옥천으로의 연결고리 역할
지금은 단 3가구만이 거주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15가구가 거주하기도 했던 점말. 안남면민이라면 누구나 옥천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점말을 통해 강가로 나가 뱃길로 수북리를 거쳐 옥천을 방문하곤 했다.

산간지역에 위치해 벼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주로 밭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고추나 참깨, 콩 등이 점말의 주 소득원이다. 단 3가구만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지만 마을 앞까지 도로가 잘 닦여져 다른 마을의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마을의 역사만을 따지면 점말이 가장 오래된 마을 중 한 곳으로 꼽힌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이곳에는 고려때부터 옹기를 만들던 곳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 지금은 단 2가구만이 거주하고 있지만 창녕조씨 문중의 집성촌이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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