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22] 군북면 이백1리-괴목
신마을탐방[22] 군북면 이백1리-괴목
  • 류영우 기자 ywryu@okinews.com
  • 승인 2001.04.21 00:00
  • 호수 5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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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북면 이백1,2리 6개 자연마을 중 이백리의 본동 괴목마을. 마을 앞 이백천을 넘어 옥천과 대전을 연결하는 국도가 지나 교통이 편리하고 인심 또한 좋아 고향을 지키는 사람과 외지인이 함께 어우러진 마을이다.
1993년 130가구 450명, 1995년 125가구 393명, 2000년 135가구 375명, 2001년 3월31일 현재 135가구 374명.

점차 농촌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 가운데 군북면 이백1리의 가구 수는 10년 전과 비교해 오히려 증가된 모습을 보여준다. 주민 수는 93년에 비해 76명이 줄어들었지만 가구 수는 5가구가 더 증가했다.

마을 앞 이백천을 넘어 옥천과 대전을 연결하는 4호선 국도가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인심 또한 좋아 고향을 지키는 사람과 외지인이 함께 어우러진 마을 이백1리.

대전과 지역적으로 가까운 특성 때문에 다른 직장이나 노동일을 하는 비농가 주민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농가의 비율이 떨어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백리의 본동 괴목마을
지금은 이백1리와 이백2리로 분리가 되어 있지만 분리 전 이백리는 괴목정(槐木亭), 백석(白石), 이지당(二止當) 3개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백리란 지명도 이 3개 마을이 합쳐지며 형성된 합성어다.

이백리의 지명에 대해 전 군북면장을 지내고 현재 대한노인회 군북면지회장을 맡고 있는 김상용씨는 "이지당의 이(二)자와 괴목정의 목(木)과 백석의 백(白)이 모여 백(柏)자를 사용해 1910년쯤에 이백리(二柏里)란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쓰기 편하고 잘 알려진 한자 사용을 위해 원래의 의미와는 다른, 백(柏)자의 흰백(白)이 일백백(百)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백리가 다시 1, 2리로 나뉘면서 1리에는 괴목마을과 갯골, 새마을 등 3개 마을이 포함되었고 2리는 면사무소와 파출소가 포함된 평지마을과 백석, 이지당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1, 2리 6개 자연마을 중 이백리의 본동은 괴목마을이다. 괴목이라는 지명도 마을의 상징인 파출소 내의 느티나무를 가리킨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된 이 느티나무는 약 400여 년의 수명을 자랑하며 마을을 상징수로 자리잡아 왔다.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노란이'
이백1리 마을 앞쪽으로는 환산성이, 뒤쪽으로는 노고산성이 위치해 있다. 이곳은 백제군의 최전방 요새지로, 항상 싸움이 끊이지 않은 지역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노고산성 아래에 위치한 괴목마을은 백제군과 신라군이 전쟁을 벌인 장소로 항상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마을주민들이 개동산이라 부르고 있는 노고산성이 축성된 마을 뒷산 아래 `노란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은 괴목마을 전체를 이르는 지명이 되고 있다.

김상용씨는 "신라군과 백제군이 전쟁을 치른 장소로 `노상 난리가 난다'고 해서 `노란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며 "지금의 괴목마을이 주로 싸움터로 이용되었지만 개동산 아래 노란이골에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전했다.

가장 오래된 문중 김해김씨
`노란이'란 지명이 말해주듯 삼국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지만 괴목마을에 가장 먼저 정착해 아직까지 문중을 이루고 있는 것은 김해김씨다.

이후 선산김씨가 정착해 마을형성 초기, 이백1리에는 김씨 성을 가진 주민들이 대다수를 차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김씨 문중이 이곳에 정착한 것은 약 200년 전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10대를 이어온 밀양박씨와 동래정씨, 은진송씨도 마을에 남아있는 오래된 문중으로 기록되고 있다.

▶백제인의 혼 담긴 산성, 대전-옥천간의 통로 방어하는 노고성
남쪽으로는 옥천과 군서를 연결하는 통로를 방어하면서 동쪽으로는 경부선 철도를 넘어 세워진 환산성과 함께 옥천과 대전을 연결하는 통로를 방어했던 노고성.

괴목마을 뒷산과 군서면 오동리 무중골, 이백리 갯골 사이의 숯고개와 연결되는 곳에 위치한 노고성(일명 할미성)은 식장산 줄기의 여러성과 함께 백제의 최전방 요새이다. 군서면 방향의 절벽부분을 제외하고 동북서방면에 자연 석재를 사용, 3, 4m 높이로 축성된 노고성은 대부분이 무너져 일부분만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아쉬움을 남겼다.

또한 성에 대한 역사와 의미 등을 기록한 안내판조차 없고 가장 윗 부분에 위치해 장대지(지휘하는 장수가 올라서서 명령하던 곳)로 보이는 곳에는 묘소가 있어 고대 유적 관리에 소홀한 점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고대 축성 연구에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가치에 비해 그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게 황건하 전 옥주문화동호회장의 말이다.

백제의 멸망을 좌우한 탄현, 노고성 아래 `숯고개' 가능성
"백제의 의자왕이 타락하여 환락에 빠져 있을 때 충신인 성충과 흥수가 다같이 육로로 오는 적은 탄현을 못넘게 하고 물로 오는 적은 백마강에 들지 못하게 하라고 간언한 사실이 있으나 이말을 듣지 않은 의자왕은 결국 탄현을 넘은 신라군과 황산에서 계백장군과 싸워 대패하였고..."

옥천군지에 기록된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보아 탄현은 백제 멸망을 좌우한 중요한 요충지다. 노고성으로부터 서쪽 능선을 따라 150m 정도 내려가면 군서면 오동리 무중골과 이백리 갯골 사이를 연결하는 `숯고개'가 나타난다.

옥천군지는 이런 백제의 멸망을 좌우한 탄현이 바로 이 `숯고개'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임에도 안내판이나 역사적 설명이 붙여지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할미성'과 `할애비성'의 전설
노고성과 관련해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에 의하면 "이 성을 쌓을 때 남자들은 모두 군대에 가고 없어 마을에 남아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성을 쌓았다.

한쪽의 성은 할아버지들이 쌓았고 한쪽은 할머니들이 쌓았는데 할머니들이 쌓은 성이 더 튼튼하고 견고해 백제의 변방 경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 성이 지금의 할미성이라 불리는 노고성이고, 할아버지들이 쌓은 성은 노고성으로부터 식장산 방향으로 1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고 전해진다.

전설과는 다른 `할애비성'
이 같은 전설과 달리 할애비성은 옥천군지에 노고성의 부속 망루 정도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지난 15일 찾은 할애비성은 오히려 노고성의 규모를 능가하고 있었다.

숯고개에서 서쪽으로 500m 정도를 올라가 군서면 오동리 점말마을과 자모리 윗자모실 마을과의 경계면 산 정상에 동서로 능선을 따라 축성된 할애비성은 남쪽의 성벽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너져 원형을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약 300m 정도의 둘레에 3m 높이로 축성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장대지 부분에는 돌로 쌓인 지름 약 2m 정도의 안쪽이 움푹 들어간 원형으로 된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에 봉화터가 있었다"는 주민들의 말을 따른다면 이곳이 봉화터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성의 내부 곳곳에 병사들이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만든 움푹 파인 지형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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