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53)옥천읍 응천리>아름드리 버드나무 물레방아 있었던 응천리
<마을탐방(53)옥천읍 응천리>아름드리 버드나무 물레방아 있었던 응천리
옥천읍 외곽 한적한 마을, 최근 신작로 뚫리고 새 마을회관도
젊은 이장·의욕적인 입주자 대표, 아파트와 마을 공존 모색
  • 황민호 객원기자 ijazz@naver.com
  • 승인 2013.08.09 10:56
  • 호수 1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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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회관 앞을 지키는 은행나무. 은행나무 앞에 마을 우물이 있다.

읍내 시가지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완연한 농촌도 아닌 것이 어중간하게 걸쳐 있다.

복닥복닥 사람과 상가들이 많아 소음도 많고 역동성이 있는 읍내 시가지가 움직이는 활동사진이라면, 도로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응천리는 정물화 같았다.

작열하는 태양아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즈넉했다. 이글거리는 열기만 타오르고 있었을 뿐 고요했다. 마을 입구 새말에 물레방아가 있어 물방아거리라 불렀다는 그곳. 서대리 방향 하천에 커다란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군락을 지어 있었다는 그 곳. 그 옛날 옥천장이 열리면 이원에서 삼청리 소정리에서 응천리 소로길을 따라 장터에 갔다는 이야기, 4번 국도 건너 마을 저쪽편 주유소는 말을 갈아타던 역참이 있던 곳으로 주막거리가 있었고 번화가였다는 것, 군서면 넘어가는 길 사목재 너머서 전라도 사람들이 한양 가는 길로 이용했다는 것. 가다가 해가 지면 소정리 중마루 언저리에서 하루 묵었다는 옛날 이야기들이 마을 회관 앞 정자에서 나지막히 흘러나왔다.

"응천리는 빈촌 중의 빈촌이었지요. 몬(못) 사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어요. 옥천읍에서도 신기리, 가화리 굴다리 지나 옛골목, 응천리 등이 몬 사는 사람들이 모여산다고 했는데 그중에서도 빈촌이 응천리였지요. 그때로 말하면 생활보호대상자들이 많았어요. 하루 한끼 밥 먹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지요. 응천리에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모였었구요."

마침 오이를 따러 왔다가 마을 정자에서 잠시 쉬고 있는 김영수(68)씨가 말을 해준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넓은 길 하나 없이 좁은 길과 골목으로 점철되어 있던 응천리는 성암리 원할인마트 바로 앞에서 응천리까지 2차선 도로가 뚫렸다. 그리고 몇 년 전에는 낡은 이층집 마을회관을 부수고 깔끔한 단층 마을회관을 지었다. 응천리를 중심으로 성암리와 서대리 일부에서는 건축 붐이 일어 서대리 쪽에는 전원주택 단지가 이미 많이 들어섰고 성암리 쪽에는 아파트를 짓는다고 한참 이야기가 돌고 있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정물화 같은 응천리에 무언가 개발의 활기가 약간 일긴 일었던 것 같다.

사실 응천리는 옥천읍 시가지 확장의 중요한 지점에 있다. 이미 포화된 상태로 주정차난이 심각할 정도인 옥천읍의 확장에 응천리는 뻗어나갈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마을 자체로 볼 때는 기회인지 위기인지 모를 일이었으나 지금 서대리에 위치한 옥천 조폐창이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옥천군에서 매입을 했더라면, 그리고 국제종합기계의 모기업인 동국제강 연수원이 군에서 추진한대로 유치되었더라면 응천리의 마을 지형은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로 확 바뀌어있을지도 모른다.

읍 시가지는 응천리를 지나 서대리까지 확장일로를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뤄지지 않았다.

응천리는 그래서인지 조용했다.

93년에 근로자 아파트로 준공된 청솔아파트가 병풍처럼 마을 위에 떡하니 버티어 있고 그 아래 옹기종기 골목마다 집들이 빈틈없이 앉아 있다. 나름 아파트와 주택이 공존하는 마을이다. 세대수로 볼 때는 거의 절반 쯤으로 나뉘어진다.

그 조용한 마을로 한번 들어가 봤다.

▲ 청솔아파트에서 본 응천리 마을 전경


■ 청솔아파트 93년 응천리에 만들어져

옥천문화원에서 발간한 옥천의 마을유래에 살펴보면 옥천읍 응천리는 법정리인 대천리 안에 포함된 마을이라고 짤막하게 서술되어 있다. "대천리의 또 다른 자연마을인 응천리는 예부터 마을 앞 국도변에 흐르는 금구천에 물레방아가 있어 물방아거리라 불렀고 근로자 임대아파트인 청솔아파트가 건축돼 거주인구가 늘어났다" 이정도다. 응천리의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라면 93년 청솔아파트가 세워진 것이다. 아파트 준공으로 인구가 두배가량 늘어났으니 가장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주로 노동자들이 많이 살았고 장기 근속자가 없던 탓에 이주율이 높아 마을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기보다 잠만 자는 베드타운 구실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현재 응천리 5개 반 중 청솔아파트에는 2개 반이 있다. 응천리 전체 200여 세대 중 103세대가 청솔아파트에 산다.
 

▲ 청솔아파트 입주자 대표 전영철씨

이전에는 마을과의 결합도가 떨어졌던 것이 사실이지만 최근에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이는 청솔아파트 입주자 대표를 맡고 있는 전영철(64)씨가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평택이 고향인 전영철씨는 1977년에 옥천으로 내려 와 옥천을 고향처럼 사는 사람이다. 시내에서 옥천천막사를 하는 전영철 대표는 옥천읍 양수리에 살다가 9년전에 청솔아파트로 이사를 와 8년째 입주자 대표를 하고 있다.

좁은 평수 낡은 아파트를 평생 거주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적고 이주하자마자 이사를 고려하고 있어 마을 일을 하기가 쉽지 않지만 전영철씨는 그래도 낡은 아파트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일단 그는 2년 남짓 오래된 이름인 근로자임대 아파트란 옛 이름을 등기부등본상에 지우고 청솔아파트란 실제 이름으로 바꾸는 데 고생을 많이 했다. 아파트 쉼터와 놀이터를 정비했다.

현재는 아파트 앞 슈퍼가 지난 9월 문을 닫아 고심중이다. 아파트 주민을 위해 조그만 구멍가게라도 들어와야 하는데 들어오려는 사람이 없어 걱정이란다.

그리고 본 마을과 교류를 끊임없이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전에 박효식 이장 볼 때부터 마을 회의에 자주 참여하고 같이 하려고 했어요. 같은 마을 울타리안에 있으니 적극 협조하고 같이 해야죠. 아파트 특성상 쉽지는 않지만 조금씩 길을 트고 자주 만나다 보면 언젠가는 그리 되겠지요."

그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공기 맑고 시내도 가까운 응천리야 말로 참 살기좋은 동네라고 이야기했다.

좁다란 골목길에 옹기종기 모여사는 응천리

응천리는 골목길 탐방하기 제격이다. 미로처럼 군데 군데 골목길은 막다른길까지 가기 전에 그 끝을 종잡을 수가 없다. 숨어있는 집들이 곳곳에 나타난다. 마을회관 앞 은행나무 우물을 지나 쭉 끄트머리까지 올라가 보면 10년 전 이장을 맡았던 박병윤씨 댁이 나온다. 마침 올라가보니 두 노부부가 정겹게 마주 앉아 부침개와 두부 지짐을 간장 종지에 찍어 드시고 계시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오후 두시 응천리 시계는 그렇게 갔다. 박병윤(74) 전 이장은 지난해 갑작스레 뇌졸중이 일어 몇 달간 대전 병원 신세를 졌다. 지금도 몸이 힘들지만 그래도 다시 회복되어 마을에 온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한다고 말한다. 그는 2006년 낡은 마을회관을 주민들이 이용하기 좋은 새 마을회관으로 바꾸는 데 많이 애를 썼다. 10여 년 전 옥천신문사가 응천리에 자리잡았을 때 자주 얼굴을 익혀서인지 어찌나 반갑게 맞이해주던지 감사할 따름이다. 옥천신문사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응천리 사옥을 사용했다. 그 당시 지면에는 응천리 옛 지명을 따서 '물방앗거리에서'라는 제목으로 칼럼이 나오기도 했다. 
 

▲ 김명성 이장과 아들, 딸의 모습.

■ 마을을 지키는 젊은 이장 김명성씨

골목길 따라 다시 내려오면 올해 새로 뽑힌 읍내에서 가장 젊은 이장이 사는 집이 나온다. 김명성(41)씨다. 그는 읍내 가장 젊은 이장이지만 응천리에서 살아온 경력만큼은 남에게 뒤지지 않는 그야말로 본토박이다. 고조할아버지 때 부터 터를 잡고 살았다 하니 족히 100년은 훌쩍 넘어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충북대 축산학과를 나와 옥천공고와 옥천중, 보은 자영고 등에서 농업교사를 하면서 농사를 지어왔던 아버지 김영수(64)씨가 고등학교 3학년때 개축한 50년 가까운 역사를 간직한 집이 아직 있고 그 한켠에는 명성씨가 초등학교 3학년때 지어진 집이 있다. 고조할아버지가 응천리에 세운 일가에서 삼대가 사는 집이다. 증조할아버지 때 안내면 밤티에 잠깐 이사를 갔던 적이 있었지만 다시 이사 와 응천리의 계보를 고스란히 이어갔다. 그는 우송대 건축과를 나와 대전 등지에서 건축기사 생활을 하다가 생업인 농사를 이어받기 위해 8년전에 고향으로 다시 들어왔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그는 장남으로서 대대로 이어져 온 농토와 농업을 기꺼이 걸머졌다. 콘크리트 구조물 사이에서 벽돌 먼지에 분칠을 했던 그가 흙을 만지게 될 줄은 그 자신도 몰랐다고 했다. 벌써 농사만 해도 사오십마지기가 훌쩍 넘는 6.6핵타아르(ha) 가까이 친환경농사를 짓는 대농이다. 대천리 친환경쌀 작목반장도 맡고 있다. 그리고 올해 마을 이장도 맡았다. 이제 젊은 사람이 해야한다는 수차례 마을 어른들의 권유를 마냥 뿌리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 이장을 맡고 나서 그는 마을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고 고백했다.

"이장을 맡고 보니까 마을이 새롭게 보여요. 마을 어른들, 주민들을 이제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야 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마을에 무슨 일이 발생하면 5개반 반장님과 노인회장님, 부녀회장님, 개발위원분 등 10여명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결정을 해요. 제가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해도 아직 젊은 초짜 이장이지요. 처음이니까 배우는 자세로 천천히 하고 있어요."

명성 정미소까지 운영하며 눈코뜰새 없이 바쁜 그에게 마을일은 새로운 일이다. 그는 의지를 열심히 다지고 있지만 아버지는 아직 기대반 걱정반이다. 선뜻 농사를 짓겠다고 내려 온 장남이 고맙고 의지가 되면서도 마을일을 잘 할 수 있을 지 걱정도 되는 눈치다.

마을회관 안에는 여든이 넘은 할머니 두분이 낮잠을 청하고 있었고 그 맞은 편 김용자(73)씨는 고추에 탄저병 안 걸리는 농약을 치고 있었다. 응천리에 대해 물으니 "갈 데가 없어 못 떠나니까 이리 주저 앉아서 오래 살지요"라면서도 "공기 맑고 시내도 가깝고 좋다"는 자랑을 잊지 않는다.

▲ 김응자씨가 고추에 농약을 치고 있다.

한여름 응천리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시가지 옆 변두리 조용한 마을이지만 오래된 마을의 역사도 있었고 그 마을을 지키러 고향에 들어온 젊은 이장도 있었다. 아파트와 공존하는 마을로 같이 화합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그 마을의 분위기 따라 천천히 조용히 보일듯 말듯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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