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옥천의 잃어버린 반쪽 역사를 찾아(2)>빨갱이 오욕 딛고 사회주의 항일사 되찾은 해방의 섬 '소안도'
<기획 - 옥천의 잃어버린 반쪽 역사를 찾아(2)>빨갱이 오욕 딛고 사회주의 항일사 되찾은 해방의 섬 '소안도'
광복 뒤 사회주의 독립운동 이유로 '빨갱이 섬' 핍박
사회주의 항일운동 연구 인정받아 독립운동 성지 변혁
  • 권오성 기자 kos@okinews.com
  • 승인 2013.07.26 10:34
  • 호수 1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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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1945일제강점기, 옥천의 잃어버린 반쪽 역사를 찾아

1회: 잊히는 옥천 일제강점기 역사를 되찾자
2회: 빨갱이 오욕 딛고 항일역사 되찾은 소안도
3회: 옥천지역 친일파와 독립운동가
4회: 옥천의 친일언론인과 항일언론인
5회: 옥천출신 전국구 친일파와 독립운동가
6회: 근현대사 찾아 지역미래 가꾸는 오키나와(상)
7회: 근현대사 찾아 지역미래 가꾸는 오키나와(하)

▲ 23일 열린 제218회 옥천군의회 제1차 정례회 제7차 본회의 현장. 상하수도사업소 양만석 소장이 2013 상반기 군정업무 보고를 하고 있다.
본격적인 우리고장 친일사와 독립운동사 보도에 앞서 잊혔던 지역 근현대사를 밝혀내고 후세에 전달하는 소안도 사례를 소개합니다.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에 있는 소안도는 전체 인구가 2천800명에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항일운동의 성지로 불리는 곳입니다. 지역주민들이 직접 사립학교를 만들어 일본 신민이 아닌 조선인이 될 수 있도록 후학을 양성하는 것은 물론 항일운동도 적극 개진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섬 전체 주민 6천명 중 800명이 불령선인(일본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지칭한 말)으로 지목되었을 정도입니다. 당시 1가구 가족이 7~8명 이상이었음을 감안하면 한 집안에 1명 이상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항일의 섬이자 해방의 섬으로 불리던 곳은 한 순간에 '빨갱이 섬'이 되었습니다. 소안 주민들은 '빨갱이의 섬'이라는 낙인에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서슬 퍼런 전두환 군부정권이 물러난 뒤인 1987년부터 소안 주민들의 덧씌워진 오욕을 벗겨내기 시작했습니다. 근현대사 사료집을 만들고 항일운동 기념탑을 세워 군부정권과 친일파들에 의해 조장된 '빨갱이 역사'를 털어내고 자랑스러운 지역사를 되찾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소안 주민들의 자부심은 높아졌고 지역에 대한 애정은 물론 지역공동체가 더욱 강화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소재로 한 관광사업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지역사 연구를 통해 지역의 미래를 찾은 것입니다. 우리가 소안도를 살펴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 빨갱이 역사로 치부되던 소안항일운동이 재조명되면서 2005년 새 탑이 건립됐다. 탑 인근에 소안항일운동기념관과 사립소안학교가 있다.

◆ 항일과 독립, 해방의 메카 소안도

일제강점기 당시 소안도는 항일운동이 극렬하게 일어난 곳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6천명의 주민들 중 800명이 일본에 협력하지 않는 불령선인으로 지정받았을 정도로 독립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소안 항일운동은 1910년 일본이 소안도 땅을 임의로 친일파 왕족 이기용(1889년~ 미상)에게 주면서 시작됐다. 일본 총독부가 시행한 토지조사와 토지이관으로 하루아침에 논밭을 잃은 주민들은 13년간 법적 투쟁을 벌인 끝(1922년)에 되찾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독립투쟁을 본격적으로 벌여가게 된다.

소안 항일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한 곳은 사립소안학교와 '수의위친계'다. 1923년 설립된 사립소안학교는 토지를 되찾은 소안 주민들이 1만400원의 기금을 모아 건립됐다.(당시 소 한 마리의 가격은 70원 정도) 자신들의 무지로 땅을 빼앗기는 아픔을 겪은 것이라 생각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학교를 세운 것이다. 이후 소안학교는 항일민족운동가를 양성하는 요람인 동시에 지역의 지식인이 배출되는 곳으로 발전했다. 수의위친계는 소안도뿐 아니라 전라도와 경상도 일부의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이끌던 조직으로 당시 마을마다 있던 장례계의 하나로 위장해 활동하고 있었다. 수의위친계는 1922년 소안의 대표적 항일운동가인 송내호(1895~1928)가 주도해 조직되었으며 소안도 내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 소안도에는 송내호와 정남국 등 많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이들의 공적은 소안항일운동기념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 소안 항일운동사의 중심에 있었던 송내호 선생의 묘소.

◆ 항일의 섬에서 빨갱이의 섬으로

일본 조선총독부의 눈엣가시였던 소안도는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에 의해 '빨갱이'로 폄훼된다. 친일파들이 자신들의 과오를 덮고자 사상적 기반이 사회주의에 있던 항일운동가들을 대규모로 숙청했던 것이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를 탐탁찮게 보던 친일파와 일부 자유주의 세력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인 1950년 7월 대규모 학살을 감행한다. 소안도에서는 100명가량 사살당한 것으로 알려진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다. 이 당시 사망한 주민들은 대부분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하던 사람들이었으며 줄에 돌을 묶어 매달아 산 채로 수장시키는 학살이 자행됐다. 이후 한동안 해변에는 사체들이 즐비했으며 어망에 시체 일부가 끌려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후 두 번째 학살이 진행될 뻔 했으나 소안 항일운동의 또 다른 지도자였던 정남국(1897~1955)과 소안배달청년회의 도움으로 추가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호남 항일운동의 중심지는 빨갱이의 섬으로 변질되었다. 자연히 친일파들이 다시 전면에 등장해 횡포를 부렸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 자체가 죄가 되는 분위기로 변했다. 주민 방종근(81)씨는 당시를 비교적 상세기 기억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항일운동도 독립을 위한 거고 나라를 위한 애국활동인데 빨갱이라고 매도당해 억울한 마음이야 말로 다 할 수 있나요. 그래도 어디 이야기할 수도 없었어요. 누가 신고라도 하면 한순간에 잡혀가니까요. 친일하던 사람들이 독립운동 한 사람을 신고하기도 했어요. 하나로 똘똘 뭉쳐 일제와 싸운 소안이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 소안면 주민들은 소안 항일운동사를 자세히 알고 있다. 주민들은 사상의 차이에 따른 평가는 올바른 역사청산이 될 수 없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 소안도에는 집집마다 태극기가 1년 내내 걸려있다. 이 태극기는 주민들이 직접 사비로 구입해 걸어두고 있다.

◆ 왜곡 벗고 다시 찾은 '해방의 섬'

군부 아래 숨죽여 지내던 소안 주민들이 다시 목소리를 낸 건 1987년 전두환 정권이 물러나고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 연좌제를 폐지하면서다. 공식적인 연좌제 폐지는 1980년 8월1일이지만 사실상 전두환 정권은 연좌제를 존속시켜 왔다는 게 소안 주민들의 증언이다. 주민 이민수(73)씨는 연좌제가 없어지면서부터 시작된 지역사 찾기의 바람을 기억했다.

"노태우 정권이 시작되면서부터 소안 독립운동을 말할 수 있었다고 보면 되요. 소안 노인회가 먼저 역사를 되찾자는 운동을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벽 안이나 구들장에 숨겨둔 독립운동 기록을 다시 꺼냈고 그걸 모았지요."

이 뿐만 아니라 송내호 선생의 대한독립단 재판기록과 사진 등 공식적인 기록들까지 확보되면서 소안도의 항일운동사가 되살아나게 됐다. 이러한 활동은 1990년 '소안항일운동사료집' 편찬과 '소안항일운동기념탑' 건립으로 이어진다. 사회주의 항일운동이라는 이유로 왜곡되고 감춰졌던 지역의 독립운동사가 기록으로 남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2000년 주민들이 주축이 된 (사)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가 발족하고, 2005년 소안항일운동기념관과 새로운 기념탑이 건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소안 항일운동의 시작을 알린 사립소안학교를 원래 위치에 재건해 지금까지 기념해오고 있다.

◆ 바로 선 지역 근현대사, 되찾은 명예

지역사를 되찾고 잘못된 평가를 바로 잡아가자 눈에 띄게 변화한건 지역 주민들의 의식이었다. 완도군에서도 소외받는 작은 섬 주민이지만 과거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선조들이 있다는 사실은 큰 자부심이 되었다. 게다가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억누르자 득세한 친일파들도 자연스럽게 사그라졌다고. 이대욱 (사)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 부회장은 바로세운 역사를 통해 주민들이 진정한 소안의 주인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여기는 독립의 섬이고 해방의 섬입니다. 소안 항일운동을 기록하고 기념하는 것을 국가가 도와줬지만 시작은 주민들이었어요. 집집마다 3만원씩 모으고 독지가는 몇 천만 원씩 내놓기도 했지요. 독립운동을 한 건 기념해야 할 일인데 오히려 핍박을 받고 친일파가 더 큰소리를 치니까 그랬던 거죠. 주민들 스스로 역사를 찾고 소안의 주인이 되고자 노력한 결과입니다. 오늘날 소안의 주인은 일제와 싸웠던 우리들입니다." 

'용서하고 화합하되 잊지는 말아야'
이대욱 (사)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 부회장

▲ 이대욱 (사)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 부회장
이대욱 (사)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 부회장은 소안 항일운동사 연구 초기부터 참여해온 대표적 지역 향토사학자다. 해방 후 소안도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사건을 지켜보거나 들어온 그는 지역사를 기록함에 있어 관용의 자세를 가지되 부끄러운 역사라 해서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지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지역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다 함께 알아야 합니다. 사회주의 항일운동이 무조건 옳다는 건 아니지만, 사회주의라 해서 종북·친북·빨갱이라는 평가를 받는 건 부당하다는 생각에서 역사 찾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친일청산 문제는 소안 항일운동사 편찬 과정에서도 골칫거리였다. 친일을 한 사람이 독립운동가가 되고, 가문의 조상들을 독립운동가로 올리려는 시도도 있었기 때문. 서로 진실이 뭔지 알고 있지만 같은 좁은 지역 사람들끼리 제대로 말하기 어려웠다고.

"친일문제를 다루는 건 작은 지역일수록 어렵습니다. 우리는 친일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기록하지 못했지만 독립운동가 명단에서는 철저히 배제했습니다. 주민이 다 알고 있는데도 친일을 덮으려는 시도는 최소한 막아냈습니다."

이대욱 부회장은 독립운동사와 친일의 역사를 철저히 기록하되 처벌 대신 용서와 화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좁은 지역사회에서 친일문제를 처벌과 보복으로 해결하면 분란이 생기고 기록 자체가 중단될 수도 있어서다.

"친일 등 부끄러운 역사에 대해서는 용서하고 화합하되 기록으로 정확히 남겨 후세에 전달해야 합니다. 자랑스러운 역사는 따르고 부끄러운 역사는 반성할 수 있어야 지역사가 바로 섭니다. 지역이 역사를 바로 세우면 국가의 역사로 바로 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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