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세상>옻칠의 빛깔로 세계를 춤추게 하다
<함께 사는 세상>옻칠의 빛깔로 세계를 춤추게 하다
옻칠공예가 정해조씨
  • 박누리 기자 nuri@okinews.com
  • 승인 2013.05.03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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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듯 굽이치는 유려한 곡선과 옻칠의 깊은 광택에 세계가 탄복했다. 아름다운 옻칠의 매력에 이태리 밀라노가, 프랑스 파리가, 영국 런던이 푹 빠졌다. 가장 한국적인, 그러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의 옻칠 작품은 콧대 높기로 유명한 이들 나라의 예술평론가들이 찬사를 쏟아내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이들이 눈을 떼지 못하는 그 중심에는 지난 30여년 간 옻칠에 매달려온 옻칠공예가 정해조(68, 군서면 금산리)씨가 있다. 옆 사진은 정해조씨의 옻칠화 작품

▲ 정해조씨와 부인 도경애씨가 작품활동 중인 모습

■ 옻칠, 세계 속으로 알리다

3년 전인 2010년 6월 군서면 금산리에 터를 잡은 정씨는 매일 자연을 벗 삼아 작품 활동에 여념이 없다. 지난달 30일 그의 자택을 찾았을 때도 그는 작품 활동에 매진 중이었다. 오는 8일 영국으로 출국을 앞둔 그는 런던의 사치갤러리에서 열리는 '콜레트 2013' 전시회에 출품하기 위한 작품 5점을 마무리 하느라 어느 때보다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불과 몇 주 전인 4월 중순까지 이태리 밀라노,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참석하느라 집을 떠나 있었는데 또 영국이라니. 긴 비행시간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몸이 피곤해지지만 '옻칠'을 세계에 알린다는 생각만 하면 절로 신이 난다. 지금도 정씨는 '옻칠' 이야기만 하면 밤을 홀딱 새며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만큼 열정적이다.

옻칠에 있어서라면 국내 최고의 전문가로,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옻칠예가 정해조씨. 옥천읍 대천리가 고향인 정씨는 삼양초등학교와 옥천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고향을 떠났다. 대전 보문고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이후에도 쭉 타지 생활을 해오던 그가 다시 고향에 눈을 돌린 것은 '옻' 때문이었다.

▲ 정해조씨가 영국 콜렉트2013전에서 선보일 작품 모습

■ 그림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

어릴 때부터 유독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정씨는 1964년 홍익대 미대에 입학하며 본격적인 예술가의 길을 걷는다.

"입학을 했지만 1년을 다니고 나니 너무 힘들더군요. 돈이 문제였죠. 학비도 학비지만, 생활비 마련이 어려워서 거의 학교에서 자다시피 하며 살았거든요. 할 수 없이 휴학하고 군대에 갔어요. 어차피 가야할 거 얼른 군대부터 마치고 오자 했던 거죠."

제대 후 낮에는 학교, 저녁에는 회사 일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 당시 일했던 곳은 '화창레스'라는 란제리 회사. 여기서 정씨는 포장디자인과 홍보물 디자인을 맡았다. 졸업 이후에는 본사가 있는 대구에 내려와 일을 했고 이때 디자인을 전공한 아내 도경애(61)씨를 만나게 됐다.

이후 회사 일을 정리하고 1973년 대전으로 거처를 옮긴다. 때마침 남대전고에서 미술 교사를 뽑았는데 거기 이력서를 낸 게 정씨가 교직 생활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됐다. 남대전고 미술 교사로 교직 생활을 시작한 정씨는 1979년부터 배재대 미술과에 출강을 나가게 됐고 1980년 교수로 임용된다. 당시 정씨의 나이 불과 34살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실로 파격적인 대우였다.

■ 최초의 칠예과 설립까지

홍익대 진학이 정씨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이었다면 두 번째 전환점은 배재대에서의 교직 생활이다. 정씨가 '옻칠'과 조우하게 된 게 바로 이 시기다.

정씨는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칠공예 관련 자료를 찾다 옻칠에 빠지게 됐다.

"우리나라 옻칠 산업 현황을 파악해보니 너무나 빈약하더군요. 대표적으로 나전칠기라는 찬란한 옻칠 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걸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현실이 가슴 아팠습니다. 일본이나 중국에는 미대에서 옻칠을 가르치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도 않았고요. 이제라도 이쪽 분야를 가르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죠."

그때부터 정씨는 닥치는 대로 옛 문헌들을 조사하고 옻칠 장인들을 찾아다니며 거의 독학하다시피 옻칠을 공부했다.

"옻칠에 대한 모든 게 신기하면서도 답답했죠. 장인들 역시 각자 배워온 방법이 다 달랐고요. 옻칠에 있어 어떤 배합비율이 가장 합리적인지, 건조는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좋은지, 이런 것들을 답사하면서, 책을 보면서, 또 직접 실험하면서 정립했습니다."

손바닥에 진물이 고일 정도로 옻이 오르기도 했다. 그런 각고의 노력 끝에 1983년 칠공예를 대학 수업 강의에 넣게 됐고 1997년에는 미술과 안에 칠 전공을, 2004년에는 칠예과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아시아권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옻칠을 배우는 칠예과가 단독 학과로 개설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 정해조씨가 다양한 칠기법을 학생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만든 샘플들

■ 온전한 우리의 옻칠 작품 만들고 싶어

2003년 옥천군과 배재대가 '옻칠사업에 대한 공동연구'로 자매결연을 한 배경에도 정씨가 있다.

"옥천이 옻나무 전국 5대 주산지(함경남도 신흥, 평안북도 태천, 강원도 원주, 경상북도 함양, 충청북도 옥천) 가운데 한 곳이었어요. '옻칠'이 고향에 이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업이 될 수 있겠구나 싶었죠."

고령화된 농촌 지역에서 옻 재배는 힘을 덜 들이면서도 고부가가치가 있다는 것. 여기에 옥천은 기후나 토양이 옻을 재배하기에 적합하고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지라 옻 산업 육성에 최적의 조건이라고 정씨는 생각했다. 특히 옻칠을 이용한 문화 산업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당시만 해도 옻칠하는 데 쓰는 수액이 1관(3.75kg)에 5천원 정도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중국산이 30만원에 거래됩니다. 상당히 가격이 오른 거죠. 국산은 생산량이 극히 적어 1관에 240만원을 호가해요. 그런데도 서로 사지 못해 난리죠."

국내 유통량의 95% 이상이 중국과 일본산일 정도로 국내에서 생산되는 옻 수액은 매우 적다. 우리의 전통 옻칠에 외국산 옻을 사용해야 한다는 건 정씨로서는 더욱 아쉬울 수밖에 없는 일. 이제는 옥천도 옻 전문가를 양성하고 옻칠을 통한 문화 산업을 육성하는 데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게 그의 오랜 숙원이다.

"우리의 것을 담는 게 옻칠인데 그 재료가 외국산이라니요. 이왕이면 옻산업특구인 옥천에서 나는 원료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늘 생각하지요. 그래서 세계에 더 멋있게, 더 당당하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멋, 옥천의 아름다운 옻칠이라고요."

▲ 옻칠과 관련된 문헌자료들이 정해조씨 작업실 벽면을 빼곡히 메우고 있다.

▲ 작품활동에 사용하는 염료들


"옻칠,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

지난달 9일 이태리 밀라노에서 열린 한국공예전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작품은 단연 정해조씨의 작품이었다. '적광율 0834'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세계적인 디자인 평론가인 크리스티나 모로치를 비롯해 유명 디자이너 마리오 벨리니 등이 가장 인상 깊은 작품으로 꼽기도 했으며 이날 현장에서 6천만원이라는 고가에 판매되기도 했다.

이어 11일 프랑스 파리 르아뜨리에에서 열린 전시회에서도 그의 작품은 큰 호평을 받았다. 이날 '옻칠'에 대한 정씨의 특강이 진행되기도 했는데 이 자리에 참석한 파리 시민들이 우리나라 옻칠의 매력에 감동받는 자리였다고.

이처럼 그의 작품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것은 가장 한국적이기 때문이라는 게 정씨의 설명이다. 그의 작품 '광율(光律)' 시리즈는 우리 선조들이 쓰던 토기에서 따온 모양에 옻칠을 이용한 제작방법, 우리의 오방색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 옻칠 기법 가운데서도 가장 어렵고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 협저태칠기법(삼베와 모시를 옻칠로 겹겹이 쌓아 만드는 칠기법)이라는 점도 정씨의 작품이 인정받는 이유다.

"광율은 '빛이 율동하듯 춤을 춘다'는 뜻입니다. 곡선의 형태와 옻칠의 광택이 만나 시시때때로 빛깔과 느낌이 달라지는 작품이지요. 우리 전통토기에서 그 모양을 따왔는데 여기에 옻칠의 광택과 오방색의 아름다움이 더해져 외국인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거죠.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처럼, 앞으로도 옻칠을 통해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고 싶습니다."

 

▲ 정해조씨의 아내 도경애씨 역시 옻칠의 매력에 빠져 함께 작업을 한다. 사진은 도경애씨의 작품
▲ 협전태칠기법으로 만들어지는 작품 모습
▲ 옻칠을 응용해 그린 옻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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