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병과 함께 걷는 여울길>조헌 선생 흔적 보고 안남을 걸어 금강여울로
<정수병과 함께 걷는 여울길>조헌 선생 흔적 보고 안남을 걸어 금강여울로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12.07.27 11:01
  • 호수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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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남면 도농리 조헌 묘소, 표충사, 신도비~안남면 청정리 선돌~안남면 연주리~안남면 종미리 경율당~종미리 미산마을 세밑여울, 가운데여울 구간 12.5km ■

비가 예보돼 있습니다. 늘 여름이면 만나는 장맛비입니다. 사람이 간사한 것은 가뭄이 들어 문제라고 말하면서도 늘 행사 때만큼은 비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예보된 비는 피할 수 없겠지만 사람은 비 예보에 거의 1/3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시간이 다 됐는데도 평소 30명 이상 보이던 분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15명 남짓한 사람으로 오늘의 여울길을 출발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금강여울길에 참가한 분들 한결같이 하는 말이 "이런 날이 걷기는 훨씬 더 좋다"는 것입니다. 비가 잠깐씩 비치기는 했으나 우산을 쓰거나 비옷을 꺼내 입을 정도가 아니었던 날씨는 사람들이 걷는데 훨씬 더 좋은 조건을 제공해주었습니다. 호젓하게 담소를 나누며, 안남에 대한 얘기, 조헌 선생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걸을 수 있는 길이 좋았습니다. 오늘도 역시 여울지기 정수병 선생이 여울에 대한 재미있는 얘기를 엮어주었습니다.

▲ 여울길 출발점은 조헌 선생 묘소이다. 묘소 주변에는 표충사, 신도비, 하마비 등이 있어 조헌 선생의 충절을 가늠케 한다. 일행들이 묘소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장맛비가 온다는 예보다.

그러나 산길을 가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많은 비가 예보된 바도 아니기에 장맛비 무시하고 길을 떠날 채비를 차린다. 이런 길이 걷기에 좋다.

지난 6월 여울길이 한반도 지형을 타는 길이었기에 임도와 산속 등산을 해야 하는 여울길이었다면 오늘은 평상적인 길을 걷는 구간이다. 아무런 부담없이 놀면서(?) 걷는 길이라고 몇몇 이들에게 설명했다. 빨리 걷지 않아도 좋고, 무엇에 쫓겨가면서 걷지 않아도 좋다. 아무리 여울길을 정해놓고 걷는다지만 이런 날도 한 번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오늘이 그런 날이다.

■ 중봉 조헌 선생의 충절을 좇아

▲ 송시열 선생이 쓴 조헌 선생 묘비
그래서 오늘은 그동안 시간에 쫓겨서 한 번도 여울길에서 가보지 못한 안남 지역 문화재를 찾기로 한다.

비가 온 뒤라 그런지, 농막 마을 산골짝에서 내려오는 마을 계곡물이 시원스레 되재 마을 입구 개천을 내달린다. 어라? 가만히 보니 마을 앞이지만 이 구간이 심상치 않다.

안남면 도농리 되재로 가는 다리 위에서 바라보니 통바위에 그늘이 큰 나무 한 그루. 바위에 걸터앉아 냇물에 발 담그고 수박 한 덩이 입에 물면 그만이리라. 마침 안남지역발전위원회 주교종 위원장이 어릴 때부터 냇물에 발담그고 잘 놀던 곳이라는 귀띔을 한다. 그러면 그렇지! 올 여름 더위식히기는 여기서 해도 좋겠다 싶다. 그것도 안남지역 문화재 탐방과 더불어서라면 더욱 좋으리라.

조헌 선생 묘소에 다다랐다.

보은현감을 그만둔 후 1584년, 말하자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8년 전에 안내면 용촌리에 정착한 조헌 선생은 용촌리 뒷산에 후율정사를 만들어 후학들을 양성한다. 대쪽같은 기개로 선조 임금에게 국방을 튼튼히 하고 정치개혁을 해야 나라가 산다고 상소를 올리고, 진언을 했다.

8년 동안 조헌 선생은 우리 고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흔적을 남긴다. 특히 장령산부터 금강에 합류하는 합수지점까지 서화천 곳곳을 살펴보고는 아홉 군데의 절경을 꼽아 '율원구곡가'를 짓고 지금까지 전한 것은 앞으로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관광 소재를 주고 있다.

어쨌든 조헌 선생의 걱정대로 임진왜란은 일어났고, 선생은 우리 고장 유생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영규 대사와 합심해 왜군을 몰아내려 애쓴다. 조헌 선생의 참모를 했던 정립 선생이 쓴 문집인 '고암집'을 인용해 여울지기 정수병 선생은 조헌 선생이 왜군을 맞아 전투를 치른 것은 보은 수리티재가 아니라 이원면 원동리 적등나루였다고 설명한다.

정수병 여울지기의 선조인 정립 선생이 쓴 이 문집은 임진왜란 당시 상황을 잘 살필 수 있는 기록으로, 앞으로도 연구할 가치가 많은 자료이다.

청주성에서 영규 대사와 승병과 함께 성을 탈환한 조헌 선생은 마침내 금산 연곤평 전투에서 함께 순절하고 만다.

조헌 시신은 그의 아우 조범 등이 수습해 안내면 도리동에 모셨다가 1636에는 안남면 도농리 되재 마을로 이장한 것이다. 충청북도 기념물.

이와 함께 선생에게 제를 올리는 표충사가 있고, 묘소로 올라가는 입구 못미처에는 공신 등의 산소 앞에 세워주는 신도비가 있다.

■한반도 지형은 '고자끝' 전설로 즐겁고

일행은 저수지를 따라 청정리로 향한다. 청정리에 가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선돌. 3기의 선돌 중 한 기는 남성을, 두 기는 여성을 상징하고 있으며, 그중 한 기는 또한 임신한 모양을 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조헌 묘소 등지에서 문화재를 돌아보느라 시간을 지체한 터라 정오가 가까웠다. 이왕 천천히 걷는 걸음이다.

옥수수가 한창이다.

밭에서 따온 옥수수는 먹음직스럽고, 일행들도 달려들어 만져도 보고 해야 하는데 옥수수를 따내는 농민들의 심사가 좋지 않다.

올해 처음으로 선택해 심은 종자 '스피드대학찰'이 뿌리가 약해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넘어진다는 것을 올해 많은 농가들이 체험한 탓이다. 이제 수확할 철에 옥수수가 넘어진 탓에 따서 출하는 못할 망정 말리기를 먼저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으니 농민들의 속은 더 까맣게 타들어가는 듯이 보인다.

배바우도서관에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쉬어서 가면서 점심을 먹잖다. 점심은 언제나 풍성하다.

코스모스 피어 있는 연주리 길을 걸어 종미리 종배와 미산 마을에 다다르고, 용궁전씨 전후회 공이 율곡 이이 선생을 흠모해 지은 '경율당'에 다다른다. 경율당은 금강을 둔 앞의 경관이 그만이다. 마루에 앉은 일행들을 품은 경율당이 그리 너그러워 보일 수가 없다.

이윽고 일행은 강변에 다다른다.

여울 얘기가 나온다. 세밑여울과 가운데여울이다.

세밑여울은 물이 얕아 짐을 가득 실은 소가 많이 건넜던 여울이고, 옥천장에 가던 주민들이 많이 건넜던 여울이다. 가운데여울은 한반도지형의 낮은 고개를 가로질러 옥천장에 가던 주민들이 건넜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옛날 전설 하나가 전한다.

옛날 한 여인이 세밑여울 바로 하류인 독락정 앞에서 빨래를 하다가 더워서 옷을 벗고 멱을 감으려 했는데 갑자기 건너편 땅이 강건너 쪽으로 자꾸 커져오더란 것이다. 이에 여인이 '어? 저기 땅이 커져온다'고 소리를 쳤고, 이에 땅은 거기서 멈추고 말아서 고자끝이라는 별칭을 얻었다는 얘기다. 한반도 지형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다.

▲ 안남을 가로질러 가는 길에는 코스모스가 활짝 피어 있다.


옛 동창들의 수다는 강변을 흐르고

이병훈 전 옥천새마을금고 이사장이 동동주를 담가왔다. 맛난 동동주가 오늘은 참가인원이 많지 않아서인지 잘 안팔린다. 그 덕분에 막걸리 두 병이 금강에까지 올 수 있었다.
여울을 위 아래에 두고 가운데 쯤에 퍼질러 앉은 일행은 막걸리 두 병으로 얘기꽃을 피웠다. 주교종 안남지역발전위원장과 여성회관에 근무하는 조도형씨는 옛 추억을 되살린다.
둘이 공통점은 무엇일까? 안남 출신인 주 위원장은 초등학교 때부터, 조도형씨는 중학교 때 이곳으로 소풍을 왔다는 것이다. 둘의 공통점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자 막걸리가 한 순배 돌고, 여울길 단골손님 이주우씨가 백제와 신라가 맞붙었던 관산성 싸움에 대한 얘기로 불이 붙었다. 삼국시대 얘기부터 소풍, 그리고 강물에 돌을 튕기는 '수제비'까지 이날 여울길은 동창들의 수다(?) 끝에 한바탕 웃음으로 마무리됐다.

▲ 강가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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