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16] 청산면 삼방리-장록골
신마을탐방[16] 청산면 삼방리-장록골
  • 류영우 기자 ywryu@okinews.com
  • 승인 2001.02.17 00:00
  • 호수 5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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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방리 첫 관문인 아랫가사목을 지나 청량산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산기슭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마을 장록골.
청산면 시가지와 예곡리를 지나 소백산맥 기슭에 자리잡은 조그만 마을 삼방리. 삼방리 첫 관문인 아랫 가사목을 지나 청량산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산 기슭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마을이 장록골이다.

500여 년 이상 되었을 것 같은 커다란 느티나무가 오는 손님을 반가이 맞이하고 있고 마을에 들어서자 커다란 웃음소리와 함께 시골마을의 따뜻한 정취가 느껴졌다.

30가구 86명의 주민 거주
이곳 삼방리는 웃 가사목, 아랫 가사목, 장록골 등 모두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그 중 장록골에 가장 많은 15가구가 모여 살고 있으며 웃 가사목에 10가구, 아랫 가사목에 5가구 등 총 30가구 86명의 주민들이 서로 화합하며 살아가고 있다.

주민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다른 마을과 달리 남자 46명, 여자 40명 등 남자의 비율이 높다는 것이 눈에 띄는 현상이다. 가구 수는 30가구지만 실질적으로 농사를 짓는 가구는 20가구에 불과하다. 고령으로 인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수 없는 가구가 4가구, 이웃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가구도 6가구에 이르고 있다.

고추, 인삼이 주소득원
주위가 모두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토질이 비옥하지 않아 벼농사를 짓는 농가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은 고추와 인삼을 재배함으로써 부농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고추는 1만5천770평에 15가구가 재배하고 있으며 인삼은 1만2천904평에 모두 14가구가 종사하고 있다. 자급자족을 위해 약간의 벼농사를 짓고 있는 농가를 제외하면 마을 주민 모두가 고추와 인삼을 재배하고 있다.

여기에 올해부터는 농업기술센터에서 시행하는 고추 시범단지로 조성돼 많은 혜택도 받을 수 있어 삼방리의 고추농사는 더욱 활성화될 전망이다. 하지만 인삼 농사는 올해 내린 폭설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군에서 조사한 피해내역을 살며보면 삼방리 인삼재배 면적 1만2천904평 중 반파가 1천480평, 완파는 1만1천424평에 달해 인삼재배 면적 전체가 피해를 입었다.

"돈이야 빚을 내서라도 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노인들만 사는 동네라 인력을 구하기 쉽지 않아"
마을 주민의 하소연 속에 삼방리의 인삼농사는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청량산 자락의 작은마을 장록골, 임란 전 강릉최씨 처음 정착
장록(長綠)골, 이름처럼 소백산 자락에 위치해 숲이 우거진 지역이다. 한국전쟁이 있기 전, 판수리 지역을 비롯해 장위리, 인정리, 신매리 등 청산면 많은 지역에서 나무를 해가 삼방리 장록골은 명티리와 함께 산이 가장 울창한 지역으로 알려졌다.

지금도 멧돼지를 비롯해 노루나 꿩 등을 주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일제 말기 30여 가구가 거주했던 이곳도 이제는 15가구만이 마을을 지켜나가고 있다. 장록골에 처음 정착한 문중은 강릉최씨로 알려져 있다.

이 마을 최종훈 이장의 12대조부터 이곳에 정착하였고 지금도 11가구가 거주, 가장 많은 가구 수를 보이고 있다. 강릉최씨가 마을에 들어온 후 상산박씨가 7대조부터 장록골에 거주하고 있다.

▶고려말 건립되었던 청량사, 이젠 소나무가 빼곡이 자리잡아
"할머니가 시집가기 전이었어. 13살에 시집갔으니까 한 100년 가까이 될까? 어느날 새벽에 청량사 주지스님이 피투성이가 된 채 마을에 내려와 도둑이 들었다고 전했어. 그 사건 이후 점차 청량사는 폐허가 돼 버렸지"

최 이장이 청량사가 사라지게 된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이런 연유로 고려 말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청량사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아직도 그 터가 남아있고 기왓장과 석탑의 잔재가 남아있다는 말에 함께 올라가 보았다.

장록골 앞산을 돌아 청량산 자락을 얼마 올라가지 않아서 1년 365일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흘러 내려온다는 돌다리걸에 도착했다. 최 이장은 이곳이 청산면 지역의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돼지를 잡던 곳이라고 설명한다.

"청산면 지역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현감이 직접 나서 하늘에 기원하던 용짓날이라는 곳이 청량산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출암이란 암자와 마주보고 있는 이곳은 최근 유동찬 도의원이 면장을 하던 시절에도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고 기우제를 지내는 날이면 이곳 골짜기에 여자들은 얼씬도 못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영낙없이 3일 이내에 비가 내렸고 어떤날은 비를 맞으며 산을 내려오기도 했다고 최 이장은 전한다. 돌다리걸을 지나 얼마를 올라갔을까 멀리 청산면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청량사터가 나타났다.

과거의 웅장함은 이미 사라지고 지금은 대웅전이 있었다는 장소 뒤편에 소나무들만이 빼곡이 들어서 있었고 오랫동안 청량사와 운명을 같이 해온 감나무도 청량사 쇠퇴와 함께 고사해 이제는 쓸쓸함 마저 감도는 이곳에 법당골이라는 이름만이 지금까지 주민들의 입을 통해 불리고 있다. 청량사에 있던 보물들은 속리산 법주사에, 부도는 청산 백운사로 이전돼 보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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