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청암 송건호 선생 10주기 기념음악회 열려
<현장>청암 송건호 선생 10주기 기념음악회 열려
부인 이정순 여사 "애향심 남달랐던 남편"
  • 정순영 기자 soon@okinews.com
  • 승인 2011.12.23 08:50
  • 호수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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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2월21일은 우리고장 군북면 비야리 출신으로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언론'을 만드는데 평생을 바친 청암 송건호 선생이 영면에 든 날이다. 선생의 기일보다 이틀 앞선 19일 저녁 7시30분, 선생의 10주기를 기리기 위한 기념음악회가 서울 정동 이화여자고등학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렸다. 이 날 음악회에는 청암 선생의 유족들과 선생이 초대 대표이사를 맡았던 한겨레신문의 창간 당시 독자 및 지국장 등, 선생을 그리워하는 많은 이들이 참석해 선생을 추모하며 그의 '정론직필' 정신을 되새겼다. 음악회 시작 전 만난 선생의 부인 이정순 여사는 "선생은 고향을 참 사랑한 사람이었다"며 옥천에 대한 당신의 기억, 그리고 남편에 관한 추억 등을 들려주기도 했다.
 
▲ 19일 서울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청암 송건호 선생님 10주기 기념음악회 현장

 

▲ 이정순 여사

 

△ 청암 선생이 돌아가신 지 벌써 10년이 흘렀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
=>10년이라는 세월이 정말 금방 지나간 것 같다. 다행히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줘 선생의 뜻을 잇는 청암언론문화재단을 무리 없이 잘 이끌어 오고 있다. 아무래도 자식들이 직접 나서 재단 운영을 책임지니 이사로 참여하는 분들도 부담 없이 마음 편하게 재단 일에 함께 하실 수 있는 것 같다. (2001년 설립된 청암언론문화재단은 송건호 선생의 뜻을 기려 해마다 민주언론창달에 큰 업적을 쌓은 이를 대상으로 '송건호언론상'을 시상하고 있으며 우리 언론 및 역사 등에 관한 조사ㆍ연구ㆍ출판 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 선생의 장남인 송준용씨가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 옥천신문에 '고향사람'이라는 코너가 있다. 선생님이 생전에 계셨다면 참 많은 독자들이 선생님을 '고향사람'에 모셔주길 고대하셨을 것 같다. 여사님께서도 신혼 시절 비야리골에서 몇 년을 보내신 걸로 안다.

=> 이번에 나온 평전(김삼웅 지음, '책보세' 발간)을 봤겠지만 표지 사진이 바로 고향 (군북면) 비야리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애향심이 참 많은 양반이었다. 시부모님이 고향에서 농사 꽤나 지으신 분들이셨기 때문에 선생이 어렸을 때 마을 분들이 '도련님 도련님' 했다하더라. 그래도 선생은 마을 분들께 깍듯이 존대를 하는, 사람 차별 안하는 분이었다고 마을 어른들께서 칭찬하시는 말씀을 들은 기억이 난다. 1953년 결혼 당시 남편이 기자생활은 했지만 월급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나만 백일이 갓 지난 큰딸을 데리고 시부모님께 의탁하러 비야골에 내려왔다. 5년 정도 살았는데 시골생활이라곤 경험해본 적도 없고 도시에서 교편만 잡다 시집을 왔기 때문에 지금 떠올려 봐도 비야골 생활이 참 말할 수 없이 고생스럽긴 했다. 게다가 남편은 명절과 부모님 생신에만 내려왔기 때문에 우리는 주말 부부가 아니라 연말부부였다.(웃음) 그래도 그 때 어린 며느리라고, 또 마을 심부름을 도맡아 한다고 어르신들이 참 잘해주셨는데 지금은 많이들 돌아가신 것 같다.

△ 선생은 살아생전 '언론인의 지위를 징검다리 삼아 이익과 출세를 구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런 점에서 요즘 언론인들의 모습은 선생님 영전 앞에서 참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 선생이 살아생전 겪었던 고초를 어찌 말로 다 하겠는가. 그래도 이제 와서는 이렇게 남편을 기리고 제대로 조명할 수 있게 된 것이 감사할 뿐이고 고생한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은 늘 '양심껏 꾸준히 한 길을 걷는 것이 인생의 성공'이라고 강조하셨다. 언제나 민족을 걱정하고 애국심이 참 많은 양반이었다. 선생이 살아계셨다면 '공부 잘하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삶을 옳은 방식으로 양심껏 살아가는 것이 옥천을 빛내는 일'이라고 고향의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말씀하셨을 거라 생각한다.

 

 

 

▲ 19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직을 내려놓은 바로 다음날 고향 군북면 비야리의 아버지 산소를 찾은 송건호 선생. 선생은 '성묘'를 끝내고 잔디 위에 앉아 '사방을 훑어보니 자주 찾아오는 곳은 아니면서도 고향은 역시 반갑고 늘 보는 산이며 개울이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었다'고 당시의 심정을 선생의 책 <고행 12년, 이런 일 저런 일>에서 전하고 있다.<사진출처: 김삼웅 저, '송건호 평전'>

이정순 여사와의 대화는 음악회 시작을 알리는 안내와 함께 아쉽게 마무리되었다. 10주기 기념음악회는 '(사)밀레니엄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와 첼리스트 최정주씨와의 협연, 성악가ㆍ뮤지컬 배우들의 노래 등으로 꾸며졌다.

특히, 연주 사이사이 비춰진 청암 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영상과 서희태 지휘자가 들려 준 선생에 대한 해설은 선생을 그리워하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시기에 충분해보였다.

1974년 독재정권에 맞선 후배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 투쟁을 지지하고자 나이 오십에 동아일보 편집국장직을 내려놓고 거리의 투사로 나선 선생의 결단 앞에 지금 언론의 현실은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한미에프티에이(FTA)에 반대하는 수만 개의 촛불이 거리를 메워도 주요 방송사들은 정권의 눈치를 살피느라 보도에 몸을 사린다. 조중동과 같은 수구족벌신문들은 이제 방송사까지 차려놓고 여권의 유력 대선주자에게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와 같은 낯부끄러운 수식어들을 갖다 바친다.

70년대, 정권 입맛에 맞지 않는 기사를 쓴다고 편집국장이던 자신을 포함해 수십 명의 양심적인 기자들을 거리로 내몰았던 바로 그 독재자의 딸이 지금에 와 여권 대선주자가 된 현실을 송건호 선생이 목도했다면 무어라 이야기했을까?

'역사 앞에 거짓된 글을 쓸 수 없다'며 스스로 수난의 길로 걸어갔던, 하지만 그랬기에 '20세기 최고언론인'으로 꼽힐 수 있었던 송건호 선생님이 한없이 그리워지는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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