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병과 함께 걷는 여울길 군북면 국원리-군북면 석호리 청풍정(용댕이여울)-석호리 진걸마을(신통개여울)-군북면 막지리 장고개마을-안내면 답양리-안내면 답양리 가산사
군북면 석호리에는 지난달 다녀왔던 군북초등학교가 있던 함티여울이 있습니다. 함티여울은 인근에서 가장 큰 여울입니다. 안내면 답양리 가산 구들을 싣고 다니던 트럭이 함티여울을 건너 답양리로 드나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여울을 건너거나 학교를 다니던 길목이었지요.
오늘 가는 용댕이여울과 신통개여울은 함티여울 하류에 있는 여울로, 주로 진걸 마을 사람들이 건너거나 이용했던 여울이었습니다.
진걸에서 불렀던 용댕이여울은 석호리 석결(돌고리) 마을에서는 진걸여울, 또는 청풍여울이라고 불렀고, 신통개여울은 상진진개여울이라고 불렀답니다.
여울 이름이 마을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진걸에서 부르는 명칭이 좋겠다 싶어 용댕이여울, 신통개여울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이 여울길은 400년도 훨씬 더된 조선중기 임진왜란을 앞두고 중봉 조헌 선생이 안내면 용촌리 도래밤티마을에 정착하면서 옥천 곳곳을 다니던 길이었으며, 서화천을 중심으로 '율원구곡가'를 지은 현장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는 길입니다.
■ 가산큰애기 불렀던 노래를 따라
'막막하기는 가산이요, 시원시원하기는 장고개요, 펀펀하기는 진걸이로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금강여울길편'이라고 제목을 붙여 노래를 하나 만들어도 되겠다.
뜻밖에도 '가산 큰애기' 노래가 나왔다.
'가산'이란 보은군 수한면 노성리부터 가산천 주변으로 안내면 용촌리와 답양리에 이르기까지 형성된 28마을(용촌 출신 박란과씨 증언)을 통칭하던 말로, 지금은 많은 마을이 없어져 통칭 '열두가산'이란 말로 부른다.
가산 처녀가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가면서 불렀다고 전해지는 노랫말이다. 여울길 탐방에 함께 참여한 김계순(72, 옥천읍 문정리)씨가 석호리로 가는 길을 걸으며, 구성지게 불러넘긴 노래이다.
안내면 장계리가 고향인 김씨는 진걸에 살았던 고모를 찾아가려면 안내면 장계리에서 며느리재를 넘어 국원리로 왔고, 지금 이 길을 걸어 진걸을 가곤 했다.
어른들에게 들었던 노래를 그대로 기억하고 있는 김씨. 김씨의 기억으로 가산은 산으로 둘러싸여 막막했고, 막지리로 넘는 장고개에 이르러 금강이 보이는 탁트인 전경을 볼 수 있었으므로 시원한 전경을 노래한 것이리라. 또 펀펀하기는 진걸이라는 말 역시 당시 진걸 앞 금강 전경을 그대로 나타낸 노랫말이다.
40~50호가 살았던 진걸은 금강변으로 넓디넓은 백사장과 자갈밭을 갖고 있었고, 농산물 또한 풍요로웠던 지역. 그러니 금강 인근에서는 가장 넓은 강변을 갖고 있는 마을이라는 말이 통하던 곳이었다.
군북면 국원리를 출발한 일행 중에는 산수원산악회 회원을 비롯해 새로 얼굴을 내민 독자, 주민들이 많아 참가자가 약 30명에 달한다. 최근 들어서는 가장 많은 숫자.
일행은 석호리 진걸 고개를 넘기 전에 청풍정에 들러 조선말 개화파 김옥균과 기생 명월의 애틋한 사랑 얘기 전설을 되짚고는 진걸을 향한다.
한 차례 땀을 식힐 수 있는 정자 청풍정은 일행이 숨을 돌리고, 막걸리 한 사발씩 마시기는 아주 제격이었다. 정자 마루턱에 걸터앉아 마시는 막걸리나 물, 옥천새마을금고 이병훈 이사장과 박덕분씨 부부가 싸온 쑥떡이 아주 맛있다.
청풍정 하류로 1km 가까이 떨어진 용댕이여울은 지금은 배를 타지 않고는 주변에 갈 수 없지만 예부터 진걸마을에서 막지리로 건너는 여울이었다. 노인장애인복지관 손채화 관장은 여름이면 이 여울을 통해 막지리로 건넜다가 다시 함티여울을 건너 군북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땀이 많이 나는 여름, 길을 걷기보다 여울을 걷는 길이 더 시원했기 때문이다. 기억하기로는 용호리가 100여가구, 막지리 130여가구, 소정리 80~90가구, 진걸 50가구 등 주변 마을에 많은 인구가 살았고, 용댕이여울은 여름철 학교를 시원하게 가기 위한 좋은 길이었다. 여울 건너로 막지리 모래밭에는 자라가 많았다. 모래 속에 알을 낳는데 엄청 많았다는게 손 관장의 기억이다.
마을 앞에는 막지리 장고개로 건너는 배터가 있었고, 신통개여울은 배터 바로 하류에 있었다. 손 관장이 해석하기로는 신통개여울은 한자로 풀면 '새로 통하는 여울'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하천 너비가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았으나 물살이 세서 사람들이 건너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로 살을 매서 고기를 잡는 여울이었다.
여울지기 정수병씨가 건져올린 또 하나의 얘기는 수수를 이용해 금강 참게를 많이 잡았던 추억어린 여울이 신통개여울이다.
진걸 손동철씨가 운전하는 마을 배를 타고 대청호를 가로질러 장고개로 향한다. 답양리에 살고 있는 이남규씨가 미리 장고개에 나와 있다. 그리고는 어릴 적부터 애환이 서린 곳, 이무기가 나왔다는 용댕이여울하며, 주변에 대한 설명을 친절히 한다.
장고개를 올라서니 대청호 건너 우리가 건너왔던 진걸이 보이고, 휘돌아가는 대청호의 아름다움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넘어서면 바로 답양리다.
답양리 양지골 가산천에서 맛난 점심을 먹은 일행은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 영규대사와 의병장 조헌 선생의 혼이 서린 호국사찰이며, 천년고찰 가산사에서 일정을 마친다.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가산사 영정각은 조선 숙종 21년(1695년)에 건축된 것으로, 영규대사는 물론이고, 드물게 유학자인 조헌 선생의 영정을 절에 영정을 모신 점이 특이하다. 일제 때 조선총독부가 영정각에 모셔져 있던 영규대사, 조헌 선생 강탈해갔다는 얘기가 전한다.
가산사 오르는 길에 따먹은 복분자가 달콤했던 여울길은 늘 아쉬움과 설렘이 교차한다.
지난 토요일 간만에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됐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