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만물상회' 이종임 할머니
'길거리 만물상회' 이종임 할머니
함께사는 세상 [17]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0.12.09 00:00
  • 호수 5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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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이 지나도록 팔리지 않을 것 같은 색바랜 물건같이 질긴 삶 75년을 살아온 이종임 할머니
옷 핀, 고무줄, 양말...
한 번도 팔리지 않았을 것 같은 내복과 여성용 스타킹. 값이 나가보이는 물건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누구하나 발걸음을 멈춰 물건을 들춰볼 것 같지 않은데 간혹 한 두 사람이 가던 길을 멈추고 옷 핀이나 고무줄을 꼼꼼히 고르고는 동전 몇 개를 떨궈 놓는다.

화려한 조명과 넓은 매장,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세상에 있는 온갖 물건들은 모두 가져다 놓았을 것 같은 가게가 하나 둘 늘어가고 있는 지금, 길가 작은 한 귀퉁이에 물건을 늘어놓고 앉은 그 곳에서도 팔리는 물건은 있었다.

5일장이 서는 날과 특별한 날이 아니고는 항상 조흥은행 앞을 지키고 있는 이종임(75·옥천읍 신기리)씨. 이종임씨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듯 `노점상'이다. 그것도 그 분야에서는 잔뼈가 굵을 만큼 경력이 오래된 노점상.

▶하루 많이 팔아야 5만원...
이종임씨가 옥천읍 조흥은행 앞 공터에 전을 벌이는 시간은 대략 아침 6시 쯤이다. 해 길이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는 해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면 어김없이 손수레에 물건을 싣고 일터(?)로 나와 전을 차린다. 자리를 맡아 놓고는 집으로 돌아가 혼자 상을 차려 먹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들고 다시 일터로 나오면 8시30분 쯤이다. 그 때부터 할머니의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집에서 특별하게 살림할 것도 없는데 집에 있으면 뭐해. 공치는 날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이렇게 나오는 거야."
그렇게 하루 종일 앉아 있다 집으로 돌아갈 때 할머니의 주머니에는 동전과 1천원짜리 지폐들이 모이지만 그 돈이 1만원을 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장날이라든지 어쩌다 손님들이 몰리기라도 해야 기껏 5만원이다. 이윤을 20%로 잡으면 2천원에서 1만원 정도가 평균 수입이다.

"그래도 다른데서 잘 안 파는 것이나 가져다 놓으니까 조금 팔아먹지 요즘엔 누가 이런데서 물건 살라고 하나." 할머니 얘기대로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햇볕아래 놓여 있다 색이 바래버린 스타킹은 절대로 팔리지 않을 물건처럼 보였다.

할머니의 길거리 마트에서 가장 고가품은 계절을 얘기해 주고 있는 오래된 내복이었다. 무려(?) 1만5천원이나 하는 내복도 역시 스타킹처럼 이 겨울이 다 가도록 그 자리를 떠나기는 힘들 것 같았다.

"이렇게 사니 뭐 자식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었나, 결혼한다고 혼수를 제대로 해 줄 수 있었나. 그게 제일 섭섭하지. 그나마 늙은이 불쌍하게 여겨 쫓아내지 않는 은행 사람들이 고마워."

벌이가 시원치 않다보니 할머니의 좌판 옆에는 종이상자들이 모아진다. 앉아서 장사를 하다가 주변 가게에서 빈 종이상자라도 내 놓으면 하나씩 가져다 쌓아 놓는다. 그것도 예전에는 1kg에 50원씩은 쳐 주더니 지금은 폐지가격이 내렸다고 40원밖에 주지 않는다.

지금은 거리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아 좌판을 벌이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5일장을 찾아다녔다. 안내, 안남, 이원, 원남 등 장을 찾아다녔을 때는 지금보다 벌이가 괜찮았지만 그것도 `장차(장꾼들을 모아 태우고 다니던 차)'가 없어지고는 그만둬버렸다.

해방이 되면서 사기그릇을 이고 다녀 모은 곡식을 한국전쟁 통에 모두 잃어버리고, 피난민들을 상대로 떡 장사를 하다가 지금 은행 옆에 앉기까지 할머니는 24살부터 50년이라는 긴 세월을 그렇게 살아오고 있다.

▶아픔의 시대, 소용돌이 한가운데를 헤쳐 나온 삶
이종임씨에게 할아버지 얘기를 묻자 뜬금없이 "8.15 해방을 알어?"라고 반문한다. 알고 있다는 답변에 할머니는 "알긴 어떻게 알아. 지금 나이가 몇인데..."라며 면박을 준다. 우물쭈물 `학교에서 배워서 안다'고 대답은 했지만 할머니 얘기를 듣고 보니 알고 있다고 생각한 `일제 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등에 대해 진짜로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 정신대라는 게 있었어. 일본놈들이 정신대로 처녀들을 끌고 간다니까 부모님이 당시에 일본으로 징용 가서 얼굴도 모르는 이웃 동네 남자에게 사주를 보내고 혼인신고를 해놓았어. 그게 내 나이 17살 때 일이었지."

할머니는 그렇게 결혼을 했다. 그리고 2년 뒤 8.15해방이 되고 일본에 있던 남편도 돌아와 정식으로 결혼을 했지만 삐뚤어진 시대는 할머니를 비켜가지 않았다. 한참 신혼의 단꿈을 꾸고 미래를 설계해야 했지만 곧바로 남편은 군대로 끌려가 또다시 이별 아닌 이별을 해야 했다.

"아이구 징그런 세상이었어. 돈 있고 빽 있는 놈들은 자기 차례인데도 모두 빼먹고 돈 없고 서러운 사람들만 추려서 끌고 갔으니까. 없는 게 죄지..."
5년 동안 군대생활 한 것도 모자라 또 얼마 있지 않아 남편은 `보국대'라는 사슬에 끌려가 죽을 고생을 하다 돌아와서는 바로 앓아 누웠다. 세상은 한 젊은 신혼부부의 삶을 밑동부터 흔들어댄 것이다.

근 10년을 병석에 누워있던 할머니의 남편이 숨을 거둔 것이 이제 27년이 되어간다. 그러니 세상살이는 온통 할머니 혼자의 몫이었다. 그렇게 좌판을 벌이고 때로는 머리에 물건을 이고, 얹고 혼자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쳐 온 인생이 이제 50년이다.

"우리 세대들이 가장 힘들게 살았을걸. 지금도 생각해보면 징글징글하고 우리가 살아온 걸 책으로 쓰면 수 십 권은 나올 꺼야."
얘기를 하는 할머니의 눈동자는 끔찍했던 과거(아니 아직도 진행 중인)를 회상하는지 잠시 흔들렸다.

할머니는 좌판에 벌여 놓았던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긴다. 5시가 조금 안된 시간이었지만 더 이상 손님도 없을 것 같고 허리가 너무 쑤셔 그만 들어가 봐야겠다며... 돌아서는 기자에게 할머니는 "다음에 올 때는 술이나 한 병 받아와∼"라며 너무 많은 말을 했다는 듯 쑥스러운 웃음을 보냈다.

70대 중반의 나이에 비해 눈에 보이는 외모는 훨씬 젊고 정정해 보였지만 얘기를 나누는 내내 몸을 가만히 두지 못했던 것은 그놈의 척추 디스크 때문이었다.

70여 평생 살아오며 견뎌야 했던 시대의 무게가 고스란히 할머니의 허리로 몰려가 끝까지 고통을 던져 주고 있지만 수술을 받을 수 있는 형편이 못돼 진통제 몇 알로 그 고통을 넘겨 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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