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10] 안내면 월외리-본동, 서답벌
신마을탐방[10] 안내면 월외리-본동, 서답벌
  • 류영우 기자 ywryu@okinews.com
  • 승인 2000.12.02 00:00
  • 호수 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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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외리 4개 자연마을 중 가장 오래된 마을 본동(위). 본동 다음으로 큰 마을이었던 서답벌(아래)은 지금 5가구만이 생활하고 있다.
앞에는 가재봉이 뒤로는 노승산이 감싸듯 안아주고 있는 마을 월외리. 우뚝 솟은 가재봉이 달빛을 가리운다 하여 붙여진 월외리는 산과 물이 빼어나고 인심 또한 그만이며 예로부터 효성이 지극한 마을로 알려져 왔다. 본동, 서답벌, 용골, 신월동 4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월외리에는 총 58가구에 136명의 주민이 옛 전통을 이어가며 생활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본동'

임진왜란 전 형성된 마을 본동, 밀양박씨 13대째 거주
월외리 4개 자연마을 중 가장 오래 전에 형성된 마을은 본동이다. 3대가 함께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박용희(64)씨의 10대조 할아버지가 임진왜란 전에 현재 본동의 위쪽에 있는 백골에 가장 먼저 정착하였으며 임란 후 전주 이씨가 본동에 자리잡으며 마을이 형성되었다.

전주이씨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경위에 대해 이상철(68)씨는 "이곳 전주이씨는 조선 2대 임금 정종의 아들인 덕천대군의 후손들로 임란 당시 이곳에 휴양 차 온 이빈 선생이 선조의 부름을 받고 전쟁에 나서게 되었지만 그 가족들은 이곳에 남아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임란 후 이씨들이 본동에 자리잡자 백골에 살고있던 박씨들도 본동으로 이전해 함께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20년 전 월외리에 거주하는 96가구 중 50여 가구가 거주할 만큼 큰 마을이었던 본동은 이제 점차 쇠퇴해 25가구만이 남게 되었다. 25가구 중 박씨가 7가구, 이씨, 어씨, 김씨가 2가구, 안씨 1가구와 외지에서 들어온 노인들이 몇 가구를 형성해 거주하고 있다.

스님 도포 입은 모습을 한 `노승산'과 가재의 모습을 닮은 `가재봉'
본동마을을 감싸듯 안고있는 노승산과 가재봉. 스님이 도포를 입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노승산'에는 추운 겨울에도 따뜻한 수증기가 나오는 장소가 있어 주민들은 온천수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노승산 정상에서 피난봉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이 장소를 발견할 수 있는데 날씨가 추운 날이면 바둑판처럼 갈라진 바위 사이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이곳에서 나오는 수증기에 온도계를 대 보면 항상 15도 이상을 유지하고 있으며 몇 년 전 한 전문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수증기에서 철분과 유황성분이 나오기도 했다고 주민들은 전한다.

가재의 모습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가재봉'에는 송이버섯이 많이 나 버섯철만 되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가재봉의 이름과 관련된 또 다른 얘기에 대해 이기석 이장은 "천지개벽이 있을 때 온 세상이 물에 잠겼지만 가재의 등 만큼만 물 위에 남아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기도 하지요. 가재봉 뿐 아니라 노승산도 천지개벽 당시 스님의 도포 만큼 물 위에 남아 있었다고 해서 노승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얘기도 마을 어른들에게 들을 수 있습니다"라며 두 산이 높고, 악산 임을 암시해 주는 얘기라고 전한다.

가재봉 아래 우뚝 솟은 색경산도 주민들의 화제에 오르는 곳이기도 하다. 본동에서 보면 거울을 바라보는 듯 하여 색경산으로 불리고 있지만 신월동이나 용골에서 바라보면 범이 앉은 모습을 하고 있어 백호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어 은 선생의 선행 본보기
본동마을 앞 색경산 아래에는 어 은 선생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마을주민 어수옥(72)씨의 증조부이기도 한 어 은 선생은 생전에 많은 선행을 베풀어 후대에까지 그 이름을 기억하는 주민이 남아 있다.

이름이 어국선이라 알려진 어 은 선생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마을을 지나가는 행인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대접해 줌은 물론 거리에서 객사하는 부랑자가 발견되면 직접 장례까지 치러주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배고픈 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푼 어 은 선생을 기리며 마을주민들은 그의 행적을 본받아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미덕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다.

노인들의 쉼터 `게이트볼장'
농한기 대부분의 농촌지역 노인들은 경로당에서 대화를 나누거나 각 가정에서 소일거리를 찾으며 하루를 보내게 되지만 월외리 노인들은 농촌지역에서는 드물게 마을 안에 시설되어 있는 게이트볼장에서 여가생활을 즐기고 있다.

지난 98년 설치된 게이트볼장에서는 현재 28명의 마을 노인들이 농한기를 이용해 게이트볼을 즐기고 있어 다른 지역 노인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98년 월외리 게이트볼 분회를 창설한 최용훈(73) 노인회장은 "게이트볼을 통해 건강관리는 물론 정신집중으로 인해 노인들에게 찾아드는 치매를 예방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고 게이트볼장이 마을 주민들에게 주는 효과를 설명한다.

과거 담배농사 성행, 지금은 4가구만이
본동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바로 담배 건조실이다. 80년대에는 이곳에 거주하는 거의 모든 농가에서 담배농사를 지어왔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이곳에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담배 건조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논이 많지 않고 밭곡식을 주로 하는 이곳의 지형적 특성 때문에 담배를 재배한 농가가 많았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현재 엽연초생산협동조합장을 맡고 있는 유덕륭씨도 이곳 월외리 출신이다. 이처럼 크게 성행했던 담배재배는 주민의 고령화로 인해 차츰 줄어들어 이제는 4가구만이 재배하고 있는 실정이다.

▶옥천과 보은의 경계 `서답벌'

옥천군과 보은군의 경계지역으로 서쪽에 위치한 농사짓는 땅이라는 뜻의 서답벌. 60년대 말 월외리 총 가구 수 94호 중 24가구가 거주해 본동 다음으로 큰 마을이었던 이 지역은 이제 5가구만이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다.

이 마을에도 가장 먼저 정착한 문중은 박씨이다. 본동에 거주하다 이곳으로 이전한 박씨들과 피난봉을 넘어온 화전민들이 주로 거주했다는 서답벌에는 아직도 화전민의 생활습관이 배어있는 듯 5가구가 각각 떨어져 살아가고 있다. 이곳 서답벌은 월외리보다 방하목과 가까워 주로 왕래를 하고 지냈다.

`과수 천냥, 잡곡 천냥' 주로 과수와 채소 농사
과거 서답벌을 가르켜 서쪽 골짜기에 논은 적어도 사람 살기는 좋다는 뜻으로 `과수천냥, 잡곡천냥'이란 말을 자주 사용했다. 높은 산과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지만 비교적 평평한 곳이 많아 본동에 거주하는 주민들도 이곳에서 많이 농사를 짓기도 했다.

마을과 동떨어져 있으면서도 넓은 공간이 많아 많은 사람들이 찾았던 곳으로 가장 오래 전에 정착한 박씨는 모두 이곳을 떠났고 지금은 배씨와 안씨, 이씨가 1가구씩을 이루고 김씨가 2가구가 거주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인테리어 일을 하다 귀농한 이채준씨는 배추 및 특수작목을 재배해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으며 귀농 전 몸담았던 인테리어 기술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없는 이들의 안식처 `공동묘지'
이곳 서답벌에는 어느 지역에서든지 설치를 꺼려하는 공동묘지가 위치해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거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주로 안장된다. 일제강점기부터 형성된 이 묘지는 10년 전까지 사용돼 군의 관리 아래 300여기가 안장되어 있으나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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