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예가 박경용씨
목공예가 박경용씨
함께사는 세상[12]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0.10.14 00:00
  • 호수 5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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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년만에 처음 나온 세상은 목공예가 박경용씨에게는 온통 스스로를 실험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옥천읍 마암리의 골목길을 몇 번씩 오갔지만 박경용씨가 근무하고 있는 `대광공예'는 보이지 않았다. 지나쳤던 길을 다시 돌아오다 우연히 들려온 나무를 자르며 나는 것 같은 기계음과 건물 전체를 뿌옇게 덮고 있는 나무먼지를 보지 못했다면 난 또 전화기를 집어들어야 했을 것이다.

약속시간에 늦지 않았다는 안도와 흐뭇함으로 들어선 작업장. 희뿌연 나무먼지 사이로 작은 개인 작업실이 보이고 공작기계 앞에서 별 의미없는 나무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박경용씨의 진지한 모습이 보였다.

"간판이 없어서 찾느라 한참 걸렸어요. 나무먼지와 톱밥이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거예요."

"이곳을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들 찾아요. 근데 나 같은 사람이 신문에 나올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어요.(웃음)"

박경용씨는 비좁은 작업실 한쪽에 의자를 내주며 조금은 부담스럽다는 표정을 웃음으로 막는다. 목공예를 시작한 지 10년. 세 살 때 걸린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는 1급 지체장애인으로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지만 결코 세상과 분리돼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섞여서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박경용씨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 창조의 매력

박경용씨의 작업대 옆으로 놓여 있는 작은 바구니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받으며 누워있었다. 박씨가 작업을 하고 남은 짜투리 나무 조각을 이용해 두 아이에게 갖다 줄 장난감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아빠가 직접 만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장난감을 받아들고 좋아 할 세현(9), 민주(4) 남매의 얼굴이 그려진다. 박씨에게는 어려서부터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나무였다. 집에 있는 무료한 시간들을 보내기에 그 만큼 좋은 것이 없었고 그것은 목공예를 직업으로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죽어있는 나무에 나의 의지대로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창조'의 작업이라는 게 매력적이잖아요." 박씨는 자신이 8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손재주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농기구는 손에 딱 맞도록 직접 만들어 사용했던 아버지는 동네에서도 그 솜씨를 알아줘 많은 사람들이 빌려다 쓰기도 했다.

"어려서 농기구를 만드는 아버지 곁에 앉아 떨어진 나무 조각들을 주워 갖고 놀던 것에 익숙해져 있었나봐요." 장신구를 주로 만드는 박씨는 아직까지는 내세울만한 실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박씨는 언젠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자신의 생각을 넣은 작품을 만들어 보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전통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요. 예전 우리의 전통문화가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역수입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거든요." 박씨는 아직 거창한 대회에서 거창한 상을 받아본 경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수상경력이 곧 실력의 객관적 검증으로 인식되는 지금의 사회에서 그를 목공예의 대가라고 소개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나무에 대한 그의 애정과 불편한 몸 때문에 겪었던 가슴앓이와 낯설기만 했던 사회에서의 시련을 통해 이미 `장인'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준비를 마친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익힌 세상에 필요한 모든 것들

박씨는 이 사회에서 수여하는 정규교육의 혜택을 받은 경험이 전혀 없다. 집밖으로 나와본 것이라고는 아파서 병원에 갈 때와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 뿐이었다. 올해 39살인 박경용씨. 하지만 그가 자신을 둘러싼 단단한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데는 26년의 시간이 걸렸다.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8살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학교를 들어갈 수도 있었다.

"어려서 그랬는지 두 다리가 불편한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기가 싫더라구요. 그래서 안 간다고 그랬죠. 그렇게 미루다보니 결국 기회를 잃게 됐어요. 지금도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 많이 후회돼요."

하지만 정규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박씨는 자신의 생각을 풍부한 어휘를 사용해 논리적으로 풀어가고 있었다. 최초의 공부는 아버지가 사다준 천자문 책이었다. 그나마 첫 번째 수업이었던 그 천자문 교육도 한 장을 가르쳐 주고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로 인해 짧게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인가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니까 세 들어 살던 집에서 마루에 내 놓은 자명종 시계가 보이더라구요. 궁금했죠. 매일 문틈으로 시계를 보면서 시계 보는 법을 익혔어요."

박씨의 모든 배움은 이런 식이었다. 그에게 한글을 가르쳐 준 스승은 `만화책'. 형들이 빌려다 준 만화책을 보면서 동작과 대사들을 일치시켜 나가는 과정으로 한글을 익혔다. 한글을 익히고 나서는 신문을 돌리던 옆집 후배가 아침마다 모아다 주는 각종 신문을 통해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한자실력도 갖추게 되었다.

혼자만의 외롭고 힘겨운 배움의 과정, 그리고 책과 나무 조각에 자신을 매몰시켜 두었던 삶에서 벗어나 밖으로 뛰쳐나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박씨가 26살이 되던 해였다.

▶26년만에 알을 깨고 세상밖으로...

"26년 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살다보니까 너무 답답하고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군청 사회복지과의 문을 두드렸죠." 이런 절차를 통해 박씨가 처음 찾아간 곳은 충주에 있는 직업재활원이었다. 어릴 때부터 여건상 나무 조각들을 가지고 노는 것이 익숙해 `목공예'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박씨는 목공예 대신 `시계와 도장'에 관련된 기술을 배웠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 두 기술 모두 박씨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목공예' 기술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찾아간 곳에서 애초 목적한 것을 이룰 수는 없었지만 1년여동안 그곳에서 박씨가 얻은 것도 많았다. 집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박씨가 접하는 모든 것들은 실험이었고, 도전이었다.

"항상 맨 처음이 힘든 것 같아요. 처음 집에 다녀가기 위해서 충주부터 옥천까지 혼자 오게 됐어요. 저에게는 정말 큰 일이었죠. 휠체어를 타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집까지 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사실 26년을 살아온 우리 집이 어딘가 잘 모르겠더라구요."

지나가는 사람들의 묘한 시선을 등에 받으며 한참이 걸려 집에 도착했을 때 박씨는 평소의 생각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세상의 한 가운데서 다시 태어났던 26살박씨에게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평소의 생각에 대한 확신과 함께 지금의 아내 유영수(36)씨를 만난 것이 아마도 가장 큰 소득일 것이다.

▶자신감은 도전의 용기를...

"직업재활원을 찾아간 것 자체가 그렇겠지만 지금의 아내에게 연애를 걸었던 것도 저에게는 실험적인 일이었죠." 직업재활원 직원으로 박씨가 머물던 기숙사의 담당자였던 유영수씨. "자주 부딪치면서 나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러니까 용기가 생기는 거예요. 가정을 제대로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생기구요."

이미 예상했을 테지만 둘 사이의 연애와 결혼까지의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는 못했다. 박씨의 신체적 장애를 안 유씨 집안에서 박씨가 과연 한 가정을 구성해 제대로 꾸려나갈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반대 이유였다. 그러나 박씨는 자신이 있었다. 재활원 쪽에서도 별로 내켜하지 않는 둘의 관계였지만 박씨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이상 다른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처음엔 뭘 믿고 저렇게 자신만만한가 했어요. 그런데 꾸밈없이 자신의 삶을 자신있게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더라구요. 무엇보다 서로 마음이 통했기 때문이겠지만요" 아내 유영수씨의 얘기다.

직업재활원을 1년 만에 그만두고 집에 내려와 대광공예사에서 그렇게 원하던 목공예 일을 하는 동안 지금의 아내 유씨가 가끔 옥천으로 박씨를 만나러 오는 것으로 그들의 연애생활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양가의 허락을 얻어 1990년 박씨가 서른이 되던 해, 옥천의 넓은 가든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우리 가족들은 많이 울더라구요. 누님도 그렇고 어머님도 그렇고 즐거워야 할 결혼식장이 눈물바다가 됐어요." 하지만 지금은 처가에서도 박씨를 인정해주고 있다. 직장 생활을 통해 한 가정의 가장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박씨의 삶을 인정해 준 것이다. "후회라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지금 자식들 키우며 열심히 살고 있잖아요. 그 곁에 항상 있었던 사람인데요."

▶집에 모셔둔(?) 칼 한자루

한동안 박씨는 검정고시 준비를 했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잠시 접어두었지만 결코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기회가 되면 전문 교육기관에서 금속 공예를 배워보고 싶어요. 나무는 무엇과도 잘 어울리는 소재지만 특히 금속하고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꼭 배워보고 싶거든요."

박씨는 집에 칼 한 자루를 소중하게 가지고 있다. 대형 차량에 사용되는 스프링을 가지고 직접 디자인해 대장간을 찾아가 제작해 온 칼. 물론 직접 두드리지는 못했지만 칼이 완성되어 가는 내내 옆에 앉아 훈수를 두었고 칼집과 자루는 `흑단'으로 직접 정성스럽게 제작했다. "계기가 되었던 것은 소설가 이외수씨가 쓴 `칼'이라는 소설 때문이었어요. `칼'을 지켜보고 있으면 좋지 않아요?"

왜 그가 `칼'이라는 물건에 푹 빠져 있는지 정확하게 잡히지 않는다. 이외수씨의 소설 때문만은 아닌 것 같고, 대장간에 대한 매력을 얘기하는 것으로 봐서 어쩌면 아직 폭발하지 못한 `장이'의 기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취재를 마치고 일어서는 기자에게 그는 `온다는 전화를 받고 막 잡아 올린 싱싱한 것'이라면서 나무로 만든 고래 한 마리를 건넸다. 그리고 그 고래는 지금 나의 책상 위에 놓여져 나를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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