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옥천현대사 - 한국전쟁 당시 미군 오폭 청산에서도 있었다
발굴 옥천현대사 - 한국전쟁 당시 미군 오폭 청산에서도 있었다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00.06.24 00:00
  • 호수 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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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오폭으로 청산면 교평리 노루목 고개와 청산면 지전리 등에서 피난민과 군·경의 장작을 나르던 부역주민 수십명이 죽거나 다친 것으로 밝혀졌다.

청산면 주민들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어 인민군이 후퇴하고 국군과 경찰이 북상하고 있던 시점인 1950년 음력 8월24일께 미군 폭격기에 의한 오폭으로 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

이는 현재 청산에 거주하는 60대 중반 이상의 주민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사실로 그 동안 입으로만 전해져 왔었을 뿐 명확한 사실조사나 현장 답사 등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방치되어 왔다. 특히 당시 폭격 현장에 있던 주민 중 살아 있는 사람들이 증언을 통해 비교적 상세하고 일관된 증언을 하고 있어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당시 청산면 교평리 노루목재에 살다가 미군 폭격기에 의해 폭탄을 맞고 집을 잃었던 손윤임(84)씨는 "노루목재에는 경찰이 필요하다고 해서 장작을 가져오던 사람들과 피난민들이 뒤섞여 수십명이 신작로 양쪽으로 쉬고 있었는데 비행기 한 대가 공중을 돌더니 갑자기 영동 쪽에서 네 대의 비행기가 몰려와서 폭격을 했다"며 "이 폭격으로 고개 마루에 있던 우리 집은 물론 산과 신작로 모두 온통 불바다가 되었으며 도로에는 나무 장작과 불에 탄 시체 등이 뒤엉켜 마치 지옥 같았다"고 증언했다.

또 장작을 나르던 행렬에 함께 참여했던 이은태(70·청산면 목동리)씨는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후 경찰과 국군이 청산에 들어왔고 경찰과 군인들의 밥을 해준다고 음력으로 8월24일 하예곡리에 있던 장작을 가져오느라 36명이 부역을 나갔다가 노루목재에서 미군 비행기에 폭격을 당했던 것"이라며 "나중에야 장작 짐을 인민군의 폭탄 짐으로 오인했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았지만 당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은 아무런 잘못 없이 경찰 부역을 나간 죄로 죽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미군기에 의한 폭격은 교평리 노루목재 뿐만 아니라 청산면 시내에도 이루어져 역시 장작을 나르던 사람들과 민간인 희생자들이 나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현재 노루목재와 청산시내에 대한 미군기의 오폭으로 인한 희생자의 상세한 규모는 파악되지 않고 있으나 교평리 평상목 마을, 노루목재 현장에서 폭격을 맞고 즉사했거나 폭격의 후유증으로 인해 며칠 안에 사망한 사람, 청산시내 폭격으로 사망했던 사람들을 포함하면 수십명에 달한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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