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덜도 말고 옛모습 그대로만”
“더도 덜도 말고 옛모습 그대로만”
[내고향 옥천] 군북면 와정리 출신 손근익 대전 선건축사 대표
  • 황민호 기자 minho@okinews.com
  • 승인 2007.07.19 14:42
  • 호수 88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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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음에 달려왔다. 대정분교에서의 연락에 그는 과거 추억속으로 성큼 뛰어들었다.  어느 새 작아져 버린 교실에 40년 터울의 똘망똘망한 후배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까지 모교가 버티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랑스런 후배들이 이렇게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에 그는 큰 감사함을 느끼면서 운을 뗐다.
 
그러고 보면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수몰되기 전 선배들은 마을 공회당에서 공부하다가 직접 벽돌과 기와를 쌓으며 학교를 지었고, 1회 졸업생들이 기념으로 심어놓은 플라타너스나무는 운동장을 다 뒤덮을 정도로 커다란 그늘을 자랑했다.
 
지금은 전교생이 17명에 불과하지만, 그 때만해도 250명∼300명에 달할 정도로 학생이 많았다. 대정분교 21회 졸업생 손근익(53·대전 선건축사 대표)씨는 12일 만난 재학생 후배와의 만남에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 손근익 선건축사 대표
“저도 동창회 체육회장도 했었구요. 모교에 대한 애정이 참 많았지요. 그런데 학교에서 사라진 동창회를 다시 이렇게 불러내주니 감개가 무량하지요. 옛 생각들이 새록새록 떠올랐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이야기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비록 작은 분교지만, 소외된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려고 애를 쓰고 있는 학교의 노력에도 참 감사해 했다.  “솔직히 놀랐습니다. 도시에서도 바이올린, 플룻 등은 어느정도 가정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학교 예산으로 이렇게 해주는 것을 보고, 동창회도 빨리 결성해 큰 힘이 되어줘야 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모처럼 모교를 다녀온 그는 아직도 그 감격에 젖어있었다,

대전건축사협 감사도 맡고 
“부모님은 농사를 지셨고, 저는 2남 4녀중의 장남이었지요. 당시 48명이 졸업했는데, 중학교 진학률은 30%도 안 되었지요. 저는 충남중학교를 졸업하고 5년제 대전 공전에 들어갔어요.” 그는 대전공전을 졸업하고, 동국대 건축과에 편입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동아건설에 입사를 했고, 1984년부터 2년 여 동안 울진원자력발전소 건설현장에서 공사감독을 맡았다.
 
대전에 있는 한 건축사 사무실에서 일할 무렵, 그는 건축사 사무실 직원들의 열악한 환경을 알고, 전격적으로 연합노동조합을 만들자고 제의를 했다. 그는 이 제안을 하면서 건축사 연합노동조합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단체협상, 임금협상을 주도했다. 그것은 당시 합법적인 투쟁으로 건축사 직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그것도 잠시, 그는 충북은행에서 삼고초려하면서 건축직 스카웃 제의를 해온 것을 받아들였다.  충북은행은 지연으로 인한 비리방지를 위해 타지역 사람으로 4년제 대학을 나온 건축직 사람을 원했고, 대전 지역에서 해당되는 사람이 그 하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충북은행에서 10년 동안 일을 하다가 99년 `대전 선 건축사'를 개업한다. 창업한 지 8년 남짓 밖에 되지 않지만, 대전건축사협회 감사직을 4년째 맡고 있다.
  그것은 지난해 건축사 연합노조일을 했던 것이 사람들의 뇌리 속에 많이 남아 있었고, 최선을 다했던 그의 모습에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 
“논도 별로 없었어요. 물이 별로 많지 않은 논이라 대부분 보리 2모작을 했어요. 당시 5∼6월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지요. 모내기를 할 때는 노래를 부르고, 풍물을 하며 참 흥겹게 했어요. 대정학교는 체육대회를 꼭 추석 이튿날 했어요. 추석 이튿날에는 동창생, 지역주민, 재학생이 한 자리에 모여 다같이 즐기는 지역잔치였지요. 그렇게 우리는 1년에 한번 한 마음이 되었지요. 그런데 그것도 어느덧 사라져 버렸네요.”
 
추석 이튿날 체육대회, 그것은 군북면 대정리, 방아실, 항곡리 지역 주민을 하나로 묶어내는 의미있는 행사였다. 세대와 지역을 초월하며 대정학교 동창생으로 그들은 하나가 됐다.
 
“옥천군 초등학교 체육대회를 봄에 했던 것 같은데, 당시 25개 학교 중에 우리가 추소초등학교하고 꼴찌를 다퉜거든요. 우리의 목표는 추소초를 제치고 꼴찌를 면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다가 체육선생님 한 분이 부임해서 배구를 열심히 가르쳐서 인근 내탑초, 세천초 등 6개 학교 배구대회에서는 우승도 했던 기억이 나요.”

어렵게 살았지만, 행복했다. 공동체의 정감이 흘러넘쳤고, 선후배간의 우애도 돈독했다.  지역에 대한 자부심도 강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소중한 것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그 소중한 것 하나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어머니같은 모교가 불러줬는데, 기꺼이 노력하렵니다. 다시 옛 친구들 연락하고, 선후배들 만나서 후배 재학생들을 위해 책 한권, 장학금 하나 마련 못 하겠습니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전교생이 딱 100명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학교에서 하는 만큼 동창들도 같이 노력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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