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나라의 걸리버...
'낮은 곳'나라의 걸리버...
[만화로 만난 언론계 사람들] 열일곱번째 옥천신문 조주현 편집국장
  • 이용호 연재작가 webmaster@okinews.com
  • 승인 2006.06.19 17: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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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기차에 몸을 실었다.열차 안으로 투과되는 봄빛이 따사롭기만 했다. 덜컹덜컹 거리며 서울역에서 두시간 반을 달리자 옥천역에 다다랐다. 현대언론사에 커다란 발자욱을 남긴 고 송건호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며, 풀뿌리 지역언론의 귀감이 되는 옥천신문이 자리한 곳이다.

작고 아담한 대합실에 한 남자가 목발을 옆에 세워 놓고 앉아 있었다. 옥천신문의 조주현 편집국장이다. 순수회화를 전공한 미술학도에서 현재는 옥천신문의 편집국장으로서 '낮은 곳'을 찾아 '낮은 곳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옥천에 오면 반드시 먹고 가야할 게 있습니다. 올갱이국인데, 가시죠."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마침 옥천장날이었다. 장애인용으로 내부가 개조된 그의 차를 타고 몇 분 안 가 식당에 도착했다. 인구 5만5000의 작은 도시라 굳이 차가 없어도 되는 곳이라며 씨익 웃는다.  

함박 웃는 모습이 순박했지만, 눈가에 자리잡은 주름은 사연 많은 그의 삶을 대변해주는 듯 했다.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불편했다. 집안이 유복해 개인교사도 있었지만, 그는 8살 나이에 재활원으로 보내진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 생활이 힘들고 슬펐다. 부모에 대한 섭섭함도 컸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그에게 물감과 크레파스는 그의 벗이 되었다. 남달리 그림 그리는 재주가 뛰어났던 조 국장.

미대 시절, 시골의 허름한 건물을 화실로 꾸며 친구들과 '없는 층'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전시회도 열었다. 가진 자, 못 가진 자 사이의 층과 벽을 허문다는 주제였다. 그림을 배우고, 그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1cm의 층도 없는 열린 공간이었다. 수강료는 받지 않았단다. 대신 화실에 연탄이 없으면 천장에 마지막 연탄을 달아 놓았다고. 다음날 화실 한 켠엔 연탄이 쌓여 있곤 했단다.

이러한 그의 이면엔 염세적 관념이 지배하고 있었다. 속세가 싫어 대학 졸업 후, 전라도 정읍에 위치한 산자락에 안식처를 마련했다. 학교 후배가 잠시 작업실로 쓰던 흉가와 다름없는 빈 암자에 혼자 살기 시작했다. 옛날 선비들이 음주가무를 즐기던 지금의 '요정'이었단다. 야학교사로 일하면서 밤엔 사색하고 그림을 그렸다.

TV도, 전화기도 없었다. 오로지 세상과의 연결고리는 라디오였다. 조용히 사색하고 그림그리는 데 우리말 방송은 방해가 되었단다. AFKN만 들었다. 지금은 최신 빌보드 힙합랭킹을 외울 수 있는 내공을 소유하고 있다. 암자에 살면서 별 희한한 일들이 많았단다.

비가 억수로 내리던 어느날 밤,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비를 홀딱 맞은 할머니가 다짜고짜 들어와서는 방에 귀신이 있다며 연신 벽을 보고 절을 해대더란다. 술에 취한 할머니였다. 술 먹고 밤에 불쑥 방문을 여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암자 앞에 약수터가 있었다. 약숫물에 떠 있는 버드나무 잎을 주워오면 아들을 낳는다는 말을 듣고 찾아오는 만삭의 아주머니도 있었다. 새벽에 시작해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굿판도 수없이 봤다. 고시공부 하러 오겠다는 사람들, 소위 '도(道)'에 심취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도 그 암자에서의 1년 반이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었죠"라며 회상의 눈을 감는다.

그러던 그에게 새로운 삶이 다가왔다. 지금의 아내와 아들이다. 앞에 언급했던 '없는 층'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그녀의 열정과 마음을 엿봤단다. "제 아내가 되었으면 했었죠. 자신도 있었구요. 그래서 기다릴 거라고 했습니다."

그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암자생활을 마치고 화실을 운영하던 즈음, 그녀는 집안의 결사적 반대를 무릅쓰고 야반도주를 감행했다.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처가식구들과의 '싸움'이 계속 됐다. 가족과 연을 끊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던 아내다. 가진 것 없는 그에게 사랑 하나 믿고 달려온 아내다. 그저 미안하고 고맙기만 하다. 아들을 낳고 처음 처갓집에 인사를 가던 날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들이 5살이 되어서야 결혼식을 올릴 정도로 그의 결혼생활은 어려웠지만 한편의 순애보다. 지금은 제일 사랑 받는 사위가 됐다. 이름이 '약돌', 즉 '조약돌'일 뻔 했던 아들 은석이(10세)는 그의 속마음에 자리했던 부모에 대한 섭섭함과 미움을 순식간에 녹여 버렸다.

매형의 소개로 옥천신문 오한흥 발행인(현 여의도통신 대표)을 만났고 편집기자로 입사한다. 만평도 그렸다. 사진도 찍고, 동영상취재도 나갔다. 지금은 웹마스터이기도 하다.

"지역언론사 기자들은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합니다. 옥천신문이 지역언론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연유죠. 바로 그것이 옥천신문의 17년 전통이자 힘입니다."

다른 언론사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제의도 있었지만 그는 옥천의 '낮은 곳'만을 바라본다. "저기 강 건너 산간마을에 사는 할머니들에겐 전화도 인터넷도 없죠. 그런 할머니들의 불편과 바람을 지역언론은 대변해야 합니다. 바로 지역언론이 있어야 하는 이유죠"라며 붕괴되는 지역공동체의 복원을 역설한다.

아내와 아들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질 건 다 가지고 산다는 그에겐 그 어떤 물질도 무의미하다. 소망이 뭐냐는 질문에,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작은 담배가게 차려놓고 동네사람들 말벗해주면서 사는 게 소망이면 소망이죠"란다. 소망마저 '낮은 곳'에 있다.

비록 목발을 짚고 서 있지만 그는 '걸리버' 였다. 한없이 위로 올려 봐야 하는 그런 사람, 조주현.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을 찾는 사람, 조주현.

풀뿌리언론, 그 이름의 희망을 쐈다!

미디어 오늘/2006년 3월 22일/ 이용호 연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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