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렷하게 기억하는 사랑스런 학교'
`또렷하게 기억하는 사랑스런 학교'
[내고향 옥천] 청성면 신기리 출신 서울 영락교회 장로 김용수
  • 황민호 기자 minho@okinews.com
  • 승인 2006.04.28 00:00
  • 호수 8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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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영락교회 장로 김용수씨

「학생 용수에게
아침저녁으로 일기도 쌀쌀하고, 서북풍이 초목을 흔들거리나, 청년 학생들의 정신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배움을 목적으로 진리탐구에 바쁜 군이 이와 같이 글월을 보내주는 것에 대하여 매우 반갑다. 나는 성스러운 학생의 떨리는 글을 받고서 하루의 피곤함과 전일에 걸린 괴로움이 일시적으로 사라지고 말았으며, 이에 천분지 일의 보답을 하기 위해 일과를 상신하오니 그리 알고 받아보아라」

2005년 4월25일 청성면 소서리 소서교회(이명재 목사) 작은 방안에서 그는 50년이 훌쩍 넘은 기억을 다시 길어 올리고 있었다. 1950년 즈음에 능월초 6학년 학생 용수는 전방에서 고군분투하며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던 윤순차 소위와 위문편지를 서로 교환했다.

그는 그 편지를 토씨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암송했다. 그의 기억력도 기억력이었지만, 그것은 고향과 어린 시절에 대한 각별한 애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편지는 당시 전쟁 통에 혼란스러웠던 상황 속에서 학생 용수에게 큰 힘을 주었고, 학생 용수는 능월초를 1등으로 졸업하며 도지사 표창을 받고 삼승고등공민학교로 진학했다.
능월초 8회 졸업생 김용수(70)씨, 그는 청성면과 자매결연을 해서 매달 이미용 봉사를 하러 오는 서울 영락교회의 장로이다.

영락교회 봉사팀은 25일 이 날도 청성면 소서리를 중심으로 인근 청산 신매, 대사리 등지에 이미용 자원봉사를 했고, 능월분교와 청성초 학생들의 머리를 말끔하게 깎아 주었다. 자신이 35년 동안 몸담고 있는 ‘교회’와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고향’과 이렇게 색다른 인연으로 만나게 되니 그는 오직 고마울 뿐이다.

“제가 직접 나서 일을 추진한 것은 아니에요. 고향도 아닌데, 청성면 대안리로 귀농한 우리 교회 이한구 집사님이 일을 추진하셔서 고향과 교회가 새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마침 제 고향이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저 대신 고향을 위해 일을 해주는 이한구 집사와 우리교회 봉사팀에게 고마울 뿐이지요.”

그는 고향에서 봉사하는 교회 봉사 팀들에게 미안해 이 날도 위로 방문을 했다.

“어릴 때 서신을 주고 받던 윤순차 소위와는 그 뒤로 연락을 못했어요. 나중에 이래저래 알아보니까 대령으로 예편했다는 소식만 듣고 직접 만나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그 때 일이 정말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어요.”

◆내 기억속에 아련히 남아있는 능월초
“그 때 전교 학생 수가 한 400여 명 되었을 걸요. 한 반에 50-60명씩 2개 반이 있는 학년도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분교로 작아졌고, 학생 수도 20명 내외인 걸로 알고 있는데, 격세지감이죠.”

그는 초등학교 때 유명한 우등생이었다. 웅변과 달리기, 학교 공부에서 수위를 달려 많은 학생들의 부러움을 샀다. 삼승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부산 성서신학교에 입학했다.

목사로 돈을 벌겠다는 철없는 생각으로 입학한 학교인지라, 3학년 때 깨달음을 얻고 과감히 그만뒀다. 불순한 의도로 시작한 학업인 만큼 백지상태에서 새로 시작해야겠다는 그의 마음가짐 때문이었다. 그는 이후 57년 서울에 올라와서 직원 15명과 함께 봉제공장도 하고, 고속터미널 이사도 했다.

그리고, 68년부터 평신도로 서울 영락교회를 다니기 시작해 지금은 장로로 교회 상담부장을 맡고 있다.

“초등학교에 대한 애착이 많아요. 그래서 30여 년 전에 10평짜리 대형 천막과 축구공 30여 개를 기증한 적도 있었지요. 당시 능월초는 천막도 하나 없어 옆에 삼승초등학교에서 빌려오고 그랬거든요. 학교 홈페이지에다도 몇 번 글을 남겼었는데, 별 답변이 없어서 그냥 말았던 적도 있었지요.”

그는 같이 학교 운동장에서 뛰놀았던 친구들에 대한 기억도 아련하다.

“학교 졸업할 때 2등을 했던 송일근이는 후에 원남중학교 교장을 했다가 정년퇴임을 했고, 두릉리에 살던 이해준이는 지금 이장을 하고 있고요. 마장리 사는 육신웅, 유종명, 소를 키우는 박희철이도 내 친구고, 새터의 최성호, 안티리의 김동성, 서강육도 친한 친구들이었죠. 경찰을 하던 귀곡리 양병두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났고요. 다들 열심히 살았지.”

그는 현재 영국 맨체스터대 생명공학 학부에서 국비장학생으로 유학을 하고 있는 아들과 함께 모교인 능월초를 찾아 같이 학적부를 찾아보기도 했다.

“아들 녀석도 아버지 뿌리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버지가 뛰놀던 학교와 고향을 돌아보며 후손들에게도 전해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죠.”

다시 북적거리는 고향과 학교가 됐으면 좋겠다고, 그러기 위해 고향과 학교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다고 일흔 나이에 모처럼 고향을 찾은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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