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철도는 내 손을 거쳤소이다!"
"한국 철도는 내 손을 거쳤소이다!"
[내고향 옥천] 이원면 강청리 한국철도시설공단 일반토목기술팀장 정장용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06.04.14 00:00
  • 호수 8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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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면 강청리 출신 정장용씨

그때만 해도 왜 그리 추웠는지. 참 추웠다. 지금보다 눈도 훨씬 더 많이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덕분에 논과 저수지, 강이 얼면 꽝꽝 얼어 썰매나 스케이트 타기는 정말 좋았다. 당시로서는 생각도 못할 호강(?)이 찾아왔다. 스케이트. 다른 애들은 각목에다 철사를 매 썰매를 만들어 탈 때 그냥 씽씽 달릴 수 있었으니 그 기분이야 말할 수 없었다. 돈을 주고 산 스케이트는 아니었다.

우연하게도 매형이 스케이트 하나를 놓고 가는 바람에 스케이트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지금은 저 세상 사람이 되었지만 겸사겸사 개심리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갔다. 버스를 타고 간 것도 아니고 걸어서 찾아갔던 길. 

지금은 서울에 살고 있는 친구 한진섭(현 재경이원향우회 부회장)씨와 강청리에서 친구 집에 가려면 족히 한 시간은 걸렸다. 그렇게 그들은 둘이서 개심저수지에서 종종 스케이트를 즐겨 탔다.

가는 데에만 한 시간이 걸렸던 길, 갔다가 낮에만 스케이트를 타기가 아까워 밤에도 이 둘은 스케이트를 탔다. 달밤에 스케이트.

  ◆달밤 개심저수지에서 스케이트를
사위는 어두운데 얼음은 서로를 결박하느라 ‘쩡쩡’ 소리를 더 내고, 둘은 얼음이 깨질까봐 가슴이 철렁거리면서도 스케이트를 즐겼다. 얼음이 얼면서 오히려 ‘쩡쩡’ 소리를 낸다는 사실을 몰랐던 탓일까?

개심저수지를 휘저었던 스케이트는 대전 현재의 홍명상가 부근인 목척교 스케이트장에까지 진출했다. 당시 대전에 마련된 스케이트장이 목척교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장용(55·한국철도시설공단 일반토목기술팀장·이원중 20회·이원초 44회)씨가 풀어낸 옛 얘기는 말 그대로 추억이 되어 있다.

어려서부터 할 것은 다하고 컸다. 이원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고부터 바로 두각을 나타냈다. 학예회 때에는 선생님이 선생님으로 분장시켜주셔서 ‘선생님’ 노릇도 했다.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웅변에다 노래도 잘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그때 어울렸던 백지리 강변은 지금 생각하면 정말 좋은 강변이었다. 원동 다리부터 백지리까지 강변은 더할 수 없이 좋은 놀이터였다.

  ◆이원에서 혼자 철도고를 진학하고   
이원에서는 단 한 사람, 철도고등학교를 진학했다. 철도 공사화에 따라 철도고등학교가 명맥을 잇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국가에서 돈을 받고 다닐 수 있는 좋은 학교였다. 취직도 물론 보장되었다.

1968년 7대1의 입학경쟁률을 뚫고 합격했고, 71년 졸업한 후 바로 현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부산을 택했다. 부산을 택할 경우 야간대학이 있어서 대학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시 공무원 월급으로 야간대학까지 다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대학 진학 꿈은 그로부터 한참 후에나 가능했다. 그가 결혼을 한 후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토목학 석사 학위를 땄고 올해는 다시 박사 과정에 입학했다. 55세 만학도인 셈이다.

 그에게 만학의 의지를 불태우게 한 것은 그의 두 남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다. 두 남매는 이런 아버지가 `존경스럽다'고 말한단다.

  ◆남북 철도연결, 통일 사명감으로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현장은 역시 끊겼던 남북 철도를 잇는 사업이었다. 경의선 복구팀장을 맡아 도라선역사를 짓고, 4.5km 구간의 철도를 복구했다. 1년 갖고는 어림도 없는 공사 기간이었건만 남북을 연결시키는 통일철도라는 사명감으로 온힘을 다해 매달렸다.

공사를 마무리한 후 2002년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표창을 받고 대통령 내외와 저녁을 함께 먹은 것도 그렇게 열심히 일한 덕이었다. 그러니 전국 철도 가운데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래서 지나가는 기차를 보면 느낌이 새롭고 의왕에 있는 컨테이너기지를 드나들었을 컨테이너를 보면 뿌듯하다.

철도청 서기관을 끝으로 공사로 전환됨에 따라 시설공단에서 근무하게 된 그는 ‘길을 놓는 것은 보시다’라는 불가의 가르침을 소중히 간직한단다. 시냇물에 징검다리가 떠내려가면 누군가는 발을 벗고 징검다리를 놓듯이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 ‘길을 엄청나게 많이 놨으니 극락은 이미 손아귀에 쥔 것 아니냐’며 웃는다.

그는 재서울 이원중학교 20회 동창회 회장이다. 정기적으로 동창들과 추억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고향에는 주만우, 정보용, 김봉섭씨 등의 친구들이 있고, 친동생이 이원면 정주용 부면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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