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담뿍 담긴 자장면 맛∼ 어찌 잊으리오!
정 담뿍 담긴 자장면 맛∼ 어찌 잊으리오!
함께사는 세상 [142] 36년 세월 마감 준비하는 별촌식당 권칠용·송영순 부부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6.04.14 00:00
  • 호수 8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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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면에 가면 ‘별촌식당’이 있다. 장터 삼거리에서 오른쪽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1970년 문을 열어 이제 36년이 되었으니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알만도 하다. 지금 이 식당이 문을 닫으려 하고 있다. 올 1월에 부동산에 가게를 내놓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지만 아직 가게를 보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사장 권칠용(65)씨는 가게가 나갈 때까지는 영업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대신 요즘엔 오후 3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별촌식당의 음식 맛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거나 궁금한 사람이라면 조금 서두르는 게 좋겠다. 언제 완전히 문을 닫을지 모르니 말이다.

◆만화대본소에서 중국음식점으로
지금 별촌식당 자리는 권칠용씨의 아버지 가게였다. 지금도 모퉁이를 끼고 있어 목이 좋지만 당시 그곳이 장터였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대물림하기에 충분한 자리다. 군대를 가기 전 그곳에서 권 사장이 제일 먼저 했던 일은 만화대본소다. 당시 어지간한 월급쟁이보다 수입이 나을 정도로 짭짤했다. 그만큼 만화를 보고 싶어 하는 코흘리개 학생들이 안내면에 많이 있을 때였다.

   
▲ 36년 한 자리를 지키며 주민들에게 맛있는 중국음식을 만들어준 권칠용.송영순 부부. 이제 그 시간을 마무리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여자친구를 사귀게 된다. 그 여자와 군대 다녀와서 결혼하기로 약속을 하고 군에 지원을 한다.

제1보충역으로 안 가도 됐지만 빨리 갔다 올 요량이었다. 바로 입영통지서가 나올 줄 알고 기다렸다. 1월에 지원을 했는데 11월이 다 끝나갈 무렵에 입영통지서가 나왔다.

기다리기가 지루해 다시 취소를 하려했지만 이미 지원한 일,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군대 가 있는 동안 사귀던 여자도 떠나가 버렸다.

그리고 제대를 했다. 제대를 하고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 건너편에 중앙여관과 같이 있던 중앙식당이 문을 닫았다. 사람들이 밥을 먹을 곳이 마땅히 없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래 중국식당을 해야겠다고 맘을 먹고 준비를 해나가는데 희락정이라는 중국집이 생겨버렸다. 잠깐 망설였지만 다른 뾰족한 수가 없어, 당시 건어물이나 과자를 좀 놓고 팔던 가게를 수리해 중국식당을 냈다.

70년도다. 별촌식당이라는, 중국식당 이름으로 익숙치 않은 그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상주에 살고 있는 친척 형님이다. 개업을 앞두고 놀러 와서 이름 하나 지어 달랬더니 지어준 이름이다. 메기매운탕집이 생각나는 건 어쩌면 혼자만의 선입견인지도 모르겠다.

◆50원이 3천원 될 때까지
70년 개업한 별촌식당의 당시 자장면 값은 50원이었다. 막걸리 한 되는 30원. 지금 자장면 한 그릇에 3천원인 것을 생각하면 정말 오래전 일이라는 것이 실감난다.

“장사는 괜찮았지. 그 때 2년 동안 벌어서 장가 밑천 만들어 저 사람하고 결혼했지.”

군북면 환평리가 고향인 송영순(57)씨와 결혼했다. 중국집을 운영한 36년 동안 곁을 지켜준 든든한 응원군이다. 처음 중국집을 시작했을 때는 전문요리사를 두었다. 하지만 식당을 운영하면서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요리사 관리였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아이구, 그래도 지금은 다 보고 싶네. 누구는 결혼 했을껴? 한 번 좀 찾아왔으면 좋겠네.”

옛 요리사 얘기가 나오자 송영순씨의 얼굴에 금방 추억과 그리움이 가득담긴 표정이 어린다. 때론 서로를 힘들게 했을지 모르지만 30년이 훌쩍 넘어버린 지금 모두 그리운 사람들이다. 별촌식당과 인연을 맺었던 요리사가 7명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그 중 찐빵을 아주 맛있게 만들었던 요리사와 아주 어렸던 견습 요리사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짙은 모양이다.

그렇게 3∼4년 정도 요리사를 고용해서 중국집을 운영하던 어느 날이었다. 한 여자에게 온 마음을 다 뺏긴 요리사가 점심시간이 되었는데도 들어올 생각을 안했다. 반죽이며 재료준비까지 다 끝마쳐 놓고 말이다.

▲ 지나간 옛이야기를 하면서 중국음식 만들기에 바쁜 부부
손님들은 밀려들어오기 시작하고 답답한 마음이 극에 달했다. 찾아보니 괴로움에 술병을 끌어안고 거의 실성해 있었다고 한다. 별 수 있겠는가, 직접 해보는 수밖에. 3∼4년을 곁에서 보았으니 대충 눈감은 익혔다. 반죽을 잡고 수타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첫 작품은 엉망이었다. 면 굵기도 다 제각각이고 난리도 아니었다. 오죽했겠는가. 처음 해보는 건데. 하지만 매일 매일 눈에 띄게 달라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직접 수타면을 뽑고 요리를 시작했다.

그러다 93년도에 교통사고로 손목이 부러지면서 더 이상 수타면을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6개월 정도 쉬고 기계를 들여 놓았다. 그때부터 별촌식당은 기계면의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후회 없이 살아온 36년 세월
“아이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별일 다 있었네. 외상값 받으러 다니던 일도 생각나고. 떼이기도 많이 떼였지. 탕수육 만들다가 기름 튀어서 데기는 또 오죽 많이 데었어야지.”

문 닫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찾아온 사람에게 얘기를 하다 보니 잊고 있었던 지난 일들이 하나 둘 새록새록 떠오르는가 보다. 혼자 빙긋 웃으며 긴 숨을 내쉰다. 스스로 정한 정년퇴직 시한을 앞에 둔 사람의 소회일 게다.

“처음에는 한 3년 해서 장사밑천 모아지면 다른 일 할라고 그랬지. 근데 그게 쉽지 않더라구. 한 번 시작한 직업을 바꾼다는 게. 힘들긴 얼마나 힘들었는데. 여름에 주방에서 수타면 뽑을려구 해봐. 아주 죽지 죽어. 그나마 가을, 겨울은 조금 낫고.”

다른 장사뿐 아니라 아예 가게를 옥천으로 옮길 생각도 했었다. 주변에서 그렇게 조언을 해주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 때 한 3년 밑천을 모아 다른 장사를 시작했으면, 아니 옥천으로 나갔으면 권칠용, 송영순씨 부부의 삶이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권씨 부부는 한 자리를 지키며 지금까지 별촌식당을 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다. 3남매 잘 키워 모두 여의살이 시켰으니 바랄게 뭐 있겠는가. 또 간혹 옛 맛을 못 잊어 찾아왔다는 단골손님을 볼 때도 흐뭇하다. 청주나 대전 등지에서 지나는 길에 아니면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는 경우가 있다.

“3시에 문을 닫고 안에 있으면 밖에서 막 문을 두드려요. ‘멀리서 옛 맛 못 잊고 찾아왔는데 벌써 문을 닫으면 어떻게 하냐고?’ 기분 좋죠. 뭐.”

잊지 않고 찾아오는 단골 때문에 기분이 좋다는 송영순씨도 별촌식당 안주인으로 살아온 삶에 후회 없긴 마찬가지다.

◆후한 인심, 자장면 그릇 넘쳐
“시원섭섭하지. 옛날 생각도 많이 나고, 그래도 넘어가기 전까지는 계속 할 생각이니까. 채소도 다 우리가 농사짓는 걸로 쓰고 세가 나가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하는 거지.”

44살부터 아침 조깅을 거르지 않고 부부가 함께 안내신협 산악회에 가입해 틈나는 대로 산에도 오른다. 그냥 그렇게 건강하게 사는 것이 좋다. 별촌식당을 그만두면 축사에 소 몇 마리를 키워볼 요량이다. 대화가 끝나갈 무렵 궁금해 물었다. 도대체 별촌식당 자장면의 양은 왜 그렇게 많은 것인지.

“인심이 그래. 괜히 조금 주면 미안하고. 그래서 먹어본 사람들은 아예 ‘많이 주소’, ‘적게 주소’하고 주문을 하지. 모르고 곱빼기 시키는 사람들은 아주 깜짝 놀라지. 허허.”

인심 후한 주인아저씨의 자장면을 맛볼 수 있는 날이 이제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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