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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마을탐방 [193] 군북면 대촌리
신마을탐방 [193] 군북면 대촌리
  • 이용원 기자
  • 승인 2006.03.31 00:00
  • 호수 8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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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역사 간직한 봄 닮은 마을
▲ 예전 방아실이 있었던 곳에 대청호 물이 위협적으로 밀려 들어와 있다. 주민들은 방화정에서 그 옛날 마을쪽을 바라보며 추억에 잠긴다.

대촌리는 낯설다. 방아실이 훨씬 익숙하다. 그런데 방아실도 방화실이란다. 이 지명은 1994년 세운 마을자랑비에도 나타난다. 지명의 유래를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글 끝에 ‘방화실 주민일동’이라 적었다. 다만, 내용에서 지명의 유래를 추정해 볼 수 있다. 1506년 창봉 류근이 화산 아래 터를 잡고 마을을 세웠다고 명시하고 있다. 주민들은 그 화산에 있는 고개를 지금도 꽃재라 부르고 있다. 대청호 물이 차기 전에 보은 송포 쪽으로 넘어 다니던 고개다. 그 화산에 연유해서 방화(方花)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마을이 생긴 모양이 디딜방아와 흡사하다 하여 방아실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기록도 있다. 이 글에서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방아실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기로 한다.

방아실만큼 마을자랑비에 근사한 돌을 사용한 곳도 보지 못했다. 차를 세우고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마을자랑비 뿐만 아니라 1967년에 세운 충북지사 김효영의 선정비, 1989년에 세운 문화류씨 세거지 기념비까지 마을의 초입을 알리는 다양한 표지석이 한꾸러미다.

마을로 들어선다. 넓은 마을 안 광장엔 검은색 아스팔트가 깔려있고 재실 앞쪽으로 또 하나의 비석이 서있다. 덕산 류지성 선생의 송덕비다. 2003년에 세운 비로 마을주민들의 숙원사업이었던 광장조성을 해 준 덕을 기리고 있다. 마을의 기념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을광장을 지나 방아실고개에는 정자가 하나 서있다. ‘방화정’이다.

대청댐 건설로 본 마을을 대부분 댐에 빼앗긴 주민들이 물에 잠긴 고향을 추억할 수 있는 위치에 세웠다. 그 정자 옆 양지바른 곳엔 ‘방화정 중수 기적비’가 있다. 1986년 문화류씨 종중과 금산의 류지억씨가 힘을 모아 세운 정자가 세월에 노후하자 힘을 모아 1998년 중추했다는 내용과 그 때 힘을 쏟은 사람들의 이름을 정리한 비석이다. 유난히 기념비석이 많은 이유는 아무래도 이곳이 문화류씨의 세거지로 집성촌을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 대촌리 빨래터는 여전히 유효하다.

◆갈등없는 문화류씨 집성촌
“집성촌이 아니었으면 마을 안에 저렇게 큰 광장을 조성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거예요. 방화정이나 다른 것도 마찬가지구요. 쉽게 의견이 모아지면 일을 하기도 쉽죠.”

마을 중간쯤에 새집을 지은 류사열(71)씨 얘기다. 류씨는 대청댐 건설로 마을이 물에 잠기면서 고향을 떠났던 젊은 축에 속한다. 떠날 때부터 집을 짓고 다시 고향에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했던 그는 고향을 떠난 지 25년 만에 꿈을 이뤘다. 종중 땅이 대부분으로 개인 땅이 많지 않은 곳이지만 운 좋게 개인 땅을 살 수가 있었다. 자식들에게 고향에 집 한 채 남겨주고 싶었다는 얘기 속에서 문화류씨 세거지인 고향 땅은 그에게 핏줄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집성촌이다 보니까 갈등이 거의 없어요. 다툴 일도 없고요. 그래서 발전은 더 더딘지도 몰라요. 그래도 악한 사람들 없고 평화롭게 살기 좋은 동네죠.”

류사열씨와 대화를 마치고 다시 나온 마을광장. 그곳엔 작은 빨래터가 있었다. 논과 벼랑을 이룬 곳에 붙어 있어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다. 그곳에서 우영란(71)씨가 손빨래를 하고 있다.

“세탁기가 있는데 잘 안 써요. 오히려 더 불편하더라고.”

최근에 손을 본 듯 정갈하게 정리된 빨래터 위에는 깨끗한 물을 모아 놓는 곳이 따로 있었다. 바가지에 물을 모아 마셔보니 시원한 맛이 깊이를 모르겠다. 지하수 특유의 무거운 맛이 나지만 시원함이 갈증을 해소하긴 여간 좋은 것이 아니다.

“내가 살던 집이나 논밭은 물에 잠기고 옛날 논밭이 있던 여기에 이렇게 집을 짓고 사는 거지. 젊은 사람들은 다 나가고 이렇게 늙은 사람들만 여기 남아서 사는 거야.”

▲ 수몰된 고향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세운 방화정.

◆본래 방아실엔 푸른 대청호 넘실넘실
시원한 물을 마시고 방아실고개를 넘어간다. 대청호가 코앞까지 닥쳤는데도 남아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횟집이다. 여남은 개 정도 되어 보인다. 마을 위로 형성된 논·밭둑에는 대전에서 나들이 온 가족들이 한가롭게 봄나물을 뜯는 풍경을 연출한다.

그곳이 본래 방아실이다. 이곳에 닿기 전 주민들이 모여살고 있는 곳은 한저골이라 불렀던 곳이다. 버스 정류장에도 한저골이라 명시되어 있다. 과거 한저골에는 마을을 만든 문화류씨의 재실과 산, 종답을 관리하던 인원이 살고 있었을 뿐이다. 당시 방아실 가구 수에 대해서는 주민들마다 조금 다르게 증언했지만 얘기를 종합해 볼 때 100가구 정도 되는 큰 마을이었다. 절반 이상이 대청호에 잠기면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지금은 자리를 옮긴 40여 호가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는 형국이다.

방아실 횟집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 더 동쪽 방향으로 가면 한눈에 봐도 새롭게 형성된 주거지역이 눈에 들어온다. 산에 둘러싸인 요새같이 아늑한 그곳에 봄볕이 한가득 쏟아져 들어갔다. 한남대 미대 정명희 교수의 집을 포함해 이국적인 형태를 갖춘 가옥 네댓 채가 들어서 있다. 그곳에서 산 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대청호와 맞닿아 있는 곳에 방아실농원이 한창 공사중이라 어수선하다.

동남쪽에서 밀려들어오는 물을 피해 떠난 자리에 포근한 안식처를 찾아 외지인들의 입주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살기 좋은 곳이라는 반증일 것이다.

군북면 대정1리인 대촌리는 봄과 무척 잘 어울리는 마을이었다. 주민들의 마음도 따뜻한 봄날같이 푸근했다. 마을을 찾을 때 좀 더 예의를 지켜준다면 지친 도시인들이 맘을 추스르고 갈 수 있는 품을 언제든 내줄 수 있는 마을이다.

지금, 푸른 물이 차올라 반도와 같은 형국으로 남아 있지만 주민들은 논농사와 포도농사를 지으며, 혹은 횟집을 운영하며 여전히 그곳에서 삶을 꾸려가고 있다.

따뜻한 봄날 오후에 만난 아름다운 방아실 노부부

▲ 윤옥년(왼쪽) 할머니와 유기흠(92) 옹의 다정한 모습.
점심을 먹은 윤옥년(82) 할머니가 대문을 나선다. 팔을 휘휘 저으며 방아실고개 쪽으로 가는 할머니를 좇아가며 이것저것 캐묻는다. 옛날엔 어떻게 살았는지, 마을의 모습이 어땠는지, 어딜 가는 길인지. 묻는 말에도 정확히 대답도 안하고 발걸음만 빨라지는 할머니의 얼굴에 순간 피식 웃음이 피어오른다.

방아실 고개에 거의 다다랐을 때의 일이다. 하얀 머리에 하얀 한복을 입은 깔끔한 할아버지 한 분이 올라서고 있었다. 작은 손수레엔 널빤지와 각목이 몇 개 올려져 있었다. 할머니는 얼른 달려가 손수레를 빼앗는다. 할머니의 그 모습이 연애를 하는 젊은 색시의 모습과 꼭 닮아 있다.

할머니가 60년을 넘도록 함께 살아온 유기흠(92) 옹이다.

“집에 온 애들하고 밥먹는데 어딜갔나 보이지 않아서 나와 봤더니….”
“닭을 몇 마리 키우는데 사료가 자꾸 젖어서 사료 그릇 좀 만들려고 가져오는 거여.”

할아버지는 할머니 대신 낯선 이에게 어디를 다녀오는 길인지 설명한다. 할머니는 논산이 고향인데 열여덟에 방아실로 시집을 왔다. 세천까지 기차로 와서 가마로 옮겨 탔다. 증약 쪽으로 해서 애개미를 거쳐 방아실에 들어왔다고 한다. 산으로 휘휘 둘러싸인 손바닥만한 방아실이 처음에는 무섭기까지 했단다. 하지만 무엇보다 손바닥만한 그 농토에서 사람들이 무슨 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지가 제일 걱정이었다고 한다. 넓은 들이 제법 있던 논산이 고향이니 걱정은 더욱 컸다.

“비가 오면 벼를 심어 먹고, 가물면 수수, 보리 같은 그냥 잡곡이나 심어서 먹는 거지. 고생스러웠어.”
“옛날에는 담배농사를 많이 졌지. 그게 지금 포도농사나 다른 농사보다 돈은 더 됐어. 지금은 어디 힘들어서….”

천천히 걸어 내려오니 어느덧 집 앞이다. 신문에 내려고 한다는 소리에 남부끄러워서 어떻게 하느냐고 손사래를 치는 노부부의 모습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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