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다 솔 껍질 띄워 경주를 했죠”
“개천에다 솔 껍질 띄워 경주를 했죠”
[내고향 옥천] 청산면 백운리 출신 보은 풍미식당 대표 박구현
  • 황민호 기자 minho@okinews.com
  • 승인 2006.03.24 00:00
  • 호수 8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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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 풍미식당 대표 박구현씨

4살 때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큰형과 함께 한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전쟁이 일어났고, 참 춥고 배고팠던 시절이었다. 걸어서 대구, 경산까지 막내는 그 곳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피난지에서 태어났다고 막내에게 ‘경산’이란 이름을 지어줬다. 밀양박씨, 백운리에서 뿌리내린 유서깊은 집안이었다. 현재, 교평리에 사는 박영대씨가 종친회장을 맡고 있는 선배이고, 백운리에 사는 박선옥씨가 조카뻘이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 청산초(46회), 청산중(16회)을 졸업했다. 찢어지게 가난했고, 나물을 캐다 죽 끓여먹는 것이 일상이었다. 초등학교는 그 당시 전교생이 1천명이 넘을 만큼 컸다. 콩나물 교실에 바글바글 참 정도 많이 들었다. 지금은 200명도 안 된다니 격세지감이다.

중학교는 그야말로 흙집이었다. 맨 땅에다 찍어낸 흙벽돌로 차곡차곡 외벽을 쌓았다. 교실 바닥이 내내 땅바닥이라 먼지가 풀풀 날려 물을 자주 뿌리곤 했다. 규율부의 눈을 피해 담을 넘어 집에서 점심을 먹고 오곤 했던 기억도 난다. 버드나무 울창했던 장위리보, 청성보로 소풍을 지겹도록 갔었고, 운동회는 온 마을 잔치였다.

얼마 전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임한 김영자씨의 동생 영구는 참 달리기를 잘했다. 친구 일한(청산농협 전무)이랑 나도 열심히 달렸다. 그래서 우리 백운마을은 늘 달리기 대회에서는 일등마을이었다. 

서울로 올라가 여러 막일을 하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고향은 잘했든 잘 못했든 어머니의 너른 품처럼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고향에서 큰형과 같이 농사를 짓기도 하고, 예비군 전투 소대장을 맡아서 재미있게 지내기도 했다. 그 당시 방위로 분대장 구실을 했던 김용숙씨가 지금 청산면 부면장이라 하니 세상 일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내 길을 떠났다. 그 당시 청산은 시대의 격변기 속에서 변화하지 못했다. 기차가 다니고, 고속도로가 생겼지만, 청산은 그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저만큼 비켜나 있었다. ‘쇠락’, 고향 사람들은 하나둘씩 일자리를 찾아 청산을 떠나갔다.

나도 그 대열에 섰던 것이다. 난 고향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싫어 보은 내속리면 속리산 언저리에 자리를 잡았다. 여관도 해봤고, 기념품도 팔아봤지만, 85년 사촌누님이 하는 식당을 인수하면서 거기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시대를 ‘풍미’해보고 싶어서, 음식의 좋은 맛을 내고 싶어서 ‘풍미’식당이라 했다.

아! 이제 고향을 떠난 지 벌써 30년이다. 고향이 다시 생각났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담긴 세월만큼 고향에 대한 추억은 깊어져갔다.

청산에 대한 바람
박구현(60)씨. 보은 속리산에 40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고, 산채비빔밥 정식으로 유명한 풍미식당 대표이다. 지근거리에 고향을 두고, 이제 멀리 떠나간 동창들을 생각하며 그는 고향 노래를 불렀다. 앞 뒤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살았고, 휴일마다 바쁜 일 때문에 번번이 고향 친구들 한 번 마음 놓고 만나 본 적이 없었다.

3남매를 키우며, 이제 어느덧 노년을 생각할 나이지만, 아직도 삶이 그렇게 녹록치가 않다. 대학까지 다 보낸 자식들이지만, 결혼시킬 걱정을 한다. 부모의 자식 걱정은 끝이 없다.

“고향에서 살고 싶었지요. 청산에 기차가 다니고, 고속도로만 놓여졌어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많은 일자리가 생겨나 고향에 머무르며 살았을 텐데요. 이렇게 타향살이를 하네요. 고향이 발전됐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백운마을은 임창규 이장이 애를 많이 써서 좋아졌더라구요. 좁다란 골목길 정비, 도로 정비 등이 잘 돼 마을이 훨씬 나아졌어요.”

청산은 주변 여건의 변화에 이처럼 비껴나 있었고, 그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걸었다.  “옛날 장용호씨 가발공장 있을 때는 그나마 딸 가진 부모들은 취직 걱정할 필요가 없었거든요. 탄광산업이 활성화되었을 때도, 광부들 월급날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았었죠.”

그의 말에 회한이 묻어난다. 산업화에 비껴간 농촌은 자생력을 잃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떠나갔다.  “도덕봉과 백골재에 올라 노래를 부르곤 했었죠. 우리 교가 아직도 기억나요. ‘보아라! 창공의 솟은 도덕봉’ 이렇게 시작되는 교가였죠.”

그가 말한 청산은 산업화로 인해 젊은 인력들이 심하게 유출되면서 몸살을 심하게 앓았던 여느 농촌과 비슷했다. “남아있는 사람만이라도 행복하게 아기자기하게 살면 바로 행복 아니겠습니까? 저도 제 어릴 적 추억이 담겨있는 고향에 가고 싶습니다. 소나무 껍질을 개울에 띄워 경주하며 달렸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거든요.”

청산에서 그는 오랜 꿈을 꾸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그런 꿈들이 하나둘씩 모여 청산이 행복한 꿈을 꾸기를 바랐다.  이제 산업화의 외풍에 의한 발전보다, 스스로 자생력을 갖고 고향을 지키고 사는 사람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꿈을 꾸기를 바랐다.  그것은 급격히 쇠락한 청산의 모습을 못내 아쉬워하는 박구현씨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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