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부대에 '큰형님·큰누님', 10년 세월 서화천에 흐르고
화랑부대에 '큰형님·큰누님', 10년 세월 서화천에 흐르고
함께사는 세상 [141] 군서 월전리 화랑교회 김용호 목사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6.03.24 00:00
  • 호수 8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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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대를 굽어보는 언덕 위 하얀 교회에서 김용호 목사와 아내 최미옥씨는 보람을 키워가고 있다. 사진 뒤는 김 목사를 도와 활동하고 있는 군종병 정의택(23) 일병이다.

군부대 옆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한 목사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군서면 월전리에 있는 화랑부대 정문을 지나 왼쪽으로 휘어 돌아가면 언덕에 교회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다. 부대를 굽어보고 있는 그곳이 화랑교회다. 90년대 중반 군목제도에 변화가 생기면서 화랑부대에서 공식적인 군목활동은 중단됐다. 군 교회의 구실에 대해 누구보다 높이 평가했던 당시 연대장 임원준 대령이 추천해 김용호(47) 목사는 화랑부대와 인연을 맺게 됐다. 전과 같은 군인 신분의 공식적인 군목활동을 아니었지만 군부대 장병을 위한 교회의 목사로 그 구실은 다르지 않다. 당시 김 목사는 딱 두 달만 머물다 떠나려 했다. 청산이 고향인 그는 당시 8년 동안 목회 활동을 했던 영동을 떠나 서울의 큰 교회의 부목사를 거쳐 어려운 곳을 찾아 해외선교를 떠나겠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부목사로 가기 전 비어 있는 시간을 이용해 봉사를 하자는 생각에서 제안을 받아들였다. 딱 두 달이었던 당초 계획이 물 건너 간 것은 이미 오래고 지금 10년 동안 그곳에서 부대 장병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두 달로 끝낼 수 없었던 인연
“두 달 동안 병사들과 함께 어울리고 부대 방문해서 교육도 하면서 이 아이들에게 힘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굳이 외국까지 가서 목회활동을 하느니 여기서 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었죠. 그런 생각으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보니까 지금까지 온 거예요.”

김 목사의 그 같은 생각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10년 동안 수많은 장병들이 입대를 하고 전역을 했다. 늘 그곳에 있는 김 목사와 화랑교회는 그들에게 작지 않은 존재였다. 전역을 하고도 다시 김 목사를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 그를 증명한다.

때론 주례를 부탁하기도 하고, 때론 명절 인사를 하러 들르고, 때론 자신의 석사학위 논문에 고마운 이로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그들을 통해 김 목사는 교회와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곤 한다.

어느 날 찾아와 자신의 군생활 사건 하나를 고백했던 병사의 얘기는 더욱 의미심장하다. 군생활을 하던 중 그 병사는 탈영을 하기 위해 밤에 무작정 뛰쳐나갔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정문과는 반대방향으로 뛰어가다 홀로 불 밝히고 서 있는 교회 십자가를 보았다. 무슨 까닭인지 그 십자가를 따라 발걸음이 옮겨갔다. 신앙도 없는 병사였지만 그곳에서 기도를 하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부대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김 목사는 부대 안에 있던 교회의 이전 논의가 있었을 때 언제든 병사들이 교회를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해야 한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몇 가지 이야기를 끝낸 후 김 목사의 얼굴에서 흐뭇한 미소가 피어난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해외선교 활동은 어쩌면 한참 더 뒤로 미뤄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반인 신도 민경분씨도 가족
군인이나 그의 가족을 제외하고 화랑교회의 일반 신도는 딱 한 명뿐이다. 8년 째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민경분(42)씨. 김 목사는 “사실 신도라기보다는 가족”이라고 설명했다. 민경분씨를 만나게 된 것도 평범하지 않다. 김 목사의 아이들이 커가면서 피아노라도 가르치고 싶었지만 군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활동을 하는 화랑교회의 재정으론 생활비를 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작정 ‘천사피아노’를 찾아갔다. 상호에 ‘천사’라는 낱말이 들어간 것이 그 이유였다. 가서 사정을 얘기했다. “한 명의 학원비로 두 아이들을 가르쳤으면 좋겠다.” 무례한 부탁일 수 있는 그 같은 요구에 당시 민 원장도 흔쾌히 동의를 해 주었다. 그것이 무척 고마워 민 원장을 집으로 초대해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민 원장은 화랑교회에 나오는 유일한 일반인 신도가 되었다. 교회를 찾는 장병들에게 따뜻한 밥을 하고 온갖 궂은일에도 두 손 걷어 부치고 나서주니 신도라기보다는 이젠 가족이라는 김 목사의 설명이 맞다.

든든한 신도를 얻은 에피소드지만 한편으로 김 목사의 어려운 현실을 확인할 수 있는 얘기기도 하다.

“생활은 어떻게 하세요?”

고등학교에 다니는 요한이와 중학교에 다니는 기쁨이를 가르쳐야 하고 기본적인 생활도 해야 한다. 그 뿐인가. 매주 교회를 찾는 50∼60명의 장병들에게 점심을 해 주어야 하고 유격훈련이나 동계훈련이라도 하면 다른 지역에 있는 화랑부대의 예하 장병들까지 찾아가 위문을 한다. 1년이면 2천만 원이 넘게 들어가는 운영경비를 마련하는 것도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군인들만 찾는 교회를 어떻게 운영하며 어떻게 생활하는지는 미스터리다. 천사피아노학원을 찾았던 김 목사처럼 직접 물었다. ‘일하는 소에게 멍에를 씌우지 않는다’ 김 목사는 구체적인 답변대신 성경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지금의 교회를 짓는데도 1년의 시간이 들었고 큰 돈이 들어갔다. 하지만 한 번도 자신이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매년 부활절과 추수감사절에 전 부대 장병을 초청해 벌이는 파티도 매번 치러내고 있다.

“그래서 외상이 많아요. 빵 값이나 우유 값도 제때 못 주는 경우가 많죠.(웃음)”

◆장병들의 훌륭한 상담가
김 목사는 아내 최미옥(42)씨와 아들 요한, 딸 기쁨이에게 더욱 큰 고마움을 갖고 있다.

“목회활동의 70%는 아내 덕분이에요. 저의 사역을 진심으로 기뻐해주고 전적으로 지원해주니까요. 기쁘고 고맙죠.”

아내 최미옥씨도 2개월의 군부대 목회활동이 이렇게 길어질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낯선 곳에서 똑같은 옷을 입은 장병들을 대하는 것이 처음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얼굴도 구별하지 못했어요. 다 똑같이 생긴 것 같고. 지금은 그렇지 않죠.”

장병들에게 누님 같은 존재에서 이제는 이모 같은 존재가 될 만큼 시간이 흘렀다. 매주 50명이 넘는 인원의 식사를 준비하는 쉽지 않은 일에도 익숙해졌고 장병들과 함께 설거지를 하며 두고 온 애인과의 문제를 비롯해 다양한 상담을 해주는 듬직한 존재가 되었다. 아이들도 김 목사를 잘 이해해 준다. 아니 자랑스러워 한다.

“남편이 음식을 참 잘해요. 그래서 아이들도 아빠한테 맛있는 거 해달라고 조르지 저한테 얘기하진 않아요.”

믿음을 바탕으로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하는 일이지만 김 목사도 힘든 상황이 없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을 걱정해주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반복해 들으며 가슴 속 걱정도 함께 커진 것이 사실이다. 그 때 그의 마음을 다잡아 준 것은 서화천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물풀이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찾아간 서화천에서 물풀을 보았어요. 보이지 않던 물풀이 언젠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더라구요. 그런데 어느 날 큰물이 지나가고 나서 다시 그곳에 가보니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거예요. 그때 생각했죠. 목사인 제가 개인적 삶의 질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요.”

믿음과 애정으로 화랑부대에 희망과 행복을 전파한 김용호 목사부부와 그 가족의 10년 세월은 서화천에 실려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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