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맛 지켜주는 친구들이 예뻐요”
“고향의 맛 지켜주는 친구들이 예뻐요”
[내고향 옥천] 유동임/안남면 도근이 출신, 교보생명 대전AM사업소 대표이사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6.03.10 00:00
  • 호수 8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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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동임씨

“피라미드라는 것이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어요.”

안남초등학교 37회 동창회 얘기다.  처음 동창회를 만들려고 흩어져 있던 친구들을 모으는데 사용한 방법이 이 피라미드 방식이었다. 연락이 대부분 끊겼지만 처음 잡히는 끈을 이용해 하나 둘 모으다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지난 2004년 첫 37회 동창회(회장 주교종)를 개최하는 날 100명이 넘는 동창들이 교정에 모였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첫해니까 많이들 온 거지...’라며 너무 큰 기대를 갖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지난해, 2회 동창회를 준비하면서 더 많은 친구들을 찾았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2회 동창회도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참석했다. 1회와 2회 동창회를 치르면서 찾은 친구가 150명을 넘었다. 그 과정에 친구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움직인 인물 중 한 명이 이번에 소개할 유동임(47·대전 서구 도마동)씨다. 사무실 직원들이 ‘사장님, 여기가 동창회 사무실인 거 같아요.’라고 타박을 줄 정도로 한동안 매달렸다.

37회 동창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유씨는 교보생명 대전AM사업소(직영 에이전시)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코흘리개 우정 더욱 단단해져
“고향에 있는 친구들을 생각하면 그냥 밥 사주고 싶고 술 사주고 싶고 그래요. 그 친구들이 없으면 명절에 성묘 가서 그냥 조상께 인사만 하고 와야 되잖아요. 고향을 지키는 친구들은 우리 같이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겐 고향의 맛을 지켜주는 고마운 사람들이죠.”

그래서 그녀의 고향 친구 사랑은 각별하다. 지난해에도 토마토 출하를 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고향 친구의 소식이 들려오자 즉시 동창들에게 사발통문을 띄었다.

요즘 통신기기가 오죽 좋은가? 급작스런 연락도 그리 힘든 게 아니었다. 친구들의 동창 사랑 역시 그녀와 다르지 않았다. 200상자가 하루 만에 동이 났다. 그렇게 판 토마토가 ‘맛까지 좋다’는 뒷 인사를 들으니 기분이 더욱 좋았다.

안남초 37회 동창들의 우정은 아파 서 병상에 누워 있는 친구부터 힘들게 생산한 농산물의 출하를 걱정하고 있는 친구에게까지 깊숙이 미쳤다. 어린 시절 코를 찔찔 흘리며 뛰놀던 우정은 40년 가까운 세월의 더께가 앉을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모양이다.

“모산에 살고 있는 친구가 있거든요. 잠깐 들르러 갔다 오는데 그 친구 각시가 신문에 싼 것을 내미는 거예요. 집에 와서 펼쳐보니 인삼이더라구요. 수확이 끝나고 따로 그렇게 잘 다듬어서 모아놓은 건가 봐요. 눈물이 다 날려구 그러는 거예요.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마워요. 그 친구 부인이 주니까 더 고맙더라구요. 그걸 어떻게 돈 주고 산 것하고 비교를 하겠어요.”

미자, 영성, 교종, 영달, 병택씨 등 전부 나열하지 못하는 안남초 37회 동창들이 유독 고향에 많이 살고 있단다. 유동임씨는 그렇게 따뜻한 친구들과 가족이 살고 있는 고향 안남이 그래서 더 좋다.

다만, 그 친구들이 농촌에 살면서 노력한 것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제대로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 지금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친구자랑을 잠깐 접고 유동임씨의 어린 시절 얘기를 들어보았다. 안남면 도덕1리 도근이마을이 고향인 유씨는 유사현(77)씨와 성낙흥(75)씨 사이에서 5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학창시절엔 오히려 조용한 학생일 뿐이었다.

냇가에서 멱감던 추억 아련히
“아침에 학교까지 걸어 다녔거든요. 힘들어요. 아침 일찍 나오면 이슬에 신발이 다 젖으니까. 맨발로 걸어갔어요. 한참을 걸어 나가서 개울에서 발 씻고 양말신고 다시 신발 신고 걸었죠. 또 아스팔트 위를 걸으면 신발 바닥이 금방 구멍 나서 옆에 흙길만 밟고 다녔구요.”

그렇게 애지중지 신던 하얀색 운동화는 정성도 몰라주고 겉은 멀쩡한 상태에서 꼭 바닥에 먼저 구멍이 났다고 한다. 요즘 일부러 구멍을 내서 새 운동화를 사려하는 아이들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유동임씨는 도근이 마을을 흐르던 개울물도 기억해냈다. 볕 따가운 여름이면 그곳에서 친구들과 물장구 치고 젖은 옷은 커다란 바위에 척 널어놓고 말렸다가 다시 입고 집으로 돌아갔던 그 기억. 깨끗하고 무척 시원했던 그 개울물도 고스란히 머릿속에 담고 있다.

고등학교를 대전으로 진학하면서 밑에 4명의 동생도 모두 문화초등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그 때부터 아버지와 어머니 노릇을 대신하며 모두 학교에 보냈다. 흔히 그 시대 우리 머릿속에 담고 있는 억척(?)스럽고 한없이 따사롭던 큰누이의 모습 그대로가 유동임씨였다.

못 다 이룬 면학의 꿈 
지금도 유씨는 2주에 한 번 꼴은 고향을 찾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고 아직도 부모님이 고향에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남편 고향은 대전 흑석리 쪽이고요. 저는 안남이잖아요. 그래서 노후에 어디로 갈지 한참 고민했어요. 서로 자신의 고향으로 가자고 그런 거죠. 그러다가 결국 금산과 옥천 경계지점 근처에 땅을 마련해 뒀어요. 둘이 합의를 본 거죠. 지금은 그냥 채소 심어서 먹고 사는데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그곳에 집을 짓고 노후를 보낼 생각이에요.”

교보생명 에이전시 대표이사로 못 다한 공부를 하기 위한 준비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고향에 대해 이것저것 신경까지 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지만 지금의 삶이 행복하고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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