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히 세상을 지켜보는 장아실 지킴이
고즈넉히 세상을 지켜보는 장아실 지킴이
함께사는 세상 [140] 옥천읍 문정리 장아실 박진하씨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6.03.03 00:00
  • 호수 815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장아실 박진하 할아버지

지금 우시장이 서고 식당 ‘명갗가 있는 그 뒤편 산자락에도 마을이 있었다. 지금은 집 한 채 조용히 앉아 있지만 얼마전까지 서넛 집이 살았다. 또 그 전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할 만큼 밭에서 많은 기왓장이 발견되곤 한다.

‘장아실’이라는 마을 이름이 낯설다. 과거 문정리에 속했던 무시랭이 근처이긴 한데 ‘장아실’에 대한 기록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유일한 주민, 박진하(86)씨가 장아실이라고 부르니 그곳은 장아실이다.

명가 뒤쪽으로 쑥 올라가면 좌측으로 폐가가 한 채 보인다. ㄱ자로 꺾인 그 집엔 지금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 그 집 밑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친 집 한 채가 곧바로 보인다.

그곳이 박진하씨가 살고 있는 곳이다. 언뜻 보아도 꽤 나이를 먹었음직한 집이다. 그 나이를 염두하고 보면 지을 당시엔 무척 정성을 기울인 집이라는 걸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구석구석을 꼼꼼히 쳐다보게 만드는 묘한 기운을 간직한 집이다. 조금 생뚱맞게 집 한쪽 마당에 지어 놓은 축사까지도 그 집하고는 잘 어우러졌다. 야트막한 탱자나무 울타리 너머로 아래쪽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것도 묘한 매력을 더해준다. 

현관을 겸한 대청에 올라 문을 열고 들어서면 중간에 마루를 두고 삼면에 방을 하나씩 배치했다. 한 쪽으로는 부엌도 냈다. 건평이 18평 밖에 안되는 자그마한 집이지만 알뜰하게 공간을 활용하고 있었다.

땅값보다 더 들어간 건축비
안방을 놓아두고 밖이 보이는 창이 조그맣게 난 방에서 박진하씨는 살고 있다. 켜 놓은 텔레비전 소리가 유난히 크다. “귀가 잘 안 들려서 전화도 제대로 못 받아. 요즘 그냥 이렇게 살지 뭐. 오늘은 날이 좀 푹한 것 같아서 불을 안 땠더니 방이 좀 차가운데….”

미안한 표정으로 화로 앞에 방석을 내어주곤 당신은 침대 위에 앉는다. 집안에서도 두꺼운 점퍼를 입고 있는 박진하씨의 본 고향은 청성면 합금리였다. 그곳에서 결혼을 하고 마흔이 다 될 때까지 살았다. 옥천을 선택한 것은 생활 때문이었다. 

고향에도 3천여 평 정도의 땅이 있긴 했지만 노동량에 비해 생산이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이 비탈 밭으로 일을 하기가 여간 고된 것이 아니었다. 결국 1960년쯤에 땅을 팔아 9만원을 만들었다. 당시에 소를 두 마리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맨주먹이다시피 옥천읍으로 나와 땅이 꽤 많던 유씨네 집안의 농사일 일부를 맡아 시작했다.

힘들긴 했지만 고향에서 했던 고생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그러다 경부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이주를 하게 됐다. 그 때 이웃과 함께 들어온 곳이 지금 살고 있는 장아실이다. 땅값이 싸서 인연을 맺게 됐다. 집터만 평당 5천원 정도면 살 수 있었다. 땅값이 싼 대신에 길이 제대로 없었다. 손수레 하나만 간신히 들어올 수 있었다. 집을 짓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그 때 모래를 실어다 저 아래 신작로에 갖다 놔주면 한 차에 4천원을 받았어. 그러면 그걸 여기까지 끌고 올라와야 할 것 아니여. 사람을 사서 전부 지게로 나르는 거야. 그 품삯까지 주고 나면 모래 한 차에 한 7∼8천원은 먹힌 꼴이 됐지.” 

그렇게 많은 비용을 지출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터 값을 조금 더 주더라도 읍내에 집을 지었으면 훨씬 좋았을 것이라 늘 후회했다고 한다. 어쨌든 지금은 고된 삶이 누적돼 피로한 몸을 쉬는 데는 크게 부족한 것이 없는 집이다.

◆방 안 화로에 외로움도 태우고
박진하씨의 방에는 조그맣고 노란 냄비가 화로 위에서 적정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 후 매일 혼자 밥을 먹는다. 고향에서 가지고 나온 오래된 ‘화로’가 아주 요긴하게 쓰인다. 숯만 조금 넣어 주면 방도 따뜻해지고 더운 음식도 간편하게 먹을 수 있다. 이젠 외로움을 느끼기엔 너무 익숙해진 삶이다. 

“땔감이야 지천에 널렸지. 산에 올라가면 죽어서 넘어진 소나무가 얼마나 많은데. 이제 힘이 없어서 가지고 내려오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연료비를 아끼려고 나무를 때다 보니 간혹 찾곤 했던 ‘경로당’을 한 번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노인들이 보통 점심을 먹고 경로당에 나오기 때문에 그 시간에 맞춰 경로당에 가서 놀다보면 한 시간 남짓 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저녁에 따뜻한 방에서 자려면 세 시쯤에는 집에서 불을 때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렇고, 요즘엔 가보면 친구들도 별로 없어. 다들 세상을 뜨기도 하고 집에만 있나봐. 나오기도 귀찮고 그래서 그런지…. 그래서 나도 요즘엔 잘 안가.” 

가까운 경로당 대신에 멀리 있는 고향 ‘합금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40년도 훌쩍 넘어버린 오래된 이야기다. 고향 합금리는 박진하 씨의 머릿속엔 여전히 어제 다녀온 것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다. 

“후회는 안 해. 거기 있었으면 뭐 했겠어. 이제 죽으면 고향에 있는 우리 선산으로 가면 되는 거지. 그 때 고향사람들이 참 많이 나왔어. 그래서 지금 옥천에도 많이 살고 있지. 물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더 많지만….” 

그 때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왔던 친구들 중엔 ‘다시 돌아 오겠다’며 집과 땅도 안 팔고 나온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박진하씨처럼 대부분 다시 고향에 돌아가지는 못했다.

◆돌아서는 뒷모습엔 외로움 가득
지금 박진하씨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정부보조금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돌이켜보면 참 고된 세월이었다. 그 시대 삶이 대부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삶’ 이었다 생각하는 것이 맘 편하다. 찾는 이 많지 않은 장아실 외딴집에서 텔레비전을 벗 삼아 살아가고 있지만 간혹 집 아래 명가 사장이 찾아와 ‘점심이라도 내려와서 드시라’고 청하는 것이 기분 좋다. 그 청이 고마울 뿐 가지는 않는다. 

“젊은 사람들 와서 밥 먹고 있는데 그 옆에 앉아 있기가 좀 그렇다”는 것이 이유다. 낯선 사람이지만 반가운 방문객을 맞아 한참 동안 고향 얘기와 살아온 얘기, 집 얘기를 풀어 놓는 박진하씨의 얼굴엔 웃음과 근심이 교차했다. 

현관까지 따라 나와 방문객을 배웅하고 돌아서는 할아버지는 다시 텔레비전 앞에 앉아 길고 쓰디 쓴 장미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을 게다.    

비 새는 지붕 좀 고쳐주세요∼

박진하씨의 오래된 집은 지금 비만 오면 엉망이다. 비만 내리면 집안에 있는 널찍한 용기는 모두 가져다 받쳐 놓아야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비가 새면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임시방편으로 막아놓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쉽지 않다. 어지럼증이 심해서다.

지난해 그런 모습을 보고 보건소 직원이 고맙게도 얘기를 해줘 기술자가 오긴 했는데 고치지는 못했다. 보수할 부분이 너무 커서 정부 보조 사업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얘기를 했다. 자부담 부분이 너무 커지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지원사업을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찾고 있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날이 풀리며 봄을 재촉하는 비가 살금살금 내리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수 없다. 장아실 마지막 주민 박진하씨가 좀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지원의 손길을 기대해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태평양 2006-03-09 20:14:30
지붕을 수리하기 위한 경비가 얼마 가량되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