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희의 수필기행[1] - 적하리 올목 마을
조만희의 수필기행[1] - 적하리 올목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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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0.02.12 00:00
  • 호수 50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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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만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이름처럼 억센 그는 내 어릴 적 우리 집 총각 머슴이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형제들은 늘 그의 억센 어깨 위에서 놀았고, 그의 근육질 팔뚝은 레슬러 김일에 견주어도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기 두어 달 전에 진달래처럼 눈 고운 처녀가 사랑채에 스며들어 처마 끝 참새처럼 자고 간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새경도 다 챙기지 못하고 이 바쁜 시절에 그가 없어진 것은 필경 그 여자 때문이라 했다. 몇 년 세월이 풀풀 지난 후 억만이는 이웃 마을에 다시 머슴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예전의 억만이가 아니었다. 그의 눈가에는 세월 저편의 풍경이 알듯 모를 듯 걸려 있고, 그저 주인의 의지대로 순치 된 황백이 소처럼 묵묵히 일 할 따름이었다. 예전의 초가집 용마루까지 솟구치던 그 나뭇짐의 신화는 더 이상 볼 수 없고, 어쩌다 술이 거나하면 인근 동네가 쩌렁 시끄러울 뿐이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예전의 억만이는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면서 억만이의 옛 여인을 원망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이 시대 마지막 머슴으로 남아 온 동네 농사를 다 지어 주던 억만이도 새로운 시절의 도래 속에 어쩔 수 없이 아랫마을 방앗간지기로 떠밀려 들어야했다.

소달구지에서 경운기로 이동네 저동네 기웃거리며 쌀짝보다도 무거운 세월을 실어 나르던 그는 여느 사람보다도 훨씬 마모된 육신을 지켜야 했다.

어느 날 그에 의해서 하서방의 주검이 발견되었다. 하서방은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이 고을에 흘러 들어온 머슴이었는데 한겨울에 도랑가에서 고인돌 시대 사람처럼 죽어 간 것이다. 인적이 드문 그의 움집으로 삼립빵을 사들고 찾아간 억만이에 의해 하서방의 주검은 공표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총각 머슴 억만이도 오십 줄만 달랑 넘기고 하서방처럼 폐병을 싸안은 채 죽어갔다. 이미 노동력을 상실한 그에게 아무도 최후의 안식처를 제공하지 않았거늘 그는 평생 이 고장을 떠나지 못하고 오로지 그의 품에는 한 여인을 전설처럼 묻은 채 죽어갔으니...

그의 옷섶 깊숙한 곳에는 옛날 우리 사랑채에 스며들었던 진달래 여인이 빛 바랜 사진 속에서 천연덕 웃고 있었더라나.』

동이면 적하리 금강 변 올목 마을. 동이중학교 앞길을 따라 적하리 강변 마을 쪽으로 가면 이 고장 토박이 전창하씨가 운영하는 금강나루터 식당이 보이고, 강촌, 삼호, 최대감집(뒤에 '전망 좋은 집'으로 바뀜) 따위의 식당들이 나오는데 바로 이들 식당 맞은편 바라기로 보이는 강 건너 마을이 올목이다.

이곳의 감흥을 제대로 적시기 위해서는 동이중학교 뒤편 길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경부 고속 도로 최고의 절경 금강유원지로 향하는 이 길은 가히 일품도로이다. 특히 제2금강교에서 올목 마을에 이르는 뚝방 길은 아스팔트길인데도 차 한대 만만히 비껴 주지 못하는 좁다란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은 포장된 도로일지라도 자연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정겨운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보기 드문 길이다. 정말이지 이곳 강변이야말로 함부로 달려 와서는 안 되는 곳이지 않은가?

강변에 비껴 솟은 철봉산 들머리에 오종종 서 있는 올목 마을의 여섯 빈집들. 사람들과 이곳에 오면 그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한마디씩을 던진다.‘앗따! 이곳에 별장 짓고 살면 죽여주겠구먼!’

어느 집이라 할 것 없이 여남은 평 마당에 서너 칸 살림방이 전부인 이곳 마을. 지금은 비록 빈집으로 남아 있지만 나는 이곳에만 오면 가난을 동맹으로 조직하여 올망졸망 몸 뉘이고 살았을 그들의 삶이 떠오른다. 이 마을 어느 틈새를 돌아봐도 돈 될성싶은 곳은 눈에 띄지 않는다.

아니 이 곳을 누군가 혼자 다 차지한다 할지라도 가난을 쉬이 떨쳐 버리지는 못했으리라. 행여 뜬금없이 윗물 목에 큰비라도 쏟아져 내리면 댓바람으로 불어나는 물줄기로 시도 때도 없이 고립되고 말아 밤새 철철철 나대는 물 울음소리만 들려왔을 터인데...

하지만 태초에 이곳에 마을이 자리한 것은 그 어떤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비록 어느 날 동시 다발적으로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는 기구한 운명을 지녔을지라도 저렇듯 그림 같은 풍경이 머무른 곳에는 필경 강물보다도 깊은 전설이 숨쉬고 있으리라.

나는 이곳 빈 마을에 들어서면 어릴 적 억만이와의 추억이 뭉클뭉클 되살아난다. 억만이! 우리 집에 살 때가 가장 행복했었다는 억만이의 고향을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고향이 꼭 이곳을 닮지 않았을까?

그 사내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갈 수 없는 빈 고향을 갖게 된 것은 아닐런지. 김성장 시인의 시(詩) '겨울을 건너는 강'이야말로 이 곳을 고향으로 둔 자만이 쓸 수 있는 속 깊은 사연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이 곳 강마을에 그와 같은 시인이 있음은 너무도 당연한 우주적 질서이리라.

요즘 시골 마을을 둘러보면 예전의 분위기는 처마 끝에나 듬성 걸려 있고 옛 것을 찾아보기란 힘든 노릇이다. 어느 집이라 할 것 없이 방 구조를 변경하고 석유 보일러를 설치하다 보니 예전의 아랫목 윗목의 구별은 없어지고 전통 집의 형태는 외벽과 지붕에서나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학창 시절 지리시간에 배운 관서형이니 남부형이니 하는 4계절 닮은 가옥 구조는 점점 찾아보기 어려운 노릇이다. 물론 민속촌이나 민속 박물관에 가면 전통집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옛사람들의 삶의 숨결을 직접 느껴 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한데 이곳 올목 마을에 남겨진 여섯 빈집들은 옛 사람들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지붕만 70년대식 새마을 스레트로 얹혀져 있고 내부는 옛 모습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곳을 청소년 수련장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즉 옛 것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그런 교육장으로서의 수련장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남아 있는 집들을 적절히 보수하고 같은 형태의 집들을 여남은 채는 더 지어야할 것이다.

물론 지붕은 초가로 얹고 방 구조는 옛 모습 그대로 살려 두되 내부 시설은 적절히 융통성을 발휘하여, 현대식 위생 시설과 냉난방 시설을 갖추는 좋을 것이다.

한편 이곳의 교육과정은 우리의 정체성과 환경의 고마움을 터득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함이 좋다. 즉 아이들은 이곳에서 씨뿌리는 것을 배우고, 옹기도 굽고, 숯도 구워보는 것이다. 짚으로 옛사람들이 쓰던 생활용구를 직접 만들어 보기도 하고,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어 보기도 한다.

그러면 옛사람들의 숨결을 생생히 체험하며 자연의 소중함도 함께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마을 앞 강 가운데에는 수중섬이 있고, 1000여평 남짓한 밭도 딸려 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보리, 밀, 메밀 등 곡식과 함께 갖은 채소들도 가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농심을 저절로 엿보게 되리라. 한편 마당에서 비석치기, 멍석 말기, 장치기, 자치기 등 전통놀이를 맘껏 즐기게 하고 강물에 황포돛대까지 띄운다면 이곳은 그야말로 이곳은 아이들의 천국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곳은 어느새 투기꾼이 몽땅 차지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는 돈 많은 미래의 주인을 위해서 언제라도 넘겨줄 준비를 하고 있다하니 머지않아 이곳은 소위 그림 같은 집들이 줄줄이 들어서고 말리라. 벌써 귓가에는 사람들의 외침이 신음처럼 들려오누나.
“쯧쯧! 그 놈의 별장 죽여 주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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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露 2009-02-04 16:03:57
이곳의 교육과정은 우리의 정체성과 환경의 고마움을 터득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함이 좋다. 즉 아이들은 이곳에서 씨뿌리는 것을 배우고, 옹기도 굽고, 숯도 구워보는 것이다. 짚으로 옛사람들이 쓰던 생활용구를 직접 만들어 보기도 하고,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어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