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희의 수필기행[2] - 적하리 금강변
조만희의 수필기행[2] - 적하리 금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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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0.02.12 00:00
  • 호수 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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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하리를 에워 흐르는 금강. 금강이 지나는 곳 치고 사람의 마음을 붙들지 않는 곳 없지만 적하리에서 만나는 강물이 유독 편안하다. 그것은 올목 마을이 있고, 강변 가득 자생하는 물억새 군락이 있기 때문이리라.

올목 마을 앞에 있는「전망 좋은 집」식당에서 강물을 거슬러 한 500m쯤 올라가면 동이중학교 앞을 지나온 도랑물이 금강 물과 만나는 합수머리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펼쳐지는 물억새의 대 향연! 단풍과 함께 가을을 열면서 가장 늦게까지 가을을 지키다 저 홀로 한 계절 건너 봄의 전령까지 자처하는 물억새 무리.

이곳이 바로 초가을부터 늦봄까지 이어지는 물억새의 꿈 천지 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따라서 이곳 강변이 절승으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 물억새를 만나는 시점부터라 할 수 있다.

잔 버들 낮게 엎드린 강가 옆 언덕에 자욱히 깔린 물억새의 하얀 잔치! 따사로운 햇볕이 한 뼘쯤은 남아 있는 늦은 가을날 이곳을 찾아야 이곳에 숨은 뜻을 제대로 살펴 볼 수가 있다.

물억새 숲 걷다 보면 어느 청춘인가 뉘어 놓은 그윽한 정경에 연분홍 사색 절로 물들여 지고, 행여 산꿩이 푸르르 날기라도 할라치면 누구인 들 시인의 마음 아니 될까? 그러나 요즈음엔 이곳에도 안타까움이 있다. 한적한 겨울에는 사냥꾼들이 슬그머니 찾아들고, 물억새도 예전만 못하다.

지난해에 큰물 지나고 나서 물억새는 더욱 허약해졌다. 사실 물억새의 꿈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해마다 쥐불로 한번쯤은 달구어 주는 것이 좋다. 하지만 불을 함부로 지를 수는 없는 일. 그렇다면 철저한 방화 장비를 갖추어 놓은 다음 이 곳에서 쥐불놀이 축제를 하면 어떨까?

바로 정월 대 보름날을 기해 아이들을 모아 놓고 강변에서 꽃불 잔치를 펼치는 것이다. 강변 가득 피어나는 꽃불 속에 자지러지는 아이들의 함성이야말로 옥천이 안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틀림없이 쥐불이 지나간 자리에는 물억새가 더욱 근사하게 싹을 틔워 다음날의 낭만을 기약해 주리라.

물억새 길 들머리엔 이동원의 집이 지어 지고 있다. 다른 고장 그 어떤 것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을 정지용 시인! 그에 의해‘향수’가 태어났다면‘향수’를 세인의 가슴에 묻어 놓은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가수 이동원이리라!

그것만으로도 그가 이 강 마을의 가장 절묘한 자리를 차지할 자격은 충분하다. 깊은 사색과 철학이 담겨진 그의 노래가 이 강변에서 다시 익어갈 것을 기대해 본다. 지난달엔 이곳에 와서 새로운 발견을 했다. 물억새의 탄성을 헤집고 무심히 걷다가 바로 이곳이야말로 태초의 신비가 그대로 숨쉬는 곳임을 새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때 낀 자국이 어느 곳에도 드러나지 않은 순수의 세계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사람이 만든 집, 사람이 만든 길, 사람이 만든 논과 밭, 사람이 만든 철탑과 전선, 아니 인간이 창조한 그 어떤 구조물도 범접되어 있지 않은 곳!

나는 순간 그 어떤 경이로움에 사로 잡혀 풍덩 물 속에 뛰어들고 말았는데 물 속은 아직도 겨울이야기에 골몰해 있어 아푸푸 뛰쳐나올 수밖에. 이곳에는 물억새 만이 장관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물살을 들여다보며 데굴데굴 자갈길을 걸어 보라. 갈겨니, 참마자, 미꾸리, 피라미 들 무데기 무데기 눈치보며 따라온다. 문득 고개 들어 강 건너 치어다 보면 벼랑 바위군에 갸웃 붙어 오수를 즐기는 소나무도 있다. 난 가끔 이곳에서 어떤 환상에 젖어본다.

옥천 최고의 축제이며 한국 문인의 자부심인‘지용제’를 이곳 강변으로 끌어들이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시화전을 이 드넓은 강변을 무대로 열어보는 것이다. 조심조심 갈대 숲 헤집어 시한 점 숨겨 놓고, 호박돌 쌓아 박은 큰 말뚝에도 시 한 수 걸어 놓고, 언덕배기 솔숲에도, 앉은뱅이 버드나무 밑에도 시귀를 숨겨 놓는 것이다.

그리고 자갈밭의 돌탑에도 시를 올려놓고, 매끈매끈한 넙적돌에는 깨알같은 글씨로 장편시를 적어 놓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숨바꼭질하듯 시를 만나고 어느 것은 돋보기로 읽어야 제 맛이 나기도 할 것이다.

한편 강가의 키 큰 미루나무 꼭대기에도 시를 걸어놓아 망원경으로 읽을 수 있게 하고, 강변 모래밭에는 달콤한 시들을 묻어 놓고, 돌돌돌 흐르는 물길 속에도 코팅한 시를 담가 놓는다면 강변의 시 향연은 한껏 고조되리. 그러면 강 건너 벼랑 바위에 큰 글씨로 새겨진 현수막은 더욱 신바람이 나서 나부끼리라.

이때 미술인 들의 퍼포먼스도 화톳불 아래 펼쳐지고, 재즈의 향연까지 곁들여진다면 강변의 축제는 지하의 지용선생까지 일깨우지 않을까? 이곳 강물이 좋은 줄은 와본 사람이면 누구나 쉬이 알 수 있다. 따라서 초여름이면 벌써 이 곳은 사람들의 발길로 출렁이기 시작한다.

갯버들 듬성 서 있는 손바닥만한 섬자락에 멍석 펴고 물 속에 뛰어 들면 피라미와 붕어가 갯버들 뿌리털 속으로 숨고 모래무지가 악동들의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신화가 아직도 숨쉬는 곳인데 어찌 사람들의 발길을 피할손가?

옥천은 정말이지 금강이 들려 가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축복을 받은 셈이다. 금강을 가장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적하리. 나는 이곳을 다녀 올적마다 새로운 삶이 충전됨을 느끼기에 비록 철 이른 강가일지라도 이렇듯 남몰래 찾아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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