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희의 수필기행[3] - 석호리 진걸 마을
조만희의 수필기행[3] - 석호리 진걸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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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0.02.12 00:00
  • 호수 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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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는 시인이 따로 없다. 그저‘봄’이라는 글자만 쓸 줄 알면 된다. 누구든 물 오른 나뭇가지엶봄’글자를 써서 걸어 놓아 보라.

글자는 그대로 봄물 가득 배어 시가 된다. 따라서 봄은 마술의 계절인 것이다. 평소 말과 표정 변화가 적어 곰이라는 별명을 가진 동네 아저씨는 봄물 잔뜩 오른 청춘 남녀의 은근한 심사를 다음과 같은 절묘한 말로 표현한 적이 있다. 그때가 70년대 중반이었으리라.

이때까지만 해도 민둥산은 국가의 고민거리라 이를 숲으로 에워싸기 위한 사방공사가 밀가루를 미끼로 진행 중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진달래가 산불 되어 번지는 볕발 고운 날, 건넌 산 언덕배기에는 풋풋한 처자들의 질펀한 웃음과 함께 사방공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남정네들이란 그저 여자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갑절 솟는 법이다. 그때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처녀 총각은 자연 짝이 되어 나무를 심게 되었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역할 분담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남자가 구덩이 파면 여자는 그 구덩이에 나무 뿌리를 넣어 심는 일이었다.

종일토록 남자는 구덩이 파고 여자는 그 구덩이에 뿌리를 여며 넣고, 또 다시 파면 되풀이하여 집어넣는 작업을 봄빛 촉촉히 적시며 산등성이 가득 진행되고 있었다.

산야가 온통 터질 듯 물 오른 이 날의 노동은 여느 일 보다도 농익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었는데, 정말 남녀 모두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면서도 가슴은 봄바람으로 넘실넘실 술렁이고 있었다.

그때 어떤 한 쌍이 무리에서 잠시 이탈하여 주변 상황을 잊고 싱그러운 바람처럼 잔솔 곁을 맴돌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처녀는 얼굴 가득 꽃 물로 달아올라 총각을 쫒고 있었다. 이때 총각은 잡힐 듯 달아나고 잡힐 듯 달아나고 하더니 갑자기 무엇에 떠밀렸는지 넘어지면서 여자와 한 묶음이 되어 뒹굴고 말았다.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로 집중되며 하늘 가득 웃음을 토해 내고 말았다. 허허 이때 마주한 이들의 표정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진실이 그리로 옮겨 붙어 버린 것은 아닐까? 이때 유일하게 알듯 모를 듯한 웃음기만 머금은 곰아저씨의 준엄한 한마디.

“오늘 같은 날 정말 연애발 서지!”
봄을 가장 아름답게 만날 수 있는 풍경을 찾기 위해 옥천을 뒤지다 불현듯 나의 행동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를 깨닫고야 말았다.

옥천은 곳곳이 가슴을 달구는 봄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가의 풍경이 그렇고, 호수에 잠긴 산자락이 그렇다. 버려진 묵 밭에 번지는 꽃다지 무리조차 감동으로 봄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정작 내 가슴은 상춘(賞春)의 우열만을 고집하고 있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아이들의 능력을 교과 성적으로만 평가해야하는 현실 속의 못된 버릇이 예까지 미쳤나 보다 싶어 씁쓸해졌다. 아무래도 이런 날은 곰아저씨의 야릇한 목소리가 숨겨진 석호리 끝자락에 자리잡은 솔밭 가의 풍경을 찾아봄이 제격일터.

군북면 석호리 진걸 마을. 50,000분의 1 지형도를 펴놓고 볼 때 대청호 물이 가장 감칠 나게 휘돌아 가는 곳에 석호리 진걸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국원리로부터 들어서자마자 키 작은 뭇 식물들의 봄 다툼이 한창이다.

길섶 볕바라기엔 노란 웃음 흩뿌리며 양지꽃 한 움큼 피어 있고, 흔히 싸리꽃으로 잘못 불려지기도 하는 조팝나무의 하얀 꽃 무리가 유난스레 탄성을 지른다. 이 길이야말로 자동차로 휑하니 달리고 보면 언제나 꽁무니 길게 아쉬움이 따라 붙는 곳이다.

어느 한 자락 붙잡고 눌러 앉아도 호반의 기막힌 절경은 시야를 붙잡고 놓을 줄 모르는데 어디로 더 가란 말인가? 결국 자동차도 더 어쩌지 못하는 석호리 끝자락에 닿았다.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주막에 들러 소주부터 찾았다.

처음 와 본다는 김선생은 시종 상기되어 주인까지 모셔 놓고 이곳의 감흥을 몰아친다. 한데 육지 속의 어부이기도 한 나루터 식당 주인(손학수씨)과 대좌하고 보니 이 사람이야말로 이곳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TV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고 한다. 무슨 다큐멘타리 프로인데 TV 속에서의 그의 역할은 세속을 달관한 듯 살아가는 촌부의 모습을 통통배에 실어 동양화의 주인공처럼 보여 주는 것이었단다.

그것이 방영된 후에 이곳엔 대처 사람들이 더더욱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무슨 화가 모임, 어떤 사진 작가 동호회 등등은 계절 따라 이곳을 찾기도 한단다. 그는 몇 번 더 TV방송에 출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역시 세속을 달관한 도인으로서의 역할이었는데 촬영 때마다 죽을 고생만 하고 출연료 한푼 받지 못했다면서 털털히 웃는다.

그에겐 늦둥이 외아들이 하나 있다. 석호리 마을에서 옥천중학교로 통학하는 유일한 학생인 그의 학교 길은 말 그대로 처절한 투쟁 속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시오리가 넘는 국원리 버스길까지 가는 것이 언제나 문제인 것이다.

보통 아빠의 소형 트럭으로 이곳까지 오가게 마련이지만 한겨울 눈이라도 올라치면 기막힌 장면이 연출된다는 것이다. 그때는 이곳 도로 사정이 험해 자동차의 발걸음도 묶이니 이들의 생계 수단인 통통배가 한 몫을 하는 것이다.

일단 배로 대청호를 건넌 다음 솔밭 그윽한 소정리에서 버스를 타고 학교로 향하는 것이다. 하지만 평소 아빠 일이 바쁠 때는 한시간 넘는 길을 타박타박 홀로 걸어야 하고 그게 안쓰러워 자전거를 사주니 타고 가는 길보다 구비구비 끌고 올라가는 길이 많아 언제나 집에 와서는 녹초가 되어 쓰러진단다.

그렇다고 어린 외동아들을 딱히 맡겨 둘 데가 없고, 또한 하루라도 자식을 떼어놓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함께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낭만적이기도 한 이들의 통학 작전은 그야말로 이들에게는 결사적인 투쟁인 것이다.

그의 얘기를 듣고 보니 나의 상춘 행각이 새삼 부끄러워졌다. 어쨋거나 서둘러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언젠가 찾았던 솔밭 그윽한 호숫가로 말이다. 나루터에서 왼쪽으로 돌아 언덕배기를 넘으니 금방 발굴을 끝낸 듯한 선사시대 유적지와도 같은 마을 터가 보인다.

가뭄으로 대청호 수위가 낮아져서 수몰되기 직전의 마을의 터가 드러난 것이다. 대청호가 만수위가 되면 용왕께서나 주석하고 있음직한 그 마을 터를 지나다 보니 수몰되기 전에 사용하던 우물물이 원형 그대로 드러난다.

당장에 두레박만 드리우면 옛 처자들의 수런한 수다 소리가 맑은 물에 담겨져 그대로 건져 올려 질 듯하다.

이 곳에서 호반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니 내 일찍이 점찍어 놓았던 피안의 솔밭이 드디어 나타났다. 이 곳은 60, 70년대 사방공사로 심겨진 듯한 소나무가 제법 촘촘한 그늘을 드리우며 제병부대 사열하듯 정렬된 자세로 서 있는 곳이다.

그 솔밭을 에워 흐르는 호숫가의 풍경이야말로 존 바에즈의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의 애잔한 선율을 그대로 닮고 있다. 정말이지 이곳에선 마음이 허약한 자일지라도 호숫물을 보는 순간 영혼의 살은 도타와지리라!

또 아무리 서투른 화가일지라도 이곳에서는 기막힌 구도의 그림을 그려 낼 수가 있지 않을까? 한데 이 좋은 곳을 아이들 소풍지로 이용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솔밭에 아이들 가득 풀어놓으면 세상의 모든 평화는 몽땅 이곳에 모여 잔치를 하리라.

실제로 몇 년 전만 해도 폐교 직전의 군북초등학교 학생들이 소정리에서 통통배 타고 이곳으로 소풍을 왔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학생이라야 전교생이 30~40명에 불과해서 마음씨 좋은 나루터 주인의 호의로 소풍날이면 의례 것 이곳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학생들은 얼마나 복 받은 존재인가? 솔숲을 걷노라니 당시 아이들의 해맑은 함성이 솔바람에 실려 후두둑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옥천에 사는 자 이곳 석호리의 풍경을 모른다면 그는 절반은 헛살고 있는 셈이다.

한동안 솔밭에 누워 있자니 그 옛날 사방공사 하던 처자들의 질펀한 웃음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곰아저씨의 준엄한 목소리가 중저음 목소리에 실려 야릇하게 들려온다.
“이런 풍경 속에서는 어느 누구를 데불고 와도 연애발 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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