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지혜로운 고향 만들기를…”
“아름답고 지혜로운 고향 만들기를…”
[내고향 옥천] 이원면 건진리 출신 영동대 대외협력본부장 겸 산업정보대학원장 성낙양
  • 황민호 기자 minho@okinews.com
  • 승인 2006.02.10 00:00
  • 호수 8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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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향인 성낙양씨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 눈 뜨고 나서 5살 때부터 수채화물감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영동에서 태어나자마자, 6.25 전쟁이 일어나서 밀양, 부산 등지로 피난을 다녔고, 3살 되던 해에 그는 아버지 고향인 동이면 적하리에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성인영)는 평양사범대학을 나온 선생님이었다. 그가 5살 되던 해에 이원중학교 교사로 발령이 나서 온 가족이 이원면 건진리 중학교 인근으로 이사를 갔었단다. 이원초를 온전히 졸업했다. 집에서 조금만 더 가면 칠방리 금강가 백사장에서 마구 뛰놀았던 기억, 친구들과 같이 낚시를 했던 추억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거무튀튀한 바탕에 흰색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 기다란 광목 팬티를 입고, 정신없이 돌아다녔고, 배급 나온 우윳 가루를 참 맛나게도 먹었던 기억도 그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시대의 격동기에서 그의 마음을 잡은 것은 하얀 캔버스에 맘껏 수를 놓을 수 있는 다양한 색깔의 물감이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는 데 적극적인 후원자였다.

“그 당시 저는 참 행복했었지요. 아버지가 장남인 저를 데리고 가끔 대전에 나가셨어요. 기차를 타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는데, 대전 가서 한밭식당에서 새콤한 깍두기에 맛난 밥을 먹었고, 내가 갖고 싶은 물감, 붓 등 화구를 맘껏 살 수 있었죠. 보너스가 하나 더 있다면, 영화를 볼 수 있었다는 겁니다.”

◆아버지는 든든한 후원자
아버지는 ‘환쟁이하면 집안 말아 먹는다’는 풍문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아들의 꿈을 넉넉히 지켜보며 키워주었다.

고향에서 보낸 유년시절의 달콤함은 두고두고 고향을 추억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는 가끔가다 옥천 국도를 지나 아래 지역으로 내려갈 때마다, 이원 구듬티 재를 넘어 면 소재지를 꼭 들르곤 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며 마을 어귀를 돌아보곤 회상에 잠기던 시절이 바로 엊그제였다.

성낙양(59)씨. 현재 영동대 산업정보대학원장과 대외협력본부장을 맡고 있으면서 영동대의 중추적인 구실을 하고 있는 그를 지난 7일 만났다. 그는 이원초를 졸업하고 나서 바로 고향을 떠났다. 청주중, 청주고를 나온 후,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키워왔던 그림에 대한 열정 때문에 홍익대 미대 응용미술과에 입학을 한다.

5남1녀 중 장남, 아버지가 교사라는 직업을 가져서 그랬는지 나머지 형제들도 거의 대부분 교직에 있다. 밑에 동생 성낙수씨는 괴산 칠성고에서 국어 교사를 하고 있고, 성낙훈과 성낙원 동생은 청주와 수원에서 아버지의 교과목을 그대로 이어받은 체육교사를 하고 있다.

그도 한 때는 고등학교 교사였고, 지금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많은 흥미를 느끼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청주 세광고에서 6년 동안 하던 미술교사를 그만두고, 3년 여 동안 청주대, 목원대 등에서 시간강사를 했다.

그러다가 충청전문대(현 충청대)에서 시각디자인과 교수를 하다가 92년도부터 영동대 개교 작업에 합류, 창설멤버로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는 82년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 산업디자인과에서 광고를 세부 전공했고, 96년에서 98년도까지는 충북시각디자이너협회 회장도 역임하면서 작품 활동은 물론 대외적인 활동에서도 충북 지역에서 입지를 다졌다.

◆도시의 미관엔 철학이 담겨 있어야
그는 어딜 가나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갖가지 조형물과 건축물에 대한 불만이 많다. 미적인 조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효율성만 극대화시켜 삭막한 도시경관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과 건축, 그리고 행정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행정이 중심이 돼서 이 양자를 조화롭게 버무릴 때, 도시 전체가 멋진 작품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리나 건물, 그리고 여러 가지 상징탑, 보도, 표지판, 간판 등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그나마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 그 지역의 독특한 개성과 예술성을 담보해내기엔 어려움이 많아요. 요즘에는 재미를 느낄 요소가 가미되어야 해요. 지루하면 재미없거든요. 길거리를 지나면서도 슬며시 웃을 수 있는 그런 조형물이나 건축물이 드물죠.”

농촌지역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꾸려나가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학생수가 줄어들면서 그 동안 나뉘어졌던 산업, 시각, 영상 디자인은 디지털조형디자인과로 통합이 됐고, 대학원도 기존의 산업정보대학원을 유지하면서 교육대학원 신설도 예정하고 있다.

“아직까지 농촌에서 대학을 유지한다는 것이 버겁습니다. 젊은 인적 자원들이 여전히 시골을 외면하고 있거든요. 농촌의 발전이 아직까지 더디고,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이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내 고향 옥천과 내 삶터가 있는 영동 모두, 적당히 인구가 늘면서 아름답고 지혜로운 고장으로 거듭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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